헌책방에서 구했다. 많은 책들이 있었지만, 詩人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잡지였는데, 여러 권 중에서  권을 고르기로 하다.

 

  하나는 복간창간호이고, 또다른 하나는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을 고른 이유는 단순하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추모시들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분들이고, 국민의 정부, 참여 정부를 이끌었던 분들이니, 그들에 대한 추모시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잡지에서는 두 분에 대한 추모시를 실었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사게 된 것.

 

  그밖에도 다른 여러 시인들의 시가 실려 있고, 복간창간호가 조태일 특집이듯이, 이번 호에도 조태일 시인에 대한 글과 조태일 시인의 육필 원고가 실려 있다.

 

 이 정도면 읽기에 충분한 책이 아니겠는가.  다른 말이 필요없다.

 

두 분에 대한 추모시를 쓴 시인들은 언급하지 않으련다. 이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단지 이 분들을 추모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아야 한다. 이 분들이 걸어갔던 길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분들은 우리에게 우리가 갈 길을 보여주었다. 길을 보여주고 떠난 분들, 계속 이어진 그 길은 우리가 가야 한다.

 

멈춤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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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반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78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생소한 병명 '알렉시티미아'라는 이름을 이 소설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감정 표현 불능증이라고 한다는데, 특히 공포를 잘 느끼지 못하는 증세라는데... 편도체가 보통 사람보다 발달이 잘 안 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증세라고도 하고. 다만, 후천적인 훈련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보고도 있다고 하니 ('일러두기' 참조)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무궁무진한 존재인지 알려주는 병일수도 있겠단 생각을 하기도 했다.

 

아스퍼거와 같이 남의 감정을 잘 읽지 못하는 증세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는데, 알렉시티미아라... 그런 증세를 가진 이는 공포, 두려움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그 장면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칠 수 있다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다른 사람의 얼굴이나 행동, 말에서 공포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보통 때와 다름없이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

 

공포나 두려움은 인간이 살아남는데 기여를 한 감정이기에 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면 살아남기 힘들다. 왜냐하면 같은 상황에서도 같은 행동을 반복하기 때문이다.뜨거운 물이 담긴 빨간 주전자에 데었으면서도 다시 빨간 주전자와 뜨거운 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대하는 주인공의 행동이 이를 말해준다. 이는 자신을 위험에 처하게 만든다.

 

단지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공포를 느끼지 못한다는 얘기는 다름 사람의 감정에 공감을 하지 못한다는 얘기와 통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공유하지 못하기에 공포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아이가 사회에 적응하게 하기 위해 엄마는 기본적인 태도를 교육한다. 소설을 보면 단지 공포만이 아니라 감정을 읽지 못하는 경우까지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말은 생각을 전달하지만 생각을 곧이곧대로 전달하지는 않는다. 말 속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가. 말 속에 담겨 있는 수많은 감정들을 배제하고, 그냥 말 그대로만 받아들인다면 세상이 얼마나 무미건조하겠는가. 아마 세상 모든 예술이 사라질 것이다.

 

예술은 보이는 것 속에 들어있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삶도 마찬가지다. 들어가는 대로만 나오게 하는 그런 기계적인 연산과 달리 사람들은 들어가는 것과 나오는 것이 무척 다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살아왔다.

 

이런 인간 앞에 기계가 서 있는 것이다.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마치 인공지능 시대를 연상하게 하는 그런 인물이 등장한다. 부모의 죽음 앞에서도 어떤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그냥 장면이 펼쳐질 뿐이다. 그리고 다음 행동을 할 뿐이다.

 

학교에 가서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많은 관계, 행동, 말 속에서 다른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는 주인공에게는 학교란 별다른 의미가 없는 곳이다.

 

그와 정반대 인물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두 인물이 등장한다. 아마도 주인공의 편도체를 키워줄 인물, 아니 편도체라는 인체 일부분으로만 성장을 이야기하면 안 된다. 오히려 주인공은 전혀 다른 사람과 관계를 통해 스스로 성장해가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생각해야 한다.

 

곤이... 어려서 부모와 헤어지고 온갖 험한 일들을 겪은 아이. 이 아이 역시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주인공이 감정을 읽지 못해서 표현을 하지 못한다면, 곤이는 감정을 너무도 잘 읽어서 표현하지 못한다. 그렇게 살아왔기에... 자기를 인정받지 못하고 살아왔기에, 인정 욕구는 강하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내면에 있는 작은 천사가 외면에 있는 악마로 나타나는 것이다. 외면으로 보이는 악마, 그러나 속에 숨어 있는 천사... 주인공이 감정을 읽지 못한다고 했는데, 아니다. 곤이란 인물로 인해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감정을 정작 읽지 못하는 것은 주인공이 아니라 우리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 역시 사람의 내면을 보아야 한다고 하면서도 겉으로 나타나는 면만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나, 또 자기 감정을 감추기 위해 마음과는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나 하는 점을 곤이를 통해 보게 된다.

 

오히려 감정을 읽지 못하는 기계같은 주인공은 곤이를 이해한다. 왜냐하면 곤이를 어떤 판단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래서 곤이와 친구가 된다. 나중에 곤이를 찾아가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사람, 그렇게 생활한 사람은 남을 받아들일 수 있다. 곤이가 변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마지막에 주인공에게 남긴 쪽지 '미안하다. 그리고 고마워. 진심.'이라는 말을 통해서 곤이는 자기를 그대로 받아들여준 친구가 있었기에 또 변하려는 아빠가 있기에 변해갈 것이다.

 

다른 한 축에 있는 인물, 이도라. 여학생이다. 주인공 마음에 이상한 파문을 일으키는 인물.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주인공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도라 역시 집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육상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꿋꿋이 육상을 한다.

 

이도라는 자기 길을 간다. 그냥 그렇게. 이런 이도라에게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어디에 있어도 이도라를 느낄 수 있게 된 주인공. 이것은 사랑이다. 마음의 흔들림. 그런데 사랑을 느끼게 되면 자연스럽게 공포를 느낄 수 있게 되지 않나.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잃게 될까봐 두려워한다는 뜻이기도 하니 말이다. 사랑과 공포가 따로 존재할 수 없는 감정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도라가 꺼져 라고 말해 곤이가 사라져버리고 난 뒤...

 

주인공에겐 사랑과 공포가 서서히 찾아들게 된다. 물론 공포는 여전히 잘 느끼지 못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은 표현하지는 못하더라도 주인공의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된다.

 

일탈행위를 하는 곤이를 찾아가고, 곤이를 위해 칼을 맞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 그는 성장했다. 성장하게 된 이유가 바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았기 때문이다. 자기 관점에서 남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눈 앞에 있는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알렉시티미아'라는 병을 앓고 있는 주인공을 통해 작가는 정상인이라고 하는 우리들이 어쩌면 자기만의 잣대로 남을 판단하는 '감정 공감 불능증'을 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는 생각을 했다.

 

감정을 읽지 못하는 주인공을 앞세워 봐라, 정작 감정을 읽지 못하는 것은 바로 너희들이라고... 곤이를 보라고. 곤이가 그렇게 외쳐댔는데, 누가 곤이의 감정을 읽어줬냐고? 오히려 곤이를 제 관점에서 내치기만 했지 않냐고... 그런 곤이를 받아들인 사람이 누구냐고... 바로 감정 표현 불능증에 빠진 주인공 아니었냐고.

 

감정 표현 불능증, 가만히 이 용어를 살펴보니 '표현'이다. '이해'가 아니다. 그렇다. 우리는 먼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 내지 않았던가. 조금만 자기 뜻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한 사람에게 인상을 찡그리고 말에 감정이 담겨 있고 막 그러지 않았던가. 그런데 주인공을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냥 무덤덤하게 상대를 대했다. 그가 사회에서 나쁜 사람이라고 낙인찍혔든,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받든 똑같이.

 

그런 주인공을 통해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어떻게 했는지 반성하라는 듯하다.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우리가 '감정 이해 불능증'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하는. 나를 돌아보게 하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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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집에는 시인 자신을 노래한 시가 있다. 시집 맨 끝에 실린 '작은 물방울의 노래 · 4'

 

  시인은 큰강이나 큰바다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큰 물줄기가 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냥 작은 물방울이면 된다. 그렇게 '종달새처럼 맑고 천진하여 / 해가 뜨면 물푸레나무처럼 흐드러지지만 / 희고 반듯한 이마를 갖고 싶은 아이'(86쪽)였다고 한다.

 

  자연과 어울리며 한 세상을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어하지만 세상이 어디 그런가. 나만 순수하다고 행복할 수 있는가. 그런 사회였으면 좋겠지만, 이 사회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기에 시인은 작은 물방울이 되어 다른 사람곁에 머무르고 싶어한다.

 

  '우연히 간디를 알고부터 / 눈물이 자주 고여오는 아이 / 민주주의나 노동 운동은 잘 몰라도 / 신맛처럼 오래 삭힌 영혼으로 / 시를 쓰고 싶은 아이' (86쪽)가 된다.

 

순수한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 어찌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있으랴. 게다가 간디를 알고부터라고 하니, 간디가 누구인가. 비폭력 운동을 이끈 사람 아니던가. 결코 불의에 굴하지 않았던 사람. 그래서 자기 자서전 이름도 '나의 진리 실험 이야기'라고 붙였던 사람 아니던가. 그런 간디를 알고부터는 민중들을 외면할 수 없었으리라.

 

'그 아이가 어느 날 / 민중의 슬픔으로 튼 물꼬를 따라 / 흐르고 있었습니다 전생에 / 가본 길인 양 익숙한 물살로' (86-87쪽) 시는 이렇게 끝맺음을 한다.

 

바로 시인 자신이 그렇게 살아왔음을, 또 민중과 함께 살아갈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큰소리를 치지 않는다. 그냥 민중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에게 담담하게 전달할 뿐이다.

 

그런 시들 중에서 눈물이 찡하는 시가 있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노회찬 의원이 생각나는 시이기도 했고. 

 

  고해성사

 

기도했다 날마다

겨울 산벼랑에 걸린 목숨

어쩌다 한번 지은 죄

저문 또랑에서 성당 구석에서

너와 나의 기억에서 희게 빨려지기를

의무인 양 거듭되는 죄 끌고 다니는

어떤 한 사람을 본다 무척

닮았다는 생각에 몸서리를 치면서

그러면서 내일은 깨끗해질 거라며

어쩐지 안쓰러운 오,

누구에게 돌 던지랴 나는

또 누구의 하루에 뾰족이 서 있는

바늘 끝이 되었으랴

아무래도 잔인한 핏줄이었나보다고

투덜투덜 조상 탓을 하면서

악몽을 염려했다 오늘 밤의

어수선할 일기장의 내용들을

 

박라연,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문학과지성사, 1993년 초판 8쇄. 63쪽.

 

이미 변기 속에 빠져 똥냄새와 자기 냄새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국회에서, '어쩌다 한번 지은 죄'를 스스로 용서하지 못했던 사람. 그는 그런 죄를 '의무인 양 거듭되는 죄 끌고 다니는 / 어떤 한 사람'처럼 행동을 했는데...

 

자기 죄가 빨려지기를 바라지도 않는 자들이 득시글한 국회에서 너무도 순결했던 사람, 견딜 수 없었으리라.

 

사람이었기에, 부끄러움을 아는, 책임질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기에...

 

그가 꿈꾸었던 세상은 이 시집에 나오는 바로 이런 시와 같은 세상 아니었을까.

 

  누에

 

가당찮은, 참

골목길 잡상인의 리어카에 오글오글

한많은 번데기로 뒹굴지만

새하얀 내 영혼의 집은

수만 갈래의 비단실을 뽑아내고

뽑아내고 ……

아직도 기다리며 사는 이웃들

이웃들의 추운 살갗을 위하여

네 고운 색실은 즐겁게 쓰러진다

이 시대의 비단실을 뽑아내겠다면서

오늘도 꾸물꾸물 모여

새파란 이념의 뽕잎을 먹는 누에들

즐겁게 쓰러질 자유가

지금은 쓰라리다

 

박라연,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문학과지성사, 1993년 초판 8쇄. 37쪽.

 

아직은 즐겁게 쓰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시대의 비단실을 뽑아낼 수는 있다. 그렇게 '이웃들의 추운 살갗을 위하여' 살았던 노회찬 의원같은 사람이 있었으니 말이다.

 

박라연의 시집을 읽다가 노회찬 의원을 떠올리게 되다니... 이 시집은 1990년대 초반에 씌었는데 말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앞으로 많이 나가지 못했다는 생각에 씁쓸한 마음이 들면서...

 

그래도 작은 물방울들이 많아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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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두르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1
비톨트 곰브로비치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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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생각하면서 읽으면 안 된다. 제목이 소설 내용에 전혀 없기 때문이다. 왜 이런 제목을 붙였는지도 모른다.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소설 내용은 현실에 없다는 얘기다. 소설에서 현실을 찾으려는 사실주의를 비꼬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 소설에서 현실을 찾아야만 할까? 사실과 진실은 다를텐데, 소설은 사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다루는 것일텐데...

 

사람들은 꼭 소설을 읽으며 사실을 찾으려고 한다. 무슨 역사소설도 아니고... 역사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큰 역사는 사실대로 표현되지만 나머지는 역사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작가가 창조해 낸 허구일 경우가 많다.

 

그러니 소설에서 사실을 찾으려 하지 말자.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진실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자. 그러면 된다. 그런데 진실을 드러내는 방법이 직설적이기도 하지만 우회적일 때도 많다.

 

빙 둘러간다. 아니면 모자이크처럼 여러 사건들이 나열되어 있기도 한다. 도대체 연관 없는 사건들이 왜 소설에 이리도 복잡하게 나오는지, 이 소설은 다양한 사건들이 얽혀 있다. 전혀 연관성 없이 보이는 사건들이 소설 속에 중구난방으로 나온다.

 

도대체 왜? 이런 생각으로 소설을 읽어가게 된다. 읽어가면서 역시 제목만큼이나 내용을 모르겠군 하는 생각을 한다. 에고, 이렇게 소설이 어려워서야... 그러니 자기 맘대로 해석을 할 수밖에.

 

소설가는 소설로 독자들을 우롱하지만 독자들은 자기 해석으로 소설가를 우롱한다. 서로 내뿜는 우롱들이 합쳐 소설이 존재하게 하는데...

 

이 소설을 그냥 두 부분으로 나눠 버리겠다. 한쪽은 학교, 다른쪽은 시골. 모두 전통으로 무장되어 있는 곳이다.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유지되는 곳이다. 이곳에 있으면, 이 속에 파묻혀 있으면 도대체 이곳이 왜 답답한 곳인지, 왜 정체되어 있는 곳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이 두 곳은 전통사회를 이끌어가는 기본 축이 된다. 지금은 시골이 없어졌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소설이 씌어진 당시에는 시골은 사회를 이루는 기본 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유럽에서는 여전히 귀족 잔재가 남아 있을 때고, 그 잔재는 시골에 있었을테니.

 

학교가 얼마나 고루한지 알려주기 위해서는 학교 생활에 안주한 학생들을 주인공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런 학생들 역시 고루한, 전통적인 학교를 이루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런 학생은? 이미 학교를 떠났으나 다시 학교로 돌아온 학생, 그것도 나이가 서른 살이 된 학생.

 

그의 눈에 비친 학교는 어떨까? 아마 학교는 전통과 현대가 싸움을 하는 곳이지만 늘 전통이 이기는 곳, 그래서 답답한 곳일 것이다. 주인공인 유조는 어느날 서른 살에서 열일곱 살이 되어 핌코에 의해 납치되어 학교에 간다.

 

그가 학교에서 겪는 일을 통해 학교의 고루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그가 전통적인 윤리로 무장되어 있고, 인문학적 예술적 지식을 자랑하지만 결국 주트카라는 여고생에게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학교의 위선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학교가 과거를 아무리 표방해도 현대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등장인물을 통해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때 주인공 유조가 핌코에 의해 납치되어 생활하면서 무려 자기 나이보다 열세 살이 어리게 생활을 하는데, 학교 모습이 얼마나 우습겠는가, 다음은 시골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유조의 친구인 미엔투스 - 그는 학교에서는 반항아다. 학교 정책에 반대되는 행동들을 많이 한다 - 와 시골로 도망치면서 겪게 되는 일이 시골에서 발생한다.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미엔투스는 머슴을 동경한다.

 

머슴은 곧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인이라고 할 수 있다. 머슴은 하인이 아니다. 자기 생활을 해나가는 강인한 인물이어야 한다. 그런 머슴을 만나러 시골로 도망가는 유조와 미엔투스.

 

귀족인 이모 집에 머물게 된 유조와 미엔투스는 곧 머슴을 발견하게 된다. - 이름은 동유럽이나 러시아쪽 이름은 좀 길어서, 또 잘 안 외워져서 생략하기로 한다 - 이 머슴과 친구가 되겠다고 나선 미엔투스로 인해 시골에서 지켜지고 있던 위계질서가 깨지게 된다.

 

철저한 위계가 미엔투스의 행동으로 인해 무너져 내리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귀족들을 지탱하고 있던 두려움이 하인들의 행동으로 표출되고, 유조는 탈출을 하게 된다. 탈출을 하게 되는 과정에서 또 한 번의 납치가 발생한다.

 

이번 납치는 유조가 납치되는 것이 아니라 유조가 조시아를 납치하는 것이다. 수동에서 능동으로, 그것은 자신의 생활을 스스로 해나가야 한다는 표시가 된다. 물론 조시아를 납치하는 것이 그런 생각으로 나온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머슴을 납치하는 것보다는 귀족인 조시아를 납치하는 것이 자신에게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는 것으로 보아, 이런 납치는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납치라고 할 수 있다.

 

첫번 납치는 세상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면, 두번째 납치는 세상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제 자리를 찾아가는 납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납치, 그리고 서술 속에서 궁뎅이와 장딴지가 나오는데, 궁뎅이는 머무름, 정체, 과거에 속한다면, 장딴지는 나아감, 미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다리는 우리를 내달리게 하고, 그 내달림의 힘은 장딴지에서 오기 때문이다. 반대로 궁뎅이는 우리는 눌러 앉게 한다. 그 자리에 주저앉히는 궁뎅이. 하여 이 소설에 자주 나오는 궁뎅이와 장딴지는 과거와 미래, 정체와 발전, 머무름과 나아감을 대비한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사건들, 장면들이 막 나오는 듯하지만 읽으면서 이렇게 과도기에 처한 사회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서술한 소설로 해석하면서 읽으면 읽는 재미가 있다.

 

작가가 소설 속에 수많은 퍼즐 조각들을 흩뿌려 놓았는데, 그것을 나는 내 맘대로 모아 완성시키고 있다. 작가가 그려놓은 퍼즐 그림이 아니라 내가 모아놓은 퍼즐 그림으로.

 

그게 어쩌면 제목이 뜻하는 페르디두르케가 아닐까 한다. 없는 것을 서술하니,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것은 독자의 몫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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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애7


맑은 기쁨

넌 나에게

머리로는 1/N이다

하지만 마음에선 늘 N/1이다.


이 무서운 마음


눈이 애써 외면하려해도

마음은,

온 신경은

어찌할 수 없이 흔들리고

오직 한 곳으로만

흐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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