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싸움이라니

   - 톨스토이를 빌려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아무리 욕심내어도 제가 나중에 지닐 땅은

결국 단 한 평에 불과할 테고

그나마도 저는 알지도 못할 것을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자신의 것인 양

자신의 것이 아니면 안 되는 양

죽을 둥 말 둥 그 땅에 집착하는 민족들.

다시금 질문을 하게 한다


민족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톨스토이가 쓴 소설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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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8 18: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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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9 09: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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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삶에서 의미를 찾으면 더 잘살 수 있다고 한 건, 빅터 프랭클. 삶의 의미를 찾아야지만 삶을 지속시켜 나갈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런데 거꾸로 이 소설은 무의미의 축제다.

 

축제라는 것은 즐거움이다. 즐거움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기보다는 그냥 즐기면 되듯이, 삶 역시 하나하나 의미를 찾기보다는 무의미들의 연속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보게 된다.

 

시작부터,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첫부분부터 별다른 의미가 없다. 유행하는 옷들, 배꼽을 내놓은 옷을 입은 처녀들을 보면서 배꼽에 대해서 생각한다. 배꼽, 삶과 삶을 이어준 흔적. 그런데 이런 배꼽에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배꼽은 어떤 역할을 할까?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생명을 이어준 존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지만 더이상 의미를 추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주인공들이 등장하여 이끌어가는 이야기들이 그렇게 큰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연극을 가장하여 얼토당토 하지 않은 파키스탄말을 하는 주인공도 있고, 계속 배꼽에 대해서 생각하는 주인공도 있고, 병이 없음에도 병이 있는 것처럼 속이는 인물도 있고.

 

그렇게 우리들 삶은 별다른 의미없는 행동들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이루어지는 삶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물론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어떤 의미를 지니고 나온 것은 아니다. 내가 나오게 된 것은 내 의지가 아니다. 그냥 나오게 됐다. 무의미다. 그렇다고 죽음에 이르는 순간도 역시 내 의지가 작동하기는 힘들다. 몇몇은 자신의 의지로 제 죽음을 이끌어가기도 하지만, 소설에서 알랭의 어머니처럼 죽음 순간에도 어떤 무의식적인 행위가 작동하기도 한다.

 

수많은 무의미들이 모여 삶을 구성하는데, 그 무의미들이 의미를 이루는 것이 바로 우리 삶이다. 삶은 그렇게 지속된다. 그러므로 '무의미의 축제'가 바로 삶이다.

 

작고 하찮은 것들, 내겐 전혀 의미가 없어 보이는 것들이 삶의 한 구성 요소라는 것, 그것이 바로 의미라 하는 것, 무의미의 축제는 그래서 내 삶에 관여하는 모든 것들이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무의미라는 것에서도 의미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이다. 그러므로 프랭클이 말한 의미치료, 즉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이 소설에서도 부정되지 않는다.

 

나중에 엄마와 화해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알랭의 모습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삶에서 숱한 무의미들을 만난다. 무의미하다고 여기고 그렇게 그냥 흘려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모여 우리 삶의 의미를 구성한다는 것.

 

소설에서 일어나는 일상들, 언뜻 보면 아무런 의미없는 행위들이 결국 우리 삶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그렇게 쿤데라는 소설을 통해, 거시적인 것이 아니라 - 소설에서 그는 스탈린과 칼리닌을 등장시켜 그들을 희화화 함으로써 거시적인 것의 무의미함을 통렬하게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 작은 것들, 무시하고 지나치는 것들 속에 우리 삶이 있음을, 우리는 그런 무의미한 것들을 통해 삶을 지속해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쿤데라의 다른 소설처럼 참 읽기 편하다. 그가 지닌 장점이자 매력일 것이다. 이야기꾼. 도대체 왜 이야기가 여기서 나오지 하는 생각이 들게 하지만, 읽기에 힘이 들지 않게 하는 전개. 그러나 의미를 찾으려면 고생을 하게 하는 그런 소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읽기는 편하지만, 의미를 찾으면서 읽으려면 쉽지만은 않은 그런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냥 나처럼 자기 식으로 해석하면 되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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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들의 신 - 제19회 부커상 수상작, 개정판
아룬다티 로이 지음, 황보석 옮김 / 문이당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작은 것들의 신... 사람이 살아가게 하는데 가장 필요한 요소지만 그것은 다른 큰것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거나 사라지게 된다.

 

그런 작은 것을 지키는 신, 크지 않다. 결국 작은 것들의 신은 소멸의 신이다. 이 세상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들을 사랑하는 신.

 

힘이 없는 신. 그러나 작은 것이기 때문에 사라지지 않고, 우리들 삶에 늘 붙어 있는 신. 존재를 지켜주지는 못 하나, 존재와 함께 있으며 함께 사라지는 신.

 

그런 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 신이 깃들인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작은 것들의 신이 깃들인 사람은 그 사회의 주류가 아니다. 비주류다. 중심에서 빗겨난 사람들. 그러나 중심에 있는 사람과 똑같은 사람들.

 

중심에 있는 사람들, 큰사람들과 같은 감정을 지니고, 같은 욕망을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는 그러나 같은 감정, 같은 욕망, 같은 생활이 용납되지 않는다. 이들은 작은 것들, 흔히 작은 것들을 하찮은 것들, 무시해도 좋은 것들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이런 작은 것들이 결코 작은 것들이 아니고 우리 삶을 이루는 가장 큰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 아무리 우리가 작은 것들이라고 무시해도 그것 없이는 사람이 살아갈 수가 없다. 자기보다 약한 존재, 비천한(?신분이 존재하는 사회,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존재라고 해도 그들에게도 같은 삶이 있다는 사실을, 같은 삶을 살아가려 했다는 이유로 파멸해 가는 인물들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소설 구성이 제목과도 어울린다. 얼핏 추리소설 구성을 택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사건들 하나하나를 순서대로 배열하지 않았을 뿐이다.

 

작가는 1997년(무려 20년도 더 전의 일이다) 한국어판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는 소설이 복잡한 세상을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 이 소설은 저의 세상이며 제가 세상을 보는 방식입니다. 또한 이 책은 장소나 관습에 관한 것이 아니라 들과 땅과 공간에 관한 것이며, 어떤 특정한 사히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 본성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을 읽으며 퍼즐조각 맞추기가 떠올랐다. 단순한 조각들이 전체 그림에서 부분 그림을 이루고 그 부분 그림들을 먼저 맞춘 다음 전체에서 어울리는 자리에 갖다 맞추면 나중에 한편의 완성된 퍼즐이 되는.

 

그래서 이 소설은 읽어가면서 점점 형태가 명확해 진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왜 벌어졌는지를 알게 된다. 또 문장 자체들이 짤막짤막하고 경쾌하게 진행되고 있고, 작가가 적절히 개입해서 사건 전개를 알려주고 있기에 읽기에 힘들지는 않다.

 

다만 작은 것들의 신이라는 개념이 잘 들어오지 않는데, 약한 존재들과 함께 하는 신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약한 것들은 금방 소멸해가는 존재이니, 이들의 사랑이 지속될 수 없다고 여기기로 했다.

 

인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작가의 말대로 굳이 인도가 아니어도 된다. 이런 사랑의 비극은 어디에도 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작은 것들은 큰것들에 의해 하찮은 것으로 무시당하기 일쑤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소설은 어떤 측면에서 읽어야 하나? 그런 작은 것들이 파멸해 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작은 것들은 작은 것에 만족하고, 제 분수를 지키며 살라고 하나? 아니, 그렇지 않다.

 

작은 것들도 큰것들과 다르지 않음을, 작은 것들의 삶도 그들과 같음을, 그래서 존중받아야 함을 생각해야 한다.

 

작은 것들은 소멸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도 신이 있으므로...

 

소설보다는 정치평론으로 먼저 만난 작가, 아룬다티 로이... 그가 쓴 "9월이여, 오라"를 잘 읽었는데, 시간이 한참 지나서 읽은 이 소설, 출간된 지 20년이 넘었지만, 개정 번역판이 나왔다는 것은 여전히 작은 것들은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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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담 삼아 이야기한다. 선지자는 자기 가족에게, 자기 마을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어렸을 적부터 보아왔던 사람에게서 어떤 신비감이 있겠는가. 그러니 그는 자기 마을에서는 그냥 보통 존재일 뿐이다.

 

  이런 보통 존재를 더 좋아하려면 그에게서 어떤 단점을 찾아내지 않아야 하고, 또 내 약점을 그가 보지 말아야 한다.

 

  함께 지내는 존재와 갈등 없이 지내기가 얼마나 힘든가. 내 삶에 끊임없이 들어오는 그 존재에게 나는 내 삶의 일부를 얼마나 떼어내주어야 하는가.

 

'자기만의 방'(버지니아 울프의 책 제목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자기만의 방을 갖기를 원한다. 이는 누구나 적당한 거리를 원한다는 말이기도 하다)을 가져야 하는데, 그런 방을 갖기 위해서는 거리가 있어야 한다.

 

진은영 시를 읽으며 그런 거리를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중첩되어 나타나는 시어들을 통해 너무 가깝지 않은, 적당한 거리에 대해 생각한다. 그렇다고 시 제목처럼 '그 머나먼'이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멀면 내 삶과 아무 상관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무관심, 그리고 나아가는 길은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다.

 

   그 머나먼

 

홍대 앞보다 마레지구가 좋았다

내 동생 희영이보다 엘리스가 좋았다

철수보다 폴이 좋았다

국어사전보다 세계대백과가 좋다

아가씨들의 향수보다 당나라 벼루에 갈린 먹 냄새가 좋다

과학자의 천왕성보다 시인들의 달이 좋다

 

멀리 있으니까 여기에서

 

김 뿌린 센베이 과자보다 노란 마카롱이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가족에게서, 어린 날 저녁 매질에서

 

엘뤼아르보다 박노해가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상처들에서

 

연필보다 망치가 좋다, 지우개보다 십자나사못

성경보다 불경이 좋다

소녀들이 노인보다 좋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책상에서

분노에게서

나에게서

 

너의 노래가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기쁨에서, 침묵에서, 노래에게서

 

혁명이, 철학이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집에서, 깃털구름에게서, 심장 속 검은 돌에게서

 

2011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현대문학. 2010년. 진은영, '그 머나먼' 15-16쪽.

 

'그 머나먼'에서 멀어서 좋았던 것들이 이상하게 다시 가까이 다가와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혁명이, 철학이 멀이 있어서 좋았다는 말은 결국 이런 혁명을, 철학을 원한다는 말이다.

 

삶이 비루할수록 꿈은 더 간절해기기 때문이다. 단지 멀리 있어서 좋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룰 수 있는 꿈이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내 삶의 힘듦을 이겨내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머나먼' 것들이 좋았다. 좋다.

 

다시, 그것들이 내게 다가오면 나는 더 '머나 먼' 것들을 좋아하기 시작한다. 이미 도달한 것에서 머무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더 머나먼 것으로 나를 보내게 된다.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는 그래서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좋아하고, 그리워해야 한다.

 

단지 과거형이 아니라 이 시를 현재형으로 읽는다. 수많은 좋았다들을 지나 이제는 좋다를 지나, 계속 꿈을 꾼다. 그렇게 머나먼 것들을 지나 더 머나먼 것들로 떠나는 삶을, 그런 희망을 지니면서... 이 시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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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패배자 - 한 권으로 읽는 인간 패배의 역사
볼프 슈나이더 지음, 박종대 옮김 / 을유문화사 / 200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한때 아무도 2등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1등만 기억하는 세상이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1등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패배자가 되는 사회, 행복한 사회인가? 그런 역사가 있는가? 아니다.

 

비록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승자가 있기 위해서는 패자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패자로 인하여 세상은 한층 발전하기도 한다. 우리가 기억하든 기억하지 않든 패자들은 세상에서 반드시 필요한 사람들이고, 우리 인류를 발전시켜 온 사람들이다.

 

그런 패자들을 역사에서 깨끗이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역사에 기록으로 남기는 일,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런 패자의 기록들을 통해 역사는 좋은 쪽으로 한걸음 내디딜 테니 말이다.

 

승자가 지닌 특성은 집요함일 것이다. 그들은 집요함으로 승리를 이끌어낸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한다. 이에 반해 패자는 인간적인 품성에서 승자보다 뛰어난 경우도 있다.

 

그런 인간적인 품성때문에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패자들에 대한 기록, 그것이 바로 이 책이다.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다루고 있는데, 이미 역사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사람도 있다. 이 중에 처음 듣는 사람도 있는데... 이들로 인해서 이익을 본 사람이 있다는 것, 그들에 의해서 어쩌면 이들이 의도적으로 가려졌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역사에서 사라진 사람들을 다시 살려내는 것, 그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그런 사람들 중에서 노벨상을 놓친 사람, 리제 마이트너 같은 경우,물리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지만 노벨상을 오토 한에게 빼앗겼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나같이 과학분야에 문외한인 사람에게는 처음 듣는 이름이기도 하고.

 

그런 사람과 더불어 하인리히 만 같은 경우는 동생 토마스 만에 가려진 경우이고, 요한 슈트라우스는 이름이 같은 아들에게 이름이 가려진 사람. 그래도 이들은 가족에게 뒤쳐졌다고 할 수 있으니 덜 억울하다고 하겠지만, 자신의 성정체성 때문에 추락한 오스카 와일드나 앨런 튜링 같은 경우는 문제가 있다.

 

성정체성이 범죄가 되던 시대. 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 그런 시대에 살았던 사람. 그럼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던 사람, 이들이 바로 위대한 패배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한 책.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과연 이들을 패배자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사람도 있다. 윈스턴 처질과 등소평. 어떻게 이들이 패배자인가. 물론 잠시 패배해서 물러날 때가 있긴 했지만, 이들은 결국 승리를 하지 않았나.

 

역사에서도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이런 사람들 말고 역사에서 지금 다루고 있지 않은 사람들을 소개시켜 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많은 사람들, 역사에서 최선을 다해서 자기 몫을 하려고 했던 사람들, 그들이 비록 당대에는 패배했을지라도 역사의 흐름에서는 살아남아야 할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발굴하는 것이 바로 우리 몫이라는 생각을 하게 해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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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4 09: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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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4 09: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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