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시들이다. 그냥 땅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록 도시에 대한 시들일지라도 이상하게 땅을 연상시키는, 마치 떠나온 고향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그런 시들이 많다.

 

  시를 읽으며 마음은 어린 시절로, 시골로 돌아가고 있다.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서 또는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찾아서 또는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서 정도로 요약할 수 있는 시편들이 많은데...

 

  그럼에도 사회 문제를 비껴가지는 않는다. 아니 비껴갈 수가 없다. 고향을, 사람을 노래하는데 어떻게 사회를 비껴갈 수가 있단 말인가. 사람과 고향이 모두 사회와 얽혀 있지 않은가.

 

  그래서 참 오래 된 시집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텔레비전에 나오는 전 모씨, 이 모씨, 지 모씨 등등... 분통터지게 하는 이들을 생각나게 하는 시가 있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그 인간들은 지금까지도 우리 눈에 보일까? 진짜 별종이다. 이렇게 살기도 힘든데...

 

  별종

 

오월 어느날

등꽃 향기 독하던 날

어린 조카놈의 코피를 터쳐놓고

얻어들은 말

집안이 망할라고 별종이 나타났구나!

 

커서 세상을 살면서

더욱 잊을 수 없다

나라가 망할라고 그맘때면 나타나

동족의 봄을 짓밟던 무리

일그러진 얼굴들 떠오를 때

 

심호택, 최대의 풍경. 창작과비평사. 1995년. 98쪽.

 

도대체 그 '일그러진 얼굴'은 언어에 대한 감각도 별종인지, 무슨 '민주주의의 아버지'라는 말을 하지 않나, '알츠하이머'에 걸려 법원에 출석할 수 없다고 하면서 골프를 치러 가지 않나 - 몸은 기억한단다- 그를 추종하는 이상한 무리들은 아직도 광주에는 북한군이 침투했다는 망발을 하고 있으니...

 

'나라가 망할라고' 그런 '일그러진 얼굴들이 떠오'르고 있으니... 이건 아니다 싶다. 세상에 고향을 떠올려도 시원찮을 판에 이런 일그러진 얼굴들이 여전히 텔레비전에 나오고 있으니... 그들은 정말 별종은 '별종'인가 보다.

 

이 시집을 읽으며 이런 얼굴들 떠올리는 기분 나쁜 체험은 이제 그만두고, 시집에 나오는 또 다른 시. 우리가 앞만 보고 달려오면서, 성장 성장, 개발 개발 하면서 놓친 것들이 무엇인지, 바로 이런 즐거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그 기쁨의 순간들은

 

도대체 어디로 날아갔나

그 기쁨의 순간들은

 

살구철이 지난 어느날

우거진 잎새 사이에서

얼핏! 샛노란 살구 하나 찾아냈을 때

 

고구마 캐낸 빈 밭에서

무심코 쟁기질 뒤따르는데

덜렁! 고구마 한 덩이 뒤집혀 나올 때

 

사정없이 가슴이 콩당거리던

그만큼은 아닐지라도

그만큼은 아닐지라도

 

 심호택, 최대의 풍경. 창작과비평사. 1995년. 113쪽.

 

 이것이야 말로 흙'을 노래하는 땅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상기시켜주고 있는 시 아닌가. 우리가 잃은 것이 바로 이런 것들, 땅과 자연... 온통 인공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 아니던가.

 

시인은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하게 하고 있다. 이대로 나가다간 '일그러진 얼굴들'뿐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자연에, 지구에 '일그러진 얼굴'이 될 수 있는, 그렇게 '별종'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경고라고 할 수 있다.

 

시집 끝부분 '발문'에서 김종철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음 속에 새겨두어야 할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사람다운 소박하고 위엄있는 삶의 사회적 기초라 할 수 있는 '흙의 문화'는 돌이킬 수 없이 사라지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사람다운 삶에 대한 근원적인 충동을 제거할 수 없는 한,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순환적 농업문화의 복원을 꿈꾸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참다운 인간적 삶을 옹호하려는 모든 인문적, 예술적 노력은 '흙의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데 그 창조적인 열정을 집중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우리의 인간다움의 마지막 근거는 결국 '흙'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인 심호택의 성공적인 시편은 우리에게 이러한 문제를 다시 근본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129쪽. 발문, 김종철, '기억의 뿌리를 향하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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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하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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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그냥 마음이 끌리는 시인이 있다. 그런 시들이 있다. 폴란드라는 낯설고 먼 나라 시인인 쉼보르스카가 내게는 그런 시인이다.

 

이상하게 어려운 말이 없는데도, 언어 뒤편에 있는 어떤 세계를 보여주는 듯한 느낌.

 

쉼보르스카의 시집을 읽으며 환타지로 알려진 소설들이 떠올랐다.

 

나니아 연대기, 해리포터 시리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들이 다른 세계로 들어가게 되는 출입구는 옷장, 기차역의 기둥, 토끼굴과 같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것들이다. 이들은 늘 우리 곁에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을 그냥 지나치고 만다.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존재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작가들이다. 작가들은 우리 일상생활을 다르게 보는 법을 알려준다. 굳이 난해한 어휘들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써서 도대체 다른 세계로 들어갈 문은 보여주지만 열쇠는 주지 않는 그런 작가들이 아니라, 그냥 우리 생활에서 만날 수 있는 것들을 통해서 다른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가들.

 

쉼보르스카를 그런 작가라고 생각했다.

 

이 시집에서 '손'이라는 시... 그냥 물리적으로 보면 누구에게나 똑같은 구성 요소.

'스물일곱의 뼈, / 서른 다섯 개의 근육, / 약 2천 개의 신경세포들.'('손'의 부분. 82쪽)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 손들은 '『나의 투쟁』이나 『곰돌이 푸의 오두막』을 집필'('손'부분. 82쪽)할 수 있는 손이다.

 

우리에게 동심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쓰는 손이나 사람들을 파괴로 이끄는 글을 쓰는 손이나 같은 손. 그 손을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느냐, 어떻게 쓰게 해야 하느냐를 생각하게 하는 시다.

 

이렇게 우리가 늘 접하는 것에서 다른 면을 보도록 한다. '암살자들(39쪽)'이라는 시들을 보면 테러리스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임을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 악한이라고 우리하고 완전히 다른 존재가 아님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나와 다른 존재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결국 눈에 보이는 것 뒤에 숨어 있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시인. 그 세계가 우리의 삶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옷장이나, 기둥이나 굴처럼 우리가 늘상 만나는 것 속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쉼보르스카 시집을 읽으며 마음이 끌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슬'이라는 시를 보면 더 그렇다.

 

사슬

 

무더운 여름날, 개집, 그리고 사슬에 묶인 개 한 마리.

불과 몇 발자국 건너, 물이 가득 담긴 바가지가 놓여 있다.

하지만 사슬이 너무 짧아 도저히 닿질 못한다.

이 그림에 한 가지 항목을 덧붙여보자.

훤씬 더 길지만,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우리의 사슬,

덕분에 우리는 자유롭게 서로를 지나칠 수 있다.

 

쉼보르스카. 충분하다. 문학과지성사. 2018년 1판 4쇄.75쪽.

 

우리 역시 사슬에 매여 있다.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때가 있다. 어쩔 수 없이 직장에 나가야 할 때, 싫지만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야 할 때 등등 우리 역시 사슬에 묶여 산다. 다만, 개들처럼 짧게 묶여 있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슬이 없는 양 행동할 때가 많다. 그 사슬을 인식하는 계기가 찾아오기 전에는 사슬을 인식하지 않고 살아간다. 자유롭게, 서로를 지나치면서. 그렇지만 시인은 우리에게도 사슬이 있다고 말한다.

 

가끔 그 사슬을 인식하고 넘어서려고 할 때 그때서야 우리는 더 자유로워지는 것 아닐까.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시집 제목을 '충분하다'로 짓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삶 자체가 분명 어떤 사슬에 매여 있는데, 그 사슬이 눈에 잘 띄지 않고 또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충분히 길기 때문에, 그렇지만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존재함을 이 사슬이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무한하지 않음을 이 사슬이 또한 알려주기에, 삶을 살아갈 때 그때그때에 충실한 삶.

 

그런 삶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눈에 보이는 세계만 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계 뒤에 숨어 있는 세계도 볼 수 있는 그럼 삶을 산다면, 우리도 내 삶은 이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게 한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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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보이는 것들의 배신 - 여성과 아동, 소수자를 외면하는 일상의 디자인을 고발하다
캐스린 H. 앤서니 지음, 이재경 옮김 / 반니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이런 책은 꼭 필요하다. 자칫하면 내 잘못이야 하고 개인의 잘못으로, 개인의 능력부족으로 여기고 좌절할 수 있는 문제를, 개인이 아니라 공간의 문제라고, 제도의 문제라고, 그것을 고쳐야 한다고 알려주고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내가 하려고 해도 지속적으로 내가 접하는 공간이 나에게 차별을 가한다면? 그때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능력이 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공간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가?

 

이 책에는 왼손잡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대다수 디자인된 것들이 오른손잡이를 대상으로 만들어졌기에 왼손잡이들은 많은 불편함을 견뎌야 한다. 이런 불편함이 학교에서는 학습능력 저하로도 연결될 수 있음을 이 책은 말하고 있다.

 

디자인의 문제... 그냥 문제로 끝나서는 안 된다. 책의 말미에 저자는 처칠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꼭 처칠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가 이미 몸으로 겪어서 알고 있는 일이긴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건물을 빚고, 나중에는 우리가 만든 건물이 우리를 빚는다." (385쪽)

 

이런 사례로 여자 화장실 문제를 들 수 있다. 이 책에는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 후보로 나와 토론회를 할 때를 들고 있다. 토론을 하다가 쉬는 시간이 되어 각 후보들이 화장실에 갈 시간이 되었을 때, 꼭 늦게 나타나는 사람은 바로 여성인 힐러리 클린턴이었다는 것.

 

왜냐, 남자 화장실보다 멀리에 배치되어 있었을 뿐더러, 여자 화장실은 멀고 찾기 힘들고 숫자가 적어서 기다리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힐러리 클린턴은 미안하다는 말밖에는 하지 못했다는 것.

 

여기에 문제가 있다. 이것이 힐러리 클린턴의 게으름 때문일까? 이것은 디자인 문제다. 구조와 제도 문제인 것이다. 대통령 후보로 나선 여성에게도 이런 차별이 적용되고 말을 하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더한 차별을 받아도 침묵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여성 화장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고치려고 실천해서 비율을 2:1로 하는 법안도 마련했다고 한다. 일률적인 비율이 아니라 수요에 따른 융통성 있는 비율로 역차별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디자인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하고. 우리나라도 여성 화장실을 늘리려는 운동이 있었는데, 아직은 잘 안 되고 있는 것 같다. 다만, 새로 짓는 건물들은 여성 화장실에 대해서 고려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① 공중화장실등은 남녀화장실을 구분하여야 하며, 여성화장실의 대변기 수는 남성화장실의 대ㆍ소변기 수의 합 이상이 되도록 설치하여야 한다. 다만, 행정안전부령으로 정하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개정 2013. 3. 23., 2014. 11. 19., 2017. 7. 26.>)

 

이 책은 그런 침묵할 수밖에 없던 사람들을 대변해주고 있다. 그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해주고 있다고 해야 하나? 사회가 진보한다는 것은 소수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인데...

 

기술이 발전하면서 대다수가 편리한 생활을 한다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여기에 디자인의 함정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런 디자인의 함정을 알고 고치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몫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결론 부분에서 자신이 지적한 사항들을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을지 행동 방법을 이야기 하고 있으면서 이렇게 끝맺고 있다.

 

우리의 권리를 알고 살자. 디자인은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하자. 하지만 디자인에는 우리의 삶을 변질시킬 힘도 있다. 좋든 싫든 우리는 매일 디자인에 의해 차별당할 수도 우대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디자인에 의해 정의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디자인은 변화를 만들지 않는다. 변화는 사람이 만든다.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장착한다면 변화는 우리 손에 있다. (386쪽)

 

참 많은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마 우리가 생활하면서 만나게 되는 모든 것을 망라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몇몇은 이미 심각성을 알고 있었지만 처음 접하는 것들도 있었다.

 

가령 아동보호 차시트... 이것을 미국에서는(우리나라 사례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나라가 미국보다 좋은 제도를 지니고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정면 충돌 시험만 한다고 한다. 차가 정면 충돌만 하는 것도 아닌데... 아이를 차시트에 앉혀도 측면이나 좀더 빠른 속도에서 정면 충돌이 일어나면 아이 안전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측면 충돌 실험도 해야 하고, 속도도 더 높인 실험을 통과한 차시트를 판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여기에 더해서 병원 문제를 짚고 있는데, 응급실, 노인을 위한 응급실 구조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 병실의 개선도 필요하고, 이런 문제는 꼭 환자들만이 아니라 의사나 간호사들에게도 병원 디자인이 폭력이라는 것.

 

소방관들은 어떤가? 남성들이 대다수였기에 여성 소방관은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는 소방서 구조라는 것, 참... 반대로 남성 간호사들은 어떤가?

 

여기에 한 가지 더. 아, 그래 맞아 하고 맞장구를 치게 했던 지적... 연설할 때 원고를 올려놓는 연단. 세상에 무겁기는 왜 그리 무겁고 높기는 왜 그리 높고, 어떤 것은 사람을 가리기도 하는, 신체의 다양성을 완전히 무시한 연단의 획일성.

 

이것을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게 하고, 원고나 노트북을 놓을 수 있고, 또 여성들은 가방을 놓을 공간도 만들어 놓은 연단을 만들었다는 것. 작은 부분 같지만 이것들이 해결되면 성평등에 한발 또 신체 평등에 한발 더 다가가게 된다는 것. 그렇다. 평등은 큰부분에서만 찾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평등은 우리가 살아가는 아주 작은 부분들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화장실에 가방이나 물건을 놓을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 버스나 대중교통의 의자를 개선하는 것. 아이들이 자연을 쉽게 만날 수 있게 해주는 학교 건물을 디자인 하는 것, 사람들이 걸어다닐 수 있는 도로 환경을 만들어놓는 것, 걷고 싶은 계단을 만드는 것.

 

계단을 이 책에서는 좋게 평가하고 있다. 사람들을 걷게 만들기 때문에 근력 운동에도, 또 비만을 줄이는 데도 기여를 한다고 한다. 다만, 계단을 사람들이 접근하기 편하게 또 쾌적하게 이용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조건에서.

 

어떤 계단은 오히려 관절에 무리를 주거나 넘어질 위험이 있다. 이런 계단을 정비하는 것도 소수를 배려하는 디자인일 것이다.

 

이 책이 지닌 장점은 문제점만 나열하지 않고, 대책을 제시하고, 이미 대책을 만든 곳이 있다면 소개해서 따라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한다는 데 있다.

 

아무 생각없이 생활하고 있는 공간이 여성과 아동, 또 신체가 보통에서 벗어난 사람들, 소수자들을 외면하고 그들을 배제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하고 있다. 작은 부분, 그런 부분에서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디자인, 그런 디자인이 도입되도록 하는 것. 결국 모두 사람의 몫이다.

 

깨어있는 사람들. 나만 편하면 돼가 아니라, 어, 이건 누군가에게 불편할 수 있겠네... 또 왜 이것이 나한테 불편하지? 나만 그런가? 나만이 아니라 누군가도 불편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고쳐야지 하게 하는 책. 그런 책이다. 이 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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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2 14: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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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3 1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영혼의 자서전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36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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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권이다. 몇몇 구절을 인용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살아온 삶을 정리해 주고 있는 구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평생 동안 나는 오직 하나의 길만이, 오름길만이 신에게로 이끌어 감을 분명히 알았다. 밑으로 내려가거나 평탄한 길이 아니라 오직 오름길만이. 사람들이 너무 자주 사용해서 더럽혀진 <신>이라는 어휘의 내용을 조금도 선명 선명하게 파악하지 못했던 무능력 때문에 나는 자주 주저했지만 신에게로 올라가는 길, 그러니까 인간 욕망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향한 길에 대해서는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나는 신의 세 가지 피조물인 나비가 되려는 벌레와, 본성을 초월하려고 물에서 뛰어오르며 나는 듯한 물고기와, 배 속에서 비단실을 뽑아내는 누에에게 늘 매혹되었다. 나는 항상 내 영혼이 가야 하는 길을 상징한다고 상상했던 그들과 언제나 신비로운 일치감을 느꼈다. (670-671쪽)

 

  우리들의 삶은 전체가 상승, 절벽, 고독이다. 우리들은 많은 동료 투쟁자와, 많은 사상과 거대한 일행과 함께 출발한다. 하지만 우리들이 올라가도 정상이 이동하여 자꾸 멀어지면 다른 투쟁자들과, 희망과, 사상은 숨이 차서 더 높이 올라갈 마음이나 능력이 없어져, 우리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움직이는 정상에서 눈을 떼지 않았던 우리들만 남았다. 우리들은 언젠가는 정상이 움직이지 않아서 우리들이 거기에 다다르게 되리라는 순진한 확신이나 교만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며, 그곳에 도달한다 할지라도 높은 그곳에서 행복과, 구원과, 천국을 찾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우리들에게는 올라간다는 행위 바로 그 자체가 행복이요, 구원이요, 천국이기 때문에 올라갔다. (688-689쪽)

 

제목이 왜 '영혼의 자서전'인가 했더니, 그가 만나고 겪었던 일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 어떻게 견뎌왔는가를 중심으로 서술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하권을 읽으면서 깨닫게 되었다.

 

그는 젊은시절부터 계속 신을 추구하는데, 신에 대한 추구는 결국 자신의 영혼을 밝히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에서 니체로, 부처로 나아가지만 그것은 자신의 영혼이 도달할 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여기서 다른 도달점으로 현실을 택하기도 하는데, 러시아혁명으로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러시아를 언급하기도 한다. 레닌이 또다른 신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그 역시 카잔차키스가 도달해야 할 정점에 가는 하나의 길, 봉우리일 뿐이다.

 

따라서 이 자서전에서는 그리스와 세계 정치에 대해서는 언급이 되지 않는다. 정치인으로서 생활을 한 카잔차키스의 활동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그가 크레타인, 그리스인으로서 자부심을 느끼는 것, '카프카스'에 흩어져서 고난을 받던 그리스인들을 조국으로 데려오는 행위만이 이 자서전에서 표현되고 있을 뿐이다.

 

그만큼 그는 그리스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있다고 하겠는데... 하권에서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쓰게 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조르바가 카잔차키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도 잘 알 수가 있고. 이성적인 인간보다는 현실에 충실한 인간, 그런 인간에게서 불멸성을 보게 되는 순간, 깨달음이 조르바와 얽힌 이야기에서 잘 나타나 있다.

 

카잔차키스는 평생을 고뇌하며 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뇌가 극에 달할 때 그는 글쓰기로 빠져드는데, 그렇게 해서 많은 작품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또 그는 만년에 '오디세우스'에 대해서 글을 쓰는데, 그만큼 그는 영혼의 항해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도달한 지점은 바로 정점이 아니라, 즉 '파우스트'에서처럼 정점에 도달해서 '멈춰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나아감 속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에게 정점은 없다. 영혼에게 정점이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신을 추구했지만 어느 신에게도 자신을 내맡길 수가 없었다. 계속된 영혼의 여행, 오디세우스는 결국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그에게는 돌아갈 고향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곳이다.

 

도달해서도 안 된다. 그냥 도달하려고 가야할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영혼의 여행을 통해서 우리에게 많은 작품을 남겨주고 있다. 작품으로 불멸성을 획득했다고 할 수 있다고도 할 수 있는데...

 

카잔차키스의 고뇌, 영혼의 방황, 여행, 그리고 그가 도달한 지점까지 그가 쓴 '영혼의 자서전'을 통해 알 수 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로 어떤 구원을 받으려고 하지만, 구원은 멈춤에서 오지 않는다는 것, 구원은 우리가 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을 이 자서전을 통해서 어렴풋이나마 짐작했다고나 할까.

 

그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자서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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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은 '봄'을 잉태하고 있다. 겨울의 혹독함 속에서 봄의 포근함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봄은 오고 말 테니까.

 

  이번 호는 맨 뒤의 글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진경, 없어도 있는 동네의 아무것도 아닌 자들 이야기)

 

  제목에 나온 '아무것도 아닌 자'라는 말에서 오디세우스를 생각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아무것도 아닌 오디세우스... 과연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나. 아니다. 지혜로운 사람, 꾀보라고 해도 좋겠고. 성공적으로 모험을 마친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이 글에 나오는 '아무것도 아닌 자들'은 결코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무엇이나 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면 '없어도 있는 동네'라는 말에 눈길이 간다. 재일 조선인들의 삶을 다룬 시"이카이노 시집"을 다루면서 쓴 글인데... 이 시집 첫째 시 첫구절이 바로 '없어도 있는 동네'라는 말로 시작한다. (132쪽)

 

'없어도 있는'과 '있어도 없는'을 대비시키면서 글이 전개되는데... 없어도 있는 자들은 힘 있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비록 현재는 없지만 미래를 만들어가는 힘을 지니고 있는 존재들이다.

 

이진경은 이 글에서 '없어도 있는 것'에 속하는 인물로 카프카, 보들레르, 마르크스, 들뢰즈 같은 사람을 언급했는데(137쪽)...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박정희와 노무현으로 대변되지 않을까 한다. 상반되게 영향을 주고 있는 '없어도 있는 사람'으로서.

 

반면 있어도 없는 자들은 분명 현재에 존재하고 있지만 미래에는 존재 여부가 불투명한 그런 존재들이다. 이진경은 '있어도 없는 것'은 있어도 존재감을 주지 못하는 것이란 말(137쪽)이라고 하고 있다. 이 말은 '있어도 없는 자'들은 사라져 가는 존재, 또는 사라져야 할 존재 취급을 받는 그런 부류들이란 말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을 읽으며 이번 호 앞부분으로 돌아간다. (장영식, 영풍제련소와 민주주의, 일곱째별, 길 위의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 그리고 정기석, 농업이 살아야 모두가 산다)

 

주류 언론에게서 이들은 철저하게 있어도 없는 자들 취급을 당한다. 이들은 관심 밖에 있다. 우리 사회를 이루고 있는 주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철저하게 없는 자 취급을 당하고 있는데, 그런데 이진경의 논리를 따르면 주류 언론이 '있어도 없는 자' 취급을 해도 이들은 '없어도 있는 사람'으로 존재한다.

 

그렇게 우리들 앞으로 나선다. 탈핵희망도보국토순례에 대한 기록을 읽어 보라. 이들은 거의 없는 자 취급을 받지만 있는 자로서 나선다. 행동한다. 그리고 결코 희망을 잃지 않는다. 분노로 마음에 상처를 받고 나가떨어지는 것이 아닌, 상처가 멍으로, 다시 치유될 수 있는, 자신을 더 강하게 해주는 경험으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없어도 있는' 사람으로 이들은 나선다. 농민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는 잘알려져 있지 않다(? 알고도 모른 체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만큼 농민들은 우리 사회를 유지하는 필수 존재이면서도 '없는' 자 취급을 받았다.

 

아무리 없는 자 취급을 해도 농민들은 있는 자로 우뚝 선다. 그래서 아직까지 우리 사회가 희망이 있다. 비록 '있어도 없는 자' 취급을 하는 존재들이 있지만, 그런 취급을 받아도 당당하게 '없어도 있는 사람, 존재'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 존재들을 '삶이 보이는 창'에서 보여주고 있다.  '있어도 없는 것' 취급을 받는 존재들에게 '없어도 있는 것'이라는 존재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 또 결코 그들이 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그들을 볼 수 있는 창을 마련해 주는 것, 이것이 삶이 보이는 창이 하는 역할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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