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와 통하는 음식 이야기 - 음식으로 바꾸는 세상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30
박성규 지음 / 철수와영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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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일만큼 중요한 일이 있을까? 먹을거리만큼 중요한 것이 있을까? 그럼에도 우리는 먹을거리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떨 때는 바쁘다는 이유로, 어떤 때는 구하기 쉽다는 이유로 음식을 아무 생각없이 먹는다.

 

하지만 음식은 결코 가볍게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생명을 좌우하는 것이고, 음식문화는 우리들의 삶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러한 음식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들이 먹는 음식들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하는지를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

 

아마 다른 공부보다도 더 필요한 것이 이러한 음식 공부이리라. 나를 지키기 위한 첫걸음이 바로 내가 먹는 음식에 대해서 아는 일이고, 내가 먹는 음식이 환경을 덜 파괴하도록 하는 것은 우리 의무이기 때문이다.

 

여러가지를 다루고 있는데, 음식물에 있는 성분 표시를 읽는 법을 알려주고 있고, 또 탄소발자국같은 것도 이야기해주어서, 흔히 신토불이라고 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도 알려주고 있다. 여기에 음식으로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 이야기도 있는데... 이 부분은 매우 새로웠다.

 

음식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 사회를 바꾸기 시작한 요리사들이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되었으니 말이다. 요리하면 텔레비전에 나오는 유명한 셰프들이나 또는 유명인이 나와 말하는 것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요리를 통해서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고, 또 이들이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음식의 중요성이 더 잘 느껴진다.

 

내가 먹는 음식을 남기지 않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먹는 음식이 어디에서 왔고, 누구의 노동이 들어갔으며, 지구라는 행성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었다.

 

또한 요리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그러한 일들을 하는 사람도 있음을, 우리나라도 그런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음을 알 수 있었고...

 

특히 청소년들이 자신들이 먹는 음식에 대해 별다른 생각없이 지내기 쉬운데, 이 책은 이러한 청소년들로 하여금 음식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음식을 통해 사회를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먹을거리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자유로울 수 없으면 음식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지녀야 한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건강에도, 또 지구에도, 또 윤리적으로도 좋은 음식을 먹으려는 노력, 그러한 음식을 만들려는 노력을 해야한다는 생각을 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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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7 10: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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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7 10: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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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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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로 시작하고 싶다. "이 소설은 내 소설이다"라고 제목을 쓴 작가의 말. 작가는 '소설을 쓰는 것이 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라 믿었던 때가 있었다.' (171쪽)고 했다. 그는 창조주가 되어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창조하고, 사람들이 그가 창조한 세계에서 거닐기를 바라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날 자신이 창조주임에는 확실한데, 참 한심한 창조주라는 것을 깨닫는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마르코 폴로처럼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여행하는 것에 가깝다.' (171쪽)고 말하고 있다. 먼저 문을 열어주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또 그들이 떠나라고 하면 언제든지 떠나야 하는 여행자. 그런 여행자는 자신의 경험을 다른 세계의 한계 속에서만 할 수 있다. 소설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작가는 이렇게 또 말하고 있다.

 

'소설가라는 존재는 의외로 자율성이 적다. 첫 문장을 쓰면 그 문장에 지배되고, 한 인물이 등장하면 그 인물을 따라야 한다. 소설의 끝에 도달하면 작가의 자율성은 0에 수렴한다. 마지막 문장은 앞에 써놓은 그 어떤 문장에도 위배되지 않을 문장이어야 한다.' (171-172쪽)

 

여기까지 작가의 말을 따라가니 이상하게 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독자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독자 역시 소설을 읽으며 자신이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 있다고 느끼고, 그 세계 속에서 또다른 자신을 발견한다고 생각하지만, 철두철미하게 소설 속 인물이나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작가는 그럼에도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내 소설이다. 내가 써야 한다. 나밖에 쓸 수 없다.' (172쪽)

 

독자 역시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내가 읽는 소설이다. 내가 읽어야 한다. 나만의 방식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소설은 독자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소설가에게 소설이 자신의 것이듯 독자에게도 소설은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소설을 읽어야 한다. 이렇게 장황하게 작가의 말을 인용한 것은, 너무도 잘 읽히는 이 소설이 도대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기억을 잃어버리는 살인자... 수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어느 순간 살인의 세계에서 물러나 딸을 키우며 살아가던 살인자. 그러다 자신이 치매에 걸렸다는 것을 알고, 또다시 연쇄살인이 일어나는 마을에서 자신의 딸을 지키고자 하는 살인자.

 

과거의 살인자가 현재 살인자로부터 딸을 지키려고 한다. 그것도 자신이 죽인 부부의 딸을. 그는 마지막으로 살인을 기획한다. 딸을 지키기 위한 살인. 과거의 살인은 철저히 자신을 위한 살인이었다면 이번에 계획한 살인은 딸을 위한, 즉 남을 위한 살인이다.

 

그런데... 소설은 반전을 이룬다. 그에게 딸이 있었던가. 연쇄살인은 일어나고, 그에 대한 진실은 소설 후반부에 가면 밝혀진다. 그렇다. 기억을 잃어간다고 해도, 자신의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행위를 기억하지 못할 뿐, 행위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을 아무리 없는 것(無)으로 돌리려 해도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다만, 기억하지 못할 뿐, 발견하지 못할 뿐이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그래서 기억하기 위해 글로 쓰거나 녹음을 하는 기억 장치들을 동원한다. 그런 장치들 역시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만 남긴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는, 이런 기록들도 믿을 것이 못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장치들로 기억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는 소설을 읽어가면 알 수 있다. 또한 기억을 잃어가는 것이 자신의 행위를 지워가는 일이 될 수 없음을 알아가게 된다. 온전하지 못한 정신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기억을 하지 못할 뿐이다. 내면에 들어 있는 습성들이 어느 순간 터져 나오게 되는 것, 그런 행동을 하기 위해서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사건들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것.

 

사람은 무(無) 다시 무(無)돌아간다고 하지만, 처음의 무와 마지막의 무가 같을 수는 없다. 우리가 공(空)들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처음을 극복한 공(空)이 되어야 한다.

 

소설에 나오는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의 내용은 제자리 걸음을 하는, 또는 단순히 부정을 하는 무나 공이 아니다. 그것은 치열한 고민, 삶을 거쳐 깨달아야 하는 경지다. 그런 경지에 든 다음에 다시 자신이 있던 위치로 오는 것, 부처가 중생을 구제하러 세상으로 나오고, 예수가 민중들 속으로 들어가듯이 그래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깨우침인데,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망상 속에서 얻어지는 깨우침은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다. 행동이 변하지 않는,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는 공에 대한 추구는 제자리 걸음일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꽤나 스릴 넘치고 반전이 있는 이 소설을 불교의 십우도에 비유하면 결국 무에서 무로 가는 과정인데, 십우도가 한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라면, 이 소설은 이 과정이 아닌 오로지 제자리 걸음을 하는, 망상 속에서만 다른 차원으로 가게 되는, 현실과 자신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상태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늘 같은 나같지만, 결코 같은 나가 아님을, 나는 망상 속에서만 달라진 나를 발견할 것인지, 아니면 현실에서 달라진 나를 발견할 것인지 고민해야 함을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술술 읽히는 소설이다. 재미도 있고. 그렇지만 무언가를 더 생각하게 하는, 찜찜한 여운이 남는 소설이기도 하다. 나는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고 생각하게 하는, 그러한 찜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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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 교육을 담당하는 각 시도교육청에 '민주시민교육과'라는 것이 생겼다고 한다. 학교 교육 목표에 빠지지 않는 것이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것이라고 하던데... 그것을 더 잘 이루기 위해서 민주시민교육과라는 것을 만들었나 보다,

 

  그런데 민주시민이 학교 교육으로 양성이 될까? 가장 민주적이지 않은 곳에서 민주시민을 길러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모순인지 알고나 있는지.

 

  민주시민은 교과서로 만들 수 없다. 교과서는 시험이 지나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버리고 마는, 시간을 때우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민주시민을 어떻게 양성할 것인가? 아니 민주시민을 양성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민주시민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연스레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민주화 되어 있다면 자연스레 민주시민들이 살아갈 수 있다. 이미 삶 자체가 민주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회를 바꾸려 하지 않고, 학교에서 민주주의를 교육하라고 한다. 그것도 가장 비민주적인 방법으로.

 

교육내용에 관해서 학생들 의견을 들어본 적도 없으면서, 지금 청소년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학생을 위한다, 청소년들을 위한답시고 여러 말들을 쏟아내는데... 공허한 말놀음에 불과할 때가 많다.

 

이번 호에서 말하고 있는 것도 그것이다. 기획 제목이 '오늘을 바꾸는 청소년 시민'이고 표지에 있는 그림에는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시위한다'고 되어 있으며, 표지 그림 안에는 '어린 것들 해방만세!'라는 글이 들어 있다.

 

'어린 것들 해방 만세!'부터 시작하면 해방은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시위한다'고 외치는 거다. 이렇게 외치기 시작하면서 '오늘을 바꾸는 청소년 시민'들이 나타난다.

 

'청소년 시민'들이 나타나는 것은 그만큼 청소년들이 이제는 배우기만 하는 존재,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주체적인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을 객체가 아닌 주체로 인식해야 하는 숙제는 이제 어른들의 몫이다.

 

이미 청소년들은 시민으로 이 사회에 등장했다. 그런데도 청소년들을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기성세대들이 있다. 이들에게 가하는 일침, 그것이 [민들레 123]호다.

 

'학생인권조례가 왜 두렵습니까?(권리모)'라는 글을 보면 여전히 청소년들을 미숙한 존재, 가르쳐야만 하는 존재로 여기고 싶어하는 기성세대들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다. 세상에 청소년들의 권리를 나타내는 학생인권조례조차 통과되지 못하고 있는 지자체가 있다는 사실. 여전히 청소년들에게는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갈 길이 멀어도 가야 할 길이기에 가는 청소년들이 있다. 이들의 발걸음이 길을 조금씩 넓혀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교문 밖에서 민주시민이 되었다(서한울)'라는 글을 보면 학교가 얼마나 보수적인지, 또는 학생들이 민주시민이 되는데 장애물로 작용하는지를 알 수 있다. 지행불일치, 철저한 지행불일치, 바로 학교의 모습 아닌가. 그러니 학교에서 어떻게 민주시민을 길러낼 수 있단 말인가.

 

타산지석으로?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나는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을 먹게 하는 곳이 학교? 그렇다면 반어적으로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가장 좋은 곳이 학교라는 생각도 든다. 

 

이러니 청소년들이 '바뀌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니라 사회다(이새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 정작 바뀌어야 할 것은 놓아두고 청소년들에게 바뀌라고 하다니... 하다못해 미래 세대가 살 세상을 미세먼지가 가득한, 기후변화로 살기 힘들어진 세상을 만들어놓고도 자기들이 살아갈 세상이 아니라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기성세대를 보면서...

 

청소년들은 학교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청소년들이 다시 쓰는 기후변화 시나리오(여러 명의 간담회)' '청소년 참여가 정치 생태계를 바꾼다(하승우)'라는 글을 읽어보면 이미 시민이 된 청소년들을 만날 수 있다.

 

만18세 선거권을 놓고도 자기들의 이익을 따지는 기득권 세력들을 보면서 청소년들은 가만히, 학교 안에만 있으면 안 된다는 자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가만히 있는 세대가 아니라,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살아갈 세상이 어찌될지 눈에 뻔히 보이기 때문에...

 

민들레가 다룬 이번 기획 글들을 보면서...청소년과 시민에 대해서 생각한다. 시민을 나이로 구분할 수 있을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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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2 09: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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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2 10: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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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염 2019-08-15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병역을 이행할 의무도 없는 청소년에게 투표권을 준다니요. 교육감 선거까진 이해해도 그 이상은 아니라고 봅니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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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을 보고 언뜻 공자가 했다는 말을 떠올렸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夕死可矣)

 

이 말을 과정으로 생각했다. 도를 듣자마자 죽는 것이 아니다. 아침이라는 출발점에서 도를 들었다면 그것을 실행해야 한다. 적어도 낮동안 도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 다음에는 죽어도 좋다. 이미 도를 실천했으므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이 책의 시작을 알리는 글이자 제목이 된 글이다. 공자가 한 말과 유사성을 느끼며 읽었다. 그렇다. 도를 듣는 것과 죽음을 생각하는 것, 다른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글쓴이는 말하는 이유를 읽고 공자의 말과 다르지 않다고 여기게 됐다.

 

결국 도나 죽음이나 우리가 현재를 잘 살아가게 하는 것 아니겠는가. 현재를 잘 살기 위해서 우리는 죽음을 생각해야만 한다. 글쓴이는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러한 시절에 아침을 열 때는 공동체와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첫째, 이미 죽어 있다면 제때 문상을 할 수 있다. 둘째, 죽음이 오는 중이라면 죽음과 대면하여 놀라지 않을 수 있다. 셋째, 죽음이 아직 오지 않는다면, 남은 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보다 성심껏 선택할 수 있다. 넷째, 정치인들이 말하는 가짜 희망에 농락당하지 않을 수 있다. 다섯째, 공포와 허무를 떨치기 위해 사람들이 과장된 행동에 나설 때, 상대적으로 침착할 수 있다. 그렇게 얻은 침착함을 가지고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생과 이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는 거다. (19-20쪽)

 

그렇다면 이러한 시절은 무엇일까? 인용한 글의 앞부분에 나와 있다.

 

고도성장을 통한 중산층 진입, 절대악 타도를 통한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과거 수십 년간 이 사회에 에너지를 공급했던 두 약속에 대해 사람들은 이제 낯설어하게 되었다. (19쪽)

 

우린 이런 세상에 산다. 목표가 명확하지 않은 세상, 무엇을 이루겠다는 꿈을 잃어버린 세상, 그런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바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한다. 죽음을 생각한다면 잃을 것보다는 얻을 것이 더 많기 때문에...

 

책 제목을 보면 언뜻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하는 책 같지만, 주제가 모두 죽음은 아니다. 글쓴이가 여러 매체에 기고했던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룬 글도 있고, 정치나 교육에 대한 글들도 있다. 또한 글쓴이가 신춘문예 영화평론으로 당선된 적도 있다고 하는 만큼 영화에 관한 글도 있다.

 

글 한편 한편이 생각을 많이 하게 한다. 좋은 글의 조건을 갖춘 것이다. 생각을 하게 하고, 글에서 언급된 책들을 찾아보게 하고,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책. 그것은 좋은 책이니.

 

이 책 역시 그렇다.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들에 대해서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게 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가령 '결혼을 하고야 말겠다는 이들을 위한 세 가지 주례사'를 보면 결혼 생활에서 얼굴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 나온다. 사람들이 주장하기 힘든 말... 그것도 결혼식장에서. 그러나 얼굴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얼굴이 바로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얼굴빛은 유복한 생활을 한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고, 사적인 행복에 안주하지 않고 보다 넓은 '공적인 행복'을 추구할 때 깃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50쪽)

 

그러니 결혼할 사람들을 앞에 놓고 주례사를 말할 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너희들 얼굴이 중요하다고, 그러니 얼굴을 잘 가꾸라고. 어떻게? 사적인 것을 넘어 공적인 것을 추구할 줄 알아야 한다고. 너희들 부부에만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로 눈을 돌릴 수 있어야 한다고. 그러면 얼굴이 아름다워질 거라고... 그렇다. 이런 사람의 얼굴이 아름답지 않을 이유가 없다. 얼굴에서 어떤 아우라가 나올 테니...

 

이런 글들이 많다. 읽으면서 행복해지는 순간이다. 또 글이 잘 읽힌다. 그러니 더 좋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이 말은 과정에 있다. 끝이 아니다. 삶은 바로 죽음과 함께 가므로, 죽음을 생각하면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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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1 09: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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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1 09: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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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 김영하 산문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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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여행이라는 비유를 많이 한다.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떤 감정을 지니게 될까? 짧은 순간을 함께 하면서 최선을 다하기도 하지만, 앞으로 다시는 볼 일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소홀히 대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삶이 여행이라는 생각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삶은 정착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속되는 무엇, 그것이 바로 삶이라고 생각한다. 여행이 순간적인 것이라면, 삶은 지속이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삶을 여행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그 비유는 여행이 삶을 좀더 풍요롭게 하기 위한 수단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소설가 김영하가 쓴 산문집이다. "여행의 이유"

 

도대체 작가는 여행을 왜 할까에 대한 답을 찾으려 이 책을 펼쳐 들었다. 나는 여행을 왜 하지에 대한 물음과 작가가 생각하는 여행에 어떤 공통분모가 있을까.

 

작가의 여행과 내 여행이 지니는 교집합은 무엇일까? 이 교집합 뿐만이 아니라 작가가 생각하는 여행을 알게 된다면 내 여행과 합쳐지는 합집합, 즉 여행에 대한 좀더 폭넓은 이해가 생기기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읽게 된 책.

 

그런데 읽으면서 여행에 대한 생각보다는 작가를 알아간다는, 즉 장소에 대한 탐구보다는 사람에 대한 탐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예전에 김영하 작가의 작품을 좀 읽다가 최근에는 읽은 적이 없었는데, 이 산문집을 읽으며 김영하라는 사람에 대해서 여행하고 있단 기분을 느꼈다고나 할까.

 

이 책에 실린 첫글(추방과 멀미)을 읽으면서 인간 김영하에 대한 여행기로 읽게 된다는 느낌을 지녔다. 그의 경험이 드러난, 젊은시절의 삶이 드러난 글이었는데...

 

이 글의 마지막에서 여행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51쪽)

 

이런 깨달음에 대해서는 이 책에 실린 '노바디(nobody)의 여행'이란 글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섬바디(somebody)'가 되려고 한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것, 내가 누구인지 알아? 하는 태도... 정치인들이 가끔 막말을 하는 경우, 가끔이 아니라 이들은 기회만 되면 막말을 한다. 좋은 쪽이든 안 좋은 쪽이든 이들은 남들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섬바디'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섬바디'는 이 글에 나오듯이 키클롭스에게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하는 오디세우스처럼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많다.

 

늘 '섬바디'일 수 없고, 또 늘 '섬바디'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행이 필요하다. 여행은 나를 '섬바디'에서 '노바디'로 바꿔주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노바디'일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즉 여행은 항상 일인칭이었던 나를 일인칭의 자리에서 삼인칭의 자리로 옮겨주는 역할도 한다. 물론 여행을 할 때는 일인칭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주인공인 자리에서 관찰자인 자리로 옮겨가게 하는 것이 여행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행에서 '섬바디'로서가 아니라 '노바디'로서 존재한다. 그런 '노바디'로서의 나를 깨닫는 순간, 내 삶 모두가 여행일 수 있다는 깨달음으로까지 나간다. 즉, 나는 삶이라는 장소에서 수많은 여행자들과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하기도 하는, 수많은 존재들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

 

그리고 여행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나는 나를 내려놓아야 하고 남을 신뢰하고, 그런 나를 환대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런 신뢰와 환대가 순환하는 삶이 결국은 우리를 행복하고 풍요롭게 한다는 것.  

 

읽는 내내작가의 여행에 관한 많은 이야기들을 통해 여행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고, 내 여행과 작가의 여행을 합하고, 또 공통분모를 찾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렇다. 무엇보다도 여행은 작가가 말하고 있는 대로 '오직 현재'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 '오직 현재'를 살아가는 일, 그것이 바로 여행이다. 그리고 이런 여행들이 하나하나 모여 삶이 된다. 작가는 정착을 부정하는 듯한 말을 하지만 (이번 생은 떠돌면서 살 운명이라는 것, 귀환의 원점 같은 것은 없다는 것. 이제는 그걸 받아들이기로 한다 - 207쪽) 나는 귀환을 위해 여행을 한다.

 

내가 돌아올 곳, 돌아왔을 때 이미 달라져 있는 나를 발견하기 위해, 더 잘 정착하기 위해 여행을 한다. 그것이 여행의 이유다. 노마드(nomad)가 아닌 정주민으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그러나 저러나 삶이 여행이라는 말을 더 깊게 받아들일 수 있는 책이다. 그래, 이 책에 대한 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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