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 세자의 진짜 공부 라임 틴틴 스쿨 9
설흔 지음, 유준재 그림 / 라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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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다. 책을 펴낸 목적으로 보면 청소년들을 위한 소설임에 분명한데, 읽으면서 과연 청소년들이 이 소설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소현세자의 진짜 공부라고 하면, 우선 소현세자부터 알아야 한다. 그 다음에는 진짜 공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두 가지를 알려고 하지 않으면 소설은 그냥 헛된 이야기에 불과하다. 나와는 상관없는 책 속에 갇힌 글들, 사건들, 인물들.

 

소현세자를 알기 위해서는 병자호란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그의 비극적인 죽음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은 소현세자가 귀국한 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간다.

 

(이 소설에서 과거와 현재가 중첩되어 있는데, 무더위가 극성인 현재에 나타난 소현세자를 소설의 서술자는 존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리고 소현세자가 말을 건, 알고 있는 존재의 이름은 끝내 나오지 않는다. 찾아야 한다. 이것도 작가가 제시한 공부다)은 조선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몸은 검게 변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 (211쪽)

 

아마도 독자들로 하여금 이 부분을 찾아 더 공부하라는 의미, 즉 소설로 끝내지 말고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비극적인 전쟁, 그리고 그 뒤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공부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그래서 이 소설의 말미에 있는 말은 너무도 아프게 다가온다. 이 아픔을 청소년들이 이해한다면 이 소설은 제 역할을 다한 것이리라.

 

  우리는 늘 그런 식으로 치욕의 역사를 깨끗이 잊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뭐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지요. 실패의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것, 그것이 우리가 반복된 슬픔의 역사에서 배운 유일한 교훈이니까요. (214쪽)

 

소설은 이중의 구조로 되어 있다. 현재에 만난 두 사람이 있고, 이들 중에 존이 자신의 이야기를 나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 역시 가족을 잃은 슬픔을 지니고 있다. 이 슬픔은 어떤 슬픔인가?

 

소설에서는 강화도 앞 바다의 장면이 몇 번 나온다. 그 장면을 통해 서술자인 내게 일어난 비극을 유추할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기도 싫은, 그러나 꼭 기억해야만 하는 그날의 사건을.

 

  병자년 전쟁 때 강화 앞바다에는 형형색색의 머릿수건들이 둥둥 떠다녔다지요. 머릿수건의 주인들은 바다에 빠져 죽거나 창과 칼에 찔리거나 화살과 포탄에 맞아 죽었는데도 머릿수건들만큼은 가라앉지도 않고 강화 바다를 오랫동안 둥둥 떠다녔다지요.

  나는 존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가족을 생각했습니다. 종이배에도 의지하지 못했던 내 가족을 생각했습니다. (211쪽) 

 

바다와 가족, 죽음... 침몰... 하지만 작가는 내가 겪은 비극을 이야기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내 비극을 통해 소현세자를 등장시키고, 병자호란에서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난을 드러내고자 할 뿐이다.

 

이름없는 민초들이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 불을 내기도 하고, 나라를 탈출하기도 하는 등 얼마나 그들이 고통을 받았는지, 그러나 국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어떻게 잘 살게 되었는지, 결국 전쟁으로 인한 고통은 백성들이 온몸으로 겪을 수밖에 없고,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진짜 공부를 하고 싶어했던 소현세자는 그 시대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거라는 것.

 

청나라에 반대한 신하를 낙점해 청나라로 보내는데 인조가 결정한 신하는 겨우 홍문관 교리와 수찬에 불과한 윤집과 오달제였다고 한다. (소설 175쪽)

 

이들이 어떻게 주범이 될 수 있겠는가. 이들에게 과연 왕을 움직일 만큼 권력이 있었을까? 소설 속 소현세자는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예조판서 김상헌과 이조참판 정온을 지목했을 거라고 한다. 이들은 그 직위로 보아 충분히 책임을 져야 할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을 지목해 청나라로 보내면 국내에서 계속 왕 노릇을 해야 할 인조가 신하들에게 계속 충성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것도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가. 그러니 인조는 조정에서 중책을 맡지 않은, 아직은 권력의 핵심에 들지 못한 신하들을 지목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러니 전쟁의 참화는 위로 갈수록 적어지고 밑으로 내려올수록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소현세자가 깨달은 것은 바로 이것 아니었을까... 이런 전쟁을 피할 수 있는 방법, 그것에 대한 공부, 그것이 진짜 공부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 공부가 현실에 적용이 되어야 진짜 공부가 되는데, 소현세자는 그러지 못했다. 그의 비극적인 죽음.

 

소현세자는 이렇게 한탄하고 있다.

 

  나는 그런 아이가 되지 못했습니다. (중략)

  아, 나는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럽습니다.

  나는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역사의 죄인일 뿐입니다. (208쪽)

 

소설에서 하고자 하는 얘기가 바로 이것이다. 권력의 핵심에 있는 자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지... 소설에서 서술자를 죽임을 당한 나로 설정한 것이 그 한 이유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진실을 고발했지만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사람. 소설을 시작하기 전에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책을 준비하면서 《심양장계》,《소현동궁일기》,《소현심양일기》등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것은 아니고 어떤 이의 죽음이 등장하는 순간까지만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궁금하겠지만 제 입으로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가 되어 스스로 찾아낸다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은 없겠습니다. (작가의 말에서 5쪽)

 

소설을 읽으며 소현세자가 하는 진짜 공부가 무엇인지 찾고, 또 소현세자와 짝이 되어 소설을 이끌어 가는 사람을 찾아보라고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나'가 어떻게 죽게 되는지가 나와 있는데, 이것이 힌트다.

 

아마도 요즘 청소년들의 검색 능력으로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단지 찾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 '나'를 서술자로 택했는지도 고민해야 한다. 소설 속 현재에서도 진실은 가려져 있으니...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어느 세상이나 필요하다.

 

이 소설을 읽으며 역사에 흥미를 느껴 관련 자료를 찾아본다면 작가의 목적이 성공한 것이리라. 단지 관련 자료를 찾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현실을 보고, 실천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진짜 공부가 된다는 것을 명심한다면 더더욱.

 

그렇다면 소설에서 말하는 그 사람의 죽음,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 찾아보자... 검색했더니 이런 글이 눈에 띄었다. 

 

정명수가 임금을 모독하고 조선 관료들을 업신여기며 횡포를 부리자 1639년 세자시강원 필선 鄭雷卿이 조선에서 바친 은자와 배, 감 등 세폐 물품을 정명수와 김돌시가 몰래 횡령했다는 혐의로 청으로 하여금 처단하도록 꾀한 일이 있었다. 이 일은 결국 근거 없는 모함으로 몰려 정뇌경은 처형당하고 이후로는 청역들이 일마다 말썽을 일으켰다고 전한다. (병자호란 직후(1637~1644) 朝淸 관계에서 ‘淸譯’의 존재  김 남 윤  25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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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하는 신체 -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선다는 그 위태로움에 대하여
우치다 타츠루 지음, 오오쿠사 미노루.현병호 옮김 / 민들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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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몸을 경시하는 시대는 없다는 생각을 한다.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의 몸을 학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은 표현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수준까지 이르지 않았나 한다.

 

내부에서 외부에서 신체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상황이 지금 우리 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우치다 타츠루의 책 제목이 흥미를 끈 것은 바로 '소통하는 신체'라고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다.

 

말로가 아니라 신체로 소통을 한다는 것, 말로는 가까이 오라고 하지만 몸으로는 밀어내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또 자신의 몸이 위험하다고 신호를 보내는데 그 신호를 읽지 못하고 위험한 곳으로 계속 나아가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

 

그만큼 신체에 관심을 갖는다고 하지만 오히려 신체를 무시하고 학대하는 수준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소통하는 신체에서 가장 멀어진 곳이 바로 학교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학생과 교사가 서로를 밀어내고 있는 형국, 이것이 지금 우리나라 교육이 처한 상황 아니던가. 말로는 교사와 학생이 서로 소통하고 함께 어우러지는 교육현장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말로는 번드르하게 그렇게 표출하지만 몸은 서로를 밀어내고 있기에, 학교에서 학생과 교사는 소통이 되지 않는 관계에 머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타츠루는 교사의 역할에 대해서 선수를 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선수를 친다는 것은 따라올 마음을 품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는데...

 

학생에게 선수를 치는 것, 한 발 앞서 있는 것, 학생들로 하여금 "이 사람은 대체 뭘 말하고 있는 거지" 뭘 하려는 거야?"하고 의문을 품게 해서 뒤를 좇아오도록 만드는 것, 교사의 역할은 단지 그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교사가 하는 일의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56쪽)

 

그런데 과연 지금 우리나라 학교에서 이런 관계가 유지될 수 있을까? 교사는 한 발 앞서 있기만 해서는 안 된다. 아주 친절하게 모든 것을 명확하게 알려주어야 한다. 정답을 알려주어야 하는 존재가 바로 지금 우리나라 교사인 것이다.

 

나는 여기에 있다.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라 하는 교사는 학교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답을 알려주지 않는 교사이기에 온갖 비난에 시달릴 것이다. 학생은 고사하고 학부모부터 가만히 있지 않는다.

 

이러니 교사는 아주 친절하게 모든 정답을 알려주어야 하는 역할에 머무른다. 학교의 학원화. 아니 학교든 학원이든 정답 알려주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지는 한참 되었다. 이렇게 정답을 알려주어야 하니, 학생들은 몸을 움직여서는 안된다. 몸을 구속하게 된다.

 

다른 활동을 모두 차단당한 상태에서 주어진 정답을 찾는 활동만을 하는 학생들. 그들은 결국 자신의 몸을 괴롭힐 수밖에 없다. 학교 현장에서 나타나는 타투 열풍(이미 우리 사회에는 온몸에 문신을 한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다. 여기에 학교에까지 문신을 한 학생들이 존재하고 있는 현실이다)이나 또는 자해 활동들이 늘어난 것이 바로 그 이유다.

 

타츠루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자신의 신체를 지배하여 그것에 고통을 주는 사람은 다르게 말하면 그 외에는 지배하고 고통을 가할 수 있는 것을 소유하지 못한, 그야말로 '가난한' 사람입니다.

  소녀들을 거기까지(성매매를 의미한다) 몰아붙인 것에 대해서는 학교나 가정, 사회 전체의 책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은 자기 신체를 마음대로 손상시킬 권리가 있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 '나의 신체'는 성매매 따위는 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71쪽)

 

  제가 문신이나 피어싱에 위화감을 느끼는 것은 고통을 참는 경험을 자기 몸에 강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누구에게도 존경을 받을 수 없고,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하는 무방비 상태의 가난한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남겨진, '아무리 난폭하게 취급해도 괜찮은 자원'이 자기 신체인 것입니다. 감각만 차단해버리면 자신의 신체는 아무리 상처를 입거나 혹사당해도 불평을 하지 않습니다. (79-80쪽) 

 

우리나라 학생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 이 상황에서 얼마나 멀리 있는지. 바로 우리나라 학생들 이야기 아닌가 싶을 정도다. 자신의 신체를 학대해서 감각을 차단하는 상황으로 몰리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에게 무엇을 알려줘야 하는가.

 

최근에 놀이에 대해서, 학교에서 아이들이 놀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바로 아이들의 신체를 살리는 길이고, 그것이 아이들을 살리는 길이라는, 교육이 제대로 방향을 잡는 길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신체에 관심을 갖고 관점을 확장하면 죽음으로까지 나아간다. 죽음에서 자신을 바라보게 되고 현재를 살아가게 되는 것, 죽은자들과도 대화를 할 수 있게 되는 경지... 책은 이렇게 자신의 몸에서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죽은 자들까지 나아간다.

 

소통하는 신체가 눈 앞에 존재하는 물질적 존재인 신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신체를 죽음으로까지 확장하고, 그것을 통해서 소통하는 신체를 말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나아가는 교육, 그것이 필요할 텐데... 거기까지 가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자신의 신체 감각을 유지하는, 신체와 말이 따로 놀지 않는 그런 교육을 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을 고치지 않으면 죽은 신체 속에 온갖 잡다한 지식만을 집어넣어, 결국 몸과 마음이, 신체와 뇌가 따로 노는, 자신의 몸을 위험에 쉽게 빠뜨리는 사람들로 우글거리는 사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두고두고 생각해보고 고민해 봐야 할 주제라는 생각이 든다. '소통하는 신체'라는 주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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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적 인간 - 시와 예술의 힘에 대하여
고영직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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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예술을 몸에 새긴, 그것을 인문이라고 한다면, 인문적 인간은 다른 말로 하면 예술적 인간이다. 인간으로서의 무늬를 지닌 인간이 바로 인문적 인간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인문은 사람의 무늬다. 사람의 무늬가 무엇일까?

 

사람이라는 말에서, 삶을 안다는 말을 유추해내는 사람도 있고, 사람 인(人)에서 서로 기대는 존재임을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사람을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는 말로 정의하든, 사회적 동물이라고 정의하든, 홀로 살아가는 존재는 사람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라는 말에는 이렇게 함께 함이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인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의 무늬는 바로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이 서로 만들어가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 관계를 인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고영직은 이 책에서 시와 예술을 통해서 인문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가 원하는 세상은 비빌리힐스(비빌里Hills)다.  얼핏 읽으면 미국 부자 마을인 비벌리 힐스(= 베벌리 힐스라고 읽는다고 한다. 나는 비벌리 힐스가 더 친숙하다. 영어로 Beverly Hills 이렇게 쓴다고 하니...) 를 떠올리는 말인데...

 

두 가지 효과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는 미국 부자 마을처럼 사람들이 잘 사는 마을을 연상시키는 것-그렇다고 돈이 많은 부자들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의미에서겠지만 풍요와 행복을 떠올려야 한다는 것-과 도대체 무슨 뜻이지 하고 생각을 하게 하는. 이 말의 뜻을 이 책 뒤에 있는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비빌 언덕'이라는 우리말에 마을(里)과 언덕(Hills)을 뜻하는 한자와 영어를 조합해 재미있게게 표현하고자 한 말이다. "마을(里)에는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 내지는 "마을(里) 자체가 비빌 언덕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자 한 조합어이다.

  우리 사는 삶터가 '비빌리힐스'가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네 삶터는 서로가 서로에게 '있어줌'의 존재론을 구현하고, 내면의 야생성을 회복하는 장소의 혼으로서 제 기능을 회복하게 된다. (323-324쪽)

 

이 비빌리힐스야 말로 인문학이 살아 있는 마을 아니겠는가. 비빌리힐스를 만든 사람들 몸에는 인문이 새겨져 있지 않겠는가. 고정된, 이미 새겨져서 어찌할 수 없는 무늬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면서 더 만들고 칠하고 고쳐가는 그런 무늬들.

 

이 무늬를 만들어 가는데 사람만큼 큰 역할을 하는 존재가 어디 있겠는가. 사람이 만들어가는 무늬. 그런 사람들과 사람들을 이어주는 존재가 바로 시를 비롯한 예술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예술은 자신의 내면으로만 침잠해 들어가서는 안 된다. 자신의 내면을 넘어서 밖으로 향해야 한다.

 

예술은 결코 자위 행위가 아니다. 자위를 넘어 서로를 위로해주고 즐겁게 해주는 행위여야 한다. 그런 시와 예술이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이고, 이런 예술을 통하여 우리는 인문적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예술비평만 하지 않는다. 예술과 사회, 사회와 사람이, 사람과 예술이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로 맞물려 있다. 이 맞물림을 통해 무늬가 만들어진다.

 

이런 무늬를 인식하고 함께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인문적 삶이다. 그런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바로 인문적 인간이다. 저자 고영직은 바로 그런 세상을 꿈꾼다. 아니 거창하게 세상이라고 할 것도 없다.

 

바로 자신이 살아가는 곳에서부터 시작하고, 자신이 만나는 사람부터 시작하는 것이니, 그가 꿈꾸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마을이다. 마을, 사람 무늬, 즉 인문적 인간들이 살아가는 장소인 것이다. 인문적 인간들이 살아가는 마을, 그 마을이 바로 '비빌리힐스'다.

 

고영직이 꿈꾸는 '비빌리힐스' 아직은 멀리 있다. 그러나 멀리 있다고만 해서는 안 된다. '비빌리힐스'는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지금-여기에 있는 우리들이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 지금-여기에서 만들어가야 함을 깨달은 인간, 그 인간이 바로 인문적 인간이고, 그런 깨우침을 시와 예술을 통해서 할 수 있다는 것, 해야만 한다는 것이 고영직의 주장이다.

 

다양한 글이 실려 있지만, 그 글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곳을 '비빌리힐스'로 만들자. 다른 누구가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 그래서 어디에도 없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지금-여기에 있는 '나우토피아'를 만들자는 것. 그런 일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고, 그런 사람이 인문적 인간이라고.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이다. 가끔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을 받으면 기분이 좋고, 고마운 마음이 든다.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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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인의 자장가 - 내 아버지 최인훈과 함께했던 날들
최윤경 지음, 이은규 그림 / 삼인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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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으로 믿음을 주는 작가가 있다. 이유도 없이 그 작가가 작품을 발표하면 꼭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게 하는 작가, 그 작가의 작품을 다 읽지도 못하고, 내용을 잘 이해도 하지 못하지만 그냥 마음에 들어하는 작가가 있다. 내게 그런 작가는 바로 최인훈이다.

 

젊은 시절 많은 사람들이 읽었던 "광장"보다도 "가면고"에 더 끌리기도 했고, "라울전"을 읽으며 종교적 깨달음과 이성적 사고에 대해서 생각하기도 했고, "총독의 소리"를 읽으며 우리는 일본을 완전히 극복했을까 하는 생각도, 또 "태풍"을 읽으며 일제시대가 조금 더 길어졌더라면 어쨌을까 하는 위기의식도, 그의 장편 "화두"를 읽으며 최인훈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했었다.

 

많은 작품들, 또 그에 관한 글들을 찾아 읽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읽을수록 새로운 것을 찾아내게 하는 작가였다. 작년에 세상을 떠서 이제 그의 새로운 작품은 읽을 수가 없겠구나 하는 아쉬움이 있었는데...

 

딸이 아빠인 최인훈에 관한 글을 썼다. 때로는 감정적으로 때로는 담담하게. 최인훈의 잘 알려지지 않았던 가정 생활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책이라서 최인훈에 대해 더 친근하게 다가가게 해주는 역할도 해주고 있다.

 

이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봤더니, 여전히 이 문구가 삭제되어 있지 않았다. 아마도 이 책이 많이 읽히면 이 책에 있는 내용이 추가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해본다.

 

최인훈은 생활이 거의 베일에 싸여 있는 사람, 평소에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들리지 않고, 예전에는 강의라도 나갔지만 정년퇴임 후 요즘은 그마저도 무소식이라고 《나무위키》에 적혀 있다. (272쪽)

 

《나무위키》에는 뒤에 몇 문장이 더 있다.

 

특히 최인훈의 가족같은 경우는 언론에 공개된 적이 아예 없다시피한 수준. 서울예대에서 봤을 때는 평범한 교수님 A같은 느낌이었다 카더라. 고. 그러니 이 책이 나온 지금에는 뒷 얘기에 이어 많은 것들이 덧붙여질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작가로서 최인훈은 작품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본 딸이 아버지에 대해서, 아버지와의 일을 쓴 것도 의미가 있다.

 

읽으면서 최인훈이라는 작가를 떠올리는 시간이 되기도 했고, 그의 작품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어쩌면 글과 삶이 일치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자식들 처지에서는 참 힘든 아버지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지만, 이 책에 나타난 아버지 최인훈의 모습은 딸에게 너무도 관심이 많은 아버지였다는 생각을 한다.

 

딸에게 거는 기대도 있었겠고... 자신이 쓴 소설을 가족들이 읽게 했다는 것, 함께 이야기를 했다는 것도 또 가족의 일에도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을 할 때도 있었다는 것 등등 최인훈의 알려지지 않은 모습을 알게 되어 좋았다. 

 

이 일화를 너무도 잘 드러낸 글이 이 책에 실려 있는 글 중에 '크리스마스 캐럴'(128-134쪽)이다. 마치 한 편의 짧은 소설같은 글이지만, 아버지 최인훈의 모습, 딸에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자기 소설을 통해서 하는 작가로서의 최인훈의 모습도 만나볼 수 있다.

 

  책의 끝부분에 손녀가 그린 최인훈의 초상화가 있다. 그만큼 그는 손녀에게는 한없는 사랑을 베풀었다고 하는데...

 

  손녀가 벌을 세우면 손 들고 벌 서면서도 한없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는 다정한 할아버지의 모습.

 

  자식들을 키울 때는 책임감이 있었거든. 야단도 쳐야 하고. 손녀들은 예뻐만 하면 되지. ... 할아버지는 그냥 예뻐만 하면 되니까. 얼마나 좋으냐. 최고지. (194쪽)

 

  이렇게 말하는 할아버지 최인훈. 그는 자신의 작품을 손녀들을 보듯이 하지 않고 아마도 자식들을 키우듯이 했을 것이다. 책임감이 있는. 그래서 자신의 작품이라도 야단을 쳐야 하는.

 

  "광장"을 여러 차례 개작을 한 이유도 아마 그러한 이유였으리라. 자신의 자식이었으니까. 자식이 잘 되기를 바랐으니까.

 

이렇게 최인훈은 작품이라는 많은 자식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제는 작품을 통해서 그를 만나야 한다. 그가 남긴 작품 속에서 삶을 만나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몫이다.

 

최인훈이 세상을 뜬 지 이제 한 해가 넘어간다. 우리는 최인훈 작품을 그가 손녀를 대하듯이 대하면 될 것 같다. 가까이 두고 읽고 또 읽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렇게 그가 만들어낸 소설 속 삶에서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할 것들을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딸이 본 아버지 최인훈, 잘 알려져 있지 않던 최인훈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소중한 책이다. 일본과 사이가 좋지 않은 요즘, 최인훈이 쓴 "총독의 소리"와 "주석의 소리"를 다시금 읽고 싶어진다. 이 책을 읽으니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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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모래바람 - 최경주 연작소설
최경주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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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에서 있었던 주바일 폭동사건(폭동사건이라고 하기보다는 노동자들의 항의 사건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을 듯하다)을 주요 사건으로, 김대위란 인물을 주요 인물로 삼아 전개하는 연작 소설이다.

 

'김대위, 조선소 소요, 거간꾼들, 여우 가죽, 어느 전기공 이야기, 사막의 모래바람, 떠나는 자와 남는 자'

 

이렇게 일곱 편의 소설이 묶여 있다. 소설을 읽으면 나이 든 김대위의 회상으로 시작하여, 다시 현실의 김대위로 끝난다.

 

각 편이 독립되어 있지만 전체적으로 읽으면 연결이 된다. 시간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기도 하고, 배경이 중동을 중심으로 되어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김대위라고 하여 지식인이 주인공일 것 같지만, 김대위는 서술자에 불과하다. 오히려 주인공들은 이름 없는 노동자들, 가혹한 노동 환경 속에서 일을 하는,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서 억압을 견뎌내야 했던 노동자들이다.

 

그들의 삶이 미화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비참하게 그려지지도 않고, 딱 그렇게 노동자들이 그렇게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형상화되어 있다.

 

사우디에 가서도 술을 만들어 먹고 - 아랍은 금주다 - 고된 노동이 끝난 뒤에 많지도 않은 월급을 가지고도 화투판을 벌이고, 들개도 잡아먹는 그런 모습들, 열악한 환경, 관리자들의 횡포 속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영위해 간다.

 

그런 삶들 속에서 더 견딜 수 없을 때 드디어 폭발하는 것이다. 이 폭발이 바로 주바일 폭동 사건이고, 이 사건으로 인해 강제추방되는 노동자들과 관리직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강제추방이라고 해도 노동자들은 귀국하자마자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가혹한 고문을 당하게 되지만, 관리자들은 보직 이동만 할 뿐이다. 결과까지도 이렇게 다를 수밖에 없는데... 소설에서 이 점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한때 중동신화를 들먹이고 대통령이 된 자가 있고, 대통령이 되고자 했던 자가 있다. 회장과 사장을 엮임했던 그들... 소설 속에서 돈에서만은 회장이 양보를 안 할 거라고 할 정도로 노동자들의 임금에, 그들의 처우 개선에, 노동 환경 개선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

 

그 회장에 그 사장이라고 젊은 나이에 사장이 되어 온갖 무리한 공사를 했던 사람... 그런 사람이 주인공이 아닌 소설이라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사람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각자 사연이 있지만, 이들은 아무리 가혹한 노동 환경이라도 인간적인 대우가 이루어진다면 관리직들을 적으로 돌리거나 폭동 같은 것을 일으키지 않는다.

 

인간 이하의 상황이었기에, 인간임을 알리는 소리를 내는 것 뿐이었다. 김대위가 베트남전에 참전했을 때, 베트남이 우리나라 경제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많은 노동자들이 와 있었는데, 그들에게도 노동조건은 가혹했다고 한다. 자신들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노동자들, 두번째 소설에 조선소가 나오는데 역시 노동자들의 항의가 나온다.

 

베트남 - 국내 - 중동으로 이어지는 장소의 바뀜. 그러나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은 어디서나 똑같다. 그래서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에서는 장소는 다르지만 모두 우리나라 노동자들이지만.

 

그런데... 이 항의는 소설이 전개되는 몇 년에 걸쳐 나오지만 노동조합이 있어야 해라는 말만 나오지, 노동조합을 만드는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1970년대.. 군인이 정권을 잡고 긴급조치라는 명목으로 반대하는 소리를 억압하고, 경제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던 그 엄혹한 시대에 노동조합은 멀고 먼 이야기였다.

 

1970년대를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자신의 몸을 불태우며 시작했는데, 그런 불태움이 70년대 내내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기껏 노동조합을 결성해도 곧바로 들어오는 탄압과 블랙리스트...

 

그러니 소설 속에서 일거리를 찾아 다니는 건설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이들은 그때 그때 상황 속에서 대표자를 뽑고, 이들의 협상으로 투쟁을 마무리한다. 그 마무리는 늘 자본측에, 권력측에 유리한 협상이 되었고, 대표자들은 처벌을 받고 현장에서 유리되고 마는 현상이 반복된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정당한 단체인 노동조합이 없는 상황이 얼마나 노동자들을 힘들게 하는지를 이 소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베트남이나 중동만이 아니었다. 국내에서도 노동조합은 제대로 결성되기 힘들었으며, 결성되었어도 온갖 탄압을 이겨내야만 했다.

 

이런 노동조합운동의 전사(前史)로 이 소설을 읽어도 된다. 힘들게 힘들게 자기들의 권리, 생존권을 지켜나갔던 노동자들이 있었음에 그나마 이정도 되는 노동 환경을 지니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하는데... 딱 여기까지다. 이런 말은 정규직들에게만 - 현재는 얼마 되지도 않는 정규직들에게만 - 해당하는 말이다.

 

비정규직들은 이 소설에 나오는 노동자들과 비슷한 환경에 처해 있다. 이들은 여전히 열악한 환경에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일을 하고 있다. 비정규직들에게 이 소설에 나오는 노동자들은 남들이 아닐 것이다. 바로 자신들의 이야기...

 

1970년대 일어났던 먼 과거, 지금은 웃으며 그땐 그랬지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지금도 끈질지게 계속되고 있는 노동 착취의 현장인 것이다. 그 모습을 소설 속에서 만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소설은 현재진행형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소설은 노동조합이 건설되어 환경이 많이 개선되어 있는 것으로 끝나지만...

 

'수백 수천 명이 작업하는 대규모 현장에는 건설노동조합에서 걸어놓은 현수막이 펄럭이고, 긴 스피커를 얹어놓은 노동조합 승합차가 현장을 누볐다.' (380-381쪽)

 

이 노동조합이 비정규직 노동조합으로, 그들의 권리까지 지켜줄 수 있을 때 더 이 소설이 빛을 발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아직도 우리 노동환경은 1970년대에서 벗어나지 못한 곳이 많음을 생각해야만 한다.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이다. 마음 아프게 읽었다. 노동자들의 현실이 이 소설에 나타난 주바일에서 얼마나 많이 벗어나 있는지 생각하면서... 여전히 공고한 자본의 위력을 생각하면서 읽었다. 고맙게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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