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말은 없지만 시가 쉽지는 않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는 시집이다.

 

  시집에 등장하는 존재들은 이 세상에서 탄압받고 있는 존재, 사라져 가고 있는 존재들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이름로 자연에, 또 다른 존재에 대해 가한 폭력이 이 시집에 너무도 잘 나와 있다.

 

  가령 40쪽에 있는 '바보들'이라는 시를 보면 인간에 의해 멸종된 동물들이 나열되고 있다. 그리고 그런 동물을 보호하기 위해 모피 반대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도.

 

  이렇게 이 시집에 등장하는 존재들은 힘이 없다. 힘이 없어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뿔을 빼앗긴 코뿔소들, 인간이 빨리 가기 위해 만들어내는 철도, 고속도로로 인해 살 곳을 잃어가는 동물들.

 

'도롱뇽 소송'이라는 시를 보면 절대로 도롱뇽은 소송에서 이길 수가 없다. 왜냐 힘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힘의 논리가 작동하는 현 시대를 이 시를 통해 비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시들로 보아 이 시집을 생태시집이라고 해도 좋겠다.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 모두가 공생하는 그런 세상을 꿈꾸는 시들.

 

세상 모든 존재들이 자신들이 살기 위해서는 다른 존재들의 생명을 앗아갈 수밖에 없지만, 적어도 그 종 자체가 멸종이 되지는 않도록 해야 하는데... 개체들의 생명과 달리 종으로서의 생명들은 유지되도록 해야 하는데...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생존에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까지 만들어내어 뭇생명들을 지구상에서 몰아내고 있는 것이, 개체의 생명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아예 종의 말살을 이뤄가고 있는 것이 이 시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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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디카詩 한국문학 명저총서
이상옥 지음 / 국학자료원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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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서 '디카시'로 검색해 본다. 과연 디카시가 하나의 장르로 자리매김했는가를 살피는 방법이다. 하나의 장르로 디카시가 자리잡았다면 검색했을 때 많은 책들이 있어야 한다.

 

'디카시'라고 치고 검색을 하니 제법 많은 시집들이 디카시집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다. 이젠 디카시는 시의 하위 장르로 자리를 잡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 디카시라는 장르가 자리를 잡게 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이 바로 이상옥이다.

 

처음으로 디카시라는 말을 썼고, 또 디카시에 관한 잡지들을 냈으며, 지방이나 서울에서 디카시 축제를 열기도 한 사람이니, 그의 작품을 시발로 해서 많은 디카시들이 창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디카시는 사진과 시가 화학적 작용을 해서 하나로 융합한 장르다. 시 따로 사진 따로 놀거나, 시나 사진 중 어느 하나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 시와 사진이 합쳐져 다른 존재로, 즉 디카시라는 존재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니 디카시는 새로운 존재가 된다. 이 책에서는 디카시에 대한 많은 논의를 모아놓았다. 이상옥 시인이 그동안 디카시에 들인 노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글들이다.

 

그 중 하나, 디카시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디카시는 시인의 상상력이 아닌, 자연이나 사물의 상상력, 즉 신의 상상력으로 시적 형상이 구축되어진, 아직 문자언어의 옷을 입지 않은 '날시(raw poem)'를 디지털카메라로 찍어서 그 형상을 문자로 재현할 때 완성되는 것이다. (52쪽)

 

자연이나 사물이 말을 걸어오고, 그것을 사진으로 찍어서 걸어온 말을 시로 표현하는 것, 이것이 바로 디카시다. 그러니 사진이 먼저 있고, 시가 나중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자연이나 사물에서 느끼는 감정을 사진과 시로 표현하는 것이다.

 

문자에 갇힌 시가 아니라 문자를 넘어선 시, 그것이 바로 디카시다. 무엇보다 스마트폰이 우리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로 자리잡은 지금 시대에는 디카시는 우리 삶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대상이 있다면 언제든지 사진을 찍을 수 있고, 그 말에 대해서 문자로 표현을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보내면 되니 말이다. 이것이 디카시가 지닌 장점이다. 그러니 디카시의 문자 표현은 짧다.

 

물론 길수도 있지만 짧게 표현했을 때 더 효과가 크다는 생각이 든다. 즉 사물이 내게 걸어오는 말의 울림을 짧을수록 더 잘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디카시의 운율은 시조의 운율을 닮아간다고 한다.

 

시조는 짧은 길이 속에 많은 것을 담고 있는데 (평시조가 3장 6구 45자 내외라고 하니, 짧다.) 디카시 역시 한 컷의 사진과 문자 표현 속에 많은 것을 담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디카시와 친해지면 주변을 잘 살피게 된다. 주변의 모든 것이 디카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디카시를 쓰는 사람은 자연이나 사물과 사람의 매개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 디카시가 정립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시가 너무 난해해지는 이때 우리 삶 속으로 시를 데려올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디카시를 쓰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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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3 09: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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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3 10: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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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의 인문학 - 가장 철학적이고 예술적이고 혁명적인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정아 옮김 / 반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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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로 마음 먹는다. 마음은 먹지만 밖으로 나가기는 쉽지 않다. 자꾸 망설여진다. 걷기에 적당한 장소를 고르기가 쉽지 않다. 마음은 늘 걷고 싶지만 실제 몸은 집 안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또 걷기를 시작하면 처음에는 힘들다. 계속 걸어야 할까 망설이기도 하고, 도대체 왜 걷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때 멈추면 걷기는 중단되고 만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걷기의 인문학이라고 제목을 붙였지만, 처음 부분은 우리가 걷기를 시작하는 것만큼 편하지가 않다. 솔닛 자신이 걷는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내용이 명확히 들어오지 않는다. 아직 걷기 초반인 것이다.

 

참고 계속 읽기 시작한다. 읽기와 걷기는 이래서 비슷하다. 시작하기도 힘들지만, 시작하고도 처음은 더 힘들다. 이때를 이겨내지 못하면 도중에 멈추고 만다. 이 책은 읽어가면서 재미가 붙는다. 마치 걸으면서 점점 주변이 눈에 들어오고 재미가 있는 것처럼.

 

2부와 3부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걸을 때 어느 지점부터 즐거워지기 시작한다. 걷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고, 이 책도 2부와 3부에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정원에 머무르는, 있는 사람들만의 걷기에서 정원 밖으로 나가는 걷기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유명한 시인인 워즈워스 남매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들이 걸은 거리가 만만치 않음도 놀랍지만, 당시 걷기는 정원 내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기에, 정원 밖으로 걷는 것을 당연하게 만든 이들의 걷기는 놀라운 걸음이라고 한다. 특히 동생인 도로시의 경우 여자들에게 주어지는 제약을 넘어섰다는 점에서 더 놀랍고.

 

정원 밖으로 나온 걷기는 이제 산으로 향한다. 등산 문학이 등장하고 보행을 위한 모임과 통행을 위한 투쟁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3부로 가면 근대의 걷기가 나온다. 도시를 걷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이 도시에서 이제는 걷기가 정치적 행위가 됨을 보여주고 있다. 행진, 시위... 우리는 이 걷기를 너무도 많이 경험하지 않았는가.

 

함께 모여 걷는 행위. 그것을 많이도 한 시민들이 바로 우리나라 시민들 아닌가. 그냥 걷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삼보일배를 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극한의 걷기를 통해서 자신들의 의사를 강하게 표현하는 행위. 사회를 바꾸는 노력의 한 방편으로 걷기를 택하기도 했으니.

 

여기에 엄청난 거리를 걸은 사람들 이야기도 나온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국토순례라고 하여 우리나라 남단에서 휴전선까지 걸은 사람들이 있으니... 걷기는 여러 이유로 실행이 되고 또 사람들에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렇게 걷기는 개인의 행위에서 사회적 행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할수록 걷기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기차, 자동차, 비행기의 등장으로 우리는 걷기보다는 이런 기계들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빠르게 이동해주는 수단들이 나오면서 걷는 행위가 줄어들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걷는 행위가 실내에서 실외로 바뀌고 있다.

 

처음에는 헬스장이나 집안에 자전거나 러닝머신을 이용해 걷기를 대신하던 모습에서 도심에도 걷는 공간을 마련해서 걷는 행위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

 

대도시, 환락의 도시로 유명한 라스베이거스가 이 책의 대미인 4부를 장식하는 것도 이 점을 대변해준다고 할 수 있다. 자동차로만 접근이 가능할 것 같은 이 환락의 도시가 너무도 많은 자동차들로 인해 도로가 주차장이 되니 도심 한복판에 걸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는 것. 그래서 걷는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것.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지금 새롭게 조성한다고 논란이 되고 있지만 광화문 광장이 조성되어 그나마 사람들이 걷는 장소가 조금 생기지 않았던가. 또 차없는 거리를 시행하는 도로들도 있어서 점차 사람들을 걷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 각 지방자치단체들마다 걷는길을 만들어 사람들로 하여금 걷게 하고 있지 않은가. 제주도 올레길을 필두로 하여 술마다 치유의 숲길이 만들어지고, 가장 붐비는 서울에도 둘레길과 성곽길을 만들어 걷게 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듯 걷기는 사라질 것 같았지만, 사람들이 직립보행을 한 이후로 걷기는 사라질 수 없음을, 또 두 발로 걷는 장소를 마련함으로써 사람들이 교류할 수 있게 해 사회적 동물임을 인식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리베카 솔닛은 이 책 [걷기의 인문학]을 통해 걷기에 대하여 총체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처음에는 조금 헤매면서 읽게 되지만 점차 읽기에 속도가 붙고 재미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걷기를 생각할 수 있게 한다.

 

자연 속 걷기도 좋지만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장소에서 걷는 행위를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함을 생각한다. 직장인들이 출퇴근하거나 학생들이 등하교할 때 또 약속 장소레에 갈 때, 과연 걸을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어 있는지, 여가를 내서 걷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생활에서 걸을 수 있게 생활을 재편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걷기의 인문학은 단지 걷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 삶에 대한 이야기,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다. 삶과 사회의 변화에 따라 걷기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음을 이 책을 통해서 잘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니 결국 이 책은 우리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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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2 15: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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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2 15: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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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혁명 - 약과 병원에 의존하던 건강 주권을 회복하라
조한경 지음 / 에디터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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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가장 쉬운 문제인지도 모른다. 우리 건강에 관한 것은... 그냥 잘 먹고, 잘 자고, 운동 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아니, 여기에 한 가지 더 스트레스 덜 받으면 된다. 가능하면 아예 안 받으면 좋지만, 그것은 불가능할 것 같고.

 

너무도 단순하고 자명한 일인데, 건강을 지키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너무 쉽기 때문에 너무 어렵다는 역설이 성립된다.

 

너무 쉽기 때문에 그것이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시험 볼 때를 생각해 보자. 문제가 너무 쉬우면 이건 아닐 것 같은데 갸우뚱 하면서 맞는 답에 의혹을 갖고 다시 풀거나 다른 답을 고를 때가 많지 않았는가.

 

여기에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이 한 마디 더하면 그냥 넘어간다. 전문가에다가 주변에서 모두들 이것이 옳다고, 그것도 언론에서 그렇다고 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쪽에 가담한다. 병도 그렇다. 병은 건강하지 않은 상태다. 우리가 건강을 유지한다면 굳이 병원에 갈 이유가 없다.

 

그런데 병원에 가도 건강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병원에서 병을 치료하는 것이 환상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도 병원에 가겠는가? 그래도 간다. 왜냐하면 병에 대해서 자신은 모르고 의사가 잘 알고, 알아서 치료해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신화들이 합쳐진 결과라고 하는데... 현대의학을 지배하는 것은 제약회사라는 이 책의 주장은 그럴 것이다라는 심증에 물증을 더해주고 있다. 제약회사들이 자신들의 약을 팔기 위해 어떻게 로비를 하는지, 그 약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증상을 완화할 뿐이라는 것.

 

이것의 최종판이 바로 백신이다. 마치 백신 접종을 안 하면 인류에게 감염병을 전파시키는 인류의 적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도 바로 제약회사의 로비를 받은 언론과 정치집단들이다. 이들만이면 그래도 그들이야 뭐, 본래 그런 집단이니 하고 넘어가겠지만, 의사협회라든지, 세계보건기구 같은 경우도 제약회사들의 홍보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하니, 참으로 참담하다.

 

자신의 건강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버린 꼴이다. 내 몸을 다른 사람들이 결정하게끔 하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는, 그것도 많은 돈을 써버리면서 지내는 그런 상태가 바로 현대의학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저자인 조한경은 아주 단순하다고 말한다. 우리 건강을 지키는 길은.

그것은 풍부한 영양 섭취, 즉 가공식품을 멀리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온갖 제초체로 길러진 채소를 먹는 것이 아니라 유기농 식품들을 먹어야 하고, 탄산음료와 같은 것들은 멀리해야 건강을 지킬 수 있다고 한다,

 

생협이나 한살림 등 유기농 식품을 찾는 사람들이 유별난 것이 아니라 당연하다는 것이다. 또 병원에 가지 않고 자연치유를 하려는 사람을 뭘 모르는 사람, 용감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병원에 가기보다는 자신의 생활습관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고치려고 하는 것이 병을 근원적으로 고치는 것이라고 한다.

 

영양과 더불어 중요한 것이 우리 몸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우리 몸을 어느 한 부분으로 조각내 증상만을 치료해서는 절대로 건강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우리 몸이 모두 연결되어 있으므로 어느 한 부분에 병이 들었다는 것은 전체적으로 자신의 몸을 돌아볼 기회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외부의 침입보다는 내부 환경을 중시하는 관점이다.

 

또한 잘 자야 한다. 잠을 포기하는 사람이 많은데 잠은 건강에 필수요소다. 잘 잔 잠은 보약보다도 좋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 청소년들이 제대로 잠을 못 자고 학업에 시달리고 있는 현실은 이들의 몸을 우리가 혹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지금 청소년들의 몸이 어떻게 무너져 내릴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예측할 수 있다. 이렇게 지금처럼 청소년들이 잠을 잘 못자고 성장한다면 그들 몸에 다양한 이상 증세들이 나타날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내버려두는 것, 우리 어른들의 미필적 고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말 안 해도 건강에 필수인 요소가 스트레스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고 하지 않던가. 엄청난 스트레는 몸의 균형을 깨뜨린다. 그러므로 충분한 수면, 명상, 복식 호흡 등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이것이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길이다.

 

이런 이야기에 이어 현대에 많이 발병하는 병들을 지금 의료계에서는 어떻게 치료하고 있고, 그것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 그것들을 우리 생활습관으로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저자는 우리에게 건강을 지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인 증상을 들어서 설명해주고 있다. 그렇게 설명한 다음 이렇게 말한다. 읽은 것에 책임을 지라는 것.

 

지금까지 건강하지 못했다면 당신의 책임이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는 독자 여러분들의 책임이다. (342쪽)

 

당연하다. 내 몸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 예전에 한의사였던 김홍경이 쓴 책도 제목이 [내 몸은 내가 고친다]였다. 이렇듯 당연한 일을 의사에게 맡겨버리고 나 몰라라 했으니, 이 책을 읽은 다음 건강은 내 책임이다.

 

옆에 두고 찬찬히 읽으며 내 생활습관을 들여다보아야 할 필요를 느끼게 한 책이다. 우리 모두 건강한 사회를 위해서 내가 내 몸에 책임을 지는 그런 생활을 해야 함을 깨닫게 한 책이기도 하다. 적어도 의료산업에 완전히 내 몸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하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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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솔아 시집을 읽으며 이상하게 '이상'이 떠올랐다. 이상이 쓴 '오감도' 무슨 내용인지 해석하기가 힘들고, 괴기스러운, 그러나 근대를 맞이한 인간들이 느끼는 불안을 잘 표현했다고(누군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오감도, 앞이 보이지 않는 불확실한 시대의 두려움이라고) 하는데, 읽는 사람 입장에서야 어디 이것을 시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당시 사람들이 이상에게 반발한 이유도 알 것 같다. 그들에게 이상의 시는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는 시에 불과한, 한마디로 정신이상자의 넋두리였을 테니까.

 

  그런데 이런 이상의 작품과 비슷한 작품들이 최근 시인들에 의해서 많이 창작되고 있다. '난해시, 전위시'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우리 곁으로 다가오려고 했는데, 이상의 시가 근대를 이해하는 열쇠 역할을 하려고 했다면, 현대 시인들의 시는 인공지능 시대, 인간의 삶이 더욱 불확실 시대를 여는 열쇠 역할을 하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한다.

 

열쇠는 있는데, 마치 수많은 자물쇠를 가져다 놓고 열쇠에 맞는 자물쇠를 찾아봐 하는 식이란 생각이 들어서 씁쓸하기만 하지만.

 

한 번에 열 수 있는 자물쇠를 찾는 사람을 천재라고 해야 하나? 백 개의 자물쇠를 주고, 열쇠는 단 하나, 열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 능력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한 번에 아니 서너 번에 연 사람을 실력보다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운칠기삼이라더니, 시를 읽는데 이런 말이 통용이 된다면 문제가 있지 않나.

 

열쇠라는 말이 생각난 이유는 시집에 있는 '시인의 말'때문이다.

 

언니가 열쇠라는 것만 알았지./방 열쇠를 나눠 가지면 된다는 걸 나는 몰랐어. //내 방에선 끔찍한 다툼들이 얽혀/겨우겨우 박자를 만들어내.//언니는 말했지. 이런 세계는 풀 수 없는 암호 같고,/그런 건 낙서만큼의 가치도 없다고.//그건 얼마나 옳은 생각인지.//언니와 나 사이에 사는 사람들과/열쇠를 나누어 가지면 좋을 텐데.//2017년 3월 / 솔아가

 

열쇠를 나누어 갖기 위해서 시인은 시를 쓴다. 시인에게 시는 방을 여는 열쇠일 수 있다. 그 열쇠를 다른 사람과 나누어 갖고 싶다고 하는데, 시인이 나누어 준 열쇠가 열쇠인지 모르고 있다면 그 무슨 소용이랴.

 

하지만 시인이 나누어준 열쇠는 문을 여는 열쇠가 아니라, 즉 만능열쇠가 아니라 이 세상이 어떻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인식의 열쇠일 테니... 세상은 암흑으로 가득 차 있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확실성의 세계이며, 그 세계 속에서 우리는 길을 잃고 헤맬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 열쇠는 우리 스스로가 찾아야 한다는 것을 시인이 말해주고 있는 것 아닐까? 두 시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아홉 살

 

  도시를 만드는

  게임을 하고는 했다. 나무를 심고 호수를 만들고 빌딩을 세우고 도로를

 

  확장했다. 나의 시민들은

  성실했다. 지루해지면

 

  아이 하나를 집어 호수에

  빠뜨렸다. 살려주세요

 

  외치는 아이가 얼마나 버티는지

  구경했다. 살아 나온 아이를 간혹은

 

  살려주었고

  다시 집어 간혹은 물에 빠뜨렸다. 아이를

  아무리 죽여도 도시는 조용했다.

  나는 빌딩에 불을

 

  놓았다.

  허리케인을 만들고 전염병을 퍼뜨리고 UFO를 소환해서 정갈한 도로들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선량한 시민들은 머리에 불이 붙은 채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녔다. 내 도시 바깥으로 도망쳤다. 나는 도시를 벽으로

  둘러쌌다. 그러나 모든 것을

 

  태우지는 않았다.

  나의 시민들이 다시 도시를 세울 수 있을 정도로만 나는 도시를

  망가뜨렸다. 더 놀고 싶었기 때문에. 더 오래 게임을 하고 싶었으니까. 나는 나의

 

  시민들에게 미안하지

  않다. 아무래도

 

  미안하지가 않다.

  약간의 사고와 불행은 나의 시민들을 더 성실하게 했다.

 

임솔아, 괴괴한 날씨와 착은 사람들. 문학과지성사. 2017년. 41-43쪽.

 

아이들 장난을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이 세상.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세상이 아무리 불확실하고 어두워도 사람들은 성실하게 살아간다. 그것이 세상을 지금까지 버티게 하는 힘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이 이렇게 된 것이 마치 아홉 살짜리의 게임과 같다면,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 세상은 겨우 아홉 살이 만든 세상에 불과하므로.

 

그럼에도 세상은 예측할 수가 없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아니, 내가 말하는 순간 세상은 내 말로 인해 또 변하고, 내가 행동하는 순간 내 행동으로 인해 또 변한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와 같은 세상. 도무지 확정할 수 없는 세상인 것이다.

 

예보

 

나는 날씨를 말하는 사람 같다.

 

봄이 오면 봄이 왔다고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전한다.

 

이곳과 그곳의 날씨는 대체로 같고 대체로 다르다. 그래서 날씨를 전한다.

 

날씨를 전하는 동안에도 날씨는 어딘가로 가고 있다.

 

날씨 이야기가 도착하는 동안에도 내게 새로운 날씨가 도착한다.

 

이곳은 얼마나 많은 날씨들이 살까.

 

뙤약볕이 떨어지는 운동장과 새까맣게 우거진 삼나무 숲과

 

가장자리부터 얼어가는 저수지와 빈 유모차에 의지해 걷는 노인과

 

종종 착한 사람 같다는 말을 듣는다.

 

못된 사람이라는 말과 대체로 같고 대체로 다르다.

 

나의 선의는 같은 말만 반복한다. 미래 시제로 점철된 예보처럼 되풀이해서 말한다.

 

선의는 잘 차려입고 기꺼이 걱정하고 기꺼이 경고한다. 미소를 머금고 나를 감금한다.

 

창문을 연다. 안에 고인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을 창밖으로 민다.

 

오늘 날씨 좋다.

 

임솔아.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문학과지성사. 2017년. 16-17쪽.

  

이런 예보처럼 도대체 확실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간다. 불확실하기 때문에 서로를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내 예보가 이것일 수도 저것일 수도 있는 늘 미래 시제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미래 시제는 결국 추측 아니던가. 그러니 내가 착한 사람이라는 말은 못된 사람이라는 말의 다른 면일 수 있는 것이다.

 

착하다는 말을 하는 순간 이미 못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래서 완전히 착하지도 않고 완전히 못되지도 않은 그렇게 섞여 있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 유폐되어 살아갈 수는 없다. 밖으로 나가야 한다. 밖으로 나가 서로 어울려야 한다. 그런 어울림이 일어날 때 '오늘 날씨 좋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불확실한 세상,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은 없다. 우리는 그냥 서로 부딪치면서 살아갈 뿐이다. 그렇게 부딪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착한 사람들이다. 이 시는 불확실한 세상에서도 우리는 밖으로 나가 살아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열쇠를 주고 싶다고 했는데, 나는 시인이 주고 있는 것이 열쇠인지도 모르고 있는 상태다. 아니 열쇠임을 알아도 맞는 자물쇠를, 열 수 있는 문을 못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 이 열쇠가 무슨 소용이람. 시인의 말에서처럼 '낙서만큼의 가치도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참, 어려운 시다. 난해하다. 시인은 열쇠를 주고자 하나, 나는 열쇠를 받아도 쓰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지금 우리 세상은 정말로 북확실하다. 불확정성의 세계다. 우리는 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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