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우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8
샤를 보들레르 지음, 윤영애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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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산문시'라고 한다. 우리가 시라고 하면 대체로 운문이라고 하고 짧은 시를 떠올리는데, 산문시는 행과 연이 구분이 없는 좀 긴 시를 떠올린다. 여기에 서사기라고 하면 사건이 있는 소설과 비슷한 시라고 생각하고. 그런데 여기에 '소'자가 붙으면 작은 산문시, 또는 짧은 산문시라는 뜻이 될텐데... 그런 시 장르가 무엇인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이야기시' 또는 '담시' 아니면 '단편서사시'라는 개념이 있었다. 시에 이야기가 들어 있는 것이고, 그런 시를 통해서 소설에서 느꼈던 삶들을 시에서도 찾고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시들과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읽어보면 짧은 산문시도 있지만, 4쪽 정도에 걸치는 산문시도 있는데, 그것도 짧다고 해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시인이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을 형식으로 선택한 것이니, '소산문시'란 개념도 통할 수 있다고 인정하고 읽는다.

 

어떤 형식을 택하든 시인이 자신의 감정을 언어에 실어 표현하고 있는 것이 '시'고, 다른 글에 비하면 짧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보들레르의 시도 마찬가지다. 파리의 우울. 근대화된 도시 파리에서 시인이 느끼는 감정을 표현한 시다. 총 50편의 시가 모자이크 식으로 나열되어 있는데, 아르센 우세에게라는 프롤로그 격인 글이 있고, 마지막에는 에필로그가 있다.

 

시작과 끝 속에서 시들이 50편, 각자 제목을 달고 배치되어 있는데, 시인의 생각과 시인이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밝은 분위기와 어두운 분위기, 칭찬과 비난, 화려함과 비속함이 교묘하게 대비를 이루고 있는 시들이 많은데... 이 책은 시 한 편 한 편마다 주석을 달아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보들레르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고, 자연스레 보들레르의 다른 작품들도 만나게 된다.

 

군중 속에서도 개인을 발견하는 존재.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는 존재. 자연스러움에 맞서 싸울 줄 아는 존재. 그래서 시인은 발전하는 도시 파리에서 우아하고 화려한 사람들을 보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소외된 사람들을 보게 되고, 자신과 소통할 수 없는 사람들에 절망하기도 한다.

 

이런 시인의 모습을 드러내는 구절들이 몇 있는데...

 

당신도 깨지는 듯한 유리 장수의 소리를 샹송으로 번역해 보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 않았소? 이 소리가 거리의 가장 높은 안개를 가로질러 다락방까지 보내는 모든 서글픈 암시들을 서정적 산문으로 표현해 보고 싶은 유혹을 말이오. (18쪽)

 

무자비한 마술사. 늘 이기는 자신만만한 라이벌, 자연이여, 나를 놓아주오! 나의 갈망과 나의 자부심을 시험하는 일을 그쳐주오! 아름다움의 탐구는 일종의 결투, 예술가는 두려움으로 비명을 지르며 패하고 마는. (31쪽)

 

시인은 거의 초자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영혼의 예외적 순간, 자연의 모든 사물로부터 '사물의 말 없는 언어'를 들을 수 있다. (주석에서. 42쪽)

 

시인은 제멋대로 자기 자신일 수도 있고, 동시에 타인이 될 수도 있는 비길 데 없이 훌륭한 특권을 누린다. 육체를 찾아 방황하는 넋처럼 그는 자신이 원할 때 다른 사람 속에 들어간다. 그에게만은 모든 것이 비어 있는 것과 같다. (75쪽)

 

인간이 악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약간의 가치가 있다. 가장 돌이킬 수 없는 악덕이란 어리석음에서 악을 저지르는 것이다. (174쪽)

 

열린 창문을 통해 밖에서 들여다보는 사람은 결코 닫힌 창문을 바라보는 사람이 발견하는 것만큼 많은 것을 보지 못한다. 촛불로 밝혀진 창문보다 더 깊고, 더 신비하고, 더 풍요하며, 더 어둡고, 동시에 더 눈부신 것은 없다. (214쪽)

 

이렇게 '파리의 우울'을 읽으며 보들레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됐다. 사실 보들레르의 작품은 읽어 본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의 이름은 많이 들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를 퇴폐, 세기말과 연결지어 생각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작품을 직접 읽어보니 그를 퇴폐와 세기말과 연결시키기보다는 세상을 좀더 깊이 있게 보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눈을 지닌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열린 창문을 통해서 세상을 본 것이 아니라 닫힌 창문을 통해서 본 것이리라. 또한 한낮의 뜨겁고 밝고 강한 태양 아래서 세상을 본 것이 아니라 어둡고 은은한 달빛을 통해 세상을 본 것이리라. 그렇게 느껴졌다.

 

그러므로 그의 시에서는 세상의 밝은 면을 이야기하더라도 꼭 어두운 면이 함께 나온다. 그런 존재들에 대한 애정이 시에서 묻어난다. 이렇게 세상은 어느 하나로 구성되어 있지 않고 밝음 속에 가려진 어둠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듯이.

 

이 '파리의 우울'을 읽어 보니 '악의 꽃'을 읽고 싶어졌다. 두 작품이면 보들레르를 만났다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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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의 시 - 그때 꿈꾸던 어른이 되었나요
김승일 외 지음 / 돌베개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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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꿈꾸던 어른이 되었나요'라는 작은 제목을 달고 있다. 큰제목은 물론 '교실의 시'이고. 교실과 시. 교실이라기보다는 학교라고 하는 편이 범위가 더 넓겠다. 사실 학교라고 하면 교실과 다른 장소 또 사람들까지 다양한 범주의 존재들을 아우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꿈꾸던'이란 말을 통해 교실에서 미래를 꿈꾸던 시절을 회상하게 만든다. 회상 또는 추억이 대체로 아름다움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게 되는데, 이상하게도 아름다운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 바로 교실이다.

 

어쩌면 군대를 갔다온 남자들이 군대를 떠올리기 싫어하는 것과 같이 대다수의 사람들은 중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기 싫어한다. 떠올리더라도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고통, 짜증, 어쩔 수 없음을 함께 떠올린다. 교육의 이념과 학교의 현실이 이렇게 극명하게 반대를 이루고 있기도 힘들텐데 말이다.

 

그만큼 학교는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장소이면서도 탈출하고자 하는 장소였던 것이다. 그런 학교를 대상으로 시인들이 쓴 시와 그 시에 어울리는 글들을 엮어 놓았다. 산문을 읽다보면 그 시가 어떻게 쓰였는지, 어떤 의도로 썼는지를 시인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시인의 말을 그대로 따라갈 필요는 없다. 시인 역시 그것을 바라지도 않을 것이고. 그럼에도 시를 다양한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책 뒤 발문에도 나오지만 산문이 시를 더 다양하게 읽을 수 있게 해주지만 시에 속해 있는 것은 아니다.

 

시와 산문이 각자 존재하면서 또 함께 어울리고 있다. 그래서 시를 읽는 맛도, 산문을 읽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여기에 시인들이 겪었던 학교가 참 이렇게도 긍정적이지 않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민감한 사람들에게 학교란 공간은 얼마나 무미건조한 공간인지 시인들이 쓴 산문을 통해 다시 느낄 수 있다.

 

이 중에 오은이 쓴 '척 보면 척'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 글에서 오은의 시와 산문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학교가 정말로 '척'하는 자세를 몸에 배게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

 

남에게 자신을 보여주기를 강요하는 장소가 바로 학교 아니던가. 나를 찾아가는 과정보다는 남들이 내게 기대하는 나를 보여주는 과정이 더 많았던 학교 아닌가. 그 대표적인 공간이 교실이고. 그렇게 자신보다는 남 시선을 의식하게 만드는 공간에서 대다수의 사람이 12년을 보냈다는 사실.

 

'척'하다 보면 '다움'이 형성된다고 하는 말. 그렇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그렇게 끝까지 척만 하는 모습으로 굳어진 사람들도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그래, 학교는 적어도 '척'을 기대해서는 안 되지. '척'에 넘어가서도 안 되지. 정말로 '척'하다가 '다움'으로 굳어지면, 그렇게 성장하면 좋겠지만, 끝까지 '척'으로만 남으면, 정말로 그때 꿈꾸던 것들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냥 인생이라는 길에서 뱅글뱅글 돌고만 있는 것은 아닐까.  천천히 읽어보자. 청소년들이 읽기보다는 이미 그 과정을 거쳐서 그때를 돌아볼 수 있는 나이에 이른 사람들, 읽으면서 학창시절의 자신을 다시 불러낼 수 있다면 '그때의 자기'에서 '지금의 자기'를 더 잘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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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재(遍在)' 라는 말이 생각났다. 두러 퍼져 있음. 아니 도처에 있음. 없는 곳이 없음이라고 생각되는 말.

 

  없는 곳이 없다. 어디에나 있다. 부정하고 싶은데 부정할 수 없는 존재. 그것이 바로 독재자다.

 

  독재자!

  결코 좋은 감정으로 부르는 말이 아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담고, 어느 정도는 두려움도 담고, 빨리 사라지기를 바라면서 부르는 말이다.

 

  그런데, 독재자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편재하기 때문이다. 도처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독재자를 정치에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니다. 독재자는 우리 삶 모든 분야에 널려 있다.

 

2015 현대문학상 수상시집을 읽다가 문정희 시인의 독재자에 대하여를 읽고 내게도 독재자가 있음을 생각하게 됐다.

 

나는 부정하고 싶은데, 그럼에도 나는 독재자다. 그것을 인정해야 했다. 문정희 시인의 시 중에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는 시 구절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전쟁보다 더욱 정교하게 여성을 파괴시킨다는 / 결혼 외에는 어디에도 갈 데가 없었지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2015 현대문학 수상시집 146쪽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사하는 독재. 결혼에도 이런 독재자가 있는데, 문정희 시인의 '독재자에 대하여'를 읽다 보면 정치에서 가정으로, 가정에서 자신으로 점차 범위가 좁혀지지만, 어디에나 존재하는 그런 독재자를 깨달아가는 과정이 시에 나타나 있다.

 

  독재자에 대하여

 

말벌처럼 허리 부러진 페닌술라!

이 반도의 아래쪽이 나의 고향입니다

독재자들이 철따라 출몰한 땅! 초등학교 때는

수업을 전폐하고 대통령 할아버지라는 글을 쓰기도 했어요

탱크를 밀고 나온 군인들이 새로 길을 만들고

선거를 악용하며 버티는 사이

나의 젊음은 최루탄 속에 시들어갔어요

북쪽에는 더 미친 독재자가 있다고 겁주던

노회한 독재들이었어요

문학을 했지만 문자옥(文字獄)이 두려워

무사하게 사는 법부터 터득했습니다

인간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서둘러 결혼 속으로 도망쳤지만

결혼 속에도 독재자는 있었어요

그는 더욱 난해한 모습으로 삶을 애무하며

지배와 행복의 명분을 세워나갔어요

혼자 때리고 혼자 깨어지는 무정란 같은 언어를 들고

비겁하게 침묵을 지키다가 가끔 모호한 시를 썼어요

속도와 물신 앞에 무릎 꿇지 않으려고 버둥거렸지만

시간의 검푸른 이끼 속으로 빨려 들어갔어요

이윽고 내 안의 늙은 독재자가 나를 덮쳤어요

 

문자옥(文字獄) : 지식인의 글을 꼬투리 잡아 탄압하는 것.

 

2015 현대문학상 수상시집(굴 소년의 노래). 2014년. 문정희, 독재자에 대하여. 147-148쪽.

 

괴물과 싸우는 자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니체의 말을 인용할 것도 없이, 독재자의 나라에서 자란 사람들이 자연스레 가정에서도 독재를 체험하게 되고, 그것이 어느 순간 자신에게서도 독재자의 모습이 나타남을 인식하게 하는 시.

 

나이듦은 독재자에게서 멀어질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함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나이듦이 독재자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만의 성채에 갇혀, 나 아니면 안돼라는 생각을 지니게 되는 순간, 그는 독재자가 된다. 어느 분야에서든.

 

시인은 우리가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독재자를 제시하고, 그런 독재자가 실은 우리들 가정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을, 가정에서만이 아니라 개개인들 속에도 독재자가 있음을, 그래서 그런 독재자가 자신을 덮치지 않도록 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결국 독재자란 닫힌 존재 아닌가. 나라를, 가정을, 나를 가두어 두려고 하는 순간 독재자는 나타난다. 그러니 열린 존재가 되어야 한다. 열린 존재란 바로 자신과 다른 존재 사이에 연결할 수 있는 문을 지니고 있는 존재다.

 

담이 아닌 문을 지닌 존재. 나에게 그런 문(門)이 있는지 이 봄에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고 있는 이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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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당신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삶을 위한 일곱 개의 주석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울리히 베어 엮음, 이강진 옮김 / 에디투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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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작가도 마음에 들었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얼마나 친숙한 이름인지, 윤동주의 '별헤는 밤'에 나오는 그 이름을 보고 그냥 친근하게 다가와 버린 시인. 또 소설가.

 

이 책은 그가 쓴 여러 글에서 삶에 관한 글을 발췌해 놓은 책이다. 경구들의 모음이라고 해도 좋은데, 모든 글들이 곱씹을 만하지만, 그래도 다섯 편의 문장을 골랐다.

 

그 글을 통해서 내 삶을, 거창하게 삶이라고 하지 말고 그냥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해 본다.

 

무언가를 창작한다는 것은 곧 무언가를 잉태하는 경험이며, 따라서 창작을 수행하는 자의 내밀한 경험이란 여성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42쪽)

 

여성적이라는 말. 생물학적인 여성이 아니다. 포용하는, 생산하는 존재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런 존재는 다른 존재들에 무심할 수가 없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가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여성성이 앞으로 우리가 지녀야 할 태도이기도 하다.

 

창작하는 사람. 다른 존재들을 무심히 넘기지 못하는 사람이다. 민감성, 예민한 심성을 지닌 사람. 사랑이 충만한 사람, 그런 사람이 창작하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런 여성성을 우리 태도로 삼아야 한다.

 

사회에서 대다수의 사람이 이런 여성성을 지니고 있다면 삶이 조금더 부드러워지고 따뜻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런 사람들은 군림하려 하지 않을 테다. 군림하지 않을 테니 자연스럽게 남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 속에서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남에게 알리려 할 필요가 없다.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각인시키고자 하는 사람, 그 사람을 남성성이 강한 태도를 지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성성의 반대에 있는.

 

당신이 사람들 사이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다른 이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시간과 의지를 허비하시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누가 거기에 응하여 당신의 위치를 인정해 줄 수 있겠습니까? (53쪽)

 

그렇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 된다. 사람들 사이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사람은 남과 갈등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바로 경쟁의 논리, 승자의 논리다. 이러한 승자독식, 경쟁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한 강박은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가 지닌 문제가 이것 아닐까? 그러나 승자독식, 경쟁 사회라고 해서 좌절에만 빠져 있어서는 안 된다.

 

심연 속에 도사리고 있는 경악스러운 것들 역시, 사실은 우리의 도움을 갈구하고 있는 가련한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94쪽)

 

우리를 경악하게 하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그러한 것들을 극복해 냈을 때 우리 삶이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다. 그렇다. 우리 사회를 승자독식, 경쟁 사회에 경악할 수 있어야 한다. 경악해야지만 그것에대응할 수가 있다. 그리고 경악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이런 사회의 모습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얘기다. 바로 우리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학교다. 따라서 학교에서는 이런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학교가 제공해야 할 모든 앎은, 진심을 담은 것인 동시에 위대한 것이어야만 할 것입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에는 숨겨진 것이나 제약이 있어서는 안 되며, 아무런 의도도 가지지 않은, 감수성이 풍부한 교사에 의해 수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곳에서 다루어지는 모든 과목들은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삶 자체를 다루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85-86쪽)

 

그런데 우리는 교육에서 삶 자체를 다루고 있는가? 아니다. 아니기 때문에 승자독식, 경쟁사회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를 경악하게 하는 이 현실을 바로 보아야 한다. 우리가 학교를 통해서 얼마나 아이들에게 부당함을 행사하고 있는지를.

 

지금 코로나19로 인해 개학 연기를 하고 온라인 개학을 한 것을 생각해 보라. 이런 사상 초유의 사태에 많은 사람들은 오로지 아이들 학업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를 고민한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살아갈 세상이다. 공부도 좋지만 왜 이런 감염병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지, 이것들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학교가 할 일이다. 단지 지식 전수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우리나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죽하면 스웨덴 청소년인 그레타 툰베리가 학교에 가지 않고 행동에 나섰겠는가. 행동하는 것이 학교에 가서 앉아 있는 것보다 더 필요하다고 느낀 툰베리.

 

좋든 나쁘든 간에, 부모들뿐만 아니라 학교 역시도 아이들에게 부당함을 행사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자기가 아이들에 깊이 숙고해 보았다 자부하는 그런 어른들이 제시하는 전제들에 기댐으로써, 잘못된 방식으로 아이들을 재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부모와 학교가 끝내 알지 못하는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아이들을 동등한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더없이 위대한 이들이 도달하고자 분투했던 목표라는 사실입니다. (104-105쪽)

 

릴케의 말처럼 아이들을 동등한 눈높이에서 바라보고 있다면 청소년이 기후 행동에 나서기 전에 이미 행동했어야 했다. 청소년들이 살아갈 세상을 우리가 살아갈 세상과 동등하게 본다면 어떻게 미래를 희생시켜 현재를 살아갈 수가 있단 말인가.

 

삶은 머리 속에 있지 않다. 삶은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삶은 행동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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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의 이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7
헤르만 헤세 지음, 김누리 옮김 / 민음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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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는 무엇일까? 우리는 왜 살아가고 있는가? 또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이런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까? 명쾌하게 답을 할 수 있다면 우리들이 이렇게 살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토록 많은 종교가 있지도 않을 것이고.

 

사람이라는 존재를 요소로 분해할 수 없듯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유나 살아가는 방식을 이거다라고 명확하게 분리해서 말할 수가 없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실시되어 인간 유전자 지도가 어느 정도 밝혀졌다고 하지만 인간을 유전자들로 이야기할 수 없듯이, 우리들은 다양한 요소들이 단순히 결합되는 것이 아니라 결합하면서 또다른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헤세 작품이 우리나라에 많이 알려져 있는데, 이 [황야의 이리]는 좀 낯설다.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지와 사랑], [유리알 유희]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사람 안에 있는 이성과 본능이라고 해야 할까? 아주 단순화 시키면 인간이 이성을 대표한다면 이리는 본능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교육을 통해 성장하면서 내 안에 있는 이리를 억누르고 길들인다.

 

그래서 자신의 본능과 이성이 충돌하기도 하지만, 본능에 따르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리라는 표현 자체가 이미 도덕적 판단 기준을 제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인간을 이성과 본능으로 양자택일 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인간이란 이성만으로도, 또 본능만으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을 스펙트럼 상에 놓고 보면 맨 오른쪽에 이성을 놓고, 맨 왼쪽에 본능을 놓는다면 그 사이에 있는 수많은 지점들을 포함해서 모든 것이 인간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도 그런 말이 나온다. 자신이 두 부류가 아니라 수백 수천의 부류로 구성되어 있음을, 그래서 어느 하나로만 규정해서는 안 됨을.

 

불합리한 시대에 이성으로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힘들고 그렇다고 본능에 충실한 삶만을 추구하기도 힘든 시대. 그 사이에서 흔들리며 살아가는 존재가 현대인이라면, 불합리한 현실에 대응하는 우리 인간의 모습은 소설 속에 나타났듯이 웃을 수 있는 인간이다.

 

웃음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거리를 제공한다. 웃음은 그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침잠하지 않고 현실을 비껴갈 수 있는 힘을 준다. 그래서 소설에서는 웃음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렇지만 웃을 수 있는 인간.

 

현실의 고통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인간은 강한 인간이다. 그런 인간이야 말로 우리가 추구하는 인간이다. 소설 속 하리 할러는 이성이 강한 삶을 살던 인간이었지만, 그는 점차 자신을 괴롭히고 있던 황야의 이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인정하게 된다. 이성과 본능. 황야의 이리는 억눌러야만 하는 존재로 여기고 살아왔던 그에게 본능의 힘을 일깨워주는 존재가 나타난다.

 

헤르미네. 본능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여인. 그에게서 하리는 자신을 본다. 그리고 헤르미네에 이끌려 본능의 세계에, 세속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그가 비판해 마지 않았던 세계에서 그는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한쪽에만 머물 수는 없다. 우리들 삶이 그렇다. 이성만이, 본능만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우리가 영원을 추구하는 것은 현실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현실에 거리를 두고 웃을 수 있는 인간. 즉 현실을 받아들이되 그것에 자신을 완전히 넘기지 않는 인간이다.

 

수많은 자신들의 조합으로 현실을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되는 존재. 그런 깨달음을 얻으면 그때부터는 이성과 본능이 양자택일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 둘과 그 사이에 있는 다양한 것들이 바로 자신임을, 현실을 살아가는 자신임을 하리 할러를 통해 헤세는 보여주고 있다.

 

지식인 사회에 속해 있던 하리 할러가 비판해 마지 않았던 세속의 세계 속에 발을 들여놓고, 억눌렀던 욕망들을 들여다보고, 이 현실에서 자신이 살아가야 함을, 그 현실을 웃음으로써 극복해 나갈 수 있음을, 그래서 자신 속의 황야의 이리와 함께 살아가야 함을 깨달아 가는 과정, 그 과정을 '수기'라는 형식을 통한 소설을 통해 우리도 함께 가고 있다.

 

소설은 하리 할러의 수기라는 제목 밑에 '미친 사람만 볼 것'이라는 작은 제목을 달아놓고 있다. 그리고 할러가 들어가는 마술 극장은 미친 사람만 입장 가능하고 입장료로 이성을 지불할 것이라고 되어 있다.

 

미친다는 것, 수많은 자아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자아를 볼 수 있는 사람은 현실이 변하지 않는 고정된 하나가 아니라 과거와 미래가 겹쳐져 있는 곳임을 깨닫는 사람, 그래서 고통 속에 허우적거리지만 그 고통도 웃음으로 떨쳐낼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소설 도입부에 편집자의 말에서 (이것 역시 소설의 일부다. 소설을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하는 장치인 것이다) 하리 할러를 이렇게 평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소설을 통해서 이런 하리 할러를 만나고, 그 할러가 우리들 중 한 사람임을 인식하게 된다.

 

  할러는 두 시대 사이에 끼여 있는 자였고, 일체의 안정감과 순수함을 상실한 자였다. 인간의 삶이 지닌 모든 문제를 자신의 개인적인 고통과 지옥으로 승화시켜 체험하는 것 - 이것이 그의 숙명이었다.

  내가 보기에 그의 수기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의미는 바로 이 점에 있다. (36쪽)

 

자, 할러의 수기를 따라가 보자. 나는 어떤 존재인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내 안에 있는 이리를 나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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