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 이야기 (리커버 일반판, 무선) 시녀 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김선형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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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 자체가 끔찍하다. 인간을 이렇게 통제할 수가 있다니.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빅브라더를 이 소설에서는 도처에서 만날 수 있다.

 

빅브라더라는 전제 권력만이 아니라 주변 모든 사람들이 감시자가 될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자유란 무엇일까? 자유란 결국 복종하는 것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체제를 벗어나거나 거부하려는 행동들은, 또 생각들은 처절하게 처벌을 받는다. 그것도 법에 의해서이기도 하지만, 속박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도.

 

시녀들... 빨간옷을 입은 다른 사람의 아이를 낳아주어야만 하는 여자들. 그들의 목표는 오로지 출산이다. 출산을 하지 못하면 이들은 쫓겨난다. 쫓겨남. 그것은 사람이 견딜 수 없는 일을 하는 곳 (소설에서는 콜로니라고 나온다)으로 보내지거나 또는 죽음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이되 비여성이 되는 것.

 

소설은 이렇게 남성중심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철저히 통제되는 사회. 남성중심이라고 하지만 남성들에게도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자유로운 것은 최고 지배층에 속하는 일부에게만 해당할 뿐이다. 장벽에 자주 걸리는 시체들. 그들은 체제를 부정하거나 다른 종교를 믿거나 다른 신념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죽음은 홍보를 위해서도 늘 전시된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사회에서 시녀가 된 여성이 나온다. 오브프레드. 세상에 모든 시녀들 이름은 오브로 시작한다. 오브(of). 소유격이다. 여성은 자신의 이름을 빼앗긴다. 누구의 것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자기 이름을 잃는다. 아니 빼앗긴다.

 

반면에 이름을 지닌다는 것, 독립된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먼 미래 소설들을 보면 이름이 없다. 그냥 몇 호 몇 호라고 하든지 아니면 다른 명칭이 주어진다. 이름이 있으면 자아의식이 생기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하여 예전부터 지배자들은 피지배자들에게서 이름을 빼앗으려고 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이름을 몇 개나 가지고 있으면서도 (족보에 올라가는 이름과 친구들 사이에서 불리는 이름 또 자신의 작품에 저자를 명기할 때 쓰는 이름 등, 본명에 호니 자니 해서 자신을 잘 드러내는 이름을 붙이며 살았다) 평민이나 천민들이 제대로 된 이름을 갖게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냥 돌쇠, 개똥이 등이었을 뿐이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시녀들은 모두 오브로 시작되는 이름을 갖는다. 자신이 어떤 사람집에 사느냐에 따라 그 이름을 자연스레 갖게 된다. 그러니 다른 곳으로 가거나 죽임을 당하면 다른 사람이 그 이름을 그대로 쓴다.

 

끔찍한 환경이다. 가정을 이루고 살던 사람이 한 순간에 가정을 잃고 자기 딸도 빼앗기고, 시녀가 된다. 아이 낳는 기계가 되는 것이다. 아이를 낳지 못하면 쓸모 없어진 기계 취급을 받아 폐기처분되듯이 사라져야 한다.

 

이런 과정을 시녀의 독백체로 담담히 풀어나간다. 그렇지만 상황은 비참하다. 철저한 디스토피아다. 자신들은 유토피아를 건설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주장일 뿐이다. 다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유토피아는 없다. 그것은 디스토피아 또는 지옥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세계일수록 다른 생각이나 행동은 용납하지 않는다. 체제 유지를 위해서 무력과 비밀경찰들에 의지한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한다. 그리고 철저하게 계급을 나눈다. 도처에 감시자, 밀고자가 있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 끔찍한 일이다.

 

특히 여성을 아이 낳는 기계 취급하는 사회, 이 길리어드 사회에서 여성은 지배층의 아내를 제외하고는 하녀나 시녀가 된다. 경제 활동부터 정치 활동까지 어떤 활동도 할 수 없다. 오로지 재생산을 위해서만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여성들을 감시하고 교육하는 존재로 여성을 불러낸다.

 

하지만 이런 사회에도 틈은 있다. 사람들을 아무리 옥죄어도 숨쉴 틈을 발견해 내는 것이 사람이다. 저항한다. 어떤 세상에도 저항하지 않는 사람만으로 구성된 사회는 없다. 오웰의 '1984'에서도 저항하는 사람이 나오고,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도 소위 야만인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저항하는 집단이 있다. 이들의 암호는 '메이데이'. 주인공은 저항단체에 의해 구출된다. 그렇게 소설은 끝난다. 아니 소설은 후일담으로 아주 오랜 후일에 주인공이 녹음한 소리를 정리하고 분석한 학자의 발표로 끝난다.

 

그런 사회가 있었음을. 시녀의 이름은 끝내 밝히지 않는다. 프레드 역시 누군지 밝히지 못한다. 다만 추정되는 두 명의 인물이 있음을 학자의 발표가 말해주고 있다. 지배층 역시 숙청을 당하고 기록이 말살되는 것이다.

 

여성이 가장 심하게 억압당하고 있는 사회에서 남성들 역시 자유롭지 않고 또 지배층 역시 자유롭지 않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그러면 억압받는 존재가 있는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자유롭지 않고, 언제든 억압받는 존재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지배하는 권력자도 지배받는 사람들도 자유롭지 않은 사회, 그런 사회를 좋은 사회라고 강변하는 언론들, 그 가치를 스스로 내면화 한 사람들. 이 소설은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시녀인 화자를 통해 들려줌으로써 그런 사회가 얼마나 끔찍한지를 생각하게 하고 있다.

 

지금 사회는 이 소설에 나오는 길리어드보다는 많이 세련되어 있지만 감시 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코로나19로 우리들 행동 하나하나가 얼마나 쉽게 남들에게 공개되는지를 몸소 체험하지 않았던가.

 

내 행위들이 모두 기록으로 남는 시대, 또 그것을 남들이 알아낼 수 있는 사회, 정보가 집적됨으로써 정보를 관리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넘겨지는지를 생각하는 요즘인데, 이 소설을 읽으며 지금 우리 사회가 소설 속 길리어드처럼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 속 길리어드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많이 다르지만, 그런 직접적인 폭력은 나타나기 힘들지만 더 세련된 체계가 작동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우(杞憂)... 그래, 이런 생각은 기우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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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문학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는데... 일본 작가라고 해봐야 몇 명 알지도 못하고. 그래도 오에 겐자부로 작품은 조금 읽었고, 어렸을 때는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쓴 '설국'을 읽었으니... 아주 모른다고 할 수도 없다.

 

  일본 시로 하이쿠에 대해서는 많이 들었다. 아주 짧다는 것, 그 짧음 속에서도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 특히 바쇼오가 유명하는 것.

 

  그럼에도 잘 읽게 되지 않았다. 시는 우선 모국어로 읽어야 그 맛을 느낄 수 있는데, 특히 짧은 시는 더더욱, 짧기로 치면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하이쿠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시라고 하지만 최근에 점점 길어지고 무슨 소린지 모르는 말들이 지면 위를 날아다니는 시를 보다가 짧은 시, 읽고 싶어졌다. 그냥 읽으면 되지 뭐 하는 생각.

 

그래, 번역 시집에서는 세 행으로 번역했지만, 일본어도 명기되어 있는데 보면 달랑 한 줄이다. 그것도 17자란다. 한자어를 일본어로 읽으면 17자가 된다. 5, 7, 5의 규칙적인 글자. 한때 우리나라도 시의 운율을 음수율로, 글자수로 파악하던 때가 있었는데... 3,4조라든가 4,4조라든가 심지어는 7,5조라는 운율까지 있었으니...

 

하지만 우리말은 글자수가 딱 정해지지 않으니 음수율보다는 음보율로 운율을 파악하는 것이 바뀌었는데... 일본 하이쿠를 보니 글자수를 기막히게도 잘 맞췄다. 틀에다 글자를 집어넣은 것 같다.

 

그 17자에 자신의 감정과 세상을 담고 있으니... 바쇼오의 하이쿠 중에 유명한 것이

 

고요한 연못 / 개구리 뛰어드는 / 물소리 <퐁당> (마츠오 바쇼오의 하이쿠, 유옥희 옮김. 민음사. 41쪽)  이다.

 

고요한 연못과 물소리 <퐁당>이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정중동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잘 알려진 하이쿠도 좋지만 내게는 말의 중요성을 노래한 이 하이쿠가 마음에 와닿았다.

 

남의 말 하면 / 입술이 시리구나 / 가을 찬바람 (위 책. 94쪽)

 

그래 입술이 시리지 않도록 해야지. 남의 말이라는 것, 남을 비난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내가 의식하지 못하고 내뱉은 말일 수도 있다. 어쨌든 말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기도 하지만 사람과 사람을 끊어놓기도 하니 말이다.

 

그런데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 어쩌면 말이라고 하기보다는 언어를 막 쓰는 시대에 접어들었는지도 모른다. 익명성에 숨어서. 소위 SNS라고 하는 곳에서 악플이라고 불리는 댓글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가.

 

그들이 그렇게 내뱉은 언어들이 결국 자신의 입술만이 아니라 심장을 얼리고, 얼어죽게 만들고 말텐데.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 하이쿠 읽어보며 마음에 새기면 좋겠다. 가을 찬바람은 겨울을 예고한다. 내가 남의 말을 함부로 하면 입술만이 아니라 나에게 겨울이 오는 것이다. 그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렇게 바쇼오의 하이쿠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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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주파수 - 청소년 테마 소설 문학동네 청소년 41
구병모 외 지음, 유영진 엮음 / 문학동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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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테마 소설집이다. 청소년기에 느끼는 불안을 주제로 일곱 명의 소설가가 쓴 소설을 모아놓았다. 청소년기에 느끼는 불안은 청소년들마다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런 테마 소설집에서 동일한 주제라고 하여도 다양한 내용을 다룰 수밖에 없다.

 

소위 말하는 정통 리얼리즘 기법으로 쓴 소설도 있고, 환상적인 기법이 나타나는 소설도 있다. 그럼에도 청소년기에 느끼는 불안이 어떤 것인지 알려고 그것에 주파수를 맞춰 읽게 된다. 물론 주파수가 알려져 있지 않기에 정확히 맞춘다는 보장은 없다.

 

이것이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청소년들마다 느끼는 불안은 다를 수밖에 없고, 그들이 우리에게 보내는 신호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청소년에게 잘 적용되었던 것이 다른 청소년에게는 부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니 해법은 하나다. 주파수가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

 

우리가 여행을 가면 동일한 방송이라고 할지라도 지역에 따라서 주파수가 달라진다. 주파수를 옮겨야지만 그 방송을 들을 수가 있다. 청소년기에 느끼는 불안도 마찬가지다.

 

진형민, 헬멧

최영희, 단추인간 보고서

구병모, 유리의 세계

오문세, 거울 속에 있다

최상희, 어디에도 있는

김진나, 나딸

송미경, 마법이 필요한 순간

 

이렇게 일곱 편의 소설이 있는데... 청소년기에 접하게 되는 다양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헬멧'은 오토바이를 쉽게 연상할 수 있게 한다. 청소년기에 질주 본능을 어쩌지 못해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폭주족들을 연상하지 않아도 아르바이트로 오토바이로 배달을 하는 청소년들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는 가장 최소한의 요소가 바로 헬멧이다. 귀찮더라도 써야 할 것.

 

'단추인간 보고서', 환상적인 표현인데, 사람의 몸에 단추 구멍이 생긴다. 똑딱이 단추. 그것이 몸의 구멍을 닫고 있는 데 단추를 열어본다는 것. 그것이 무엇일까? 자신의 본질을 들여다보고,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을 들여다보기를 두려워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 자신의 내면, 또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솔직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청소년기에 불안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유리의 세계'에서는 기존의 관습에 저항하는 청소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어쩌면 불필요한 유리 상자 속에 갇혀 사는 어른들과 달리, 유리 상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세상은 쓸모만으로만 구성되지 않고 쓸모없음이 함께 할 때 더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니, 청소년기에 겪는 일들이 꼭 쓸모 속으로 가둬버릴 수 없음을, 그렇게 쓸모 속에 갇혀 있는 것에 대한 불안을 다루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거울 속에 있다'와 '어디에도 있는'은 외모와 학교라는 곳에서 불안을 느끼는 청소년의 모습을, 나딸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자라나는 청소년의 불안을, '마법이 필요한 순간'은 세상을 멈춰버리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는 청소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불안, 삶에서 완전히 없앨 수 없다. 아니 불안을 없애서는 안 된다. 이 불안은 우리 삶에 꼭 필요하다. 다만 이런 불안을 인식하고 그것을 정면에서 마주치고 이겨내려고 해야 한다.

 

그럼에도 청소년기에는 불안함을 느낀다. 그런 불안함이 삶과 함께 하고 있음을 이 청소년 테마 소설을 통해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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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페미니스트 - 식민지 일상에 맞선 여성들의 이야기
이임하 지음 / 철수와영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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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아서는 조선시대 여성들 이야기인 줄 알겠다. 조선의 페미니스트라는 제목을 붙였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조선이라는 이름이 언제까지 불렸나? 일제강점기가 되고 사라진 이름인가 하면 아니다. 일본인은 조선인을 조센징이라고 불렀으니까. 

 

남북이 분단되고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조선이었을 것이다. 조선공산당. 그러다가 조선공산당이 남조선노동당과 북조선노동당으로 갈라서니까, 해방 정국까지도 우리는 조선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조선은 바로 여기까지다. 해방 정국까지. 그 이후의 일은 없다. 없는 것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았다. 또 이들 중에 역사에서 지워진 인물들도 많다. 그들이 빛을 발한 것은 해방 정국까지다. 

 

그렇다면 해방 정국에서 빛을 발했던 사람들은 누구일까? 어떤 인물이기에 여성으로서 해방이 된 뒤 이름을 내세울 수 있게 된 것일까 이런 생각을 지닐 수 있다. 당연한 질문이다. 식민지에서 해방이 된 나라에서 나름대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일 수밖에 없다.

 

독립운동가들... 여기에 여성 독립운동가들... 여성이라는 말을 앞에 붙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지만 여성이라는 말을 꼭 붙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활동에 비해서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시적으로 여성이라는 말을 앞에 붙이기로 하자. 그렇게 붙일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세상이 아직은 오지 않았다는 씁쓸한 마음을 되새길 수 있게.

 

솔직하게 말하면 여성 독립운동가를 대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유관순밖에 없다. 최근에 영화로도 알려졌고 또 여러 책에서 언급한 사람들도 있지만, 퍼뜩 머리에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만큼 그들은 해방이 된 이후 많이 가려져 있었다고 해야 한다.

 

이 책에서는 일곱 명의 여성을 들고 있다. 일곱 명의 이름을 적어본다. 몇 사람이나 알고 있는지?

 

유영준, 정종명, 정칠성, 고명자, 허균, 박진홍, 이순금

 

각자 자신이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던 사람들... 이들은 모두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 해방 이후에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여성들이 독립된 존재로 인정받고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사회 구조다. 즉 남성과 여성이 또는 다른 성이 서로 대립하는 사회, 또는 어느 성이 다른 성에게 종속되어 사는 사회가 아니다. 

 

그만큼 일상에서의 평등을 이루기 위해 이들은 사회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조선이라는 사회, 일제강점기라는 시대는 여성들에게 억압과 착취, 불평등한 사회였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구조를 그냥 놓아두고 여성들도 남성들과 동등한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은 힘을 지니지 못한 헛된 구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 지금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월북을 했기 때문이다. 또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들의 말년이 어떻게 되었는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이유가 바로 분단에 있다는 것, 분단으로 인한 갈등이 같은 이념을 지닌다는 북쪽에서도 사상투쟁을 거쳐 숙청이라는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렇게 지금은 많이 잊혀졌지만 이들이 한 노력이 물거품이 된 것은 아니다. 어디 역사가 한방에 변했던가. 이런 활동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어느 순간에 폭발적으로 변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들을 기억해야 한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나름대로 씨를 뿌렸던 이들의 활동을.

 

이 책이 소중한 이유가 그것이다. 페미니즘에 대해서 논란이 많지만, 그런 논란 자체도 바로 페미니즘의 일부라는 사실을 이 책을 읽으면 느낄 수가 있다. 같이 활동을 해서 검거가 되어도 언론은 남성들에게는 절대로 쓰지 않았을 기사를 여성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게가 아니라 악의적으로 오도하는 기사를 쓴다.

 

독자들의 흥미를 끌려는 목적도 있지만 여성들의 활동을 폄훼하려는 의도도 다분히 있는 것이다. 지금도 이런 기사들이 종종 나는데... 일부 언론은 일제시대 언론의 관행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않았다는 생각을 한다. 언론의 그런 태도는 이 책 '박진홍, 이순금' 편에 너무도 잘 나와 있다.

 

'식민지 일상에 맞선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작은 제목을 달고 있는데, 식민지 일상은 바로 여성들에게는 이중 억압이다. 식민지로서의 억압과 가부장제가 일상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에서의 억압. 이런 이중의 억압을 끊는 길은 눈에 띠는 사회적인 억압에 대항하면서 얼핏 가려진 것처럼 보이는 일상에서의 억압을 함께 끊으려고 해야 한다. 이중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니 식민지 시대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더 힘든 활동을 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대중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을 테니 더더욱 힘들었을 거고.

 

그것을 이겨내려 했던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이들의 활동을 각 편 제목에서 간결하고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유영준(1890-?) : 여남평등 이룩하여 평등조선 건설하자!

정종명(1896-?) " 여성들이여! 분노하라 그리고 경제적 독립을 쟁취하라!

정칠성(1897-1958?) : 사람이 있고 운동이 있다

고명자(1904-1950?) : 우리 자신의 해방은 우리 힘으로

허균(1904-?) : 부인 노동자에게 해방의 혜택이 무엇인가

박진홍(1914-?) : 십 년 감옥살이를 빼면 이제 겨우 스물세 살이라니까요

이순금(1912-?) 여성 대중은 민족해방운동을 위해 열심히 싸웠다

 

이들의 이름 뒤에 출생년도와 사망년도를 쓴 이유는 바로 물음표(?)에 있다. 일곱 명 모두 물음표(?)가 있다. 이 중에 사망한 년도가 그나마 추측 가능한 사람이 두 명. 나머지 다섯 명은 잘 모른다. 왜? 바로 이 글 제목에 그 이유가 있다.

 

조선부녀총동맹...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조선의 페미니스트](1권)은 조선부녀총동맹에서 활동했던 여성들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 해방공간의 식민지 일상을 바꾸고자 했던 여성들의 삶을 알고 싶었다.'(13쪽)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을 지닌 사람들. 남과 북 어디에서도 제대로 자기 자리를 잡지 못한 사람들. 그럼에도 우리 사회가 발전하도록 한 발 앞서 나선 사람들. 그들이 이렇게 영원히 물음표(?)로 남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우리 역사에 있는 수많은 물음표(?)들을 이제는 사라지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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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썰록
김성희 외 지음 / 시공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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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는 문학보다는 영화에서 더 유행했다. 세상이 각박해질수록 좀비가 예술에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월드 워 Z'가 있고, '부산행'이 있고 또 기타 등등 많은 좀비 영화들이 있었는데, 물론 좀비 영화도 문학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좀비는 인간이었던 존재, 지금은 인간이 아닌 존재다. 우리나라 귀신과 좀비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다른 점은 귀신은 주로 밤에 나타난다면 좀비는 시도때도 없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또 귀신은 자신에게 해를 입힌 존재를 응징하는 역할을 주로 한다면 좀비는 불특정 다수를 공격한다.

 

이런 점에서 차이가 많이 나는데, 지금은 귀신의 시대가 저물고 좀비의 시대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세상이 명확한 인과관계로 맺어지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너무도 얽히고설켜 무엇이 원인이고 결과인지 정확하게 가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니 좀비가 등장해 아무나 눈 앞에 보이는 존재를 물어뜯고 마는 것. 어쩌면 세상에 좀비와 같은 존재들이 득시글거리고 있는 현실을 예술로 승화시켜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술 작품에서 좀비가 많이 등장하고 유행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에 좀비와 비슷한 존재들이 있음을 우리들이 무의식 중에 자각하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책은 우리나라 소설을 좀비를 등장시켜 재탄생시킨 작품들을 모아 놓았다. 고전소설이라고 하는데, 근대소설에 들어가는 작품도 있으니, 우리 소설과 좀비의 만남 정도 되겠다.

 

대상이 된 우리나라 소설은 (아니 다섯 편이 모두 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다, 관동별곡은 정철이 쓴 가사 작품이니까. 가사 작품은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시와 수필의 요소를 갖추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정철의 관동별곡,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 주요섭의 사랑 손님과 어머니,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황순원의 소나기다.

 

이들을 각자 좀비와 만나는 작품으로 재탄생 시켰는데... 기존 작품의 틀을 유지한 작품도 있고, 기존 작품에서 빈 틈을 찾아내 메운 작품도 있다.

 

관동별곡, 강원도 관찰사로 가는 정철의 이야기...갈 때 만나는 좀비, 좀비들을 퇴치할 수 있는 약(김치)을 만드는 것. 관료들의 무책임. 이런 것들을 잘 버무린 김성희가 쓴 소설인데... 제목을 영화 부산행을 연상할 수 있게 '관동행: AMA TO GWANDONG'이라고 했다.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죽어라 외웠던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쓴 정철을 떠올리기보다는 몰락한 양반, 꾀죄죄한 양반을 떠올리지만, 그럼에도 단점을 장점으로 만들어내는 주인공에게 공감할 수가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로 일컬어지는 김시습의 '금오신화'에 실려 있는 작품 중 하나인 만복사 저포기를 비틀어서 '만복사 좀비기'로 바꾼 정명섭의 소설. 소설에서는 부처님과 내기에 이겨 귀신과 결혼하는 사람이야기지만, 여기서는 그 자신이 좀비로 죽임을 당하는 쪽으로 내용이 바뀌었다. 좀비와 인간의 구분은 보통 아주 명확하게 나오는데, 이 소설에서는 끝에 가서야 좀비와 인간의 구분을 알 수 있는 추리적인 요소까지 겸비하고 있다. 만복사 저포기의 기본 축을 바탕으로 내용을 뒤집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지금은 옥희의 말투를 재미있어 하기도 하는 '사랑 손님과 어머니'를 비튼 소설 '사랑 손님과 어머니, 그리고 죽은 아버지'라는 작품은 전건우가 썼는데, 예전 관습을 거스르지 못하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원작 소설을,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를 스스로 탈피해 나가는 여성 주인공으로 어머니를 내세운 것이 특징이다.

 

좀비 앞에서도 결코 당황하지 않고 당당하게 그들을 물리치는 여성 주인공. 소설에서는 아버지가 죽은 것으로 나오지만 이 작품에서는 아버지가 살아 있고, 결국 죽음에 이르고 좀비가 되는, 가부장의 모습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 가부장적 사회가 여성에게는 좀비처럼, 또는 좀비보다도 더 무서운 족쇄였음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조영주가 쓴 '운수 좋은 날'은 제목을 그대로 따왔다. 다른 작품들이 제목을 조금씩 변형했다면 이 소설을 제목을 그대로 쓴 대신 내용은 크게 변형했다. 아마도 제목을 다른 것으로 했다면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떠올리기 힘들지도 모른다. 물론 작품의 끝부분에 김첨지가 등장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두 소설의 연관성을 짐작하기가 쉽지는 않다.

 

이 작품이 지닌 참신성은 김첨지가 오래도록 살아남은 데 있다. 좀비는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피가 공급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살아있는 인간의 목을 물어 뜯는다. 피를 먹어야 하기 때문. 그렇기에 그들은 인간에게 위협이 되고, 인간과 좀비는 목숨을 걸고 서로를 없애려고 한다. 피, 고기. 육식성의 극한, 살인. 그것이 좀비다.

 

이 작품은 이런 틀을 벗어난다. 채식 좀비의 등장이다. 좀비가 채식을 한다? 그렇다면 인간과 적대적일 이유가 있을까? 없다. 오히려 육식을 하는 인간을, 그런 좀비를 거부하려 한다. 그게 이 작품이다. 새로운 좀비를 제시한 작품.

 

차무진이 쓴 '피, 소나기'는 슬프다. 원작 '소나기'도 슬프지만 이 소설은 좀비가 된 소녀가 또 죽게 되는 데서 슬픔은 배가 된다. 좀비이기 때문에 공격적이고 피를 원하는 것은 공통적이지만 말을 할 수 있는 좀비. 이를 이해하는 소년. 소년에게만은 공격하지 않는 소녀 좀비.

 

또 한번의 죽음을 맞으며 '죽기 직전에 제 할아버지한테 자기가 죽거든 입었던 옷을 꼭 함께 묻어달라고." (330쪽)말했단 구절, 소나기의 마지막 구절을 다시 한번 만나게 하는 것으로 소설의 결말을 삼은 작가는 소녀의 첫번째 죽음을 우리에게 불러옴으로써 소녀의 죽음을 좀비의 죽음으로 치환하지 않게 한다.

 

이런 식으로 다섯 편의 작품이 예전 작품을 토대로 새롭게 탄생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작품을 이런 식으로 비튼 것들은 우리 문학이 지속적으로 재탄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도 다양한 활동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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