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는 팔레스타인 제노사이드에 침묵하는가 - 잔해 속의 그리스도
문터 아이작 지음, 김상기 옮김 / 동연출판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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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휴전 협정을 맺었다는 뉴스를 얼마 전에 보았다. 휴전 협정이라니? 이들이 언제 전쟁을 했던가? 이스라엘이 일방적으로 가자를 공격하여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죽거나 쫓겨난 사건 아니었던가. 여기에 무슨 휴전? 그냥 잠시 이스라엘이 공격을 멈추었다고 봐야겠지.


공격을 멈추었다는 표현을 이 책을 쓴 문터 아이작이 본다면 어이 없어 할지도 모르겠다. 그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분쟁'이 아니라, 그러니까 '전쟁'이 아니라 '학살'이니까.


몇 십 년에 걸친 학살. 하지만 세계는 이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인권을 중시하는, 홀로코스트는 절대로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이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참극에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이상하다.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이스라엘이 가자 지구에서 벌이는 일들을 용납해서는 안 되는데...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이들은 하마스의 무차별 공격으로 이스라엘이 방어에 나섰다고 옹호하고 있다. 


이에 문터 아이작은 몇 십 년 동안 이스라엘에 의해 자행된 일들을 고려하지 않은, 역사적 맥락을 제거하고 한 시점을 분쟁의 시작으로, 아니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방어라고 말하는 것은 사기라고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옹호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 역시 학살에 동조하는 일이라고...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침공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의해 국제사법재판소에 기소되기도 했다. 이 책에 보면 '(2024년) 1월 26일, 국제사법재판소는 이스라엘이 집단학살방지협약을 위반하는 행동을 저질렀을 '개연성'이 있다고 판결했다'(162쪽) 그러면서 임시 명령을 내렸다고 하는데, 기가 막힌 일은 다음에 있다. 


'국제사법재판소의 임시 명령이 나온 다음 날, 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위스, 핀란드, 호주 캐나다 정부는 신속하고 단호하게 대응했다. ...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기구, UNRWA에 대한 자금 지원을 중단하기로 했다'(163쪽)니...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을 보면 비록 '개연성'이라고 했지만 이스라엘이 집단학살방지협약을 어겼다는 판결인데, 이스라엘에 압력을 넣는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을 돕는 기구에 대한 억압에 들어간 것. 그것도 우리가 인권 선진국이라고 믿고 있는 나라들에서.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만큼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미디어를 움직이고 있고, 또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 굳건한 동맹을 맺고 있으니... 그 동맹으로 인해 트럼프가 강제하다시피 휴전 협정을 맺었지만, 가자 지구에 대한 공격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고 하니...


그러한 공격이 학살임을 증언하고 있는 문터 아이작. 그는 팔레스타인에서 목회 활동을 하는 기독교 목회자이다. 그의 종교가 이슬람이 아니라 기독교다. 그래서 그는 서구의 기독교가 이런 학살에 침묵하고 있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의 교리와도 맞지 않는다고, 세계의 기독교가 이러한 학살에 침묵하는 것은 학살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그는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팔레스타인이 처한 현실을 알리고 있다. 함께 행동하자고 하고... 단순히 기도가 아니라 행동이 필요하다고 성경을 인용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놀랍다. 이슬람을 증오하는 것이야 이해하겠는데, 같은 기독교도들이 살해되고 있는데도 기독교 단체들이 침묵하고 있다니... 아니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민족, 국가가 중요한가? 이들이 어느 민족, 인종, 나라 사람이냐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나? 그러면 안 되지 않나?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었음을 팔레스타인 목회자인 이 책의 저자 문터 아이작이 말하고 있다.


'너무 오랜 세월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은 동료 기독교인들에게 무시당하고, 비인간화되고, 심지어 악마화되어 왔다. 우리는 종종 팔레스타인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경험이 폄하되고, 존재 자체가 배제되었다.'(230쪽)고 토로하고 있으니... 이건 아니다 싶다.


이런 내용, 경악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이 책 곳곳에 나타나는데... 그렇다고 문터 아이작이 하마스를 지지하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하마스는 이슬람이고 이 책의 저자는 기독교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폭력에 반대하는 관점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역시 비폭력, 사랑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지 않은가. 그러니 기독교도가 폭력에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폭력도 구분하고 있으니... 


하마스를 반대하지만 그런 그이지만 하마스의 변화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하마스 역시 자신들이 반대하는 것은 유대인이 아니라 시온주의라고 하고 있는데, 이 책의 저자 역시 시온주의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시온주의는 침략주의고, 폭력이라고.


분명 학살이 일어났고, 이에 대해서 세계 곳곳에서 이러한 학살에 반대하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를 반유대주의로 뭉뚱그려 비난하는 것은 문제다. 이들이 이스라엘의 학살에 반대하는 것은 반유대주의가 아니다. 홀로코스트에 반대하는 것이다. 이 책에 보면 이러한 반대 운동에 유대인들도 많이 참여하고 있다고 하니, 가자 지구 침공에 반대하는 것을 반유대주의로 몰아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


또한 기독교 단체에서 이러한 학살에 침묵해서는 안 된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성경에도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 너희가 이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마태복음 25:40, 45)라는 말이 있다. 앞의 문장은 천국에 가는 사람을 의미하고, 뒤의 문장은 지옥에 가는 사람을 의미한다.


천국과 지옥에 가는 것이 어려운 사람을 도왔느냐, 모른 체 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는데, 지금 세계에서 가장 작은 자에 속하는 사람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지 않는다면 그러한 기독교인이 어떻게 천당에 갈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꼭 기독교인만이 아니겠지만...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기도 하다.


읽으면서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마음이 답답해지기도 했고, 그럼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에 조금의 위안을 받기도 했는데...


저자는 책의 마지막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희망을 선택한다. 살아남기를 선택한다. 존재하기를 선택한다.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끝까지 주장하기를 선택한다. 우리는 회복할 것이다. 회복의 뿌리를 인내에 두고, 우리 민족을 위한 정의를 요구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회복할 것이다.' (382쪽)


이런 희망, 이런 인내를 그들은 '수무드'라고 한다고 한다. 너무 오래 걸리지 않게 팔레스타인이 회복되기를... 종교인들이 이러한 환난에 빠진 사람들과 함께하기를... 그들에게 희망이 되기를, 이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저자가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사람들과 함께한 '잔해 속의 그리스도'가 많은 반향을 얻었다고 한다. 재난을 겪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그리스도.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야 학살이 없어질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한다. 정보를 다양한 방면에서 얻는 것이 중요하니까. 사건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진 출처 : https://www.instagram.com/p/DQdkMLugZT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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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25-12-06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kinye91 2025-12-07 00:2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한서 열전 2 한서 열전 2
반고 지음, 신경란 옮김 / 민음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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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엄청난 양이다. 벽돌책이라고 하기도 한다. 1000쪽이 넘는 분량이니. 중국 한나라 때의 인물들을 수록했으니 양이 엄청날 수밖에 없다. 그것도 능력 있는 사람들과 또 역사에 남길 인물을 선정해서 수록했으니...


하지만 열전에 포함된다고 해서 모두 본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다. 또한 모두가 잘살았던 것도 아니다. 끝이 안 좋은 사람도 많았고, 자신 때는 성공했을지라도 자식 대에, 그것도 아니면 자손 대에 망한 집안도 꽤나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전제군주 시절이니, 능력보다는 황제의 인정을 받아야 살 수 있었던 시대의 한계가 명확하다. 백성을 위하는 정책을 건의해도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면 사형에 처해졌으니... 상소문을 보면 자신의 목숨을 건다는 내용이 들어 있는데, 이는 그만큼 목숨 걸고 의견을 내야 하는 시절이라는 말이다.


또한 목숨을 걸지 않으면 자리를 보전할 수는 있겠으나 사서 편찬자의 말에서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 반고가 찬하여 말한다에서 00는 수년 간 승상이라는 직위에 있었으나 특별히 공을 세우지 못했고, 자리만 지켰다고 하는 인물들이 꽤 있었으니...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고 하는 승상 자리에 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는데 중국 한나라 때 승상의 지위에 올랐다는 것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까지 갔다는 얘기고, 자신의 정치를 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한데, 그런데도 이들의 목숨은 파리와도 같아, 황제의 뜻에 따라 언제든지 죽을 수 있었으니...


열전을 쓴 이유가 무엇인가? 역사 속 사람들을 통해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찾으라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황제라는 절대 권력의 말 한마디에 목숨이 왔다갔다 한다면, 이런 열전을 읽으며 목숨 보전을 하기 위해서는 또 집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려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반대로 그렇게 목숨을 부지해도 욕된 이름만 남기니까 좋은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는 목숨을 아껴서는 안 된다고, 옳다고 여기는 것은 목숨을 걸고라도 지키고 주장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2권에서는 무신에서 문신으로, 즉 나라를 세우고 안정을 이뤄가는 과정이 지나 이제는 안정기에서 다시 쇠퇴기로 접어드는 때에 활동했던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그러니 무신보다는 문신의 비중이 커지고 있고, 이들을 통해서 유학이 중용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유학이 나라의 학문으로까지는 정립되지 않았음을, 황제에 따라 또 열전에 나오는 인물에 따라 유학을 숭상하고 공부한 사람과 다른 학문을 공부한 사람들이 함께 실려 있음으로 알 수 있다.


여기에 인재를 추천하는 방식도 여전히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하여 과거제와 같이 선발로 관리를 뽑는 제도는 더 뒤에 나올 것임을...


이러한 추천제는 장점도 있지만 추천하고 추천받은 사람끼리 작당한다는 문제도 있으니 능력있는 사람을 어떻게 발굴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황제가 중심일 수밖에 없는 전제군주 시대에는 그러한 인재들을 잘 등용하는 것이 백성들에게도 행복한 시절을 만들어주는 길이었을 텐데, 다른 말로 하면 '적재적소'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를 알게 해주는 '한서열전' 2권이다.


이 권에서 주목한 사람은 '금일제'다. 투항한 흉노의 태자라고 하는데, 무제에게 중용되어 무제 사후에 어린 황제를 보필하는 역할까지 했다고 한다. 꼭 필요한 인재라면 국적을 따지지 않고 중용하는 황제. 그러한 황제를 통해 '적재적소'라는 말이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는데...


뒤로 갈수록 '적재적소'라는 말이 무너지면서 아첨을 일삼거나 또는 외척 세력이 대두하는 모습을 '한서열전' 2권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는 한 나라가 무너져가는 과정을 인물들을 통해 보여준다고 생각하는데...


'적재적소'


이 말은 지금도 유용하다. 선출직으로 대통령을 뽑지만, 그 대통령을 뽑는 과정에서도 이 말을 생각해야 하지만, 선출된 대통령이 임명하는 많은 장관들과 다른 공직자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과연 그 자리에 맞는 능력을 갖추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제 능력에 맞지 않는 자리에 앉은 사람이 많을수록 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대통령은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미디어가 발달해서 많은 것들이 공개된 세상에서도.


착각 속에 살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이러한 '열전'을 읽을 필요가 있다. 중국 한나라의 역사를 통해 수많은 인물들이 나오니까. 그들의 다양한 행적을 통해서 지금을 살필 수 있으니까. 


적재적소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은 '유취만년', 적재적소에 어울리는 사람들은 '유방백세' 아니겠는가... 그 점을 명심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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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들의 아침식사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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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들의 아침식사라는 제목을 생각한다. 제목을 보고 어떤 내용이 펼쳐질지 예상한다면 소설을 읽으면서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이게 뭐야 하는 생각이 들게 소설은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가 중구난방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문구가 '어쩌고 저쩌고'다. 그렇다. 우리가 흔히 기타 등등이라고 하는 etc.가 소설에 나오기도 하니, 왜 이렇게 어쩌고 저쩌고 하는 걸까?


수많은 이야기를 이렇게 섞어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런데 읽다보면 이야기가 연결이 되기도 한다. 작은 이야기들이 하나의 이야기를 이뤄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제목이 특이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먹고 자고 싸기. 인간이라면 누구도 해야만 하는 일. 먹는 일을 제목이 대변한다면, 그렇다면 나머지는? 자는 일은 이 소설에서 찾기 힘든데 싸는 일은 찾기 쉽다. 왜냐하면 '어쩌고 저쩌고'만큼 특색있게 다가오는 말이 '우주의 똥구멍'이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의 말을 빌려보면 '이곳은 우주의 똥구멍이야(224쪽), 이곳은 우주의 똥구멍이 분명해요,'(265쪽)라고 한다. 똥구멍은 싸는 곳. 그러니까 먹는 것이 제목이라면 소설 속에 나오는 똥구멍은 싸는 곳이다. 무얼 싸지?


당연히 소화가 되지 않은 것을 싼다. 소화가 되지 않은 것? 과다 생산된 것. 필요 없음에도 필요하다고 광고해서 남들로 하여금 사게 하는 것. 그리고 곧 쓰지 않게 되어 쓰레기가 되어 버려지는 것. 버려진 다음 자연스레 분해가 되지 못해 인간에게 해를 끼치게 되는 것. 인간만이 아니라 지구에 더 해를 끼치는 것.


소설에서는 그러한 예가 많이 나오는데, 주인공인 드웨인과 관련된 일들이 그렇다. 그리고 미국이라는 나라가 이렇게 게걸스럽게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 싸버리는 나라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렇다면 챔피언들의 아침식사는 미국이라는 제국이 끝모를 성장을 추구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고, 우주의 똥구멍이라는 표현은 그렇게 성장, 성장하는 미국 또는 지구의 나라들로 인해 더욱 살기 힘들어지는 지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들이 편하자고 썼다가 버린 것들이 어떻게 돌아오는지는 '트라우트는 슈거크리크의 범람을 막는 콘크리트 홈통에 자신의 예술적인 발을 담갔다. 그러자마자 수면에 떠 있던 투명한 플라스틱 물질이 발을 코팅했다. ... 한쪽 발을 물에서 꺼내자 플라스틱 물질은 공중에서 즉시 마르며 진줏빛의 얇고 타이트한 단화로 변해 그의 발을 감쌌다.'(302쪽)는 표현에서 알 수 있다.


미세플라스틱으로 인한 피해는 잘 알려져 있으니, 보니것은 그런 미래를 선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작가는 그때의 성장, 발전이 지닌 위험을 내다보고 있던 것이다. 그런 위험이 어디 플라스틱 뿐이겠는가. 그는 미국 사회가 지닌 많은 모습을 비판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노예제에 대한 비판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인간이 그러한 노예 또는 기계와 별반 다름이 없음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니 이러한 미국 사회는 '우주의 똥구멍'일 뿐이다. 그것을 인식한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여전히 자신들이 먹는 것이 소화가 되지 않고 똥으로 변할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성장과 발전만이 우리가 살 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지구에서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는 현실이니, 우리는 여전히 우주의 똥구멍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똥구멍 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곳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보니것은 비관적이었다가 생각을 바꾼다. 이 장면이 소설 속에 있는데,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예술 역시 자본의 먹이로서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자본에 먹히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자신만의 고유한 성질을 잃지 않는, 기계로서 존재하지 않고 생각을 하게 만드는 역할을 함으로써 자신을 지킬 수 있음을 소설 속 인물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기도 하는데...


너무도 짧은 이야기들, 소설 속의 이야기와 작가가 직접 등장해서 자신의 등장인물과 대화하는 장면까지 사실주의 소설이라면 상상도 하기 힘든 이야기 전개방식을 택하고 있어서 낯설기도 한데... 그럼에도 비사실적인 표현이 사실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가 표현하고 있는 일들을 우리가 계속 겪어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시 제목을 생각한다. 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자본과 성장이 결국 먹는 것과 연결이 된다는 생각이었을까? 작가가 어떤 생각을 지니고 이런 제목을 붙였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무모하게 먹어치운 것들이 결국은 배출될 수밖에 없음을, 그래서 제목인 아침식사와 소설 속에 나오는 똥구멍이라는 말이 연결되게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작가는 '챔피언들의 아침식사'라는 표현은 제너럴 밀스사에서 만든 아침식사용 시리얼 상품의 등록 상표다.(17쪽)라고 해서 다른 오해를 하지 말라고 하는데, 여기서도 우리는 자본이 얼마나 우리 생활에 깊숙히 들어왔는지 알 수 있다.


'아침식사용 시리얼'이라고 하지 않나? 기본적인 먹는 것조차도 거대 기업이 잠식하고 있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현실. 먹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것들이 그렇게 우리 삶으로 들어와 우리를 삶으로부터 더욱 떨어뜨리고 있는 현실을 보니것은 비판하고 있다.


계속 보니것 작품을 읽고 있는데, 이 작가의 작품 읽을수록 매력적이다. 다음 작품을 찾아 읽게 만든다. 그리고 이 작품 저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겹치고 있기에, 그의 작품은 전체적으로 지구를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아직 읽지 않은 작품을 찾아 읽어야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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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들, 조용히 빛나는
문선희 지음 / 가망서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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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에 배웠던 노래 '등대지기'가 있다. 이 책의 제목을 보았을 때 그 노래 가사가 떠올랐는데...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 위에 자고

한겨울에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바로 이것이었다. 이 책에 나오는 등대들, 등대가 아니다. 고공 탑(CCTV탑, 송전탑, 송신탑, 굴뚝, 대교 주탑, 타워 크레인, 철탑, 광고탑, 종탑, 사일로, 전광판, 고가도로 교각) 이다. 평소에는 사람이 오르지 않는 곳. 아니 사람이 지낼 수 없는 곳.


등대는 그래도 사람이 지낼 수 있다. 외롭고 힘들고 또 어둡고 캄캄한 곳에서 한줄기 빛을 쏘아 다른 이들을 안내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 등대고, 그곳을 지키는 사람이 바로 등대지기다.


하여 등대지기는 어둠 속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존재다. 그런 등대지기의 마음을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이라고 노래했다.


그러면 고공탑에 오르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떨까? 자신들만 잘살기 위해서 오를까? 아니다. 이들은 다함께 잘살기 위해서, 아니 살기 위해서 오른다. 아무리 외쳐도 듣지 않을 때, 자신들의 목소리를 다른 존재들이 들을 수 있게.


이들이 고공탑에 오르기까지 수없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냈다. 제발 들어달라고... 그런데 듣지 않는다. 듣지 않으니 듣게 해야 한다. 누가 외치는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게 해야 한다. 그 방법이 바로 고공탑으로 오르는 것.


평소에는 사람이 없는 곳, 사방이 트인 높은 곳. 사람이 지낼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는 곳. 그곳으로 오른다. 올라서 보라고, 들으라고 한다. 그렇게 그들은 사람이 지낼 수 없는 곳에서 많은 날들을 보낸다.


자신의 목소리를, 약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라고, 등대가 어둠 속에서 빛을 내어 다른 존재들을 인도하듯이 그렇게 그들은 고공탑에 올라 약자들의 외침을 남들이 보고 들을 수 있게 한다. 등대와 같은 고공탑. 등대지기와 같은 고공 농성자들.


자신의 목숨을 걸고 나선 사람들. 이들 덕분에 많은 것들이 좋아지곤 했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고공탑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는 현실.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고공탑에 올라야 할까?


그들이 고공탑에 올라가지 않도록 낮은 곳에서부터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는 없을까? 그런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작가는 이러한 고공탑들을 찾아 기록으로 남겼다. 소중한 작업이다. 어떤 고공탑은 철거되었고, 어떤 고공탑은 아예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기도 하고, 그곳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지워버리고 있으니,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는 작가가 있음에 이들의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사진을 흑백으로 처리했다. 그리고 수평선과 바다의 이미지를 보여 바다 위 등대처럼 보인다. 또 흑백이기 때문에 어둠 속에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 외로워보이기도 한다.


지독한 외로움, 괴로움. 그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빛을 보내려 하던 사람들. 그들의 마음이 바로 등대지기 노래의 가사처럼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작업을 해준 작가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고, 앞으로 이렇게 높은 탑들에 사람들이 오르지 않는 사회였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고용노동부 장관이 민주노총 위원장을 했던 사람이지 않은가. 노동자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장관이 되지 않았나. 그러면 이제 노동자들이 고공탑에 오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고공탑에 올랐던 많은 사람들이 노조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해고된 경우가 많았으니 더더욱. 


사진만이 아니라 그 사진에 얽힌 사연들이 이 책에 실려 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이 등대지기 노래가 생각난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보여줬던, 길을 알려줬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마음.


이러한 일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러한 기록을 남겨준 작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이 말 역시 마음을 울린다.


'세상은 그들을 약자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들을 초인이라 부른다. 초인적 인내력으로 세계와 독대한 단독자. 백마 대신 굴뚝을 타고 온 초인.' (97쪽)


이육사 시인의 '광야'에 나오는 구절을 빗대어 표현한 이 말. 여기에 덧붙이자면 이육사 시인의 '청포도'란 시에 손님이 온다고 되어 있다. 그 손님이 어떤 형상으로 오는지 아는가? 바로 '고달픈 몸'으로 온다고 했다.


고공탑에서 고달픈 몸으로 우리에게 온 손님. 그들을 작가는 굴뚝을 타고 온 초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을 맞이할 때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다는 마음을 지녀야 하고, 그들을 잊지 않고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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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책방 순례.


  예전엔 동네에서 헌책방을 쉽게 만났는데, 어느 순간 하나둘 사라지더니, 이제 헌책방을 만나려면 큰 맘을 먹어야 한다.


  산책하듯이 가볍게 갈 수 있는 곳에 헌책방은 없다. 한 번 가봐야지 하고 마음을 먹고 몸을 움직여야 한다. 그래야 헌책방에 간다. 그런 헌책방도 또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


  책에 헌 책 새 책이 있을까마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밀려나게 된다. 


  하긴 도서관에서도 좀 오래 된 책은 개방된 서가에 있지 못하고, 보존서고라고 해서 사서들이 가서 찾아와야 하는 곳으로 밀려가니... 


가끔 알라딘에서 헌책을, 아니 알라딘은 중고서적이라는 말을 쓰니, 중고서적을 사기도 하고, 팔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많은 책들은 그냥 폐휴지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마음의 양식이라는 책이 버려지는 현실. 그런 현실 속에서 헌책방은 책이 버려지는 일을 최소한 막는 역할을 한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고.


누군가 읽었던 흔적을 헌책에서 발견하고 아, 이 사람도 이 부분을 생각했구나 하는 반가운 마음도 드는데...


이번에 구입한 헌책은 [전봉건 시전집]이다. 전집이니까, 전봉건의 시를 모두 (과연 모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발표된 시들은 다 실었을 테니) 모아놓은 책.


전봉건 하면 떠오르는 시가 있다. '피아노'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했던 시.


피아노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들었다.


남진우 엮음, 전봉건 시전집. 문학동네. 2008년. 49쪽.


음표들이 막 살아 움직이는 듯한 모습이 그려지는데... 그리고 다른 시들... 같은 제목에 다양한 변주를 한 시들... 돌과 6.25.


'돌'은 56편이 있고, '6.25'는 59편이 있다. 마지막 숫자가 56과 59니.


이 중에 돌 52를 보면 어려운 말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여기서 무언가를 생각하게 된다.


  돌 52


햇살에게 말을 하면서 갔더니

바람을 만나 바람에게 말을 하면서

갔더니 비를 만나 비에게 말을 하면서

갔더니 나무를 만나 나무에게 말을 하면서

갔더니 어둠을 만나 어둠에게 말을

하면서 갔더니 새를 만나 새에게

말을 하면서 갔더니 강물을 만나

강물에게 말을 하면서 갔더니

돌을 만났다.


이제는 내가 말을 들을 차례다.


남진우 엮음, 전봉건 시전집. 문학동네. 2008년. 655쪽.


하아, 말하기보다 듣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돌을 통해서 깨우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시의 형태를 달리해서 그냥 직설적인 말하기와는 다른 느낌을 주고 있기도 하다.


이런 시집, 헌책방에서 만났으니, 그런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행복. 가격 또한 아주 싸니, 이 또한 행복 아닐까 하니...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한다. 독서를 하기 위해서는 책을 만나야 하는데, 인터넷으로 만나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서점에 가서 종이책을 만지는 일, 헌책방에 가서 책들이 뿜어내는 향기를 맡는 일을 하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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