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라리스 민음사 스타니스와프 렘 소설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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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로 나아가는 꿈. 인류는 아마도 먼 옛날부터 지구를 벗어나 우주로 나아가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우주로 나갈 기술이 안 되었을 때는, 지구 곳곳을 탐험하는 모험담을 다룬 이야기들을 만들어냈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우주에 나아가는 상상을 하면서 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어느 정도 우주로 나아가기도 하고. 물론 아직도 먼 미래 이야기지만. 그만큼 우주이야기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오래된 소설이다. 이름은 오래 전부터 들었는데, 막상 읽기는 지금이 처음이니...영화 제목으로 많이 들어봐서인가, 아니면 비슷한 이름들이 소위 SF소설에 많이 나왔기 때문인가? 아이작 아시모프 소설에서는 솔라리아라는 이름으로도 나오니, 물론 같은 행성은 아니지만, 이 이름에 친숙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폴란드어판을 저본으로 하는 번역본이라고 한다. 400쪽이 넘는 긴 분량의 소설인데, 읽으면 금세 읽힌다.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가게 된다. 그만큼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무언가가 있다.


다만, 읽고 나서는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 잘 알 수가 없게 된다. 결말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하지만 솔라리스라는 행성에 도착한 사람들이 겪는 일들을 통해서 우리가 우주에 도달했을 때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되는지를 생각해 볼 수는 있다.


솔라리스에서 과거에 만났던 사람을 만나게 된다? 솔라리스의 바다는 우리 무의식에 들어와 무의식 속에 있는 인물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인물을 우리에게 보낸다. 왜? 이유는 모른다. 선물일수도 있고, 재앙일 수도 있다.


자신이 과거에 제대로 풀지 못한 일이 다른 행성에서 반복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와 같은 방식으로 대응할까? 무한반복, 영원회귀? 아니, 이 행성에서는 성공했던 일들, 또 성공했던 관계들이 나오지는 않는다. 과거에서 불러낸 인물은 그 과거에서 실패한 관계를 맺었던 인물이다. 그것도 내게는 중요한 인물이었음에도 파국으로 치달은 인물.


그런 인물이 솔라리스에서 나에게 온다. 그렇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인물이 분명 과거 인물이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심하게 요동칠 수밖에 없다. 그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죽음에 이르게 될테고, 그 마음을 이겨낸다면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게 되겠지.


이렇게 솔라리스는 우리 잠재의식 속에 있는 인물을 우리에게 보내준다. 솔라리스 바다는 단지 그 일만을 한다. 어떤 목적의식도 없다. 또 우리를 조종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냥 내면에 있던 일들을 보여줄 뿐이다.


하여 소설 끝부분에서는 솔라리스의 이런 일들을 아기의 장난이라는 표현으로 이야기한다. 어떤 의도도 없이 그냥 순수하게 행동하는 아기들. 아기들은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다른 행동으로 넘어간다. 거기에 어떤 고민도 없다. 그냥 그렇게 행동할 뿐이다. 이런 아기의 행동을 두고 어른들이 자기들 관점으로 해석할 뿐이다.


솔라리스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지구 관점으로, 자신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행동할 뿐이다. 그 점을 주인공은 켈빈은 깨닫는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켈빈은 어떤 행동을 할까? 소설은 여기서 멈춘다. 


멈추고 있지만 비극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켈빈에게는 희망이 있다. '잔혹한 기적의 시대가 아직은 끝나지 않았음을 나는 굳건하게 믿고 있다' (447쪽)고 되어 있으니...


아주 오래 전에 나온 우주에 관한 소설인데, 지금 읽어도 그렇게 오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온갖 과학지식들이 도처에 나오기 때문이고, 우리 내면에 있는 존재들을 불러낸다는 발상이 특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른 우주에서 또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나를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연상시키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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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03-30 15: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대한 글을 읽을 수록 더 읽고 싶어져요,,, 그런데 SF는 내가 좋아하는 장르가 아닌데,,, 싶어서 주저하고요.^^;; 잘 읽었습니다.^^

kinye91 2022-03-30 16:0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저는 재미있게 읽기는 했는데, 무슨 의미인지는 잘 파악이 안 되고 있어요. 나중에 시간이 지난 다음에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코로나 19로 학생들이 학교에 등교하는 날이 확 줄어들었다. 전면등교, 정상등교라는 말이 나왔지만, 코로나는 이를 허락하지 않는 듯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2년이 지나 3년째, 학교라는 곳에 휴일을 빼고는 매일 등교하던 아이들이, 이제는 휴일이 아닌데도 원격수업이라는 이름으로 학교에 등교하지 않게 되었다.


  그랬더니 학력저하 운운하면서, 원격수업의 질이 나쁘다고, 원격수업의 질을 개선해야 한다고 이곳저곳에서 큰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문제는 오로지 학력인 것처럼. 더 다른 문제들이 있는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 오로지 성적, 성적이다.


그래, 학생 때는 공부를 해야지. 공부도 때가 있는데, 하는 말들이 있지만, 과연 학교가 아이들 성적만 책임지는 공간이었던가. 학교는 성적을 올리기 위한 공간이기보다는 아이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장소 아니었던가.


자기와는 다른 학생들을 만나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방법, 또 자기와 맞지 않는 사람과 갈등하고 화해하면서 어우러지는 방법, 교사라는 어른들, 그것도 다양한 방식으로 가르치거나 다른 사고방식을 지닌 교사들을 만나면서 사회 적응력을 키우는 장소. 그런 장소가 바로 학교 아니었나.


어떤 사람은 자조적으로 학교는 아이들의 식사(잠) 장소이자, 사교 장소라고 말한다. 밥 먹고 친구 만나러 학교에 온다고...교육기능보다 탁아기능이 더 강하다고... 이게 자조적으로 할 말인가? 오히려 학교는 이래야 하지 않을까?


친구와 만나고 놀고, 같이 밥 먹는 장소. 그런 학교... 코로나로 인해 우리는 그런 학교라는 장소를 잃고 오로지 성적, 성적만 하는 공간으로서의 학교만을 생각하게 되지 않았는가.


도처에서 들리는 학력저하 운운하는 말들은 학교를 오로지 성적으로만 존재하는 곳으로 여기고 있지 않나. 코로나로 인해 등교하는 날수가 줄어들어 학생들이 서로 어울리고, 다양한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고 그런 만남,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할 생각을 해야 하는데...


함기석 시집 [수능 예언 문제집]을 읽으며 우리나라 학생들이 갇혀 있는 수능이라는 감옥을 다시 생각한다. 수능으로 대변되는 성적, 성적, 그리고 그 성적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학교. 아니다. 학교는 그래서는 안 된다. 예전에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책도 영화도 있지 않았던가.


학교는 학생들이 행복할 수 있는 장소이자,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장소다. 그래야 하는데... 오로지 수능이라니.. 수능에 갇힌 아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 시집을 읽다보면 너무도 잘 알게 된다.


'오전 8시, 마시면 배탈 설사 나는 흰 우유 같고' (모의고사 보는 날-10쪽)라고 표현할 정도로, 수능이 아닌 모의고사 자체도 학생들에겐 견디기 힘든 존재다. 그러니 이런 청소년들은 어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우리한테 그동안 뻥쳐서 미안했다는 / 사과나무나 한 그루 심으시지'(사과나무-17쪽)라고... 하지만 어떤 어른도, 특히 권력을 쥐고 있는 어른들은 더더욱 학생들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그러니 학생들은 '아, 전국 모의고사 날은 / 전국이 모의해서 고등학생을 사망시키는 날 / 갑자기 내가 정육점 식당 갈고리에 걸린 / 9등급 고깃덩어리 같았다' (우울해서-25쪽)고 표현하게 된다.


더 많은 시들이 있지만, 이 시집 1부만 어른들이 제대로 읽어도 지금처럼 교육제도를 유지하지는 않을테다. 감정이 있는 어른들이라면... 적어도 아이들이 공각기동대라는 영화에서 킬리언 소령이 했다는 말인 '나의 정신은 인간이다 그러나 / 나의 육체는 인공 신체다'(공각 기동대-36쪽)를 비틀어서 '나의 육체는 인간이다 그러나 / 나의 정신은 인공 기계다' (공각 기동대-37쪽)라고 하게 하지는 않으려 노력할 것이다.


학교는 오로지 성적을 위해서 학생을 가둬놓는 공간이 아니다. 학교는 학생들이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온갖 실험들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장소, 또 많은 실수, 실패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하는 장소다. 그러니 코로나19로 인해 우리 아이들이 무엇을 잃었는지, 애오라지 성적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잃고 있음을 생각하고, 교육의 방향이 어떠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이 시집 1부를 읽으면 지금처럼 학교가, 교육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4부에 가면 아직도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세월호의 아픔이 오롯이 전해지는 시들이 많다. 아직도... 우리 아이들은 이렇게 힘들게...지내고 있으니...  그러니 수능이 끝나면 교과서는 쓰레기가 되고 말지... 이 시처럼.


       책 무덤


수능 끝난 학교 옥상에

책들이 쓰레기 더미처럼 쌓여 있다

알록달록 형광펜으로 칠해진 수많은 책이

수백 마리 가오리처럼 쌓여 있다

책 무덤 속에서 들려온다

글자들 우는 소리, 천둥 치던 여름밤 빗소리

절망에 빠져 흐느끼던 친구들 목소리

하늘은 옥상 난간까지 내려와 잿빛 수의처럼 펄럭이고

수능 마친 책들이 봉분처럼 쌓여 있다


함기석, 수능 예언 문제집, 창비교육. 2020년. 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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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레모사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8
김초엽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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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에 죽 읽어가게 하는 소설. 박진감 있게, 결말을 기대하게,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말로 치닫는 소설. 읽고나서도 무언가가 계속 응어리진 채 남아 있는 소설.


재미있게 읽었지만 감상을 쓰려고 하니, 무엇을 써야할지 모르는 소설.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잘 파악이 안 되는데, 작가의 말에서 '나는 이해의 실패로부터 발생하는 이야기들을 좋아하는데, 이것은 그 실패의 결과를 파국으로 밀어붙인 시도였다' (201-202쪽)라는 말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이해의 실패로 인한 파국을 이야기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무엇에 대한 이해인가? 삶에 대한 이해. 각자 바람직한 삶에 대한 이해가 다르고, 그 이해를 상대방이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데서 파국이 온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두 사람으로부터 이해의 실패를 경험한다. 주인공 유안... 한때 유명한 무용수. 다리를 잃고 기계 의족을 단 사람. 자, 과거로 완전히 돌아갈 수 있을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으로 인해 많은 노력을 하고 다시 무용을 하게 된다. 이게 과연 유안이 바라던 삶일까?


유안은 그 사람(한나)의 기대대로 행동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속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다가, 결국 자신이 원하는 삶은 이렇게 남 앞에서 다시 예전처럼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게 된다. 이 말이 나온 순간 둘의 관계는 끝나게 된다.


왜냐하면 서로가 생각하는 삶의 방식이 달랐고, 다른 삶의 방식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럴 때는 누구의 삶을 인정해야 하는가. 바로 우위에 있는 사람이 아닌,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의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위에 있는 사람은 이미 자신의 삶을 살고 있고 상대의 삶을 그대로 인정해 주어도 자신의 삶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삶을 부인하고 상대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려 하면 그 순간부터 자신의 삶에 뒤틀리기 시작한다. 자신의 삶을 살기보다는 상대가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수동적인 삶이 된다. 자신의 삶을 잃기 시작한다.


그러니 약자의 위치에 처한 사람의 삶을 자신 삶의 방식으로 끌어들이려는 행동은, 겉으로는 상대를 위한다고 하지만 결국 자신의 욕심일 뿐이다. 상대가 자신을 따라야 한다는.


소설은 이런 과거의 일이 앞부분과 뒷부분에 나온다. 그리고 현재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이 현재에서도 유안은 또다른 이해의 파국을 맞는다. 자신을 같은 뜻을 지니고 같은 행동을 하리라고 믿는 레오와의 관계에서.


레오는 므레모사에서 하는 자신의 행동을 유안이 이해하고 함께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레오에게는 므레모사에서 사람들을 구출하는 일이 혹은 자신들이 탈출해서 므레모사를 파괴하는 일이 당연한 일이다. 그런 삶은 그에게는 재앙에 불과하므로.


하지만 유안에게는 아니다. 유안에게는 그런 삶이, 어쩌면 움직이지 않고 붙박혀 살아가는 그런 삶이 바람직한 삶일지도 모른다. 레오는 상상도 하지 않던 그런 삶을 유안은 동경하고 있었던 것. 그렇다면 이들은 같은 사건을 보고도 서로 다르게 이해했다. 서로 다르게 이해했음에도 서로가 서로 삶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이곳에서도 능동적으로 주도하는 사람은 레오다. 그리고 레오는 자신의 이해를 의심하지 않는다. 유안도 당연히 그러하리라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한다. 즉, 유안이 처한 삶에 대해서 유안의 처지에서 고민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유안의 의족을 부러뜨리기도 하고, 유안에게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고 지시한다.


자, 여기서 어떤 이해가 있는가? 저 사람도 당연히 나와 같이 생각하고 나와 같이 행동하겠지라는 믿음만 있다. 그 믿음은 일방적이다. 그러니 이 지점에서 이해의 파국이 발생한다. 레오와 유안에게 벌어지는 파국이 바로 이것이다. 


이렇게 소설은 이해의 실패로 끝난다. 그러나 유안은 자신의 삶을 찾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을 읽다보면 과연 유안이 찾은 삶이 다른 삶과의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움직이지 않는 삶이라고 하지만, 자신의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다른 존재들의 움직임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선 움직임이 필요하다. 내 움직임이든, 다른 사람의 움직임이든, 또는 다른 존재의 움직임이든. 그러니 내가 움직이지 않고 살아가려면 다른 존재들을 움직이게 해야 한다.


어떻게? 이것이 바로 이 소설에 나오는 다른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물질('커맨드'라고 레오가 말한다)이다. 즉 커맨드로 다른 사람을 조종해야 한다. 여기에는 이해는 없다. 일방적인 조종만이 있을 뿐이다. 유안이 선택한 삶에도 결국 이해는 없다. 유안은 자신이 정적으로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조종하는 삶을 선택할 뿐이다. 


결국 이 소설에서는 세 가지 이해의 실패가 나온다. 과거에서 벌어지는 유안-한나의 이해 실패, 현재 므레모사에서 벌어지는 유안-레오의 이해 실패, 그리고 유안이 미래에 관계를 맺을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질 이해의 실패. 


앞 두 부분의 이해 실패에서 유안은 수동적인 처지에 놓여 있다. 한나와 레오가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세 번째 이해의 실패에서는 유안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이기는 하지만. 수동적이든, 주도적이든 모두 이해의 실패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흥미진진하게, 결말이 어떻게 될지 생각하면서 한 달음에 달린 소설인데... 읽고 나서 무언가 계속 마음 속에 남아 있다. 그 무언가가 바로 소설을 읽게 하는 힘이고, 또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힘일텐데... 무언가가 계속 무언가로 남아 있으니, 여전히 이해의 실패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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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그릇 싸움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안 먹고 살 수는 없으므로, 먹을거리를 담는 밥그릇은 우리 생존에 필요한 물건이다.


  그런데 밥그릇이 빛난다는 말을 시인이 하고 있다. 매일 닦아서 빛난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바깥 부분의 빛남이 아니라 안쪽의 빛남이라면, 이는 밥그릇이 비어 있다는 뜻이다.


  채워지지 않은 밥그릇, 빛을 흡수하지 못하고 반사하기만 하는, 텅텅 빈 밥그릇. 한번도 풍족하게 채워지지 않은 밥그릇.


  그런 밥그릇조차도 지키려고 아등바등댈 수밖에 없는 존재. 최종천 시집을 읽으며 밥그릇의 중요성을 생각한다.


  어쩌면 그 풍족하지 않은 밥그릇조차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밥그릇은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먼저 해결해야 하는데, 그것이 그리 쉽지만은 한다. 내 밥그릇에 밥을 채워주는 존재에게 묶여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묶임에서 벗어나려면 최소한 내 밥그릇이 비지는 않는다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아주 조금밖에 주어지지 않는 밥그릇을 걷어찰 수도 있어야 하는데, 이 시를 읽으며 기본소득을 생각한다.


       투명

 

혀로 빛나게 핥아놓은 밥그릇에는

허기가 가득 차 있다

허기는 투명하지만 잘 보인다

뼈가 앙상한 것을 보면

이빨은 이제

밥그릇도 씹어먹을 수 있으리라

나는 개들이

씹던 목줄을 뱉어내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내 손가락을 철망 안으로 넣어주었을 때

녀석은 절대로 물지 않았다

내가 밥을 준다는 투명한 의식이

녀석을 밥그릇 안에 가두어놓고 있는 것이다

하루에 두 끼나 세 끼를 주고 싶지만

나는 사장의 명령에 따라 한 끼만 주고 있다

나는 회사의 수위

개는 밤에 내가 할 일을 대신한다

사원들이 퇴근할 때, 개집 문을 열어놓아

불투명한 밤을 투명하게 밝혀놓아야

안심하고 잠잘 수가 있다

간밤에 없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일감들 사이에서 녀석이 잡아놓고

다 먹지 않은 의문 하나가 피를 흘리고 있다

내가 받는 임금은 아주 적다

게을러지는 것을 방지하고 굶어죽지 않을 정도

그러니까, 개밥 정도인 것이다

개의 그 깊은 낮잠 속에 고여 비치는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

 

최종천,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 창비. 2007. 32-33.


노동자들의 소득을 유리지갑이라고 하기도 한다. 소득이 확연히 다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만큼 감출 것이 없다. 사실, 얼마를 버는지 다 알려진다는 의미도 있지만, 적은 소득이라는 의미도 있다. 이 시 제목이 '투명'이다. 


없으니 투명할 수밖에... 이제는 누구라도 자신의 밥그릇이 이렇게 빛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적어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밥그릇이 보장된 사회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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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인가 - 미투 운동에서 기후위기까지
리베카 솔닛 지음, 노지양 옮김 / 창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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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미국 사회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리베카 솔닛의 글을 모아놓은 책이다. 읽으면서 역시 솔닛이야 하게 하는 책.


일어났지만 보이지 않았던 일들, 말해야 하지만 말하지 못했던 일들에 대해서 솔닛은 보여주고 말하고 있다.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솔닛에게 진실은 말해져야 한다. 


그런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약자인가, 강자인가? 책 제목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인가'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누구의 이야기인가에서 말해지지 않았던 사람들, 우리 주변에서 늘 일어나고 있었지만 모른 체 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뜻도 있겠고, 반대로 그렇게 힘없는 사람들은 말을 하지 못하게 하고 오로지 자신의 말만을 했던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는 생각이 든다.


즉 '누구'란 말에는 강자와 약자 쪽, 어느 쪽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야기를 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바로 강자다. 이야기의 대상이 되는 존재는 약자다. 지금까지는 그래왔다.


강자는 이야기를 하고, 약자는 이야기를 억압당해 왔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조차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약자들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한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를 이끌고, 또다른 이야기들이 꼬리를 물고 계속 나온다. 세상을 향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말을 한다는 것은 이제는 강자에 의해 입을 다물고만 살지 않겠다는, 삶의 주체로 살아가겠다는 선언이자 행동이다.


이런 점에서 미투 운동도 나왔고, 또 다른 많은 운동들이 나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약자들은 이야기하기를 꺼려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약자들의 이야기는 강자들의 관점으로 굴절된다. 강자들이 변형시킨 이야기들만을 진실인양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솔닛은 이 점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인가'라는 말 속에서 우리는 강자가 왜곡시킨 말과 진실을 이야기하는 말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말잔치가 벌어질 때가 있다. 선거 때면 온갖 말들이 난무한다. 그런 말들이 나돌아다닐 때, 솔닛의 이 말 '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인가'라는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한 이야기인가, 아니면 약자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어 말하는 이야기인가? 약자에 공감하는 이야기인가, 약자를 억압하는 이야기인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이 책에는 그런 조작된 이야기들의 사례가 많이 나온다. 


우리가 민주주의 국가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미국에서 이런 거짓들이, 이런 폭력들이 행해지고, 이 행위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사회 분위기가 여전하다는 사실에서, 최근에 자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사람들에 대해서 만나게 된다.


한편 한편의 글들이 다 좋지만, 그 중에 이런 말이 나오는 글 '영웅의 등장은 일종의 재난이다'를 읽으면 뛰어난 개인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된다. 이 중에 이런 말...


'긍정적인 사회적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을 뛰어넘기보다 그 사람들과 손을 잡아야 한다. 변화는 한 사람의 행동이 아닌 공동 작업에서 비롯된다. 이때 필요한 자질은 전통적으로 남성적이라기보다는 여성적이라 여겨졌던 특징, 스포츠맨보다는 모범생이 갖춘 자실이다. 즉 경청하기, 존중하기, 인내하기, 협상하기, 전략과 계획 짜기, 이야기 만들기 등이다. 하지만 우리는 고독하면서 특출난 영웅을 좋아하고, 주먹 싸움과 멋진 근육을 사랑한다.' (228쪽)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바로 이것이다. 손잡고 함께 행동하기. 이런 일들을 말끔하게 해결해줄 헤라클레스는 없다. 아니 있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우리의 이야기를 그에게 넘겨주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솔닛의 이 책을 읽으면서 그간 우리 사회에서도 어떤 사람들이 주로 이야기를 했는지 생각하게 됐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 묻혀버렸던 수많은 약자들의 이야기가 이제는 우리에게 들리게 해야 한다.


그래서 이젠 이야기의 주인공이 강자가 아니라 바르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진실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행동할 수 있을 때 그 사회는 편견과 혐오, 차별이 없는 사회가 된다. 우리가 원하는 사회가 그런 사회 아닌가. 그런 면에서 우리 모두는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걸 누군가가 막아서는 안 된다.


어떤 책을 읽어도 결코 실망을 주지 않는 솔닛이다. 이 생각을 또 하게 만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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