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 여섯 개의 세계
김초엽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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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전세계가 팬데믹에 빠졌던 상황을 기억할까? 대부분의 사람이 다른 사람과 직접 만나지 못하고 화상으로나 만났던 그 시대를. 


3명 이상이 모이지 못하고, 어디를 가던 자신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겨야 하며, 마스크는 필수였던 시대. 학교조차도 대면 교육을 하지 못하고 원격 교육을 하던 그 때를 지금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겨우 3년이 지났을 뿐인데... 참 빨리도 잊는다. 거리에 나가보면 사람들로 북적인다. 여전히 마스크를 쓰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 또 거리낌 없이 서로 만나고 얼싸안는다. 


그래서 팬데믹은 머언 과거가 되어버렸다. 또다시 그런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 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팬데믹은 우리들의 삶을 많이 바꾸어 놓았다.


과거의 호된 경험이 사람들로 하여금 기존의 삶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코로나 19는 어떤 점에서는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대면의 중요성, 즉 서로가 서로를 직접 만나는 관계의 중요성을 깨우치게 했다는 점이다.


그냥 화상으로만 만나도 될 것 같았고, 재택근무를 하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고, 원격으로 하는 공부도 언제든 접속이 가능하고, 질문과 대답이 가능하기에 더욱더 학습 효과가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아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우치게 한 것이 코로나 19로 인한 팬데믹이다. 그렇다면 팬데믹 이후의 세상은 어떤가? 원격이 전부일 수는 없으니 서로 만나는 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그렇다고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제는 원격과 대면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런 코로나 19를 맞아 전세계가 팬데믹에 빠져 있을 때 작가들이 팬데믹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작품을 썼다. 여섯 명의 작가가 창조한 팬데믹과 팬데믹 이후의 세계다.


먼저 끝과 시작(apocalypse)라는 제목을 단 소설이 두 편이다. 계시나 종말을 뜻하는 '아포칼립스'. 그렇다면 팬데믹은 종말을 뜻하기도 하지만 계시이기도 하다. 이대로 가다간 멸망한다는. 그런 세계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이미 멸망한 세계 이후를 살아가는 존재들이 나오지만.


김초엽, 최후의 라이오니

듀나, 죽은 고래에서 온 사람들


다음은 전염의 충격(contagion)이라는 제목으로 작품이 두 편 실려 있다. 감염이 확산된 시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한 편은 차라리 과거로 돌리면 좋겠다는 소망이 담겨 있고(미정의 상자), 또 다른 한 편은 감염이 된 세상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그 상자)이 담겨 있다.


정소연, 미정의 상자

김이환, 그 상자


마지막으로는 다시 만난 세계 (new normal)라는 제목으로 두 편이 나온다. 다시 만난 세계는 팬데믹으로 인해 완전히 변한 세상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은 과거와 그리 달라져서는 안 될 것이라는 점을.


배명훈, 차카타파의 열망으로

이종산, 벌레 폭풍


아무리 격리되어도 사람들은 서로 연결지으려 한다. 연결이 되지 않는 사람들의 삶은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격리되어도 어떻게든 화상으로나마 연결되려고 하지 않나. 그렇지만 팬데믹이 더 길어지고, 그러한 세상이 일상이 된다면 대면과 원격의 비율이 반대로 바뀌겠지. 바뀌기는 하겠지만 대면이 완전히 없어질 수는 없다는 것. 


이렇게 여섯 편의 소설은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을 겪은 우리들이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 또는 우리들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도록 해주고 있다.


팬데믹이 끝났다고 다시 과거와 같이 살 수는 없다. 무엇이 팬데믹을 초래했는지 찾고, 더이상의 팬데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런 과제를 코로나19가 남겼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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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삶이다.


어려웠던 시기를 거쳐 새로운 시기에 접어들었다.


같은 일을 반복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탄핵. 그 다음이 더 중요하다. 왜 탄핵이 되었는지, 탄핵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얻으려고 했는지를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람 하나를 바꾸는 일이 아니다. 그동안 지체되었던 개혁을 해나가는 일이다. 과거에 머무르고 있는 법 조항들은 개정해야 하고, 여전히 과거에 얽매여 있는 것들은 미래를 향해서 고쳐나가야 한다.


그리고 개혁의 대상이 개혁의 주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마치 자신들은 아닌 양 하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속아서는 안 된다.


국민을 대변하라고 있는 정당, 정당의 목적이 집권하여 자신들의 정책을 실현하는 데 있다고 하지만, 자신들의 정책은 바로 국민의 바람이다. 국민의 바람을 실현하지 못하는 정당은 정당 역할을 하지 못한다. 정당은 공당이어야 한다. 누군가가 좌지우지하는 정당이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듣게 해야 한다. 큰 소리로, 더 강하게.


[삶이보이는창]은 그러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이들의 목소리가 정치권에까지 가 닿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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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SF #1
정소연 외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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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작품이 많이 나오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한때 문단에서 정통 문학으로 취급받지 못해서, 외국에서는 많은 작품이 나왔음에도 우리나라에서는 도외시 되었던 문학이었는데... 최근에 봇물 터지듯 SF작품들이 나오고 있다.


왜 그럴까? 그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는 문장을 이 책에서 발견했다. SF에 대한 여러가지 글을 실어 놓은 바로 이 책에서.


'SF 영화에 투영된 과학과 기술은 현시점에서 상상한 미래가 아닌, 그 시대가 과학이라는 미명 아래 무엇을 욕망하고 두려워했는지를 반영한다.' (279쪽)


이 문장에서 SF 영화를 SF문학으로 바꿔도 된다. 우리나라에서 SF문학이 많이 나오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욕망하고 두려워하는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소외되고 차별하는 것들이 결국 우리를 좀먹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SF문학을 읽게 하는지도 모른다.


SF문학에서는 이러한 문제들이 기정사실로 드러나 있고, 소외와 차별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를 상상의 세계, 상상의 인물(존재)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문학을 통한 간접 경험을 충분히 하게 된다.


이러한 때 SF문학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책이 나왔다. 이 책은 그에 걸맞게 다양한 글을 싣고 있는데, SF 공간과 작가에 대한 소개와 비평이 있고, 영화감독 연상호와 SF작가 배명훈의 인터뷰가 있으며, SF작품이 7편이 실려 있고, SF에 대한 칼럼과 신작 소개가 수록되어 있다. 


그야말로 SF작품에 대하여 다양한 방면에 대한 글들이 실려 있어, SF작품에 대한 초심자라도 쉽게 읽을 수 있고, 여러 편의 SF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자신이 읽은 것을 떠올리면서 읽을 수 있다. 여기에 새로운 작가들을 소개하고 있어서, 더 많은 작품을 찾아 읽을 수 있기도 하고.


소설적 상상을 현실이 뛰어넘었다고 하는 말들도 들리지만, 현실은 소설의 상상을 넘어설 수 없다. 인간은 지금을 살고 있지만 눈은 늘 저 멀리를 바라보고 있다. 그런 바라봄을 우리에게 현실처럼 안겨주는 것이 바로 소설이다. 문학이다.


하여 SF작품에는 현실과 다른 장소, 인물, 사건들이 나오지만, 그러한 것들은 결국 현실로 수렴된다. SF작품을 통해 발산된 다양성들이 현실에서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들의 삶을, 생각을 통해 수렴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의 불안감을 이겨내기 위해서도 SF작품을 읽게 된다. 지금이 불안할수록 더 많은 SF작품을 찾게 되는데, 우리 사회에서 SF작품이 많이 나오는 것도 우리의 불안이 더욱 심해졌음을 의미한다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뭐, 딱딱한 글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에 실린 소설 일곱 편을 읽어봐도 좋다. 짧은 소설들이기 때문에 큰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


이 책을 읽다가 다른 책에서 읽은 김초엽의 '인지 공간'을 읽다가 이 구절에서 잠시 멈췄다. 역시 문학은 여러 번 읽을수록 다른 점을 느끼게 한다. 씹을수록 맛나는 음식과 같다.


'진리는 논쟁 속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말했다. 불변하는 진리는 모두의 인지 속에서 동일해야 한다고 사람들은 여전히 믿는다.' (150쪽)


과연 그럴까? 인지 공간이라는 모두가 공통으로 믿는 지식의 공간, 그 외의 지식은 사라져야 하는 공간만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인간일까? 인지 공간에는 어떤 지식만이 남을까? 그것은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는 사람들이 남겨야 한다고 믿는 지식들 뿐이지 않을까? 소수에 해당하는 의견, 지식들은 인지 공간에 남지 못한다. 그리고 남아 있는 지식만이 진리라고, 다른 것들을 배제하게 된다.


전체 속에 개인은 사라지게 된다. 그것은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은 아니다. 진리는 논쟁 속에서 성립한다.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고, 논쟁이 되고, 다양한 발산들이 수렴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진리는 찾아질 수 있다. 


단지 힘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권력을 쥐고 있다는 이유로 진리까지도 자신들만이 알고 있다고 하는 식의 사회는 발전할 수 없는 사회다. 그런 사회를 우리는 두려워한다. 하여 다시 읽은 김초엽의 '인지 공간'은 권력에 의해 왜곡된 진리가 우리를 얼마나 왜소하게 만드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러한 권력을 깨뜨리는 것은 또다른 거대한 권력이 아니라 작품 속 '이브'처럼 작은 존재, 그러나 자신을 잃지 않고 용기있게 나아가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SF문학에 대한 여러 글들이 실린 이 책을 읽으면 아마도 SF문학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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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이 왜곡한 한국사의 장면들 - 국어사전으로 한국사 공부하기, 국어사전 속 한국사 용어와 인물들
박일환 지음 / 새로운눈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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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학교에 다닌 사람들은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각종 상을 줄 때 상품으로 사전을 받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국어사전, 옥편, 영어사전 등을 부상으로 줬다. 그만큼 사전은 공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요즘은 집에 사전을 비치해 놓고 있는 집은 많지 않다. 굳이 종이 사전을 펼쳐볼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인터넷으로 대부분 해결이 되고, 또 인터넷 사이트에 질문을 올리면 답이 곧장 올라오기 때문이다. 인터넷 상에서 사전을 검색해서 찾아도 되고.


종이 사전이든 인터넷 사이트에 있는 사전이든 사전은 무언가를 모를 때 참고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요즘 쉽게 접하는 위키피디아라든가, 나무 위키 등을 보면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한 사실들이 정리되어 있다. 물론 잘못된 사실도 들어가는 경우가 있지만, 이것은 밝혀지는 즉시 수정이 된다.


그야말로 여러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토대로 사전 작업에 참여한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잘못된 내용은 즉시 수정을 할 수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는데, 그것을 수정해줄 사람들이 도처에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내용 중에 그래도 사전은 믿을 만하다고 여긴다. 사전을 참고하는 경우는 그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이 책을 보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권위 있다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잘못된 내용이 얼마나 많은지...


굳이 싣지 않아도 될 사람 이름까지 싣고 있는데, 이왕 수록할 것이면 제대로 하던지, 이렇게 많은 내용이 잘못되었을 줄은 몰랐다.


조선어학회에서 사전을 만들려고 할 때 얼마나 많은 조사를 했겠는가. 그들은 사전은 자신의 목숨과도 같다고 여기지 않았을까. 우리말을 모아, 그 말들이 계속 살아남도록 하기 위한 노력. 목숨을 잃은 학자도 있는데... 지금은 많은 자료들을 편리하고 빠르게 찾아볼 수 있는 시대 아닌가.


그리고 국립국어원에서 발간한 표준국어대사전이라면 사실에서 오류는 최소화해야 하지 않나. 오류가 발견되면 즉시 고쳐야 하고. 따라서 표준국어대사전을 비판하는 내용을 발견하면, 그것에 대해서 검증하고 수정하는 작업을 즉시 해야 하지 않나. 그것이 국립국어원이 해야 할 최소한의 업무 아닌가 하는데...


표준국어대사전에 수록하기 전에 '우리말 샘'이라고 따로 운영하는 사전이 있다. 사전에 등재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인정되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두는 것은 좋다. 하지만 이미 수록된 낱말들에 오류가 있다면 당연히 즉시 수정해야 하지 않나.


특히 이렇게 그러한 오류들을 바로잡아 알려주는 책이 나와 있는데... 그런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국립국어원의 책임방기라고 할 수 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사전 작업에 참여하기 힘드니, 오류를 알려주면 국립국어원에서 사전을 담당하는 사람을 두어 수정 작업을 하게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래야 어떤 사실들에 대해 알고자 할 때 사전을 믿고 참고할 수 있지. 물론 사전에 사람 이름들이나 역사적 사건들까지 다 수록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것들은 따로 인명 사전, 역사 사전 등으로 발간하면 된다. 그렇게 되기까지 이미 국어사전에 수록되어 있는 사람 이름이나 역사 사건들에 잘못된 내용이 있다면 수정해야 한다. 그런 작업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함을 이 책의 저자는 힘써 말하고 있다.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문화강국으로 가는 길이다. 앞에 K를 붙여 K-팝, K-컬처 등등이라고, 세계로 확산되어 가는 한국 문화를 자랑스레 여기는 이 때, 우리나라 국어사전에 잘못된 내용이 있나를 살피고 수정하는 것이 그러한 문화를 지속시키는 길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자기 나라 사전조차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서 세계에 어떻게 문화 강국이라고 자랑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이 책에서 지적하고 있는 내용들, 참고하고 사전의 내용을 수정해야 한다. 이 책에 나와 있는 한 가지 예를 들어본다. 얼마나 표준국어대사전에 잘못된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지...


사회교화사업(社會敎化事業): <교육> 잘못된 사회 풍조를 바로 잡고 좋은 풍속을 키우기 위하여 사회 대중을 지도하고 교육하는 사업.


좋은 말 같다. 그런데, 지금 사회교화사업이란 말은 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말의 유래는 무엇일까? 저자는 일제시대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이 말을 썼다고 한다. 즉 일본에 충성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펼치는 정책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굳이 사전에 등재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굳이 등재를 할 것이면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알려주든지. (190-192쪽)


이렇게 잘못된 내용들, 또는 불필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 이 책이다. 사전의 오류를 밝히고 있지만 읽으면서 우리 역사나 인물들을 알아가는 재미도 있으니, 한번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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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묘 대소동 - 묫자리 사수 궐기 대회
가키야 미우 지음, 김양희 옮김 / 문예춘추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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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까지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 아닌가 싶다. 그냥 사라지지 않고 무덤을 만들어 자신의 후대들이 계속 찾아오기를 바라고 있으니. 아마도 지구에 있는 모든 생물이 인간처럼 무덤을 남기를 바랐다면, 지금쯤 지구는 온통 무덤으로 뒤덮여 있으리라. 그만큼 사라져야 할 존재가 사라지지 않으면 문제가 남는다. 인간들의 무덤이 그렇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묫자리는 대부분은 땅에 매장하는 방식으로 하는 무덤이었다. 무덤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현충원이 있지 않은가. 서울에 있는 현충원만으로 부족해서 대전에도 있고, 또 다른 지방에도 그와 비슷한 묘역이 조성되어 있으니.


국가유공자라고 하는 사람들을 모신 묘역만 해도 지금 포화 상태인데, 여기에 개인 묫자리까지 하면 더더욱 남아날 땅이 없게 된다. 일본 역시 마찬가지였을 터. 물론 이 소설에 나타난 묫자리 소동은 땅의 문제가 아니라 돌봐줄 후손이 없다는 문제지만.


소설은 일본을 배경으로 한다. 며느리 역할과 시어머니 역할을 하던 사람이 죽으면서 딸에게 유언으로 가족묘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수목장을 해달라고 하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며느리라면 가족묘에 묻히는 것이 당연시하던 일본에서 자신만의 곳으로 가겠다니, 남은 남편은 충격이다. 여기에 가족묘를 돌봐야 하는 자식들도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 서로 의견이 나뉜다. 그렇다고 일본 역시 저출생으로 또는 성을 바꾼 문제로 가족묘에 들어갈 사람은 정해져 있다. 한 명 아니면 많아야 두 명 정도. 그나마 손자(녀) 대에 가면 그것마저 끊길 처지다.


이러니 가족묘에 대한 문제를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소설은 그 점을 경쾌하게 이끌어간다. 심각한 가족 갈등을 무겁지 않게 이끌어가고 있다. 며느리의 입장, 시아버지의 입장, 그리고 아들과 그 자식들의 입장에 서서 각자 자신들이 어떤 관점을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더해서 일본의 성씨 문화. 결혼을 하면 주로 남편 성을 따르는 일본의 관습을 문제 삼고 있다. 왜 결혼을 하면 자신의 성을 버려야 하는가? 세상에 성을 바꾸는 나라가 얼마나 되지? 우리나라는 자신의 성을 지니고 가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지 않는데, 일본은 성이 바뀐다고 한다. 성을 바꾼다는 것, 그냥 단순히 성만 바뀌는 것이 아니다. 관계 자체가 바뀌는 것이다.


이 관계에서 저 관계로 옮겨가는 것. 그것을 공식화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이 바뀌는 문제다. 그런데 왜 남자 쪽 성으로만? 여자 쪽 성으로 바꿀 수도 있지 않나? 소설은 그렇게 자신의 성을 지키려 하는 손녀들을 중심에 놓는다. 


적어도 남녀가 평등한 사회라면 성을 선택할 자유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나라는 고정된 성이긴 하지만 자녀에 따라서는 부모 중 한 성을 선택하거나 (예전 가부장제에서 무조건 남자 쪽 성을 따르던 것에서 벗어나고 있는 중), 부모 둘의 성을 모두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선택권이 법적으로 완전히 보장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쪽으로 가고 있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성을 선택하는 것과 묫자리 문제는 다른 것 같지만 같은 문제를 지니고 있다. 개인보다는 친족을 우선시 하는 사회의 모습. 개인과 개인이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관계 속에 개인을 위치시키는 것이다. 


살아서는 성이라는 관계, 죽어서는 묫자리라는 관계. 그러니 이 소설 [파묘 대소동]은 그러한 관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한다. 성이라는 요소에는 가부장 사회라는 모습, 여기에 누군가는 종속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관계가 만들어진다는 점이 들어 있고, 묫자리에는 소설에서도 지나가는 말로 나오지만 남자 자기 부모의 무덤인데도 돌보는 일은 주로 며느리들이 하는 것, 또 며느리는 자신의 본가로 가지 못하고 시가의 묫자리로 가는 것 등등을 통해 여성을 대등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았던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니 이 소설은 파묘와 성(姓)이라는 요소를 가지고 현대 일본 사회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무거운 주제임에도 결코 무겁지 않게, 그리고 나름대로 현대에 맞게 즉 바람직한 방향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제행무상이 결코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충실히 살라는 말이라는 것을 이 소설에 나오는 주지 스님을 통해서 보여주며, 남성들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최근에 일본에서 부부 별성 문제를 합법화하는 법안을 낸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 소설에서 성(姓)에 대한 결정권은 어느 정도 부여되었지만, 한 성으로 반드시 바꾸어야만 부부로 인정이 되는 관습은 바뀌지 않았다. 이제 그것도 바꾸려고 한다고 한다. 소설에서도 부부 별성을 반대하는 정치인이 야유를 받고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여전히 일본은 부부 별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니... 


참... 이 소설, 그런 점에서 성(姓)과 묘지를 연결지어 생각하게 하는,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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