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으로 읽는 옛집 -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왜 건축에 중독되었는가?
함성호 지음, 유동영 사진 / 열림원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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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집을 만들지만, 집이 사람을 만들기도 한다.

 

요즘 머리 속에 맴도는 말이다. 그래서 건축가들이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철학이 없다면 그들은 건축가가 아니라 그냥 건설업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김진애의 "이 집은 누구인가"라는 책도 있듯이 집은 바로 자신을 알려주기도 한다.

 

정말 그런가? 요즘에도... 아니지, 요즘은 건축이랄 것도 없이 그냥 건설만 있지 않나? 비하하는 말로 쓰이고 있는 토건이라는 말로 쓰이고 있지 않나? 어딜 가도 똑같은 아파트, 자신들은 내부가 다르다, 외양이 다르다 하지만 사실 그 나물에 그 밥인 경우가 많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이 책에서 작가가 한 말이 생각난다. 우리나라 집들은 다른 점이 없다고. 아니 정확히 말하면 특별히 다른 건축양식이 없다고. 외국에서 말하는 바로크니 로코코니 하는 양식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건축들이 이런 우리의 전통을 충실히 따랐다고 할 수 있나?

 

답은 아니다다.

 

우리는 특별히 다른 건축양식이 없지만, 집들은 거의 비슷한 양식을 취하고 있지만, 우리의 건축 특징은 집 건축의 특징을 찾는 데 있지 않고, 이 집이 주변과 어떻게 어울리고 있나 하는 점을 찾아야 한다고 한다. 그게 바로 우리 건축의 특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집을 짓기 위해서는 자연을 대하는 태도, 삶을 바라보는 자세가 중요하다. 집에는 이러한 자신만의 철학이, 삶의 태도가 나타나야 한다. 지금 우리들의 건축은 이런 면이 사상되어 있다. 그냥 짓는다. 돈이 되는 곳에... 주변의 환경을 고려할 생각도 없이, 밀어붙이고, 깎아내리고, 아니면 메워버리고...

 

그래서 삶도 집을 닮아가서 자신만의 색깔이 없다. 자신만의 색깔이 없기에 남들의 시선을 의식한다. 남들의 시선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는 듯, 남들이 하는 대로 하고 산다.

 

나만의 집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들.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이다.

 

이 책에서는 자신만의 집을 짓고 산 옛사람들이 나온다. 집 얘기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삶 얘기이기도 한다. 그만큼 그 집에는 그들의 삶이 스며들어 있다는 얘기다.

 

이언적, 조식,이황, 윤선도, 정약용, 김장생, 송시열, 윤증의 집에 대한 이야기다. 이들, 한 번은 이름을 들어봤을 학자들이다. 그들의 사상이 집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그들의 삶과 연관지어서 설명을 하고 있다.

 

우리 한옥의 아름다움을 주장한다기보다는, 자연과 사람이 함께 하는 공간에서, 사람의 삶의 철학이 어떻게 집에, 그리고 자연에 묻어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더불어 함께 나오는 사진들도 경탄을 자아낸다.

 

꾸미되, 꾸미지 않은, 자연을 이용하되, 결국 자연이 되는, 인위적인 삶을 살 자연적인 삶이 되는 그러한 집들이 나와 있다.

 

집에 대한 철학적 의미를 찾는 면에서도 이 책이 의미가 있지만, 당시 유학자들의 삶과 그들의 삶이 집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를 알게 되는 점에서도 이 책은 읽을 만하고, 또 그동안 모르고 지나갔던 집의 구조, 형태들과 삶의 철학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알려주고 있어서 좋다.

 

내 사는 공간이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만나고,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로서의 역할을 한다면, 그 집은 바로 나이기도 하다는 사실. 우리 조상들이 꿈꾸었던 집은 바로 자신의 확장형으로서의 집이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와닿았다.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책. 건축에 대해서 문외한인 나에게도 재미있게 읽힌 책.

 

 

덧말

 

이 책을 읽으면서 최근에 읽었던 민들레 78호의 학교공간이 생각났다. 결국 학교 공간도 학생들과 학생들이 만나는, 또 학생들과 교사들이 만나는, 또 학생들과 교사들과 학부모들이 만나는, 그리고 교육에 관계된 사람들과 지역사람들이, 사람들과 자연이 만나는 곳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우린 얼마나 학교 공간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던가. 이황이나 그밖의 다른 사람들은 그러한 공간 하나하나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을 환기해야 한다.

 

옥의 티. 가끔 년도가 나오면 숫자가 뒤집혀 나오는 경우가 있다. 이 책의 252쪽이 그러하다. 송시열의 집 얘기를 하면서 1951년에 파직을 당하고, 1953년에 집을 지었다고 되어 있는데, 9자는 6자가 뒤집힌 경우일 터. 1651년에 파직 당하고, 1653년에 집을 지어가 맞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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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속의 신체지도
샌드라 블레이크슬리 & 매슈 블레이크슬리 지음, 정병선 옮김 / 이다미디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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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놀랐다. 뇌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었는데... 하긴 몇 권으로 뇌에 대해 안다고 말을 하면 안되는 일이지만, 그래도 뇌가 참 신비한 일을 하는 존재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이 책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고 있다.

 

인간을 뇌로만 파악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최신과학 성과를 무시하지도 않고, 예로부터 내려오는 영성이라는 문제를 피하지도 않고 종합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뇌는 우리의 신체에만 관련되어 있지 않고, 신체와 정신의 종합이라는 사실... 그래서 뇌만으로는 인간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주장.

 

가령 우리는 뇌과학에 힘입어 많은 부분들의 뇌의 작용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 않았나 싶다.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소설이 바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란 책에 실린 '완전한 은둔자'란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자신은 바로 뇌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영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자신의 뇌만 남기고 해체하여 이 뇌를 영원히 보존하기로 한다. 그러면 자신은 영원히 자신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말이다. 결말 부분이 참 허망하지만 말이다. 주인공이 들인 노력에 비하면.

 

과연 그럴까?

 

우리의 신체를 모두 절개해내고 뇌만 남긴다면 그 뇌는 바로 우리일까?

 

이 책을 읽으면 아니다가 정답이다. 베르베르는 이러한 뇌가 인간의 전부라는 사실을 전파하는 사람을 비판하기 위해서 그 소설을 썼다고 생각하지만, 소설로는 과학이 반박되지는 않으니, 이 책이 뇌는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은 뇌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반박하는데 충분한 자료를 제공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뇌 속의 신체지도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는, 뇌에서 우리를 움직이는 요소, 즉 뇌는 인간이라는 말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뇌만이 우리 인간을 구성하지 않고, 우리들의 신체활동이나 도구활동 역시 뇌를 구성해낸다는 점을 설득력있게 예를 통해서 제시하고 있다. 즉 뇌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우리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구성된다는 얘기다.

 

뇌 속에 호문쿨루스라는 난쟁이 인간이 있어, 그가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되, 호문쿨루스는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 다양한 호문쿨루스들이 존재하면, 이들은 우리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감정까지도 무시해서는 안된다고 하니... 인간은 신체와 감정이 어우러져야 온전한 인간이 된다는 사실을 뇌과학을 통해, 특히 뇌신경학을 통해 잘 알려주고 있다.

 

운동경기에 이야기되는 마인드컨트롤도 뇌신경과학을 이해하면, 뇌에 있는 우리의 신체지도를 알면 당연하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가 영적인 체험을 하는 상황도, 뇌의 신체지도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 외적 원인이 없는 극심한 통증도 역시 뇌의 신체지도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다스리느냐에 따라 통증도 다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지금까지의 과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설득력있게 제시하고 있다.

 

뇌신경과학 책이라 상당히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다. 쉽게 읽힌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들을 들고 있어 이해하기도 쉽다.

 

학교 교육에서 기초적인 과학지식도 교육되어야겠지만, 이러한 최신 뇌과학을 학생들에게 교육을 하면 공부하거나, 해동하는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도 든다. 물론 어른들이 먼저 읽으면 좋은 책이지만 말이다.

 

나는 단지 뇌로만 환원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 뇌과학책 몇 권을 읽으면서 뇌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가 바로 나라면 과연 나는 무엇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나는 뇌와 그밖의 다른 여러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만나 관계라면서 만들어진 복잡하고, 자율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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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 시인선 276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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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읽다보면 한 두 편의 시가 마음을 움직인다. 와, 이 시다.

 

그런데, 어떤 시집은 읽다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우리 현실을 이토록 잔인하게 표현하고 있다니 하면서.

 

시가 세계의 자아화라는 조동일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시는 나와 나 외부의 일들을 철저히 나로 받아들이는 존재인데... 내가 받아들인 외부의 세계가 시에 나타나므로, 시를 통해서 내 감정을, 나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게 되는데...

 

이 시집을 읽으면서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어쩌면 10년도 더 된 옛일이 이 시 속의 현실일텐데... 왜 지금 현실 같을까?

 

10년 동안 세상이 조금 더 좋은 쪽으로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더 안 좋은 쪽으로 퇴보했단 말인가?

 

이 시집을 관통하는 말들은, 이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시에서 찾을 수 있다.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이라니... 사전이 세상의 말들을 담고 있는 대상이라면,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은 이 세상을 이 일곱 단어로 파악할 수도 있단 얘기가 된다.

 

시인이 제시한 일곱 단어는 "봄, 슬픔, 자본주의, 문학, 시인의 독백, 혁명, 시"이다.

 

그런데 "봄"은 기쁨이 아니다. "놀라서 뒷걸음치다/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로 표현되어 있다. 우리의 젊음을 봄이라고 하는데, 젊은 생기가 있고,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넘실대야 하는데, 아니다. 뒷걸음치다로 표현하고 있다. 젊음에서 앞보다는 뒤를 느끼는 세대, 불행한 세대다.

 

그러니 자연스레 "슬픔"으로 갈밖에.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고 되어 있다. 세상에 이 젊음에 설상가상, 엎친 데 덮친 격이라니... 무거운 절망이 느껴진다. 이 절망은 "자본주의"에서 유래한다. 이 절망에서 벗어나려는 젊음이 선택한 길.

 

"문학" 역시 길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길을 찾을 수 있게 해주는 대상, 누구나 다 힘들게 서 있어야 할 때 잠시 앉아서 쉬라고 자신을 내어주는 존재 그것이 바로 문학이다.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대/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따뜻하게 우리를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문학을 하는 사람 중에 시인이 된다. 그러나 시인이란 밖으로 향하기보다는 자신을 향하는 사람. 자신을 향하면서도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

 

"시인의 독백"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이라고... 이 소리들. 합쳐서 나타나면 혁명이 된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한꺼번에뒤집히는 혁명이 과연 우리의 현실이 될 수 있을까?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이라고 한다. 혁명은 그리 쉽게 보이지 않는다. 그리 쉽게 현실이 되지 않는다. 현실은 아직도 어둡다. 이 어두운 현실에서 혁명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 지니는 마지막 무기.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시는 누구에게 명확히 전달되지 않는다. 어느 누구에게 속하지도 않는다. 시는 어느 순간,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읽힌다. 그러나 "너"는 시 속에 없다. 시 속에서 너를 찾아선 안된다. 너는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를 이렇게 읽었다.

 

이 시집의 지독한 우울함과 암담한 현실에 대한 시들을 이 시가 한 줄로 꿰고 있다고.

 

다만, 이 시들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시에 나타난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들이 나아갈 바를 찾으면 되니까.

 

그게 이 시집의 긍정적인 면일테니까.

 

덧말

 

이 시집에서 지독한 우울함, 암울함이 느껴지는 시들은, 가족, 서른 살, 줄리엣, 봄이 왔다,연무도시, 벌레가 되었습니다, 달팽이 대장, 바깥 풍경 등이다.

 

앞에서 인용한 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은 전문이 아니다. 몇 개의 문장이 빠졌다.  전문은 이렇다.

 

 

봄, 놀라서 뒷걸음치다/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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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에 관한 기사가 신문에 나면, 어김없이 다음에는 그 기사 내용에 관한 논쟁이 실린다.

 

어떤 형태로든, 정부의 발표는 여러 논의를 유발하고, 또 다른 시민단체에서 발표를 하면 또다른 논의를 유발한다.

 

정답은 없다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저마다의 정답을 지니고 있는 분야가 있을까?

 

그래서 교육은 해결되지 않는 화두다. 아니 화두 자체가 개인의 깨달음을 전제로 하지 똑같은 깨달음을 유발하지는 않으니, 교육을 화두라고 하면, 교육을 개인에게 맡겨두는 꼴이 되는 셈인가.

 

그렇다해도, 화두란 깨달음이고, 이 깨달음 자신의 깨달음이지만, 깨달은 사람이 많을수록 좋은 세상임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교육은 우리에게 영원히 끝나지 않는 화두여야 한다.

 

다만, 이 화두를 붙들고 정진해야 한다는 사실만은 잊지 말아야 한다.

 

몇 년전부터 우리나라 학생들에게는 집중이수제라는 제도가 생겼다. 한 학기에 8과목 이상을 듣지 말라고 법으로 정해놓았다. 학생들의 과중한 학습을 막는다는 취지에서.

 

좀 우습기는 하다. 학원에서 10시, 아니 11시까지 학습을 하고 오는 아이들에게 기껏 6시간 정도 공부하는 학교의 학습이 과중하니 과목을 줄이라니...

 

그래서 각 학교는 학기당 8과목으로 과목을 축소했다. 끽소리 못하고.

 

이 결과 전학생들이 커다란 곤란에 처하게 됐다. 도대체 자신은 이미 한 학기 배우고 간 과목이 그 학교에서는 아직 시작도 안 해 또 배워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다음엔 자신은 배우지도 않는 과목이 그 학교에서는 이미 끝나 배울 기회가 없게 되는 경우가 생긴 것.

 

이걸 해결한다고 방학 때 특정한 학교를 지정해 그 학교에서 얼마 간 수업을 받으란다. 뭐야, 과중한 학습부담을 줄여주겠다고 집중이수제 한다더니, 방학 때도 나와서 들으라고?

 

좋은 제도가 다른 뒷받침없이 실시되었을 때 나타나는 부작용이 한꺼번에 터져나오고 있는 셈.

 

여기에 얼마 전에는 절대평가를 실시하겠다고 한다. 반발도 심하고, 찬성도 많고. 우습지 않나. 왜 절대평가가 반발에 휩싸여야 하지. 교육은 목표가 있고, 그 목표에 도달했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수단이 바로 평가 아닌가? 그렇다면 평가는 절대평가여야 하는데... 이는 특목고, 자사고를 살려주려는 꼼수라는 비판이 타당성을 얻고 있는데, 왜 그런지 생각해봐야 하지 않나?

 

한 가지 정책이 다른 정책과 연결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부작용 두 번째가 바로 절대평가.

 

또 교과교실제라는 제도가 있는데, 지금껏 우리는 학년 반이 있고, 그 반에서 수업을 받아왔는데, 이제는 교과교사들이 상주하고, 학생들은 이동을 해서 수업을 받으라고 하는 제도. 얼핏보면 대학교의 제도와 비슷한데, 문제는 교실도 없고, 학생들도 자신의 의지로 교과교실을 선택하지 못하고, 선택당하는 처지라는 점.

 

다른 정책과 동떨어진 정책이 나타낼 수밖에 없는 부작용 세 번째가 바로 이 교과교실제.

 

민들레 78호를 읽었다. 이번 호를 읽으면서, 이번 호의 특집이 공간에 관한 문제였는데, 집중이수제, 절대평가, 교과교실제가 이 공간의 문제와 겹쳐서 떠올랐다.

 

왜,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지 않나. 우선 학교의 공간을 재배치해야 한다. 꼭 교실들이 똑같을 필요가 있을까? 지금과 같은 크기를 꼭 유지해야 하나? 교실 두 개를 세 개로 만들 수 있지 않나? 그렇다면 현재 교실이 30개 정도인 학교는 45개로 늘어날 수 있는데, 이를 교과교실로 활용하면, 교사들이 모두 자기만의 교과교실을 가질 수 있지 않나?

 

여기에 한 가지 더, 복도를 지금과 같은 일자형의 복도가 아닌 교실과 어울리는 다른 형식으로 만든다면 교실은 더 나올 수도 있을테고, 학생들의 만남의 장소이자 휴식의 장소가 될 수도 있을텐데.

 

교실 문제를 학교의 공간 재배치 문제와 연결지어 해결한다면, 다음은 집중이수제. 이는 당연히 무학년제로 가야 한다. 중학교 3년이라면, 3년 동안 들어야 할 필수과목만 정하면 된다. 그 과목을 어느 학년에 듣던 상관이 없어야 한다. 학생이 한 학기에 8과목 그러면 6학기니까 3년에 48과목만 들으면 된다. 이를 자신이 듣고 싶어하는 교과교실에 있는 교사를 찾아가 들으면 그만이다. 1학년, 2학년, 3학년 편의상 학년은 정해두겠지만(대학처럼 말이다) 듣고 싶은 과목을 듣게 되면, 전학을 가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 학년에 꼭 들어야 한다는 과목이 각 학교에 없을테므로.

 

그럼, 자연스레 절대평가로 넘어간다. 교과교실에서 자신만의 수업을 준비하고, 자신만의 목표를 제시하는 교사가 특정수준을 넘어선 학생을 통과시키고, 수준에 미달되었다면 더 듣게 하는 방향이 되기 때문이다. 전체 학년이 똑같은 시험 문제로 평가를 해서, 그걸 가지고 절대평가니, 상대평가니 하는 방법은 이 체제에서는 자연스레 사라지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 학교는 공간이 아니라, 이번 호에 실린 이문재의 말처럼 장소가 된다. 함께 지내면서 함께 나누는 공간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었을 때 학교는 민주적인 공간이고,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장소가 된다.

 

덧말

 

이번 호와 관련지어서는 헤르만 헤르츠버거의 건축수업과 리텔마이어의 느낌이 있는 학교건축을 함께 읽으면 좋다.

 

이제 학교는 획일화된 공간의 상징이어서는 안된다. 학교는 다양성을 나타내는 곳이어야 한다. 이번 호에 나온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사람이 집을 만들지만, 집도 역시 사람을 만든다는 말. 사람이 학교를 만들지만, 학교도 사람을 만든다. 어떤 학교여야 하는가, 참 중요한 문제다.

 

여기에, 중학교 교사가 학생이 고등학교에서 수학할 능력이 있는지 판단해서, 진학여부를 결정해야 하고, 고등학교 교사가 이 학생이 대학교에서 수학할 능력이 있는지 판단해서 진학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 대학 서열이 남아 있는 한 이 논의는 공염불에 불과할 수도 있다. 왜 절대평가가 특목고, 자사고에 유리한지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고교등급제를 완전히 폐지하도록 정책을 유지한다면, 교과교실제를 통한 집중이수제, 그리고 절대평가는 학교 교육을 바꾸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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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교과서 - 청소년들의 행복 수업을 위한 첫걸음
서울대학교 행복연구센터 (문용린.최인철 외) 지음, 문다미 그림 / 월드김영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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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쯤 아이들과 같이 해보고 싶은 책이다. 차분히 시간을 가지고 이 책의 물음들을 함께 또는 아이들 혼자 해보게 한다면 행복은 저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우리 곁에 있음을 이 혼탁한 시대에 깨닫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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