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세기 이후 오퍼스 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정한 옮김 / 이후 / 1999년 11월
절판


한 나라의 제도에 권력을 제공하는 것은 인민의 지지이며, 이러한 지지는 법을 생성시켰던 동의의 지속에 불과하다. 모든 정치제도는 권력의 발현이자 물질화이다.-70쪽

권력과 폭력의 가장 명백한 차별성들 중의 하나는 권력이 항상 다수를 필요로 하는 상태에 있는 반면에, 폭력은 도구에 의존하기 때문에 다수가 없어도 어느 정도 철할 수 있다는 점이다.... 권력의 극단적인 형태는 한 사람에 반하는 모든 사람이며, 폭력의 극단적인 형태는 모든 사람에 반하는 한 사람이다. 동시에 폭력은 도구 없이 단연 불가능하다.-71쪽

권력은...그냥 행동하지 않고 제휴하여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조우한다. ...(권력은) 집단에 속하는 것이면 집단이 함께 보유하는 한에서만 존속한다.-74쪽

모든 것이 권력 이면에 있는 권력에 좌우된다. 혁명을 예고하는 갑작스럽고 극적인 권력의 붕괴는 시민복종이 얼마만큼 지지와 동의의 외부로의 발현에 불과한 것인지를 순식간에 드러낸다.-80쪽

붕괴는 종종 직접적인 대결을 통해서만 명백해진다. 하지만 심지어 그 때, 권력이 이미 거리에 있을 때에도, 그 권력을 줍고 책임을 맡을 만한 그와 같은 우발적인 사태에 대비해 왔던 조직 성원들이 필요해진다.-81쪽

권력은 사실상 모든 통치의 본질이지만, 폭력은 그렇지 않다. 폭력은 본래 도구적이다. 다른 모든 수단들처럼, 항상, 그것이 추구하는 목적을 통하여 지침과 정당화를 필요로 하는 상태에 있다.-83쪽

권력은...그 자체로 모적이다. ... 권력은 결코 정당화를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 정치공동체의 현존 자체에 내재한다. 권력이 필요로 ㅎ는 것은 정당성이다.-84쪽

권력은 언제든지 사람들이 모이고 제휴하여 행동할 때 생겨나지만, 그 정당성을 나중에 뒤따라올 어떤 행동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최초의 모임에서 유래한다. 정당성은, 도전받을 경우, 과거에 대한 호소에 기초하지만, 반면에 정당화는 미래에 위치하는 목적과 관련이 있다.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지만, 결코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84-85쪽

순전히 폭력만을 통한 지배는 권력이 상실되고 있는 곳에서 작동하지 시작한다.-86쪽

테러와 폭력은 동일하지 않다. 테러는 오히려 폭력이 모든 권력을 파괴하면서도, 완전한 통제를 포기하지 않고, 반대로, 유지하고 있을 경우에 나타나는 통치 형태이다. ... 텔의 유효성은 거의 전적으로 사회적 원자화 수준에 달려 있다고 지적되어 왔다.-88쪽

권력과 폭력은 대립적이다. ... 폭력은 권력을 하괴할 수 있다. 하지만 폭력은 권력을 전혀 생산할 수 없다.-90쪽

공적인 문제, 공적인 것에 괂 아주 약간의 관념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해관계의 문제에 있어서 비폭력적으로 행위하고 합리적으로 주장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합리적이지 않다.-120쪽

폭력은 본성상 도구적이므로, 그것을 정당화시켜야 하는 목적을 달성하는데 효과적인 때까지만 합리적이다. ...폭력은 단기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경우에만 합리적일 수 있다. ... 폭력은 원인들을 촉발시키지 않으므로,역사도 혁명도, 진보도 반동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불만을 극적으로 표현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고 그래서 공적인 주의를 환기시킬 수도 있다. ... 폭력은 혁명보다는 개혁을 위한 무기이다.-121쪽

폭력의 실천은 모든 행동과 마찬가지로, 세계를 변화시키지만 더 폭력적인 세계로 변화시킬 가능성이 가장 많다.-123쪽

폭력이나 권력은 ... 인간사의 정치적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서 행동능력,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서 보증되는 인간의 특성이다.-126쪽

모든 권력의 감소가 폭력의 공개적인 초대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모르고 있다면 알아야 한다.-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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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세기 이후 오퍼스 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정한 옮김 / 이후 / 1999년 11월
평점 :
절판


아렌트 읽기를 다시 시작하다. 어떤 책을 고를까 하다가 가장 얇은 이 책을 선택하다. 먼저 머리에 기름을 칠한 다음 아렌트의 다른 책으로 넘어가는 편이 더 아렌트에 쉽게 접근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폭력의 세기, 제목을 영어대로 번역을 하면 폭력에 대하여 정도가 되겠다. 폭력에 대하여, 20세기후반에 일어났던 여러 폭력을 보면서 아렌트가 폭력과 권력에 대해서 나름대로 성찰한 내용이다. 그리 길지 않은 내용이지만, 많은 면에서 생각할거리가 많다.

 

이 책을 읽으며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폭력과 권력을 구분해야 한다. 아렌트가 말하는 폭력은 "도구적이고, 그래서 다른 모든 수단들처럼 항상 그것이 추구하는 목적을 통하여 지침과 정당화를 필요로 하는 상태에 있다"고 한다. 이에 반에 권력은 "그 자체로 목적이고, 필요로 하는 것은 정당성"이라고 한다.

 

그래서 권력은 "그냥 행동하지 않고, 제휴하여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조우한다....집단에 속하는 것이며, 집단이 함께 보유하는 한에서만 존속한다고 한다." 즉, 폭력은 사적 영역에 속할 수 있지만, 권력은 공적 영역에 속한다.

 

이런 논의를 참조하면 폭력의 상황에 사람들이 눈감을 경우, 그 폭력은 권력의 이름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명심해야 한다. 결코 권력이 될 수 없는 폭력임에도 불구하고 , 사람들은 이를 권력으로 착각하고 거기에 순응하게 된다. 이러한 무관심, 또는 감성의 부재가 사회에 폭력이 만연하에 만드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어떻게 폭력을 극복할 수 있는가를 황석영의 "아우를 위하여"란 소설을 통해서 깨우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힘센 폭력에 굴복하는 아이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폭력을 물리치는 과정이 나타난 소설인데, 이 소설을 아렌트의 이 책에 대입하면, 결국 폭력은 개인의 힘으로 나타나지만, 이러한 폭력을 극복하는 상태는 집단의 힘으로, 즉 집단의 행동으로 공적 영역에의 참여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공적 영역에 집단이 행동으로 나타내는 힘을 우리는 권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권력은 당연히 정당성을 획득하며, 폭력을 굴복시키게 된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더 마음에 새기게 된 말은, "권력이 이미 거리에 있을 때에도, 그 권력을 줍고 책임을 맡을 만한 그와 같은 우발적인 사태에 대비해 왔던 조직 성원들이 필요해진다"는 아렌트의 말이다.

 

우리가 87년 6.10민주화 투쟁으로 권력을 쟁취해야 하는 순간, 이를 준비했던 조직 또는 조직 성원들의 부재로 우리는 권력을 넘겨주고 만 경우가 있었고, 그 후의 여러 촛불 시위에서도 거리에 이미 권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권력을 받아 새로운 권력을 창출하려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점에서 이 구절은 통열하게 다가온다.

 

이러한 폭력에 대한 고찰은, 정당한 권력을 창출하려는 노력을 하게끔 만드는데, 그 노력을 우리들이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 이 또한 명심해야 한다. 다만 권력은 그냥 주어지지 않고, 행동을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다는 사실도 명심해야 한다.

 

현존하는 권력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은 물론이고, 다른 여러 요소들을 통해 권력이 아닌, 폭력을 권력으로 위장하려 한다. 이러한 속임수를 간파하고, 이미 그 권력이 붕괴하고 있음을 알게끔 해주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단순히 폭력이다 비폭력이다를 떠나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서 어떠한 행동을 해야 하는가를 잘 알려주고 있는 책이다. 짧은 분량이지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덧글

불행하게도 이 책은 품절이 되었다. 그러나 이 책에 실린 내용은 다른 책에 다시 실려 있다. 구해서 충분히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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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시사 : 1920~1945
유종호 지음 / 민음사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한국근대시사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책은 많다.

정말로 많다.

그만큼 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업적으로 내세우는 책이 바로 시사이다.

연구자라면 한 번쯤 욕심을 내보고 싶기도 하리라.

자신이 공부한 시를 하나의 체계를 세워 책으로 낸다는 일,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러다 보니 많은 연구자들이 시사에 관한 책을 냈고, 이 책들의 내용이 그만그만한 경우도 많았다.

또 이것저것 많은 연구성과들을 종합적으로 내세워서 일반인들이 읽기에 힘든 경우도 많았다고 할까...

 

이 책은 유종호 교수가 자신의 관점에서 또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우리 근대시사를 정리한 책이다.

읽기도 쉽고, 또 많은 시인들에 대해 장황하게 알기보다는 주요한 시인들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정리가 되어 있어서 기억하기도 쉽다.

 

그게 바로 이 책의 장점이다.

하지만 그는 근대지향과 전통지향, 그리고 사회현실지향과 우리언어지향이라는 네 축을 중심으로 살펴본다고 했는데, 과연 이것이 충실히 지켜졌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뒤로 갈수록 시인의 시에 대한 설명이 많아지고 있는 반면에 이 시들이 이 축이 어디에 속하는지, 그리고 이 축들이 어떠한 변화를 통해서 우리 시를 형성해갔는지에 대한 설명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도 말하고 있듯이 이 네 가지 축이 명확히 구분되지도 않는다.

아니 구분될 수가 없다. 전통지향과 근대지향은 구분히 가능하다 하더라고, 사회지향과 언어지향은 서로 나뉠 수 있는 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별의 불가능성은 시의 기본이 바로 언어라는 사실에 있다. 언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시는 이미 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를 음악적으로 표현하든, 회화적으로 표현하든, 시는 언어로 만들어진 예술이기 때문에 언어에 대한 관심이 기본이라면, 근대시사의 축을 오히려 사회지향과 개인지향으로 나누는 편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렇다치더라도 문학사에서 살아남는 시는, 좋은 시, 기억할 만한 시임에는 틀림없으니,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1920년 대에서 1945년까지 나온 시집, 또 시들은 우리가 알아야만 할 시들이다.

물론 유종호 교수가 쓴 이 책에 나오는 시들이 다 좋은 시라고 말할 수는 없다.

또 언급하지 않은 시들이 좋지 않은 시라고 말할 수도 없다.

시는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근대시사를 읽는 이유도, 이런 책을 통해 시를 평가하는 안목을 기르는 연습을 하기 때문이다.

학자들이 어떤 기준에서 좋은 시라고 하는지, 여러 문학사 책들을 읽다보면 자신만의 시를 보는 눈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눈을 통해 시를 더 잘 감상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최승호의 '이것은 죽음의 목록이 아니다' 라는 시를 빌려서 말을 해보자. 제목을 비틀어서 이것은 문학사에서 사라진 시인들의 이름이 아니다 정도로 하고...

 

이것은 문학사에서 사라진 시인들의 이름이 아니다

 

1923년 개인시집 "해파리의 노래"로부터 해방이 되는 1945년까지 나온 시집의 주인공들은.

김   억,조명희,이하인,박종화,변영로,노자영,주요한,김동환,김명순,김소월,유도순,한용운,

최남선,권구현,이광수,황석우,김영희,김동명,유   엽,양주동,이진언,이은상,정영수,김성실,

모윤숙,허수만,장정심,박귀송,김한촌,황순원,김희규,백용수,정지용,김영랑,오신혜,백   석,

김기림,장재성,김인걸,이서해,윤곤강,박영희,이용악,오장환,이상필,정희준,이   찬,허이복,

장만영,노천명,이해문,조동진,임   화,조중협,최경섭,박세영,김광섭,김대봉,최병량,이하윤,

한죽송,김태오,김상용,박용철,함윤수,김광균,이병기,김기림,정호승,신석정,박남수,김이랑,

박팔양,안자산,김동일,김남인,김해강,이기열,김달진,박노춘,서정주,강홍열,임춘길,김용호,

이가종,이강수,권   환,차원흥,김기한,이태환,진금도. 다

권영민 편저, 한국현대문학사년표1, 서울대출판부. 1987년 초판본에서

 

누가 이들을 문학사에서 사라졌다고 하는가. 어찌 알겠는가. 그들이 어느 문학사에 나올 줄.

최소한 한 권 이상의 시집을 냈던 시인들.

아마추어리즘에 빠져있든, 아니면 치열한 시적 정신을 지니고 있든, 그들은 한 권 이상이 시집을 내고 우리나라에서 시인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문학사에서 언급이 되든, 되지 않든 그들은 이미 시인으로 존재했고, 앞으로도 시인으로 존재할 것이다.

누가 언제 어떤 책에서 이들을 다시 언급할지 알 수 없으므로.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알려진 시집을 낸 시인들이 이만큼이라는 사실이 우리 근대가 얼마나 빈약한지 알려주는 증거나 되나, 이를 딛고, 더 많은 시인들이 더 좋은 시를 만들어내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20여년에 우리 시가 완전한 형태의 시로 자리매김하고, 시인이 시인으로 인정받는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에 경탄을 금할 수가 없다.

 

유종호의 책에서는 이들 중 몇 명만이 나온다.

그리고 이 목록에 없는 사람 중에 몇 사람이 더 나온다. 가령, 이육사는 해방후에 시집을 냈기 때문에 이 명단에 없지만, 그의 시들은 일제시대에 발표되었기에 이 책에서 다뤄지고 있다. 이한직도 마찬가지다. 그도 일제시대에 시집을 내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면에 발표를 해서 이 책에서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 함형수란 시인은 '해바라기 비명'이란 한 시로 이 책에 언급이 된다.

그 시 하나로 그는 시단에서 무시할 수 없는 시인이 되었다는 얘기다. 행복한 시인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리 많은 시집을 내도 문학사에서 지워져버리는 시인이 허다한데, 시 하나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시인은 많은 시를 양산해내기보다는 사람들이 기억하는 단 한 편의 시를 쓰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시인이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시인 중 한 명인 윤동주를 다루고 있지 않은 점이다.

윤동주의 시집이 해방 후에 나와서 이 책의 년도와는 맞지 않지만, 그의 시들이 비록 생전에 발표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시가 쓰여진 시기는 일제시대니 다뤄줘도 좋으련만... 저자는 엄격하게 자신의 규정을 지키고 있다.

 

한국근대시사라고 해서 시를 전공하는 사람,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만이 읽어야 한다는 편견을 버리게 하는 책이다. 대중을 위해서 쓴 책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문학전공하는 사람들이나 고르는 제목을 붙이면 잘 읽지 않는 게 우리의 모습이다.

 

그래서 우리는 제목이 주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냥 옛날에 우리나라에 이런 시인들이 있었구나, 이들이 쓴 시는 이렇구나, 이런 시들을 바탕으로 지금 우리의 시들이 나오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으면 된다. 그렇게 읽은 다음 책을 덮을 무렵 더 풍부해진 상식과 지식으로 시를 보는 눈이 한층 더 좋아진 자신을 느끼게 된다.

 

어렵다고 포기하지 말고 우선 손에 들고 읽기 시작하자.

그게 시를 이야기하는 책에 다가가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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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 개정판
한나 아렌트 지음, 홍원표 옮김 / 인간사랑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아렌트의 책은 읽기가 망설여진다. 무언가 통찰력이 있는 듯한데, 막상 손에 잡고 읽기 시작하면, 무슨 이야기인지 한참을 고민해야 한다. 아니다. 한참을 고민해야 한다가 아니라, 고민을 해도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감이 잘 안 올 때가 많다. 그래서 몇 장을 못 읽고, 책을 덮고, 쉬게 된다.

 

쉬다가 또 읽어야지 하고 책을 편다. 정말로 아렌트의 책은 자세를 경건하게 만든다. 그냥 아무렇게나 편한 자세로 읽어서는 금세 졸음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지닌 깊은 철학적 지식과 사회에 대한 통찰이 우리에게 그의 책을 읽기 힘들게 하고 있다.

 

어쩌면 철학적 사유에 대한 연습이 부족한 나만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철학적 사유에 대해서 연습할 시간이 과연 있었던가 하고 생각하면 이러한 책읽기의 괴로움은 나만의 문제는 아니란 생각이 든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근대 초기에 태어나서, 근대를 온몸으로 살아간 사람들 이야기라서, 전기문이겠거니 했다가는 큰코 다친다.

 

단순한 전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철학책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전기를 통한 철학적 사유, 정치적 사유라고 해야 할 듯한 책이다.

 

더군다나 처음 들어본 사람은, 그 사람의 전기를 간략하게 소개해도 잘 읽힐까 말까 한데, 이거는 그 사람을 그 사회에 집어넣고, 그 의미를 추적하고 있으니 더더욱 읽기에 힘들다.

 

여기에 나온 사람들 이름을 나열해 보면, 레싱, 로자 룩셈부르크, 안젤로 쥬세페 론칼리, 칼 야스퍼스, 이자크 디네센, 헤르만 브로흐, 발터 벤야민, 베어톨트 브레히트, 발데마르 구리안, 랜달 자렐이다.

 

이 중에 적어도 내가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레싱, 룩셈부르크, 야스퍼스, 벤야민, 브레히트가 다니 이 책 읽기의 어려움은 여기에서 시작할지도 모른다.

 

지식의 얕음이 이런 데서 장애로 작용을 하고, 도전 욕구를 부추기고 있기도 하지만...

 

한 가지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한 것은 어둠의 시대는 이 때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어둠의 시대라는 사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다.

 

다른 사람의 전기를 읽는 이유는, 이 책처럼 전기를 빙자한 철학적, 정치적 책을 읽는 이유는 내 삶을 가다듬기 위해서이다. 이들의 삶, 즉 이들이 이 시대에 어떻게 응전하며 살았는가를 참조하여, 이 시대에 나는 사회에 어떻게 응전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찾는 목적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

 

적어도 이들은 어둠의 시대에 그 시대에서도 빛을 발하는 등불 역할을 했으므로, 이 등불들이 있었으므로, 어둠의 시대는 단지 어둠으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수 있었으므로. 지금 이 새로운 어둠의 시대에서 어떤 삶, 어떤 공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적어도 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최소한 길을 잃고 헤매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 속으로 고립해 들어가면 안 된다는 사실, 우정 또는 인간애라고 하는 무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 이런 무기를 지니기 위해서는 사회적, 철학적, 정치적 통찰력을 갖출 수 있는 성찰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사실은 명심할 수 있었다.

 

이것이 이 책이 준 긍정적인 힘이다. 성찰하지 않는 삶은, 어둠 속에 묻힌 삶에 불과하다는 사실. 이는 철학자는 철학으로, 문학자는 문학으로, 그리고 일반 시민들은 자신들의 나약함을 인간애에 바탕을 둔 우정으로 돌파해나가야 한다는 사실.

 

브레히트 부분에서 시인에게 책임을 묻는 일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았다. 시인에게 책임을 묻는 일은 결국 시로써 물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렇담 어둠의 시대를 살아간 우리 시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이를 적용시키면 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시인이란 천상으로 날아오르려는 존재이기에 현실의 중력을 일반 사람들과 같이 적용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그들의 시는 바로 우리 인간들의 잣대로 평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시가 현실에 어떻게 대응을 해서 현실을 넘어선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있느냐 하는 잣대를 동원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저런 사람들 이야기를 하나로 정리하면, 결국 인간은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함께 할 수 있을 때 사회의 변혁을 이끌 수 있으면, 이럴 때 어둠의 시대에서 길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알려주고 있다고 본다.

 

이 책. 처음부터 읽을 필요는 없다. 다 읽을 필요도 없다. 사실,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 인물을 가지고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우선, 뒷부분에 있는 헤제논문을 읽어라. 그러면 조금 틀이 잡힐 수 있다. 그 다음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인물을 읽어라. 그 인물을 읽으면서 자신의 삶과 중첩시키며 된다. 

 

어둠의 시대, 해제논문에서 우리나라도 이러한 책을 쓰는 이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우리나라도 이에 못지 않은 어둠의 시대를 겪었다. 많은 인물들이 그러한 시대 등불이 되어주기도 했다. 한 번 시도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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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너, 우리 - 차이의 문화를 위하여
뤼스 이리가라이 지음, 박정오 옮김 / 동문선 / 199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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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다음 장면들은 차이를 인정하는 모습일까, 아니면 차별이 교묘하게 나타나는 모습일까?

 

장면 1

학교 출석번호. 분명히 한 반에 남녀가 모여 있는데,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출석번호를 정할 때 아무런 고민도 없이 남자가 1번부터 시작하도록 하고, 여자는 남자 아이들 뒤를 이어서 번호를 매긴다. 모든 일이 컴퓨터로 처리되어 굳이 남녀를 분리해도 되지 않는데... 관행이 습관으로 굳어지고, 이게 당연한 문화가 되어 이제는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당연스레 행해지고 있다

 

장면 2

연말 이러저러한 대상 시상식. 어느 방송이나 대부분은 남자 한 명을 사이에 두고 여자 두 명이 나온다. 이상하게도 주요 진행은 가운데 남자가 하고 양 쪽의 여자들은 보조 진행자란 인상을 준다. 21세기 이제는 뉴스에서도 남녀가 거의 동등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연예 활동에서는 아직도 이러한 남성 중심주의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장면 3

예전 어느 대선 때 이야기. 예전이라고 해봤자 그리 오래 전 얘기도 아니다. 한 10년 됐나? 모 여성후보가 대권후보로 나오자 여성계가 양분되었다. 이념을 떠나서 여자 후보가 나왔으니 이 후보를 지지하자는 측과 어떻게 이념을 떠나서 지지하냐는 측으로. 결과는? 뭐... 지금은 단지 여성 후보라는 이유로 그 후보를 지지해야 한다는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그동안에 대선후보까지는 아니더라도 서울시장 후보로는 여성 후보가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여성이냐 남성이냐가 아니라, 어떠한 정책을 지니고 있는냐로 쟁점이 모아지고 있다.

 

장면 4

미스코리아, 기타 무슨무슨 아가씨 선발대회. 아직도 하고 있는 대회가 많은데... 텔레비전에서는 중계를 하지 않고 있다. 이유는, 여성을 상품화한다는 것. 그런데 아직도 무슨 아가씨 대회를 만들자는 사람이 있나 보다. 무슨 아가씨보다는 그 지역을 대표하는 사람을 뽑아야 하지 않나? 그런데, 그런 대회가 의미가 있나? 지역 홍보를 위한 수단일텐데...

 

장면 5

시에서 가끔 말하는이를 찾을 때 너무도 단순하게 둘로 나눈다. 기다림의 정조가 강하고, 소극적이며, 수동적인 화자가 나오면 여성적 화자, 당당하고 적극적인 화자가 나오면 남성적 화자. 그래서 김소월, 한용운의 시에 나오는 화자들은 대부분 여성적 화자라고 하고, 이육사, 유치환의 시에 나오는 화자들은 대부분 남성적이라고 한다. 과연 그러한가? 여성의 특징이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며 애상적인가? 꼭 여성만 그러한가?

 

장면 6

다시 학교. 평가를 하는데, 음악과 미술은 남녀 구분없이 평가를 한다. 절대평가인 셈. 그런데 체육에서는 남자의 기준과 여자의 기준이 다르고, 그 기준에 따라 평가를 한다. 가끔 남학생들이 볼멘 소리를 한다. 우리는 여자에 비해 미술, 음악 실력이 모자라는데, 왜 이 두 과목은 똑같이 평가를 하고, 체육은 우리가 잘하는데, 기준이 다르냐? 다 다르게 하든지, 다 같이 해야 하지 않냐고.

 

여기서 이리가라이의 책이 빛을 발한다.

 

1987년부터, 평1989년까지 발표되었던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각 편의 끝부분에 년도가 적혀 있다.

짧막한 글들이지만 여러가지로 생각할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을 뭉뚱그려서 말하면 평등이란 같음을 추구하지 않고, 다름을 추구한다는. 그래서 이 책의 부제가 '차이의 문화를 위하여'이다. 여성이 여성해방운동을 하는데, 이는 자칫하면 남성의 자리에 자신을 놓는 운동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이리가라이는 주장한다.

 

여성은 여성다움을 추구하고, 남성은 남성다움을 추구하되, 이는 사람다움이라는 공통분모 앞에서 행해져야 한다는. 그래서 남녀의 차이를 부정하지 말고, 남녀의 차이를 인정하되, 그 지점에서 서로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즉 상대는 극복되어져야하는 대상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대상이어야 한다. 그래서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무시하는 운동이 아닌, 차이를 인정하는 운동이어야 한다고 한다.

 

참 어려운 일이다. 여성성, 남성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사람다움을 찾아가야 한다니. 그래서 이 차이가 차별이 아니라, 공생이 되어야 한다니 말이다. 이런 논점을 지니면 장면6이 이리가라이의 주장에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함께 하되, 엄연한 차이가 나는 일은 다르게 해야 한다는.

 

이러한 생활이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밴다면 차이는 차별로 나아가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남녀는 서로가 배타적인 집합이 아니라, 서로가 함께 하는 교집합을 많이 지니고 있는 두 집합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이를 인정하고 여기에서 남녀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

 

이리가라이 책, 꼼꼼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이 책의 논조를 받아들이면 단순히 남녀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다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점에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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