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주의의 기원 1 한길그레이트북스 83
한나 아렌트 지음, 이진우, 박미애 옮김 / 한길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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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가 소수를 지배하는 사회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소수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회라고 해야 하나.

 

우리가 다수결 원칙이라고 하는 민주주의 원리라고 알고 있는 제도가 자칫하면 전체주의라는 독재보다 더한 제도로 귀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러한 전체주의에서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할 수 있는 장소를 상실한 사람들이 있고, 이들은 자신의 국적을 상실한 무국적자가 된다고 한다. 이들은 어떠한 저치적 지위도 갖지 못한 집단이 된다. 그래서 인류에게서 추방당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전체주의의 기원을 찾는 노력을 한 사람이 바로 아렌트이고, 이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 한 권으로 나왔으면 좋았을테지만, 워낙 방대한 분량이라 두 권으로 분책을 했다.

 

1권에서는 반유대주의와 제국주의를 다루고 있으며, 2권에서는 전체주의를 다루고 있다.

 

전체주의의 기원을 반유대주의에서 찾고 있고, 이를 기초로 유대인 학살이 일어나게된 과정을 추적하고 있으며, 제국주의가 어떻게 해서 발생했고,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추적하고 있다. 이러한 추적을 통해서 장소를 상실한 사람들이 어떻게 배제되고 탄압당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배제, 탄압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를 고민해야 한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단 생각이 들지 않는가?

 

세계1차, 2차 대전과 심각한 대량학살을 겪고도, 2000년대인 지금에 이르러서도 과연 우리는 이를 극복했다고 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면 아니다라는 대답이 나올 가능성이 더 많다.

 

얼마나 많은 민족간의 갈등이, 인종간의 갈등이, 종교적인 갈등이 지금도 일어나나고 있는지, 우리는 헤아릴 수조차 없다.

 

이유는 무엇인가? 다름을 인정하되, 같음을 찾는 노력을 하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다름을 낯섬으로 받아들이면, 이 낯섬은 곧 두려움을 유발하고, 두려움은 이를 벗어나기 위해 낯선 상대방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한 움직임이 바로 우리 집단을 공고하게 만들고, 다른 집단을 배제, 탄압하게 하게 되는데... 인간이 이 지구상에서 자연의 위협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연을 정복하는 길로 나아갔듯이, 다른 집단에게도 이와 같은 일을 취한다고 한다. 이 책에 의하면...

 

그렇다면 우리는 낯선 존재를 봤을 때, 우선 낯선 존재에게서 다름을 찾기 보다는 같음을, 비슷함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같음을 전제한 다름은 함께함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함께함은 서로가 서로를 온전히 인정한 상태에서 자신의 전존재를 거는 모험이 될 수 있는데, 이를 실행하지 않으면 배제, 탄압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반복의 고리를 끊지 않으면, 인류는 지난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상태가 될텐데...

 

전체주의를 국가간의 문제들로만 보지 말고, 한 국가안에 있는 다른 집단들과의 관계로도 살펴보면 과연 우리는 전체주의를 벗어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우리는 이 질문을 하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전체주의를 견제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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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만든 이동수단 중에 자전거만큼 친환경적인 수단이 있을까?

어짜피 인간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선 자연과의 갈등과 타협이 중요한데, 세상의 모든 생물들은 삶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생물들에, 또는 다른 존재들에 빚지고 있는데... 이 빚을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노력이 바로 공생의 노력인데...

 

이렇듯 공생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한데, 이러한 노력이 절제를 할 수 있는 도구의 사용으로 나타난다고 하고, 이동 수단 중에서는 자전거가 절제의 도구이자, 공생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반 일리치는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고 했다.

 

인간과 자연이 공생할 수 있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면 지속가능한 성장, 아니면 녹색성장을 하위해서는 우리는 자건거와 같은 도구,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자전거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일리치가 요즘 우리나라의 자전거 문화를 보면서도 과연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고 말할 수 있을까?

 

웬만한 자동차 값과 맞먹는 자전거의 비용을 얘기하지 않더라도, 좋은 자전거를, 여기에도 명품자전거가 있으니, 구입하기 위해 외국에서 수입해 온다는 사실을 묵인하더라도, 지금, 자전거는 환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역할을 하고 있지 않나.

 

오히려 환경파괴의 상징으로 전락하고 있지 않나?

 

오랫만에 춘천 쪽으로 갈 일이 있었다. 춘천, 강과 호수의 도시 아니던가. 그런데, 이 강변에 모두 자전거도로가 만들어져 있다. 자전거 하나로 전국을 돌 수 있다더니... 길이 끊기지 않고, 자전거만 타고도 갈 수 있다고 그렇게 홍보를 하더니... 북한강에도 자전거길이 만들어져 있다.

 

와, 하는 탄성이 나오는 대신, 이 길을 만들기 위해서 이미 강에 가한 인위적인 손질이, 강의 생태를 방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론 넘치고, 때론 똑바로, 때론 구불구불, 때론 느리게, 때론 빠르게 흘러야 하는 강은 자신의 주변을 인공적으로 손대면 꿈틀거린다. 견딜 수 없어한다.

 

물론, 자전거를 타며 강변을 달리면 기분은 좋다. 풍경도 좋다. 그러나 이 눈의 즐거움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 자연과 더불어 살지 못하고, 자연을 인간에 맞게 맞추는 작업을 하면서 살면 자연이 인간의 뜻에 맞춰줄까?

 

사람과 자연을 이어주던 공생의 수단, 절제의 수단이었던 자전거가 강변에 따라 설치된 자전거도로라는 이름으로 자연과 인간의 단절을 상징하는 수단이 되지 않았는지...

 

행복이 자전거를 타고 오려면, 이러한 인위적인 자전거길이 아니라, 우리가 이동을 할 때 자가용이 아닌, 자전거를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밀집해 살고 있는 곳에서 자전거길이 만들어져야 하지 않나.

 

사실, 10킬로미터 이내에서 자전거는 빠른 이동수단이고, 몸에도 좋은 이동수단이지만, 이렇듯 우리의 여가를 위해서, 또는 그냥 자신의 장거리 여행을 위해서 자전거길을 인위적으로 만들면 길게 보면 우리에게 좋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지나친 기우일까? 확대해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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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교육청에서, 아마도 교육감 권한대행인 부교육감의 결단(?)이겠지만, 서울학생인권조례안을 서울시의회에 재심의 요청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서울시 의회의 정기회의가 열리면 이 안건이 다시 심의가 될텐데... 그동안에 서울시교육감의 재판이 어떻게 결정되어지느냐에 따라, 재심의는 취소될 수도 있다고 하는데...

 

학생, 또는 청소년에 대한 인권조례가 교육감 역할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거부되거나 수용될 수 있다는 얘기는 청소년(이하 청소년이라고 하자. 학생은 청소년에 포함이 되니 말이다)은 자신의 권리를 지니지 않은 보호받아야만 할 대상이라고 규정짓고 있다는 얘기이리라.

 

너희는 자립하지 못하니, 권리를 어느 정도 유예해야 하지 않나 하는 대답이 돌아오리라. 그러나 자립의 문제와 권리의 문제는 다르고, 또한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문제는 자립 여부를 떠나 누구에게나 존중되어야 할 권리이다. 게다가 청소년은 자립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립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규제가 있나?

 

특히 학교라는 제도에서 벗어나면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회의 편견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는데, 자립을 못했으니, 권리를 유예하라니... 

 

겨우 학생인권조례라고 시의회를 통과시켰는데... 교육을 다루는 교육청에서 그를 거부하고 나서는 꼴이라니... 이런 상황에서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54호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청소년들도 이제는 정치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고... 아니, 나서고 있다고.

 

그래서 특집 글이 "청소년, 그들의 저항 그리고 정치"다.

 

청소년들도 정치적 입장을 지녀야 되고,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내야 하며, 정치 공간에서 자신들의 권리가 관철될 수 있도록 조직하고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한다. 많은 청소년 단체들이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을 정리하고, 공과를 파악하고,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모색하고 있다.

 

충분히 시도해야 할만한 문제고, 당연히, 그리고 시급하게 시도해야 할 문제다. 청소년이 조직되어 있었다면, 서울시 교육청이, 아니 서울시 교육청의 몇몇 관료들이 학생인권조례안을 거부하는 이런 사태는 일어날 수가 없다.

 

몇 십년을 앞서가도 시원찮을 교육청이, 몇 십년을 뒤로 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을 때, 이 때 그건 아니라고 강하게 주장할 수 있는 청소년들의 단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더 든다. 이 책에도 나와 있자만 청소년의 권리는 어른들로부터 주어져서는 안된다. 청소년들이 찾아야 하는 당연한 권리이니 말이다.

 

너무 앞서간다고? 아니, 청소년을 이렇게 사람 대접 안하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대표적이지 않을까 한다. 다른 글들, 즉 청소년의 성을 말한 글을 보더라도 이는 잘 드러나고 있고, 또 청소년들의 대담에서 어른들, 더 나아가 진보운동을 한다는 어른들이 청소년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같은 사람이라고 판단하기 보다는 보호해주고 도와주어야 할 대상으로 청소년을 규정하는 한, 인권은 저 멀리에서 더 이상 다가오지 않는다.

 

나이, 경제적 능력에 따라서 권리는 구분되지 않는다. 그런 구분을 없애는 노력부터 해야 인권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

 

생각 못했던 부분, 생각하게 해 준다. 꼼꼼하게 읽어볼 일이다. 이 책은.

 

 

아직도 인권이 꽃피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인권이 꽃필 수 있게 우리 모두 관심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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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전철을 탄다.

먼 거리를 갈 경우, 전철은 책을 읽기 좋다.

아니 좋았다.

예전엔 신문을 보는 사람부터 두꺼운 책을 읽는 사람까지 참 많았다.

30분 이상 가는 거리일 때는 충분히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도 되었다.

여기에 책들을 보면 무슨 무슨 도서관이라고 책의 주인임을 알리는 표시도 된 책도 많았고.

 

하지만 지금은.

사방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 신문을 넘기는 소리가 아닌, 노래소리, 드라마 소리.

저마다 손에 하나씩 들고 있는 전자기기들.

귀에 꽂혀있는 이어폰들.

그러나 이어폰을 비집고 소리가 나오고 있다.

저렇게 크게 들어도 되나 싶을 정도다.

 

책이 없으면 차창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곤 했는데...

이제는 생각할 틈을 지니지 않는다.

생각은 이미 낭비라고 생각하는지, 조금도 심심할 겨를을 주지 않는다.

심심함, 그 권태는 요즘 세상에서는 죄악이다.

세상이 정신없이 돌아가니, 몸도 정신없이 움직여야 한다.

그러니 생각이 자리를 잡을 여유도 공간도 없다.

 

책을 읽는 사람을 보기가 힘들어졌다.

이런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줄어들었겠지.

서점에서는 나는 늘 급진파다. 우선 소유하고 본다. 정류장에 나와 포장지를 끄르고 전차에 올라 첫페이지를 읽어보는 맛, 전찰길이 멀수록 복되다. (이태준의 '책'이란 수필에서)

따라서 전철에서 읽을 수 있는 크기의 책도 사라져가고 있다.

일명 문고판.

가격도 싸고, 손에 잡기도 좋고, 또 주머니에 넣기도 편하고.

일석 삼조.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갈증을 채워주었던 그 문고판들.

지금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아직 나오고 있긴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 보기는 그리 쉽지 않다.

 

전철을 타면, 이 디지털 시대에 아직은 아날로그로 살고 싶어진다.

그래서 가끔 전철 안에서 읽을 책을 고른다.

어떤 책을 가져갈까.

너무 무거워도 안되고, 너무 두꺼워도 안되고, 내용이 너무 어려워도 안되고...

그러다 한 권 고르고...

가는 내내 읽으며 생각하는 재미.

전철을 타고 가는 맛이 난다.

즐겁다.

 

이번엔 이태준의 무서록을 골랐다.

두서없이 쓴 글. 순서가 없는 글.

수필집이다.

순서 없이, 자기 생각을 체계적으로 썼기에 아무 부분이나 맘에 드는 부분을 고른다.

그리고 읽는다.

그냥 손가는 대로 읽는다.

첫 번째 무심히 펴들었는데... "책"이다.

이런 기막힌 일이.

순간, 즐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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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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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말했다고 하지, 나이 40이 되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얼굴에 드러나게 된다고. 가끔은 그래서 얼굴이 험악한 사람을 보면, 그 사람 자체도 험악하겠다고 지레 짐작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우리는 그가 그 자신의 모습에서 악을 드러낸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하지만 막상 그 사람 얼굴을 보면 그냥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일 경우가 많지 많았던가.

 

억압을 일삼는 독재자들도 자신의 집에서는 다정한 사람이듯이, 악은 그렇게 겉으로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다. 아니, 보통 악은 우리 곁에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악은 우리에게 다가와 자신의 존재를 알리게 된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지금은 흔하게 쓰는 이 말이 처음에는 아마도 충격이었나 보다. 그래서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킨 책이기도 하겠고.

 

여기서 아이히만이라는 사람은 악의 평범성을 대표하는, 생각못함과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할 수 없음의 전형으로 나온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 이는 이미 과거의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렌트가 이야기하듯이 인류의 역사에서 한 번 일어난 일은 언제고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있지 않은가.

 

자신은 옳다고, 법과 명령에 의해 성실하게 일할 뿐이라고 하지만, 그 성실이 결국 다른 사람들, 그리고 이 지구에 해를 입히는 행동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지금도 많지 않은가.

 

언제고 어디서고 적용될 수 있는 이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우리는 그냥 지나쳐서는 안된다. 아니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 대신에, 생각못함과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할 수 없음이라는 이 두 말을 사용해야 한다.

 

자신이 하는 일이 지구에, 인류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또는 자신의 행동을 자신의 이성으로 판단했을 대 옳은지, 옳지 않은지 생각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아이히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과학기술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이 때, 하나하나의 기술들이 단지 어느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전지구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한 지역에서의 문제가 지구의 문제가 되는 이 때에 내가 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지구적인 관점과 인류적인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아이히만은 또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를 다만 법, 규칙과 명령에 충실했을 뿐이라고만 하면서 자신을 정당화할 것인가.

 

자신의 일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 알고 싶으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라. 자신의 업무(?)에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충실하게 임한 사람이 인류에 어떤 악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을테니 말이다.

 

아렌트의 글들이 대부분 어려운데, 이 책은 그 중에서도 가장 이해하기 쉽다. 아마도 재판의 기록으로서, 보고서 형식이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럼에도 많은 생각할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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