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로서의 질병 이후 오퍼스 9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2년 12월
품절


군사적 은유물은 어떤 질병에 낙인을 찍으며, 좀더 나아가서는 질병을 앓는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어 놓는다.-136쪽

특히 암과 관련된 안전하지 못한 습관은 의지 박약이나 무분별함의 결과이며, 법률이 인정한 화학 제품에 중독된 결과이다. 에이즈를 양산해내는 안전하지 못한 행위는 단지 의지박약이라는 판정을 받는 정도로만 그치지 않는다. 이런 행위는 방종이자 범죄다.-153쪽

가장 무시무시한 질병은 죽음을 가져오는 것은 물론이고, 말 그대로 인간성을 말살한다고 인식되는 질병이다.-168-169쪽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깨끗한 것과 불결한 것, 친숙한 것과 낯선 것(또는 기괴한 것)을 둘러싽 미적 판단은 질병에 따라붙는 몇몇 도덕적 판단을 강조해 준다.-172쪽

'역병'은 에이즈의 유행을 이해하는데 사용되는 주요 은유이다.-176쪽

역병은 늘 사회에 가해지는 징벌로 간주된다. -189쪽

역병이라는 은유는 어떤 질병이 (실질적으로) 모든 이들의 질병인 동시에, 병에 걸리기 쉬운 '타인들'이 초래한 그 무엇이라고 여겨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202쪽

의학은 습속을 변화시키고, 질병은 거꾸로 의학을 변화시킨다.-214쪽

성관계를 통해서 감염된다는 의심을 받지 않거나 환자를 비난할 만한 질병이 아닐지라도, 급속히 퍼져 나가는 모든 유행병은 서로 엇비슷한 회피와 배제라는 행동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216쪽

에이즈는 특권계급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느끼던 모든 재앙(즉, 역사를 만들고 바꿀 수 있게 도와준다는 재앙)의 본보기였던 것이다.-228쪽

오래 전부터 질병에 온갖 의미(가장 깊은 두려움을 나타내주는 의미)를 부여하고 고통스런 낙인을 찍어왔던 이런 무자비한 과정에 맞서 싸운다는 것은 언제가 됐든지 가치가 있는 일이다. ...
우리는 은유를 폭로하고, 비판하고, 물고 늘어져, 완전히 쓸모 없게 만들어야 한다. ...
내가 없어지는 꼴을 가장 보고 싶은 은유는 군사적 은유이다.-238-2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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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상처를 말하다 -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예술가의 뒷모습
심상용 지음 / 시공아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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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이렇게 되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상처가 있다고, 다들 예술가가 되지는 않고, 또한 예술가들의 상처라고 다 예술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상처가 꽃이 되기 위해서는 상처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상처를 보고, 상처를 보듬고, 상처가 바로 자신임을 받아들이고, 그를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면 그 때 상처는 꽃이 된다. 그를 표현해주는, 드러내주는 예술이 된다.

 

그러한 예술가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까미유 클로델, 고흐, 케테 콜비츠, 프리다 칼로, 권진규, 백남준, 이성자, 마크 로스코, 앤디 워홀, 장 미셸 바스키아를 다루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무엇인가 상처가 있다는 사실.

 

이 중에는 생전에 이미 유명해져서 부와 명성을 획득한 사람도 있지만, 생전에는 극단적인 무시와 멸시와 어려움에 시달리다 사후에 유명해진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들의 상처를 꽃으로 승화시켜 내었는데, 자신이 꽃으로 만든 사람도 있고, 남들에 의해 꽃이 피워진 사람도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면서도 다르다고 해야 한다. 나무로 따지면 이들은 자신들의 몸에 옹이를 지니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 옹이가 별볼일 없는, 오히려 목재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옹이의 무늬가 나무를 멋진 예술 작품으로 만들 수 있듯이 말이다.

 

이들이 상처를 예술로 승화시킴으로써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상처가 단지 우리를 힘들게 하고, 견딜 수 없게 하는 존재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위안을 줄 수도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는 데 있다.

 

우리들은 이들이 표현한 예술작품을 보고 우리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갖는다. 이는 그들의 예술에 대한 남들의 평가가 아니라, 바로 그들의 삶과 우리의 삶이 만나는 지점에서 그들의 예술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의미다.

 

예술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비평가의 논리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우리가 이해했을 때, 그 삶이 어떻게 예술로 표현되었나를 생각해 보는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들의 삶을 몰랐을 때도 예술 작품에 자신의 삶을 투영해 봄으로써 예술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 책에서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예술가들, 혹은 겉으로는 화려하게 보였지만, 내면으로는 이방인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또는 그 고통스러운 삶이 비평가들에의해 화려한 꽃으로 장식되었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떻든 그들은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매몰되지 않고, 그들의 삶을 예술 작품으로 표현해내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는 점에서 이 책에 함께 묶일 수 있었다고 봐야 한다.

 

자, 이제 우리는 예술 작품을 볼 때 남의 시선으로 보지 말고, 내 시선으로 보는, 그리고 그들이 진정으로 추구하려는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하면서 보는 태도를 가져야겠다. 적어도 이 책을 읽었다면, 화려한, 누구나 대단하다고 칭찬하는 작품들이 아니라, 내 삶에 다가오는 작품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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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교육혁명 - 교육 패러다임의 혁명적 전환, 미룰 수 없다
교육혁명공동행동 연구위원회 지음 / 살림터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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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정말, 교육에는 혁명이 필요하다. 단순한 개혁이나 개량으로는 어찌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한 번에 확 갈아엎는 혁명이 필요한데... 과연 지금은 혁명이 가능한 시대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그간 교육개혁에 대해서는 참 많은 논의들이 있었고, 시도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성공했다고 하는 개혁은 없었다. 그러므로 혁명이 필요하다. 이 논의에는 동의한다.

 

혁명을 하는 방법은 교육의 공공성 확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교육을 사적인 자본에 맡기지 말고, 공적 자본으로 국가가 관리하는 영역을 넓혀가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만 교육 혁명이 시작되고, 이 혁명의 첫 단계로 대학평준화부터 시작하자고 한다.

 

학벌사회라는 말이 통할 정도로 우리나라 대학들은 서열이 확연하게 나뉘고 있으며, 이 서열이 너무도 공고해서 삶의 전반을 좌지우지한다. 유럽의 나라들처럼 평준화를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이를 하기 위해서는 역시 교육의 공공성이 필요하다는 논의다.

 

개인 재산으로 취급되고 있는 대학을 국가에서 평준화한다 만다 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학을 평준화시키고, 그 다음에는 중등교육을 평준화시킨다. 자사고와 특목고 등을 없애고, 학생의 선택권도 없애며, 거주지에서 가까운 학교로 학생들을 배정하며, 시설이 열악한 학교에는 더 많은 투자를 함으로써 교육의 질이 동등해지도록 노력하자고 한다.

 

또한 3년, 3년씩 분리되어 있는 중고등학교를 6년으로 통합해서 운영하자고 한다. 그러면 소단위 학급이 되고, 오히려 공동체 정신이 살아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다음으로는 정책 면으로 나아가서, 교육부를 해체하고, 국가교육위원회를 설치하자고 한다. 교육청도 교육지원센터로 바꾸고... 좋은 말이다. 군림하는 관료집단이 아니라, 학교을 보조하고, 도와주는 집단으로 바꾸어야 한다.

 

전면 무상교육과 학급당 학생 수 감축은 당연한 일인데도, 아직 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이고, 또 학교의 비정규직 문제도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이렇듯 교육의 전반적인 면에서 교육 혁명을 하자고,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나름대로 구체적인 방안이 나왔다는데 이 책의 의미가 있는데...

 

다만, 너무도 좋은 이야기는 어쩌면 하지 않은 이야기하고도 같을 수가 있다는 우려가 든다. 이 책에 나와 있는 혁명을 하려면 힘이 있어야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

 

교육혁명공동행동 연구위원회에서 내놓은 방안이라는데, 이들의 방안에서 아쉬운 점은 방안은 제시했으나 이 방안을 어떻게 강제해낼 것인지가 제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예산부터 시작하여 평준화 문제는 정말로 강한 반대 세력이 있다. 이 반대 세력이 너무도 강해서 우리는 좋은 방안을 제시하고도 늘 제자리 걸음을 하지 않았던가.

 

청사진의 제시도 좋지만, 하나부터 실현해 낼 수 있는 힘을 키우는 일부터 해야 한다. 즉 말로만 그쳐서는 안된다는 얘기다. 말로만 그친다면, 이 책 역시 방안의 제시에만 그친다면 그것은 교육에 대해서 또 하나의 허무주의를 낳을 뿐이다.

 

정말 혁명을 하고 싶다면, 이 책에서 나온 방안들을 한꺼번에 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한다. 우선 할 수 있는 일부터, 아니면 가장 시급한 일부터 손을 대야 한다. 그 분야에 온 힘을 집중해야 한다. 집중해서 관철시켜 내야 한다. 그 다음부터는 조금씩 일을 하기가 쉬워진다. 한 번에 모두라는 생각을 하다간 혁명은 책에서만 만날 수 있는 대상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것부터 시작해야 할까? 그 지점에 대한 고민이 우리가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꼬를 틀 수 있는 방안부터 힘을 집중해야 한다.

 

이 책에 나와 있는 교육 혁명 방안들, 두고두고 생각해 둘 필요는 있다. 꿈이 없는 것보다는 꿈이 있는 것이 더 낫고, 이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현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마지막에 있는 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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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권적인, 가장 교육적인 - 학생인권이 교육에 묻다 오늘의 교육 총서
한낱.최형규.조영선 외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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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장 인권적인 교육이 가장 교육적인 교육이다. 그러면 동어반복이 되나?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생각하게 하는, 가장 인권적인, 가장 교육적인이라는 제목.

 

이런 책이 나오게 된 배경은 학생인권조례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학생인권조례라는 어쩌면 당연한 조례를 가지고 반대파와 찬성파가 나눠지고 있으니 말이다.

 

여기에 학생인권조례가 통과된 지역이 몇 개의 지역이 있지만, 그 지역들에서도 과연 인권조례가 잘 지켜지고 있나 하면 그렇지 않다는데 이 책이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 책에 나오는 한 제목이 마음에 와 닿았다.

 

인권의 한계가 교육의 한계다.

 

이 구절을 보고, 샴 쌍동이가 생각났다. 늘 함께 붙어다닐 수밖에 없는 운명. 교육과 인권도 그러한 운명을 타고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그런데 우리는 억지로 어느 한 쪽을 떼어내려고 하지 않았던가. 특히 교육이라는 이름을 살리고, 인권이라는 부분을 없애는 쪽으로.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이 책의 어느 부분에서도 나오는 말이지만, 인권에도 계급과 계층이 있나? 하는 생각.

 

도대체 학생인권과 교권이 어떻게 상충된다는 얘긴지 이해할 수가 없는데, 다른 개념을 동일한 수준에 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이 책에서는 교권과 학생인권은 다른 개념이라고 분명히 못 박고 있는데, 그럼에도 학생인권이라고 이야기하는 데서는 아무래도 인권이라는 상위 개념에 학생이라는 하위 개념이 속하고 있단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인권은 사회 계급, 계층, 신분고하, 빈부, 인종, 연령 등을 막론하고 인간이 지녀야할 보편적인 권리이다. 이 보편적인 권리는 어리다고, 가난하다고, 피부 색깔이 다르다고, 다른 민족 출신이라고, 다른 계급에, 다른 계층에 속해 있다고 제한되거나 차이가 나서는 안된다.

 

그런데 왜 학생인권조례지 하는 생각이 든 거다. 얼마나 학생 인권이 지켜지지 않았으면 이런 조례까지 생길까 하는 마음도 있지만, 학생인권조례만을 이야기한다면 학생이 아닌 집단은 자기들 나름대로 또다른 인권조례를 만들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지나친 비약인가?

 

오죽 세계인권선언이나 유엔아동청소년권리규약이 힘을 발휘하지 못했으면, 얼마나 유명무실했으면 학생인권조례를 만들 생각을 했나 싶어, 인권 후진국인 우리나라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러한 인권선언이나 규약들이 우리 사회에 관철되게 해야 하는데, 이마저도 하지 못했기에 학생이라는 특정한 집단을 놓고, 인권조례를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자조감이 든다. 그러니 학생인권과 교권을 등치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하지.

 

자, 이러한 보편적인 얘기를 그만한다면, 이제 학생인권조례를 어떻게 교육에 들여올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 또한 문서로만 남지 않게 하려면 말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그동안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고민들을 모아 놓았다.

 

물론 학생이라고 하니까 학교 현장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고, 학교 현장에서 실천하고 있거나 실천해야 하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읽으면서 내 학창시절, 그리고 지금 우리 아이들이 겪고 있는 학창시절,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 또 인권조례도 많이 사문화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인권은 위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인권은 쟁취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생활 속에서 인권을 실현할 것인가, 이를 고민해야 한다.

 

학생에게도, 그리고 교사에게도, 또한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인권에 대한 감수성을 지니고, 인권의식을 가지며, 인권을 지키려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게 바로 교육이 해야 할 일이다. 교육에서 인권을 떼어내면 안된다. 떼어낼 수도 없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 책은 바로 이 점을 말해주고 있다. 아직은 학생인권에 대해서 강조점을 찍고 있지만, 이는 곧 모든 이의 인권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된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인권, 그거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내가 하기 싫은 것, 남에게도 강요하지 않으면 된다. 이는 서양에서도 동양에서도 오래 전부터 내려오던 지혜 아니던가.

 

여기에 한 가지, 인권은 어느 집단, 어느 계층, 그리고 어느 나이대, 어느 경제상태, 어느 민족에 따라 다르지 않다는 사실. 우리는 누구나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

 

이 사실이 교육이 되지 않으면 인권은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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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없는 미래로 - 출구는 자연에너지다
이이다 데쓰나리 지음, 한승동.양은숙 옮김 / 도요새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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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원자력에 관한 책을 계속 읽고 있는 중. 한 때의 관심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우리의 미래가 걸려 있다는 생각으로 원자력에 대해서 공부를 해야 한다. 그렇다고 원자력 전문가처럼 과학에 정통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원자력에 대해서는 우리의 상식 수준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수준에서 생각하면 된다.


그 중의 하나가 원자력이 왜 대도시에 건설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 원자력이 청정에너지 발전이고, 안전한 운영을 할 수 있는 시설이라면 왜 에너지를 가장 많이 소비하고 필요로 하는 대도시에 건설하지 않는가라는 질문. 여기에 대한 대답은 뻔하다. 무언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오지에 건설하고 있고, 먼 거리에 있는 대도시에 에너지를 수송하기 위해 다른 부대시설이 또 필요하다는 답이 나온다.


한 때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온 폐기물 저장소를 건설하는 문제로, 핵폐기물 반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님비주의에 빠진 사람들이니, 지역이기주의니, 다른 사람의 선동에 넘어간 순진한 사람들이니 하는 말들이 있었다. 이 때 어느 지식인이(누군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게 원자력 폐기물 저장소가 안전하다고 하면 서울 한 복판에다 건설해라라고 한 적이 있었다. 다들 미친 소리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는데... 안전하다면 왜 서울은 안 되는지 누구도 설명하지 않았다. 아마도 다른 문제가 있겠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겠지만.


이제는 원자력발전에 대해서 반대만 해서는 안 된다. 반대가 기정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많은 지지자들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물론 대안을 제시하지 못 하더라도 우리 삶을 위협하는 발전은 하지 않아야 하지만 말이다. 원전 반대의 역사도 40년이 넘으니, 이제는 어느 정도 대안이 제시되고 있어야 하고, 또 그렇게 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원전에 대한 대안은 이미 어느 정도 나와 있는 편이라고 해야 한다.


이웃 일본에서도 원전 말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하기 위해서 많은 고민을 하고 있고, 그런 결과가 이번에 책으로 나왔다. 이미 실천하고 있고, 앞으로 실천해야 할 과제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주고 있어서, 원전에 대한 대안이 뭐냐 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이야라고 제시해줄 수 있는 좋은 내용들이 많이 담겨 있다.


제목은 “원전 없는 미래로”라고 하지만 작은 제목이 “출구는 자연에너지다”이다. 즉 자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에너지로 발전을 하면 우리에게도 지구에게도 모두 좋은 발전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자연에너지, 생소하다면 생소한 개념이지만, 이는 오래된 미래처럼 이미 오래 전부터 인류가 사용하던 에너지다. 이를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과 연관지어 더욱 발전시킨 것이 자연에너지 발전이다.


태양력, 풍력, 지열 등 지속가능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원천으로부터 에너지를 얻는 방법. 이미 몇 십년 해오고 있으며, 또 유럽이나 미국 쪽에서도 성공한 사례가 많기에 충분히 실현가능한 이야기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발전을 부안 쪽에서 하고 있다고 들었고, 상당히 성공적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그만큼 자연에너지는 앞으로 우리가 발전시켜나가야 할 에너지이고, 이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이다.


자연에너지에 대한 오해에 대한 반론으로 시작하여, 자연에너지의 역사, 그리고 일본에서의 실천 등을 자세하게 담고 있어, 우리나라에 적용하기에도 무리가 없는 내용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각 정당들의 강령에 자연에너지에 대한 정책이 들어가게 압력을 넣어야 한다. 


다른 나라처럼 새로운 건물을 지을 때 태양광 발전을 의무로 한다든지(서울에 있는 고층빌딩들에 태양광 시설을 한다면 많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 주택을 지을 때는 단열에 신경을 써서, 스웨덴처럼 난방을 하지 않아도 겨울에도 견딜 수 있게 한다든지 하는 방안을 지역 조례로 제정해서 실시한다면, 동시에 하지 않아도 자연에너지를 이용하는 마을들이 점점 늘어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에너지는 결코 거대 산업이 되면 안 된다. 이는 지역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지역에서부터 시작한 자연에너지 사업은 대체로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렇게 지역에서부터 시작한 자연에너지 발전이 점점 확산되는 구조로 가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원자력에 의존하는 모습은 점차 사라지게 되고, 환경도 점점 좋아지게 될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생활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이 책의 말미에 있듯이 우리는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지 않았던가 되돌아봐야 한다. 우리의 삶에서 에너지 효율만 높여도 우리들이 희생하지 않고도 더 적은 에너지로 더 활기찬 생활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에서는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원자력 르네상스라고 하는 이 시대, 다른 나라들은 원자력 르네상스를 포기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직 포기하지 않고 있다. 이 책에도 나와 있듯이 정부 스스로 포기하기는 힘들다고 본다. 그렇다면 정부가 포기할 수 있게, 다른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 제시 방법은 자연에너지에 있고, 자연에너지 사업은 기존 기득권을 가진 사업체들과 꼭 상반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 기존 업체들과도 충분한 협력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함께 한다면 자연에너지로 우리의 생활을 영위하는 일은 먼 나라 일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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