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관하여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5년 2월
품절


카메라는 사진을 찍는 사람이 사진에 찍히는 사람에게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채, 도덕적 한계와 사회적 금기를 넘나들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여권이다. 그 사람의 삶에 끼어드는 것이 아니라 방문하는 것, 바로 그것이 누군가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의 핵심이다.-75쪽

사실 어떤 대상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그 대상을 변하게 만든다는것이기도 하다. 아무리 사소한 변화일지라도 위험, 가령 사진의 피사체를 협소라게 이해하도록 만드는 것 같은 위엄을 가져오는 법이다.-105쪽

사진은 과거를 부드럽게 바라봐야 할 대상으로 뒤바꿔 버린다. 지난 과거를 바라보는 행위 자체의 파토스를 일반화해, 도덕적 분별력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역사적 판단을 흐리게 만듦으로써.-113쪽

삶에서는 모든 순간이 중요하거나, 빛을 발하거나, 영원히 고정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사진에서는 그런 일이 발생한다.-126쪽

사진은 단 한 순간에 우리로 하여금 예술품을 감정하는 사람처럼 세계와 관계를 맺게 만들면서도 이 세계를 아무렇게나 받아들이게 만들기에 우리를 매혹하며 사로잡는다.-127쪽

사진의 역사는 두 가지 상이한 원칙 - 순수 예술에서 유래된 미화의 원칙과 진실을 말하라는 원칙이 벌인 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133쪽

사진과 시는 둘 다 불연속성, 불분명한 형태, 상보적인 통일성을 띤다. 즉, 도도하고 자의적인 주관적 필요에 따라서 사물을 원래 맥락에서 떼어내기도, 전후 맥락에 상관없이 합쳐놓기도 하는 것이다.-146쪽

사진을 통해서 뭔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세상만물을 따로따로 떼어내 바라보는 행위, 즉 각기 다른 식으로 초점을 맞추고 시점을 정하는 카메라와 육안의 객관적 불일치로 강화된 주관적 습관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148쪽

사진은 일종의 파편일 뿐이기에, 그 도덕적, 정서적 중요성은 자신이 어디에 삽입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즉, 사진은 어떤 맥락에서 보이는가에 따라 변한다.-158쪽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객관적 세계를 무한히 전유할 수 있게 해주는 기법이자 단 하나뿐인 자아의 유아론적일 수밖에 없는 표현이다. 사진이 이미 존재하는 현실을 묘사한다면, 카메라는 그 현실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 드러난 현실은 개인의 기질을 보여준다. 현실의 어느 면을 잘라냈는지에 따라 기질이 드러나는 것이다.-180쪽

교훈적인 사진은 우리가 관찰력을 갖도록 해주고, 우리의 관찰력을 높여주기도 하며, "우리의 시선을 심리적으로 변화"시켜 준다.
... 이상적인 관찰자로서의 사진작가라는 관점은 사진을 찍는 행위가 왠지 모르게 공격적인 행위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매력적이다.-181쪽

사진은 개성있는 예술가의 의식을 보여주는 이미지가 아니라 이 세상을 보여주는 이미지로서 힘을 갖는다.-194쪽

회화와 사진이 공유하는 평가 기준 중의 하나는 혁신성이다. 회화와 사진은 시각 언어에 새로운 형식이나 변화를 제시했을 때 높이 평가받는다. 회화와 사진이 공유하는 또 다른 평가 기준은 일종의 영기(靈氣)이다. -212쪽

이와 같은 이미지는 현실의 자리를 강탈할 수 있다. 사진은 (회화가 이미지이듯이) 이미지일 뿐 아니라 현실의 해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220쪽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다루기 힘들고 접근하기 쉽지 않다고 여겨지는 현실을 꽁꽁 가둬두는 방법이자, 꼼짝 않고 그대로 제자리에 있게 만드는 방법이다.-233쪽

사진은 회상을 불러일으킨다기보다는 회상을 창조하거나 대체한다.
사진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이 아니라 이미지에 즉각 접근할 수 있도록 해준다.-235쪽

사진은 거짓된 소유이다. 과거, 현재, 미래까지도 거짓으로 소유하게 만드는 것이 사진인 것이다.-238쪽

사진은 단순히 현실을 재생산해낼 뿐만 아니라 현실을 재활용하기도 한다. 재활용은 현대 사회의 중요한 절차이다. 사진 이미지의 형태에서는 사물이나 사건들이 아름다움과 추함, 진리와 오류, 유용한 것과 무용한 것, 훌륭한 취향과 그렇지 못한 취향 사이의 구분을 뛰어넘어 새로운 유용성과 새로운 의미를 제공한다. -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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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티지 팩토리
안지훈 지음 / 학고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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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전엔 헌 책방이 곳곳에 있었다.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 있던 헌 책들에선 읽은 사람의 모습이 느껴지곤 했다. 옆에다 글을 써 놓은 사람, 좋다고 생각하던 구절에 밑줄을 그어놓던 사람. 그 책을 구입한 날짜와 장소를 기록해 놓은 사람, 다 읽은 다음 느낌을 맨 뒤 백지에 써 놓은 사람, 자신의 이름을 도장으로 만들어 찍어 놓은 사람 등등.

 

좀 낡은 느낌도 나고 이미 남의 손이 갔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헌 책들에서는 나랑 같은 책을 읽은 사람이 있었구나, 이 사람은 이 책에서 이런 점을 느꼈구나, 이 사람은 책을 이런 식으로 읽는구나 하면서 다른 사람의 향취를 느낀 적이 있었다.

 

지금은 대다수의 작은 서점들이 문을 닫았고, 동네에서 흔히 찾을 수 있었던 헌 책방도 하나 둘씩 사라지더니 지금은 큰 맘 먹고 헌 책방 나들이를 해야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네 삶의 한 부분이던 물건들이 어느새, 시나브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을 신봉이나 하듯이 옛것들은 버려야 할 것, 필요없는 것이라는 인식으로 많이 버려지고 말았다.

 

아니, 급변하는 이 정보화시대, 세계화시대에 무슨 옛것이냐고, 자고나면 새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판에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옛것들은 쓸모없음을 지나 현재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라는 인식을 지니게 되었다. 눈만 뜨면 새로움이 펼쳐지는 이 빠름의 세상.

 

하지만 이럴 때 과거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꼭 앞으로만 뛰어야 하냐고, 뒤로 뛸 수도 있다고, 오히려 뒤를 볼 때 더 다채로운 삶을 만날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빈티지에 미친 사람이라고 한다. 여기서 미친은 돌았다는 뜻이 아니라, 매니아, 즉 열중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골동품들도 많은데, 이 책을 쓴 사람은 외국에서 생활한 경우가 많기에 우리나라에서 구한 것들보다는 외국에서 구한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물건들을 구입할 때 얽힌 사연과 그 물건에 담긴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풀어가고 있다. 그래서 '옛것이 좋은 것이여'라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옛것에서 사람의 냄새를 맡으며, 사람의 생활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또 그러한 옛것들로 인해 지금의 삶이 얼마나 윤택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꼭 빈티지 수집가가 되어야지 하면서 읽을 필요도 없고, 그냥 오래된 물건에 담긴 이야기들을 글쓴이가 안내해준 대로 따라가기만 해도 좋다. 그러면 자연스레 오래된 것, 낡은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을 나를 만들어준 것들이 바로 그런 것들임을 깨닫게 된다.

 

유한한 지구, 우리는 유한한 지구를 무한하다고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좀더 크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도 한다. 빈티지에 관심이 있는 것이 단지 고상한 취미, 돈이 많이 드는 취미생활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대해서, 하루가 멀다하고 새것들이 쏟아지는 이 시대에 정말 내 곁에 있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해준다.

 

꼭 골동품 가게를, 오래된 것들이 많이 나오는 벼룩시장을, 예전 우리나라로 치면 청계천 황학시장(요즘은 풍물시장이던가, 다른 곳으로 이전했는데...)을 찾을 필요는 없다. 우리 주변에도 오래된 것이 널려 있으므로.

 

물품에 대한 이야기지만 삶의 자세에 대한 이야기로 받아들여도 된다. 무겁지 않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그 가벼움 속에는 우리의 삶이 녹아 있어서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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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을 배우는 토론학교 : 문학 - 문학과 토론의 행복한 만남 청소년을 위한 토론학교
문학토론연구모임 숨은그림 엮음 / 우리학교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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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은 토론에 약하다. 자기의 의견을 합리적을 주장한다기보다는 자기의 주장을 고집한다고 보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각종 토론 프로그램을 보면 상대방의 주장과 논거에 대한 파악과 그것에 대한 비판보다는 오로지 자기의 말만을 하기 바쁘다. 그래서 토론 프로그램은 끝까지 볼 필요도 없다. 그냥 같은 말만 계속 반복되기 때문이다.

 

토론이란 자신의 주장을 합리적으로 펼치는 말들의 싸움이라고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의 토론 모습은 말들의 싸움이 아니라 사람들의 싸움, 감정들의 싸움이기 일쑤다. 마치 토론에서 지면 자신이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받는 사람들처럼.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역사적으로 당파싸움부터 찾으면 이는 지나친 해석일까? 지금은 당파싸움을 일제가 우리나라를 비하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개념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물론 당파싸움은 치열한 논리싸움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들은 말 그대로 토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이 한 논리 대결은 말싸움에서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목숨, 심지어는 집안의 목숨을 담보로 한 논리싸움이기도 했다. 그래서 토론에서 지는 일은 자신의 목숨은 물론이거니와 집안의 사활이 걸린, 또한 자신이 속한 당파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여기에서 필요한 요소는 상대방에 대한 공감보다는 상대방을 철저하게 누르는 말의 힘, 또는 권력의 힘이었다.

 

윤휴의 예에서 볼 수도 있지 않은가. 생각이 다르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까지야 없지 않는가라고 절규했다는 그. 그는 논리싸움의 연장인 당파싸움에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잃게 되었다. 이런 일들이 역사 속에서 일어났는데, 어찌 토론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지 않겠는가.

 

근대에는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거나 목숨을 잃는 일도 많았고, 지금도 빨갱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 그 사람을 낙인 찍는 효과적인 구실을 하는 용어 아니던가. 모든 토론을 한 방에 끝내버리는 무소불위의 언어, 빨갱이.

 

이런 상황에서 토론을 통해서 공감을 배울 수 있다고 하는 책이 나왔다. 아니, 배울 수 있다고 하기보다는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책이라고 봐야 한다.

 

현직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이 학생들이 읽었으면 하는 글, 또는 읽어야 하는 글 속에서 토론 주제를 찾아내고, 이 주제에 대해 토론을 해봄으로써 나만의 입장에서 판단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입장도 고려해보는 연습을 해보게 하는 책이다.

 

다양한 주제를 주고, 이 주제에 대한 상반된 주장을 생각해보게 해주고 있다. 우리의 실생활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우리들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들을 작품을 읽고 생각해보게 한다.

 

독서가 중요하다, 논술이 중요하다, 요즘은 디베이트(debate)라고 하여 토론이 중요하다고 말들을 많이 하는데, 단지 기교로써의 토론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해보게 하는 토론을 하게 해주는 책이다.

 

어쩌면 이 책은 이미 학교에서 쓰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 쓰일 가능성도 많다. 또 쓰인다고 하면 입시와 관련해서 왜곡되어 쓰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우리나라는 아직도 토론문화가 정착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이 어떤 용도로 쓰이던 한 가지는 확실하다. 어떤 일이든지 한 가지 주장만 있지는 않다고...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입장이 존재한다고... 이 책을 읽으면 이것 하나는 얻겠지. 세상은 단일한 하나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고... 다양한 요소들이 모여 구성되어 있다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토론을 하는 이유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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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성장이 되지 않는다고 난리고, 인구가 증가하지 않는다고 난리고... 도대체 무엇을 위한 성장이고, 무엇을 위한 증가인지는 생

 

각도 않고 양적으로 늘어야만 된다고들 난리이니...

 

더 이상 가질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이 가졌는데도 우리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고 말한다. 지금 아이들의 모습을 보라. 도대체 심심할 겨를이 없는 이 아이들은 바로 성장 우선주의가 낳은 결과이다.

 

아이들, 학교 다니고 학원 다니고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 아이들이 이러한 공부로도 바쁘지만 아이들 대부분이 지니고 있는 손에 있는 기계, 일명 핸드폰 때문에 더 바쁘다.

 

잠시 할 일이 없을 때, 아니 잠시 시간이 주어졌을 때 아이들은 핸드폰을 꺼내 무언가를 한다. 아마도 문자를 보내거나 필요한 정보를 찾는 아이는 이 기계를 양호하게 사용하는 아이리라. 대부분의  아이들은 핸드폰을 꺼내 게임을 한다. 아니면 요즘, 엄청난 성능을 자랑하는 그 기계를 가지고, 아이들은 온갖 영상을 받아 감상을 한다. 잠시도 눈이 쉴 틈을 주지 않는다.

 

아이들의 이런 모습, 심심함을 참지 못하고, 기계에 의존하게 만드는 모습은, 바로 성장의 결과이다. 성장, 성장, 이렇게 외친 결과가 잠시도 심심함을 참지 못하는 아이들을 만들어내었다. 이 아이들의 심심함이 다른 창조적인, 예전 성장이 되지 않던 시대에, 할 일이 없어서, 자신들이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내었던 그런 모습들을 사라지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성장을 뒷받침하는 요소로 이번 녹색평론에서는 은행을 들고 있다. 금융자본주의! 바로 이 거대한 사기꾼이 우리를 성장의 세계로 이끌어가고 있으며,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가 못 살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은행의 허구적 논리에 대해 그 허구성을 밝혀주는 글들을 우리는 쉽게 만나지 못하고 있다.

 

마치 핸드폰이 얼마나 우리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글들을 만나기 힘든 것처럼. 녹색평론에서는 지속적으로 성장의 허구성과 은행의 허구성, 그리고 핵의 위험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책마저 없다면 우리는 그런가 보다 하고 그냥 넘어가기 십상이리라.

 

하여 철저하게 우리들의 삶을 되돌아 보아야 한다. 과연 성장에서 우리는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 우리는 은행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 부끄럽게도 나 자신도 성장과 은행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고, 그러한 삶을 생각지 못하고 지내왔다.

 

그러나 이제는 어느 정도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삶이 있다는 사실. 대안이 뭐냐는 질문에 구체적인 대답은 못할지라도 분명 다른 삶은 가능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는 생각. 내 자신의 삶을 더 들여다보고, 다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이번 호이다.

 

 

금융자본주의

- 대한보증보험주식회사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속담은 남들을 비웃을 때 쓰는 말인 줄 알고 있었던 내 어리석음을 단 한 방으로 날려 보낸 이 시대의 총아, 현대판 샤일록인 그를 만나고 나서 나는 이 속담은 이 시대에서는 속담이 아니라 격언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것을 늘 명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샤일록! 샤일록! 오! 샤일록……!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이

인간을 대신하는 것

세익스피어는 일찍이 말했지

돈이란 인간의 몸에 해당한다고

샤일록은 돈 대신 살 한 파운드를 달라고 했지

아직 자본의 시대가 아니었는데 말야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샤일록은 돈과 살을 하나로 알았지만

세익스피어는 우리의 몸에는 따뜻한 피가 있다는 것을 알았거든

돈은 그저 돈일 뿐 인간을 지배하지 못 한다고 말하고 있었지

그 행복했던 시대에 말야.


지금은 과연 무엇이 배이고 배꼽인지 알 수가 없어

샤일록은 개인이 아니라

거대한 집단으로,

권력으로 존재해서

법이란 이름으로 인간에게 살과 피를 요구하고 있지

그에게 걸리면 아무도 벗어날 수 없어

자신의 몸을 모두 주고도 모자라서

남의 살, 남의 피를 빌려서라도 갚아야 하지

우리들의 시대에 샤일록은

더 이상 피와 살을 구분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구두쇠나 철면피가 아니라

편리한 이름으로, 법이란 이름으로 인간을 착취하는 권력일 뿐


거리에 현란하게 자신의 자태를 뽐내면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불러 모으지

그리고는 아무런 감정도 없이 법이란 이름으로 처단을 하지

그들이 흘리는 피와 분노는 아랑곳 하지 않고

현대의 샤일록들

그들은 배보다 배꼽이 크다는 말을

속담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로 만드는 일들을 하지

자본의 시대에 태어난 황태자들이

이제는 황제로 등극하여 우리들에게 군림하고 있지

그런 시대, 위대한 자본의 시대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이 나라, 이 시대

따뜻한 피가 그리운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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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미술의 대화
박신자 지음 / 청동거울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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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미술에 관한 책을 읽고 있는 중.

예전부터 관련이 깊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렇게 문학과 미술에 관해서 쓴 책들이 많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사람들의 생각은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이미 문학과 미술의 관계는 문학과 음악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오래 전부터 이야기되어 왔다고 해야 하나.

 

인천에 있는 차이나타운에 가면 삼국지 거리가 있다. 그 거리에 가면 삼국지의 장면을 벽화로 그려놓은 벽들이 연속되어 있다. 그림만을 보아도 삼국지의 내용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그림과 소설이 상호작용을 하는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얼마나 서정적인 소설인가. 얼마나 서경적인 소설인가. 허생원과 조선달이 흐드러지게 핀 메밀밭을 달밤에 걷는 정경은 한 폭의 수채화, 풍경화가 되지 않겠는가.

 

또한 이상은 어떤가. 그림에도 재주가 있었던 그는, 친구의 소설에 삽화를 그려주기도 하지 않았던가. 이와 같이 예전의 작품에는 삽화가 반드시 들어가 있었는데.. 우리나라 소설에도 삽화가, 특히 신문 연재 소설에는 삽화가 필수적으로 들어가지 않았던가. 그 그림들이 단지 소설을 보충하는 역할에서 그치지 않고 소설을 더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지 않았던가.

 

이런 점을 생각해보면 이 책에서 펼치고 있는 주장이 생경하지는 않다. 다만 우리의 문학 작품을 예로 들지 않고, 글쓴이의 전공인 독일문학을 예로 들고 있어서 우리가 모르는 작품이 많다는 흠이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책을 읽을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그 책의 내용 하나하나가 아니라, 책에서 쓰고 있는 방법론이다. 그러한 방법론을 익히면 어떠한 작품에도 적용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외국문학에 대해서 공부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일테다. 결국은 우리에게 돌아오는 그러한 공부.

 

그러한 생경한 내용의 작품들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든 작품은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다. 그래서 마지막 부분에서 어느 정도 친숙함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는 말이 있듯이 예술은 서로 서로 통한다고 할 수 있다. 한 종류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 한 예술만을 파는 일도 좋겠지만, 다른 예술도 공부한다면 더 폭넓은 이해에 도달하지 않을까 한다.

 

독일문학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낯선 책이 될 터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독일문학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문학과 미술을 어떠한 방법으로 융합시키는지 알아내는 일이다. 이 책은 그 작업을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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