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다, 더워. 이 말도 이제는 상투어가 되어 버렸다. 같은 말도 자꾸 하면 효력이 떨어지는데...이제는 더위를 몸이 받아들여야 하는지... 더위에 계속 시집을 읽고 있다. 어쩌면 이 여름이 가기 전까지는 계속 읽을 수밖에 없으리라.

 

이 더위에 방학을 생각한다.

만약 방학이 없었다면 학생은 어떻게 지낼까? 나는 학생 때 방학이 없었다면 견딜 수 있었을까? 내 어릴 때는 여름이 견디기 더 쉬웠다. 젊어서였을까? 여름엔 놀 거리들이 풍부했고, 해는 길었으며 우리는 힘이 넘쳐났다. 더위 쯤이야 땀 한 번 뻘뻘 흘리고, 냇가에 가서 물에 한 번 풍덩 들어갔다 나오면 됐는데... 그래도 방학이 없는 학교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하지만 지금, 아이들에게 방학이 있는가? 방학 때 더위를 식힐 만한 곳이 있는가? 또 놀 시간이 있는가? 밖에 나가보면 학원을 마치고 나오는 아이들, 학원으로 가는 아이들, 그리고 길가에 주욱 늘어서 있는 학원 차량들이 보인다. 이 아이들에겐 방학도 공부를 할 수밖에 없는 기간이구나. 하여 이 아이들은 방학을 이중으로 받아야 한다. 학교에서 하는 방학과 학원에서 하는 방학.

 

덥다고 공부를 안 할 수야 없지만, 적어도 방학기간 만큼은 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밖에 능소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다. 이상하다. 예전에는 잘 보이지 않던 능소화가 요즘은 왜이리도 잘 보이는지... 여름이면, 아니 여름이 되기 전부터 여름까지 능소화는 그 주황색의 꽃을 우리게에 보여준다.

 

담장을 넘어서든지, 아니면 가로수 옆을 타고서든지, 예전엔 양반꽃이라고 했다던데... 양반이 국민의 대다수가 되고, 이제는 아예 없어진 사회를 반영하는지, 우리에게 이 능소화는 잘 보인다. 그래 야안과 상민이 어디 있고, 꽃 중에 양반꽃이 어디 있어.

 

길을 걷다가 능소화를 보고 눈이 즐거워지고, 더위를 잠깐 잊기도 한다. 이 더운 여름에 저 꽃들은 그래도 잘 버티고 있구나. 나도 버텨야지 하면서.

 

윤재철의 "능소화"란 시집을 펼치다. 반성 시리즈 두 권을 읽었더니... 갑자기 학생들이 생각이 나고, 풍요로움 속의 비루함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집단이 학생들 아니던가. 윤재철 시인이 교사라는 생각과, 예전에 이 시집에서 매우 많은 학교 관련 시들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펼쳐보다.

 

그래 방학이란 본래 학교를 놓아버리는 기간인데... 학생들은 학교를 놓아버리되, 학원을 놓아버리지 못했고, 이들은 공부와 비슷하지만 공부는 아닌 공부를 하느라 이토록 고생을 하는구나 하는 생각. 

 

시집에는 시인의 개인적인 체험도, 생각도, 서정도 담겨 있지만, 학생에 중점을 두고 읽은 이 시는 2부가 압권이다. 우리나라 학교의 모습이 시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래 이게 바로 학교다. 이게 바로 우리 교육현실이다. 

 

획일화, 경쟁, 생각 하지 않음, 통제, 일방적 지시 등등.

 

다양성, 협동, 생각 함, 자율, 토의와 토론을 통한 일처리 등등은 사라지고 없다. 참 암울한 모습이다. 이 암울한 모습 속에서 시인은 그래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고 한다. 제도를 바꾸려고 투쟁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지만, 그래도 이 아이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준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한다.

 

하여 오히려 그런 시들 속에서 우리는 교육 현실이 잘못되었음을, 반드시 바뀌어야 함을 인식하게 된다. 슬픈 교육현실, 그 현실을 더위 속에서도 피어나 자신의 모습을 알리고 있는 능소화란 제목의 시에 담고 있다. 그래서 슬프다. 덥다. 그렇지만, 꽃은 피어나고, 학생들은 자라난다. 덥다고 나가떨어지지 않고, 물방울 하나 떨어뜨려 주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교사 아니던가.

 

이 시에 나타난 학교 현실을 보자. 우선 시험 때 이런 학생이 있다.

'중간 고사 수학 시험지 받자 마자 / 쭉 한번 훑어보더니 / 번호 이름 쓰고 그냥 엎드려 잔다'('지성이' 1-3행) 특별한 아이인가. 아니다. 학교에서 시험 때면 볼 수 있는 흔하디 흔한 모습이다.

 

여기에 '교문 지도 하는데 / 한 녀석이 반은 사복이고 반은 교복인 채 / 가방도 없이 쓰레빠만 신고 들어오길래'(겁먹은 송아지 1-3행) 이런 학생도 있고,

'공부하는 놈들은 처음부터 젖혀 두고 / 힘자랑 하는 놈들끼리 / 서로 다른 중학교 출신들끼리 / 불알을 늘어뜨리고 눈 부라리며 / 뿔싸움을 한다'(각축 2연)고 학기 초면 어김없이 벌어지는 순위 정하기 싸움이 있으며,

'환호작약 해방/ 더러는 이리 튀고 저리 튀며 / 식용유 붓고 밀가루 뿌리고 / 교복을 찢는다'(졸업식 2연)고 뉴스에도 나왔던 졸업식 모습도 보이고,

'학교에는 1,710개 번호가 산다네 / 컴퓨터도 이름은 모른다네 / 단지 오엠알 카드 까맣게 칠한 / 번호로 1,710명 얼굴을 기억한다네 / 학교에는 번호들이 하루 종일을 모여 산다네'(번호들의 세상 마지막 연)이라고 익명으로, 이름으로 존재하지 않고 번호로 존재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이름이 아닌 번호로 지내는 아이들, 비대화된 학교의 비인간적인 모습 아니던가. 우리는 작은 학교를 추구해야 하는데,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학교을 없애려고 하는 모습은 교육과는 배치되는 모습 아니던가.

 

이 밖에도 학생부에 끌려와 부모님이 빌고 있는 모습과 머리카락을 왜 단속하는지 모르겠다는 아이들, 매점에서는 살아있는 아이들, 수능 때 몇 십만의 아이들이 똑같은 자세로 대기하고 있는 그 비인간적인 모습이 이 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렇다고 시인은 이것들을 어떻게 고치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 사실들을 사실적으로 우리에게 교사인 시적 화자의 눈을 통해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때로는 본다는 것이 큰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 보여지길 꺼려하는 것들을 보여주는 일, 이 또한 시인의 일이 아니겠는가. 자, 어떻게 바꾸어갈 것인지는 우리 몫이고, 시인은 이런 학교의 현실을, 생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지금 아이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시 한 편. 과연 이것이 아이티 강국의 모습일까. 생각해 보자.

 

내공

 

휴대폰을 늘 손에 달고 다니며

틈만 나면 귀신 같은 손놀림으로

자판 눌러대는 아이들을 보면

엠피 쓰리 귀에 꽂고 볼펜 돌려가며

시험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면

내가 허전하다

 

도무지 혼자 있지 못하는 아이들

아이티 상품이 없으면 젖꼭지 빼앗긴 듯

외롭고 쓸쓸한 아이들

수염은 거뭇거뭇 덩치는 코끼리만 한 녀석들이

손바닥보다 작은 아이티 기기 속에 파묻혀

없다

 

옛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농경 문화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만 안테나 달고

도무지 내공이 없는 아이들을 보면

아이들이 허전하다

이 문명이 참으로 허전하다

 

윤재철, 능소화, 솔, 2007. 내공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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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를 벗어야 언론이 산다 - 한국 언론의 보도 관행과 저널리즘의 위기
박창섭 지음 / 서해문집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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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은 제 4부라고도 한다. 그만큼 정치와 밀접히 관련이 있는 집단이다. 행정, 입법, 사법에 이어 언론이라는 4부가 제 구실을 해야지만 민주주의가 잘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4부가 잘 이루어질까? 우리나라 행정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입법을 관장하고 있는 국회가 정상적으로 굴러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지, 그리고 사법부는 올해 대법관 임명 청문회로 인해 홍역을 치르지 않았던가. 

 

여기에 언론은 자유로운가? 이렇게 질문을 던지자. 과연 언론은 공정하고 진실한 보도를 하고 있는가. 언론인들은 지식인으로서, 또 언론인으로서 자신들의 책임을 인식하고 책임있는 보도를 하려고 하고 있는가?

 

사람들이 신문을 안 본 지, 뉴스를 멀리한 지 오래되었다고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은 있는가? 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언론에 "야마"라는 게 있단다. 처음 듣는 말이다. 하긴 이는 언론인들끼리 은어처럼 사용하는 말이라고 하니, 그리고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지도 않은 말이니, 언론인과 접촉이 없는 내가 이 말을 들었을 리가 없다. 내가 아는 야마는 기껏해야 일본어로 '산'이거나 우리가 비속어로 쓰는 '야마가 돈다'는 말밖에는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야마'란 말이 언론에서는 너무도 광범위하게, 그러나 중요하게 쓰이고 있단다. 이 '야마'가 없으면 기사가 되지 않는단다. 도대체 '야마'가 뭘까? 딱부러지게 사전식으로 정리할 수 없다. 이 책의 저자도 기자 생활을 16년 했고, 저널리즘을 공부했으며, "야마"를 가지고 책을 썼음에도 '야마'란 말을 무엇이라고 간단하게 정의할 수는 없다고 한다.

 

다만, 이 '야마'란 말은 보도의 내용과 관점, 의도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66쪽), 내용 야마, 관점 야마, 의도 야마(67쪽)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즉 기사에 깔려 있는 내용과 그 내용을 선정하게 된 관점, 그리고 그 기사를 내보낸 의도 등을 종합적으로 '야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쉽게 '틀'이라는 말로도 할 수 있는데, 이 틀보다는 더 정교하게 기사를 규정하는 존재가 '야마'라고 할 수 있다.

 

'야마'에 대한 이러한 정의를 바탕으로 각 신문사마다 어떻게 이런 야마가 작동하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사실, 야마에 따라서 관점이 달라지며, 의도가 달라지기에 내용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이러므로 같은 사안이라도 기자가 취급하는 취재원부터, 사실들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된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야마의 구현 방식을 살피기 위해 우리 사회에서 쟁점이 되었던 두 가지 사안을 예로 들어서 각 신문사의 야마를 파악하고 있다.

 

두 개의 사안 중 하나는 미디어법안이고, 또 다른 하나는 무상급식안이다. 이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그리고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 중립적인 성향의 한국일보를 대상으로 어떻게 기사화되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이를 읽다보면 같은 사안인데도 이렇게 차이가 날 수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내가 어떤 신문을 보는지에 따라서 내 관점도 알게 모르게 조정당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 사실 정보화시대라고 하지만, 어떤 특정한 사안에 대해서 여러 언론에서 정보를 얻는 사람은 이 책에서도 나와 있지만 13%정도라고 하고(305쪽) 있으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가지 매체에서 정보를 얻는다는 얘기가 된다. 나역시 마찬가지고.

 

그렇다면 자신이 어떤 신문을 보느냐에 따라 즉 그 신문사의 "야마"에 따라 자신의 관점이 고정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이런 점을 깨닫게 해준 점이 이 책이 지닌 장점이다.

 

언론의 사명을 '진실'과 '공정'이라고 한다는데, 우리가 진실과 공정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읽는 독자인 우리들이 깨어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 독자들이 깨어있어야 언론들이 진실과 공정 보도를 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역으로 깨달았다고나 할까.

 

이책의 말을 받아 정리하면 이렇다, '야마'를 벗어야 언론이 산다. 마찬가지로 언론이 살아야 정치가 산다. 정치가 살아야 민주주의가 산다. 민주주의가 살아야 우리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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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잠시 쉴만도 하련만... 여름은 제 세상이라는듯이 자기의 존재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런 더위에 다들 지쳐떨어지고 있는데... 무슨 유럽 사람들처럼 여름 휴가를 한 달을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날씨는 점점 더 우리들을 괴롭히는데...

 

이것 역시 우리들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하면 무슨 소리냐고 할 사람도 많겠지. 지구 온난화를 인정하는 사람도 있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기온이 계속 오르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으리라.

 

열대야가 일어난 날수가 늘고 있고, 수온이 상승해서 물고기의 종류가 바뀌고 있으며, 과일의 북방한계선이 점점 위로 올라오고 있으니... 게다가 요즘은 우리나라 최고기온을 경쟁이라도 하는듯이 계속 올리고 있으니...

이런 날들이 계속되면 사회계층에 따라서 더위에 대한 피해가 나타난다. 아무래도 힘없는 사람, 못 사는 사람, 경제적으로 하위층에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고통을 받게 된다. 이런 더위에 집 안에서 에어컨을 틀어놓고 쉴 수도(어떤 사람들은 에어컨조차도 없고) 없고, 땡볕에서 일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힘들 때일수록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는 자세. 이것이 바로 반성하는 자세 아니던가. 이 시집 전에 읽었던 시집이 "반성"이었다. 풍요로운 80년대를 비루하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의 모습을 시로 표현했었는데... 이 시집을 읽은 다음 이번엔 무슨 시집? 하다가 제목이 "반성하다 그만둔 날"이라서 이 시집을 골랐다.

 

연속해서 읽는 시집인데, 하는 반성이고, 하나는 반성하다 그만둔 날이니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고 말이다. 사실 예전에 다 읽은 시집인데... 머리 속에 떠오르지 않으니 예전엔 그다지 큰 감흥을 주지 못했나 보다 하는 생각도 있고, 2008년에 나온 시집이니 1987년에 나온 김영승의 시집보다 21년 뒤에 나왔으니, 내용도 좀 다르겠지란 생각도 있고... 또 하나 이 시집을 고른 이유는 출판사, 실천문학사라는 점도 있다. 실천문학사는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사회의식이 있는 책들을 냈던 출판사였으니, 이 시집에도 사회의식이 담겨 있으리라는 생각도 있었다.

 

4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시집은 '이 시다'라고 마음에 꽂히는 시는 없다. 어떤 시집에서는 시 하나가 마음에 들어 전체 시집을 빛내기도 하는데... 그만큼 쉬운 언어로 쓰여진 시들인데.. 읽어나갈수록 시들이 유기적으로 연결이 된다.

 

한 편 한 편의 시가 자기 소리를 내고 있는데, 이들이 뭉쳐서 전체적인 소리를 낸다. 어라? 이게 이 집의 매력이었구나. 그래서 한 편의 시가 내 맘에 꽂히지는 않았지만, 시집이 강렬한 인상을 내기 시작한다.

 

전체적으로 이 시집의 배경은 "가리봉"이다. 가리봉이라면 잘 모르는 사람이 있겠으니, "구로공단"이라고 하자. 요즘은 "구로디지털단지"로 바뀌어 굉장히 세련되어진 곳. 이 곳의 80년대는 우리나라 산업화의 그늘이라고 할 수 있는, 김영승의 시에서 나타난 풍요로움 속의 비루함이 전체적으로 몰려 있는 곳이었다. 물론 그 전에는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이 강하게 결합했던 곳이기도 하고.

 

일명 공순이 공돌이들이(이런 말들을 썼던 사람들...자기들도 노동자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던) 몰려 있던 곳, 가출 청소년들이 모여들었던 곳, 그 곳에서 자기 청춘의 삶을 시작한 사람. 그 곳의 삶을 시 속에 복원시켜 내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이제 그 곳에서 나오려 한다. 그 곳은 자기 시의 고향이지만, 그 고향을 떠나 또 다른 삶을 살려고 한다. 그래서 "반성하기를 그만둔 날"이다.

 

이제는 세상이 변했으므로,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미래를 찾아 떠나야 한다.

이러한 내용의 시들이 많이 들어 있는데... 2부가 독특하다. 2부는 시인의 개인사를, 가리봉이 아닌, 그녀의 고향인 해남(?)에서의 일을 담고 있다. 특히 어머니, 아버지의 일을.

 

2부가 눈물나게 슬프다. 아버지의 첩으로 살아가야 하는 어머니. 이런 어머니와 아버지로 인해 겪어야 했던 설움들... 가리봉에서의 생활보다는 시인의 어린 시절을 담은 이 2부의 시들이 아프게 마음에 다가온다. 어머니와 화해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가. 그런 어머니를 결국 하나의 여자로 받아들이게 되는 모습이, 2부에 걸쳐 펼쳐진다. 좋다.

 

더운 날, 사회의 밑바닥에서 살았던 시절을 그려낸 시들을 읽으며 다시금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생각해 본다. 나는 반성을 해야 하나,

 

반성을 그만두어야 하나.

 

나는 아직도 반성해야 한다. 그만큼 나는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으므로.  

 

무더위,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송가. 김사이의 시 한 편을 보자.

 

무엇을 위하여 종은 울리나

 

나는 잘렸다

터무니없이

 

5월 연둣빛 나무 이파리를 보는데

휴대전화로, 그래 휴대폰으로

해고통보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해고사유는 '잡담'이다.

그리고 더 이상 회사에 갈 필요도 없었다

눈만 뜨면 전쟁을 치르듯이 아이 맡기고

30분 일찍 전철에 구겨져가던 내 밥그릇 자리

그러나 나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였고

비공식적으로 잘린 거다

어디에도 내가 흘린 피는 없다

어디에도 내가 살기 위해 노력했다는 흔적도 없다

자본이 숨 쉬기 위해 내가 숨죽이다가

이름도 인격도 빼앗긴 결과다

이제 더 이상 내가 가난한 집 딸이고

돈 벌어야 하는 아내고 한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자본은 너무 자유롭고 나는 갇혀 있다

자본은 너무 안전하고 나는 위태롭다

이제 종이 울리면 쉬러 가는 것은

내가 아니라 자본, 그래 돈이라는 것이

정규적으로 쉬러 간다

 

언제든지 공식적이지 않게 나는 잘리고

무엇을 위하여 종이 울린단 말인가

 

김사이, 반성하다 그만둔 날, 실천문학사 2008 초판, 무엇을 위하여 종은 울리나 전문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 내가 꿈꾸는 사회. 종은 우리를 위해서 울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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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매혹적이다. 반성이라. 도무지 반성이란 모르고 사는 현대에서 반성이라는 제목으로 반성이라는 시들만 주욱 실려 있는 시집이다. 그렇다고 반성1부터 반성 844까지(이 시집은 반성 연작시인데... 차례를 보니 844번이 가장 뒷번호다. 다 실려 있지는 않고 중간중간 빈 번호들이 있다.) 순서대로 되어 있지는 않다. 내용들에 따라서 이 반성 연작의 순서는 바뀌어 실려 있다.

 

일일삼성(一日三省)이라고 자신을 하루에 세 번은 살펴보아야 한다고 했는데.. 이 살펴봄이라는 말은 반성이라는 말과 같고, 반성이라는 말은 자신을 떨어뜨려 놓고 바라볼 수 있다는 말과 같으니, 자신을 떨어뜨려 놓는다는 일은 시와는 거리가 맞지 않을 듯하지만, 시인이 세상을 주관적으로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은 결국,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자신을 자신과 분리하고, 세상을 바라본다는 의미라고 생각하면, 시인에게 반성은 필수품이어야 한다.

 

반성. 그러나 이 시는 직설적이지 않다. 무엇을 반성하고 있는지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비루한 자신의 삶을 독자에게 보여준다. 얼마나 비루하냐면 자신의 삶을 자신이 능동적으로 살지 못하고 억지려 밀려서 산다고 표현한다. 일명 밀어내기

 

반성 72

 

나는 대변을 보는 게 아니라

밀어내기 하는 것 같다.

만루 때의 훠볼처럼

밀어내는 것 같다.

죽기는 싫어서 억지로 밥을 먹고

먹으면 먹자마자

조금 있으면 곧 대변이 나온다.

안 먹으면 안 나온다.

입학도 졸업도 결혼도 출산도

히히 밀어내는 것 같다.

먹고 배설해 버리는 것 같다.

사랑도 이별도

죽음도.

 

김영승, 반성, 민음사, 2009년 개정판 2쇄. 반성 72 전문 

 

비루한 삶이기 때문에 온갖 비속어가 시에 등장한다. 따라서 아름다운 시가 아니다. 시에는 술과 피와 정액이 난무한다. 자신이 사는 곳을 잠수함이라고까지 표현했으니... 이 시의 전체적인 주조는 액체이다. 액체 중에서도 끈끈함이 느껴지는 맑음과는 거리가 먼 그런 액체.

 

왜 사는 곳이 잠수함인가. 간단하다. 반지하방에 살기 때문이다. 반지하방, 가난한 사람들의 거처. 그 곳에 존재하는 습기, 축축함, 그리고 삶의 고달픔.

 

시인이 시집을 낸 때는 80년대다. 우리나라가 풍요로움의 절정을 향해 치달릴 때다. 흥청망청, 우리도 곧 선진국이 된다고, 경제는 호황을 이루고, 세계적으로 한국이라는 나라의 위상은 높아지고 있는 때... 이 때 다들 행복할까? 이런 질문을 시인은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질문에 시인은 우리 모두가 행복하지는 않다는 답을 내린다. 자신의 삶에서, 또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의 삶을 보고서. 그래서 모두들 행복에 겨워해야 한다고 할 때 아니라고, 아닌 삶들이 도처에 있다고, 과연 이것이 행복이냐고 시인은 질문을 한다.

 

이 질문이 때로는 비속어로 나타나고, 비꼼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이 시집에서는 많은 시들이 논리성이나 체계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말이 안됨, 말들이 꼬여 있음, 비논리성 등등이 시에 나타난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바로 풍요로움이 넘쳐나는 80년대의 모습이다.

 

80년대 자조적으로 유행했던 말. 3S. SEX, SCREEN, SPORTS.

 

이 때 우리를 휘감았던 이 말들은 액체와 긴밀한 연관이 있다. 끈적끈적한, 우리네 삶에 달라붙는. 우리네 삶을 더 밝고, 명랑하고, 풍요롭게 해주어야 할 대상들이 위로부터의 강제로 인해 우리 삶을 더 어둡고, 더 힘들고, 가난하게 해주는 대상으로 전락한 시대가 80년대 아니던가.

 

이러니 시인이 반성할 수밖에. 그가 반성 연작시를 쓸 수밖에. 그렇다고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이 다 칙칙하지는 않다. 본래 어두움 속에서도 밝음이 있듯이, 어려운 삶에서도 행복이 있다. 어쩌면 낮은 곳에서 사람들은 더 사람답게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시를 보자.

 

반성 100

 

연탄장수 아저씨와 그의 두 딸이 리어카를 끌고 왔다. 

아빠, 이 집은 백 장이지? 금방이겠다. 머.

아직 소녀티를 못 벗은 그 아이들이 연탄을 날라다 쌓고 있다.

아빠처럼 얼굴에 껌정칠도 한 채 명랑하게 일을 하고 있다.

내가 딸을 낳으면 이 얘기를 해 주리라.

니들은 두 장씩 날러

연탄장수 아저씨가 네 장씩 나르며 얘기했다.

 

김영승, 반성, 민음사. 2009년 개정판 2쇄. 반성 100 전문

 

이 시집이 87년에 처음 출간되었으니 25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이 시에 나온 내용들과 다른 삶을 살고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아직도 80년대 풍요로움의 뒷모습이 사라지지 않은 사회에 살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우리의 삶을 반성하고 있는가. 나는? 나는 반성하고 있는가? 되새겨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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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만나야 할 미래 - 스웨덴의 한가운데서 우리가 꿈꾸는 대한민국을 만나다
최연혁 지음 / 쌤앤파커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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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비아에서 우리나라를

보았다고 한다. 나미비아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이 나쁘겠지만, 그 나라가 양극화되어 있다고 하고, 빈부격차가 심하다고 하니 뭐... 하지만, 나미비아라는 이름도 생소한 아프리카의 나라보다는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자부하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 기분 나빠 하려나?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와 비교를 한다는 심리적 거부감을 버리고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자. 매년 서울대에 입학한 학생들의 계층을 분석한 통계를 보면 경제적 능력과 서울대 입학율이 비례관계에 있다고 하지 않는가.(서울대만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학벌이라는 차별이 존재하고, 이 학벌에 의한 명문대들에 입학한 학생들을 분석해보면 경제와 학력이 함께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격차를 줄이려는 노력을 우리는 하고 있는가. 아니, 우리는 정부를 압박해서 이러한 노력을 하게 하고 있는가. 오히려 서울대를 폐지하자는 말에는 다른 대학들이 서울대의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고, 또 대학등록금을 반값으로 하자는 주장에는 재원을 어디서 마련하느냐고.. 우선 반대부터 하지 않는가. 어떻게 하면 이를 실현할 수 있을까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이런 제도를 실시하지 않을까 반대 이유를 먼저 찾지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아프리카의 한 나라와 무엇이 다를까.

반대로 스웨덴에서, 덴마크에서, 핀란드에서 우리나라를 보아야 한다. 어떻게 이 나라들이 사회 격차를 해소해나가고 있는지, 어떻게 패자들이 영원히 패자로만 머물지 않고, 자신의 삶을 찾아갈 수 있게 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조금씩 우리가 갈 길이 보일 것이다.

 

기업인들이 책임을

지는 사회가 스웨덴이라고 한다. 이케아의 회장은 직원들이 재미있게 일할 수 있는 직장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직원들이 재미있게 일한다. 이는 회사의 구조를 디자인하는 데서도 나타나지만, 최소한 왜 자신이 기업을 하는지를 인식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단지 이윤만을 추구하지 않고, 함께 살아야 함을 늘 인식하고 기업을 운영한다면 직원들이, 노동자들이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어나가지는 않을테고, 노조가 있으면 회사가 망한다는 소리를 하지도 않을테고, 또 지나치게 많은 노동시간을 강요하지도 않을테다.

우리는 직장생활을 행복하게 하고 있을까? 질문을 해본다. 답은 부정적이다. 어쩔 수 없이 먹고 살기 위해, 잘리지 않기 위해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 자신의 의견을 회사에 당당히 이야기하기 보다는 회사에 자신을 맞추기에 급급한 현실이다. 이런 상태에서 행복이 찾아올 수는 없다. 더군다나 회사에서 해고되었을 때 다른 삶을 찾을 수 있는 안전장치가 없기에 "해고는 살인이다"는 말까지 있는 우리나라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스웨덴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우선은 자신들의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조직화할 필요가 있다. 권리란 주어지지 않는다. 찾아야 한다. 그러한 권리를 찾을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뭉치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뭉칠 수 있는 조직은 바로 노동조합 아니던가. 노동조합을 무슨 좌익집단, 불순세력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데, 이는 언론을 통해서, 또는 사상통제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입된 잘못된 생각이다. 노조조직률이 낮은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제대로 찾지 못한다. 노동자들의 권리를 기업가들이 시혜를 베풀듯이 주어서는 안되지 않는가. 하여 이 책을 읽으면서 스웨덴의 노조조직률에 감탄을 했고, 그들이 파업을 했을 때 당연하다는 듯이 지지해주는 시민의식을 부러워했다. 그러나 부러워만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노조에 가입하는 일이 그렇게도 어려운가.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해봐야 한다.

 

정치인들을 구하기

힘들다고 한다. 이 나라 스웨덴에서는. 정치인의 이직률이 가장 높은 나라 중의 하나라고 한다. 왜냐하면 정치인은 특권은 거의 없고 의무는 많은 그런 직업(?)이기 때문이란다. 게다가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이 낱낱히 국민들에게 보여지고 평가되고 있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한다. 또한 보좌관도 없이 자신이 정책을 연구하고 법안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에 늘 공부를 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20대에 멋모르고 정치에 입문한 사람이 한 번의 국회의원을 하고는 더 이상 정치계에는 못 있겠다고 나가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이를 부러워해야 하는지... 우리나라 국회의원, 정치인들이 반대편에 떠오르는 이유는? 지금은 좀 나아졌는데... 국회의원 명패를 한자에서 한글로 바꾸자고 했는데도 기를 쓰고 반대했던 국회의원들, 누군가가 국회의원이 되어 간소한 복장으로 나타났더니 국회의 품위를 떨어뜨렸다고 그 의원을 그렇게도 비난했던 국회의원, 자신들의 품위를 위해서는 고급차를 이용해야 하고, 비행기 좌석도 고급으로, 자신들만의 특별 창구를 마련해야 한다고 하는 의원들이 많은 나라. 의무는 적고, 특권은 많은 이 나라 국회의원들은 이직률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해야 한다. 이들은 스스로 이직을 하지 않고, 공천을 받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이직을 강요당하니 말이다. 공천을 못 받으면 공천 부정이다 뭐다 해서 무소속으로라도 출마하려고 한다. 과연 이런 자리가 힘든 자리일까? 툭하면 불거지는 공천비리는 무엇을 의미할까? 스웨덴에 관한 이런 책을 읽으면 공천비리라는 말을 어떻게 우리는 받아들여야 하나? 그렇게 특권으로 똘똘 뭉친 정치인 집단을 우리는 개혁해야 하지 않나? 밑에서부터 압력을 넣어 정치 개혁을 해야지만, 그래야지만 복지 국가로 가는 징검다리를 하나 놓게 되지 않을까 한다.

참, 마음에 들었던 구절은, 장관이든 총리든, 자신의 아이를 자신이 직접 돌본다는 사실. 이런 가정을 꾸리기 위해서 정치를 한다는 인식을 지녔다는 사실. 그래서 정치인은 더 힘들다는 사실, 이를 국민들에게 인정받고, 신뢰를 받기에 이들의 정책이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 마냥 부러워만 해서는 안되고 우리도 실현해야 할 정치모습이라는 생각.

 

스웨덴이 꼭

답일 필요가 없다. 이 책을 쓴 글쓴이도 스웨덴만이 답은 아니라고 한다. 답은 우리가 구해야 한다. 우리의 현실에 맞는. 그러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 스웨덴은 참조자료가 된다. 이 참조자료와 우리의 현실을 비교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찾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복지국가로 가는 길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공부를 해야 한다. 공부는 학창시절에만 하는 것이 아니다. 죽을 때까지 공부하는 것이다. 단순한 지식을 습득하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만들어가는 무엇을 찾는 일, 그것이 바로 공부이다. 이러한 공부를 할 수 있게 조직을 만들고, 여건을 마련하라고 압력을 넣어야 한다. 결국 복지국가는 깨어있는 국민이 있어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직장에서는 8시간 노동을 철저히 지키라고 해야 하고, 지자체에는 평생교육 시설을 만들라고 해야 하고, 학교에는 대학에 들어갈 지식만을 교육하지 말고, 학생들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총체적인 배움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제도와 여건을 만들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정부에는 패자가 부활할 수 있는, 이 책에 나와 있는 대로 인생 마라톤에서 중간 중간에 마실 수 있는 물을 마련하라고 해야 한다. 이런 일들은 우리가 깨어있어야만 할 수 있다. 다른 나라의 모습을 읽는 일. 내가 깨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우리 깨어나야 한다.

우리가 깨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투표 때만 국민으로 대접받는다. 이 사실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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