팽 선생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남진희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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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나의 이야기를 찾으려고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은 다양한 일들이 겹쳐 서술된다. 인물의 생각인지,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는 장면들이 많다.


주인공이 최면술사라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 내면에 깊숙이 숨어 있는 것들을 끄집어낸다고 볼 수 있는데, 볼라뇨는 이 소설을 통해서 무엇을 꺼내려 했을까?


바예호라는 인물이 나온다. 이 인물이 죽어가고 있는데, 이를 살려달라는 요청을 팽선생이 받는다. 그런데 스페인 사람들이 팽선생에게 바예호를 포기하라고 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바예호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다. 결국 팽선생은 자신이 치료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지니지만 바예호에게 두번 다시 가지 못하고, 바예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 커다란 줄거리 안에 다양한 인물들과 일들이 중첩된다. 환상적으로 때로는 불명확하게 서술이 되고 있는데... 마치 안갯속을 헤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카프카 소설을 읽는 느낌을 주기도 하고.


하지만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를 생각하면 불확실함이 주를 이루는 것이 맞겠단 생각이 든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스페인 내전이 한창이던 때. 사람들은 행복의 시대보다는 전쟁이 일어날 것 같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게다가 독일에서는 나치가 집권을 하지 않았던가. 세계는 더더욱 불확실성으로 빠져들게 되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과연 안정적으로 살 수 있었을까. 


사람들 역시 불안함에 어쩔 줄을 몰라 했으리라. 어떤 사람은 그런 시대에도 자기 확신을 지니고 살아가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러니 팽선생과 그가 만나는 사람들이 헤매는 것도 이해가 갈 만하다.


바예호가 있는 병원을 찾아가지만 병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복도를 이리저리 헤매는 팽선생의 모습에서 위기를 인식했지만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 소설에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주인공인 팽선생이 적극적으로 나서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팽선생 역시 헤매고 있다. 헤맬 수밖에 없다. 그를 최면술사로 설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내면에서는 불안감이 작동하고 무엇인가를 해야한다고 하지만, 현실에서는 행동하기 힘든 상태. 그러한 인물들.


결국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이 없으니, 바예호는 죽고 마는데, 이는 스페인 내전에 이은 2차 세계대전으로 빠져드는 현실을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만 볼라뇨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명확한 주장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런 행동을 하는 인물을 창조하지도 않았다.


그냥 흐릿하게 역사 속에서 헤매는 사람들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한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길을 찾는 것은 우리의 몫이라고. 소설 속 인물들처럼 살아간다면 어떤 결말에 처할지를 보여줄 뿐이지만, 그런 삶을 긍정적으로 볼 수 없게 만들고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격동기에 살았던 볼라뇨로서는, 그 전에 유럽에서 벌어진 혼란 상황을 표현함으로써 자신들의 세계를 간접적으로나마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보라고, 이 소설 속 인물들이 그렇게 흐릿하게 살아감으로써 결국 바예호를 죽게 만들지 않았냐고. 그렇게 사는 것이 과연 바람직하냐고 묻고 있는 듯하다.


그다지 길지 않은 소설 속에 일관되지 않은 사건들을 배치해서 어지러운 현실을 소설 속에 구현해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은? 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 우리 역시 명확하게 정리된 줄 알았는데, 아직도 혼란 속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닌지, 이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 소설 속 인물인 팽선생처럼 생각은 있으나 헤매다 끝나고 말면 안 된다고, 적어도 그 점은 생각할 수 있게 해준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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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하면 즐거움을 떠올린다. 설렘.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기대. 망설임. 


  그런데 정호승 시의 여행은 그러한 것들과 거리가 있다. 정호승 시에서 여행은 삶의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의 여정이다.


  결코 쉽지 않은, 그러나 가야만 하는 길. 하여 이 시집을 읽으면서 삶은 여행이라는 말을 생각한다. 가볍게, 즐겁게, 조금은 망설이지만 그럼에도 기대가 더 많은 여행이 아니라,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 나아가는 구도의 길.


  시인의 말에서 '시는 내 인생이라는 여행의 동반자이자 스승이다'(125쪽)라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시는 인생을 바라보는 눈이자 마음이 된다.


시인은 '슬픔'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슬픔, 낮은 곳, 어려운 곳으로 나아가는 과정, 그것이 여행이다. 하여 여행은 자신을 걸고 슬픔으로 가는 과정이 된다.


슬픔에게 말을 거는 과정을 넘어서 이제는 슬픔과 하나되기 위해 가는 길, 그것이 여행이다. 이러한 여행을 함께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 여행은 궁극적으로는 홀로 가야 한다.


자신이 홀로 짊어지고 가야 할 여행, 이것이 곧 삶이다. 함께하지만 홀로 갈 수밖에 없는 삶. 


그래서 여행을 하면서 읽어야지 했던, 제목만 보고 시집을 골랐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이것은 여행을 하면서 읽을 시집이 아니라, 차분히 자신을 들여다볼 시간을 갖고 읽을 시집이라는 생각.


         여행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다

아직도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오지뿐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여 떠나라

떠나서 돌아오지 마라

설산의 창공을 나는 독수리들이

유유히 나의 심장을 쪼아 먹을 때까지

쪼아 먹힌 나의 심장이 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날릴 때까지

돌아오지 마라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람의 마음의 설산뿐이다


정소승, 여행, 창비. 2013년. 초판 3쇄. 10쪽


이런 내용과는 좀 다를지 모르지만, 이 시집에 실린 '사과'(44쪽)라는 시도 역시 여행이란 이러해야 한다고 하는 듯한 생각을 했다.


구족회화 작가들이 그린 사과 그림이 화랑에서 나와 행상을 하는 청년에게 건네져 많은 사람들이 사 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의 시. '그것이 그들 사과가 가장 원하는 일이다'('사과' 마지막 행. 44쪽)라고 하고 있으니...


사과도 이러한 여행을 바라는데, 사람의 여행 역시 그러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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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
지젤 사피로 지음, 원은영 옮김 / 이음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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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197쪽) 

절충적인 대답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양쪽을 다 편드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렇지만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어느 한쪽으로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자칫하면 작품을 완전히 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작가에 대한 평가가 완벽하게 일치할 수도 없는데, 그렇다면 그러한 작가에 대한 평가로 인해 작품도 평가가 달라진다면, 외적인 이유로 작품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질문에 여러 작가들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 답이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고 나올 수밖에 없다. 세르비아의 독재자였던 밀로셰비치를 지지(?)했다고 알려진 페터 한트케를 저자는 비판하고 있지 않다.


한트케의 주장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으로 인해 그의 작품이 지닌 가치가 떨어지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끝까지, 아마 이 책에서 저자에게 가장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작가는 페터 한트케라는 생각이 든다. 비록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고 있지만. 그가 일방적으로 밀로셰비치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쪽도 비판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면을 보면 작가에 대한 평가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그 작가를 평가하는 데는 수많은 자료들이 필요할 테고, 어떤 면에서는 시간(역사)도 필요할 테다. 그러니 동시대의 작가를 평가하면서 그의 작품을 그와 연결지어 평가하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다만, 작가의 잘못이 명백한 경우는 예외다. 범법자를 저자 역시 옹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범법자들의 사고방식이 작품 속에 은연 중에 나타날 수도 있음을 경계하고 있다. 작가의 사상이 작품 속에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이 경우는 판단하기가 쉽다. 범죄를 옹호하는 작품을 쓰는 작가는 거의 없기 때문인데... 그러한 작품이, 가령 나치의 학살을 옹호하는 작품이라든지, 반유대주의를 선전하는 작품, 아동 성착취를 지향하는 작품 등등은 그 작가가 범법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허용이 되지 않을 것이고, 작가가 범법 행위를 저질렀다면 더더욱 허용되지 않을 테니까) 대부분의 작품은 표현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니, 이런 경우는 공론을 통해서 작품을 검증해야 한다고 한다.


작가와 작품을 일대일로 대입해서 해석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으니, 작품 속에 드러난 작가의 사상을 찾아내는 읽기를 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더 많은 것들이 작품 속에서 드러날 수 있으니, 그러한 읽기를 계속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그때는 몰랐고 또 옳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알고 틀렸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할 수 있다. 역사로부터 관점이 달라지고, 감춰졌던 것들이 드러날 수 있으니까. 작가와 작품도 마찬가지다. 작가의 행적도 역사를 통해서 새롭게 밝혀진 것들이 있고, 그러한 새로운 사실들로 인해 작품이 새로운 의미를 지니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니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렇기도, 아니기도 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렇다고 작가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지 않다는 얘기는 아니다. 어떻게든 작품 속에는 작가의 사상과 경험이 녹아들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작가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다만, 그것이 작품 속에 어떻게 표현되어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작품을 통해서 작가가 자신의 사상을 노골적으로 펼치면서 사람들을 호도하려 할 때, 아마도 그 작품은 작가를 옹호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호응을 받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외면받을 것이다. 자연스레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살아남은 작품들에는 무엇이 있다. 작가가 잘못된 삶을 살았을지라도 작품 속에는 사람들을 끄는 그 무엇이 있고, 그것은 세월의 힘을 견뎌내고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으라는 메시지가 있기에 살아남는다. 그 무엇을 찾는 읽기, 토론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저자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잘못된 행위를 한 작가를 옹호하지 않는다. 그들의 작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작품은 작품 나름대로의 생명이 있으니 그 작품에 대한 평가는 여러 사람의 (동시대인과 미래 세대들) 읽기와 토론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시대에 거스르는, 즉 시대에 맞지 않는 작품은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바로 공론장의 역할이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나라 많은 작가들과 작품들에도 적용이 된다. 한때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던 작가가 잊혀지기도 하고, 좋은 작품으로 인정받던 작품이 새로운 사실들의 발견으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어 비판받는 경우도 있으며,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이나 작가들이 새로운 조명을 받는 경우도 있으니.


작가란 시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작품은 그러한 작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마찬가지다. 작품을 읽고 평가하는 독자들도 시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들이 사는 시대의 공론장 속에서 작가와 작품을 해석하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매달리기보다는 이 작품이 우리 시대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논의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또한 우리 시대뿐만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서 지녀야 할 보편적인 가치를 구현하고 있는 작품인가 하는 점을 살펴야 할 테고. 그러한 작품은 역사의 심판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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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아 사장을 납치한 하롤드 영감
프로데 그뤼텐 지음, 손화수 옮김 / 잔(도서출판)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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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면 무슨 범죄소설 같다. 이케아 사장을 납치하다니. 읽어보니 내용을 알려주는 제목임은 확실한데, 원어로도 과연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찾아보니 노르웨이어로 saganatt라고 했단다. '전설적인 밤 또는 신화적인 밤'이라고 해석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아마, 원어의 뜻에 맞게 번역을 했다면 별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제목을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붙였으니, 이것이 번역의 묘미인가 싶기도 하다.


하롤드 영감은 어느 날 길을 나선다. 이케아 사장인 잉바르 캄프라드를 납치하기 위해서다. 이유는? 이케아가 시장을 잠식해 자신의 가구 가게가 망했기 때문이다. 공존을 하지 못하고, 소상공인들을 잠식해가는 거대자본의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냥 그렇게 넘어갔으면 좋겠지만, 자신이 평생을 일궈온 가게가 망했으니, 그에 대한 복수를 하고 싶었으리라. 


노르웨이에서 스웨덴으로 넘어가는 길, 엄청나게 내리는 눈. 여정에서 만난 젊은 소녀 엡바. 엡바의 도움으로 성공적으로 납치하지만, 엡바가 더 말려들길 바라지 않아 엡바는 보낸다. 즉 자신의 일을 젊은이에게 넘길 수는 없는 일.


이케아 사장 역시 나이든 사람. 납치범이나 납치된 사람이나 '가구'를 판매한다는 점과 자식들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하지만 그들이 살아온 배경과 사업을 하는 방향은 정반대라 할 수 있다. 


그것이 하롤드 영감이 이케아 사장을 납치한 다음 그에게 하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그게 바로 당신과 나의 차이점이오. 가구점을 하는 사람은 가구만 파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줄 수 있어야 하오." (194쪽)

"나는 세월이 가면 갈수록 아름다움이 더욱 깊어지는 가구를 팔았고, 당신은 세월이 지나면 허물어지고 망가지는 쓰레기 같은 가구를 팔아 왔소." (194쪽)


하롤드 영감은 단지 가구만 파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열정도 함께 팔았다. 가구는 그냥 물건이 아니라 사랑이었던 것. 삶이 함께하는 존재였던 것. 이웃과 자신을 이어주는 존재가 가구였고, 자신의 삶의 의미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삶의 의미를 이케아가 들어오면서 잃게 되었다. 단지 돈을 못 벌게 되었다는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생명과도 같이 여겼던 가구들이 더 이상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된 현실을 견디지 못하게 된 것이다.


사회에서 낙오된 듯한 느낌. 그러한 느낌을 40여 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 마르니가 기억을 잃어가는 것에서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아내는 기억을 잃어가고 자신을 가게를 처분하고, 이제는 더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 이때 이케아 사장을 납치하기로 한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그렇게 무겁게 서술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아주 가볍지도 않다. 물론 하롤드 영감이 이케아 사장을 납치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경찰들과 납치 후에 자신이 한 일을 알리지만 그것을 무시하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소설은 무겁게 진행되기보다는 경쾌하게 진행이 된다. 납치 후의 일은 범죄 소설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전개가 된다. 


경쾌한 진행과 반대로 내용은 점점 더 무거워진다. 하롤드 영감이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납치가 성공하고 경찰들과 대치하면서도 병원에 있는 아내와 통화를 하는 모습. 잠시나마 기억이 돌아온 아내의 모습을 통해, 그 밤이 하롤드 영감에게는 신화적이고 전설적인 밤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어찌보면 이런 경쾌한 진행을 통해서 무거운 내용을 전달하고 있는 작가는, 우리들의 삶을 잠식하는 거대자본을 비판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소설의 끝부분에 '내일은 월요일'(205쪽)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렇다. 오늘까지는 이랬을지 모르지만 내일은 다른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 어쩌면 하롤드 영감과 그의 아내 마르디를 통해서 이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내일이 있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 그것은 희망이다. 비록 지금이 힘들고 괴롭더라도 밤이 지나면 내일이 올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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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빛
정지아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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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 소설, 무거운 내용인데도 가볍게 읽었다. 무거움을 웃음으로 덜어주고 있는 소설들이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자본주의의 적], [나의 아름다운 날들], [빨치산의 딸]들. 모두 재미있게 읽었다.


사실 재미있게 읽었다는 말을 하기엔 다루는 내용들이 무겁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소설 속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엄혹한 시절을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실린 작품들이었는데...


그럼에도 그 엄혹함 속에서도 웃음이, 낙관, 긍정이 나타나서 좋았다고나 할까. 어떤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고꾸라지지 않고 기어서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이야기. 그런 사람을 소설에서 만나는 것은 우리 삶에 도움이 된다.


이 소설집도 마찬가지다. 분명 소설의 주요 인물들은 한 세상을 살아내고 이제는 스러질 일만 남은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정지아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에 따스한 눈길을 보낸다. 그들의 모습이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다가오지만, 흑백사진은 그 자체로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안쓰러움, 그러나 그토록 오랜 세월을 거쳐왔던 신산한 삶들이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이 소설집은 보여주고 있다.


치매에 걸린 노인, 한 평생 자신의 마을을 떠나보지 못한 사람 등을 보여주면서도 그들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현대사를 관통하면서 살아온 사람들, 지금은 늙고 병들어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그들이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자신들의 삶을 살아왔음을 이 소설집은 보여주고 있다.


봄빛... 그렇다. 봄빛은 겨울을 나고 이제 새로운 시작을 할 때 이미 지나온 것들을 따스하게 비춰준다. 그러한 봄빛 속에서, 봄볕 속에서 고단했던 삶을 위로받을 수 있다. 이 소설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러한 고단한 삶을 잠시나마 위로해주는 봄빛(봄볕)일 것이다.


11편의 소설이 실려 있는데 어느 소설도 순탄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짐을 지고 살아간다. 운명을 받아들이든 맞서 싸우든 자신의 삶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작가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따스한 눈길을 보내고,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열심히 살아서 이제는 앞으로 나아갈 길보다는 과거를 돌아보는 길이 훨씬 길어진 사람들. 그 길을 되짚어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길은 끝나지 않는다.


끝까지 가도 가도 길은 끝나지 않는다. 하여 많이 걸어온 길, 잠시 쉬어가는 사람들, 그 쉼에 함께하는 빛, 봄빛, 봄볕. 과거의 신산함을 녹여주고 쉬게 해준다. 완전히 녹이지는 못하겠지만, 또한 봄볕에 피부가 타듯이 또다른 일들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우리가 가고 있는 길에서 잠시 쉴 때, 그 쉼을 함께해주는 봄빛과 같은 사람들, 장소들이 있음을...


이 소설은 그렇게 우리 삶이라는 길을 함께해주는 봄빛과 같은 역할을 한다. 언뜻 쇠락한 삶들이 풍경으로 제시되는 것 같지만, 멈춤이 아니라 나아감을, 우리가 지나온 길과 가야할 길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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