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 속에 들어간 기분. 앞으로 나아가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냥 앞에 보이는 대로 갈 뿐이지만, 제대로 가고 있는지, 결국 나갈 수는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오른쪽으로만 돌면 결국 출구가 나온다고 하던데... 시집에는 이러한 오른쪽이 없다. 오른쪽이라고 생각하면 왼쪽이 되고, 왼쪽인가 싶으면 오른쪽이다. 이런 끝없이 헤맬 수밖에 없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출구가 보이련만, 미로가 훤히 밝혀지련만, 미로를 내려다볼 위는 없다. 오로지 미로 속에 있을 뿐이다. 미로 밖은 보이지 않는다.


  내 눈 높이보다 높은 미로들, 내 이해 범위를 벗어난 시어들. 시들. 그러한 시를 쓴 시인(들)


이해하길 포기하고 그냥 간다. 언젠가는 나가겠지. 나가더라도 어떻게 나왔는지 알 수 없다. 논리로, 한 단계 한 단계를 밟으며, 기억하며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 


이래서 시집은 미로다. 시라는 미로 속에 우리를 들여보낸다. 그리고 출구를 찾으라고 한다. 하, 갑자기 다이달로스가 생각났다. 그는 미궁을 만들었다. 그런데 자신이 미궁에 갇혔다. 미궁 밖으로 만든 사람은 나갈 수 있을까?


그가 갇힐 때 아리아드네의 실을 준비하지 못했을 텐데... 하지만 다이달로스는 미궁을 만든 사람. 탈출할 방법은 하늘을 나는 것. 그는 새의 깃털을 모아 날개를 만들어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이렇게 미궁은 아리아드네 미로 속에 들어간 기분. 앞으로 나아가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냥 앞에 보이는 대로 갈 뿐이지만, 제대로 가고 있는지, 결국 나갈 수는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시인을 다이달로스라고 하더라도 시인 자신도 시집이라는 미로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시인이 아리아드네의 실을 쥐고 있다면 모를까, 시인은 시를 쓰자마자 아리아드네의 실을 잃었을 테니. 시인 역시 시집이라는 미궁에 갇힌 존재가 아닐까. 아무리 시인 자신이 다이달로스라고 말한다 해도, 시인은 다이달로스처럼 날개를 달고 날아오를 수 없다.


시인이 다이달로스라고 해도 미궁에 갇힌다면 이 시집을 읽는 나는? 당연히 미궁 속에서 헤맨다. 헤매다 헤매다 그럼에도 계속 헤맨다. 오른쪽으로 찾으려고, 아리아드네의 실을 찾으려고 애쓴다.


애쓰면서 그렇게 시집의 끝에 다다른다. 시집의 끝. 출구인가? 아니다. 여전히 미궁 속이다. 에라, 이런... 황혜경 시집은 이렇게 나에게는 미궁이 된다. 나는 여전히 미궁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러다 이 시집 제목을 생각한다.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 어떻게? 과거가 되는 길이 바로 쓰는 것 아닐까 한다.


어떤 특검이 사초 쓰는 자세로 수사를 하겠다고 했다. 사초(史草) 역사의 기록이다. 쓰는 행위다. 그런데 사초는 현재가 아니다. 쓴다가 현재지만 이미 쓴다에는 과거가 포함되어 있다. 쓰는 행위는 과거로 가는 행위다. 적극적으로 과거로 가서 현재에 남겨 놓는다는 의미다.


결국 쓰는 것은 과거로 가서 과거를 현재로 끌어온다는 의미다. 사라질 것들, 잊혀질 것들을 붙들어 놓는 행위. 이것이 쓴다는 행위다. 쓰면 보게 된다. 언젠가는 보겠지. 황혜경이 쓴 이 시집의 출구를... '목도(目睹)'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을 기억하려 한다. 그 구절을 쓴다. 보기 위해서.


이렇게 쓰기는 보기다. 그리고 쓰기는 아리아드네의 실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오래 걸릴 수는 있지만.


'두 눈을 뜨고도 분별하지 못하던 것들이 보이는 때가 오고 있다

눈여겨보려고 한다'


황혜경,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 문학과지성사. 2018년 초판 2쇄. '목도' 중에서. 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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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는 어떻게 현실을 바꾸는가
브라이언 애터버리 지음, 신솔잎 옮김 / 푸른숲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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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다. 이름을 붙이기 나름이라고 해도 좋지만, 각 장르로 분화되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 장르 중에 사실주의 소설과 판타지 소설, 또는 SF소설도 있다. 


이 책은 판타지 소설과 SF소설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르 귄 같은 경우에는 SF작가로 더 알려져 있지만,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작가가 르 귄이기 때문에, 이 책에서 말하는 판타지에 SF소설도 포함시키면 된다.


판타지를 그냥 환상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상상으로 만들어 낸 세계라고 하는 편이 더 좋겠다.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고, 그러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소설을 사실주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러한 사실주의 소설도 엄밀히 말하면 사실이 아니다.


현실에서 일어남 직한 일을 형상화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사실주의 소설도 역시 상상의 산물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있음 직한 현실과 완전히 다르다고 여기면서 읽는 작품인 판타지 소설은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과연 판타지 소설이 현실을 바꿀 수 있을까? 그냥 상상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는데... 아니다. 상상이 현실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상상은 현실에서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것,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기에 그것을 채우려는 우리의 활동이다.


그렇다면 상상이 문학으로 표현된 것이 판타지 문학이고, 판타지 문학은 현실에서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무엇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판타지라고 생각하기에 거리를 두고 작품을 읽을 수 있고, 읽음으로써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점을 깨닫기도 한다. 그것이 판타지가 우리에게 주는 효과다.


그렇기 때문에 판타지는 현실을 바꿀 수가 있다. 판타지가 바꾸는 것이 아니라 판타지를 읽고 현실에서 부족한 점, 보완해야 할 점 등을 생각한 독자가 행동으로 나설 때 현실이 바뀌는 것이다. 문학의 힘.


소위 정통 문학이라고 하는 문학만이 아니라 문학은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그리고 판타지는 상상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내기에 현실과 비교할 수 있는 세상을 제공해 준다.


다른 세계를 보는 것. 우물 안의 개구리에서 벗어나는 것. 자신의 한계에 대해 생각하고 그 한계 너머를 보게 해주는 것이 판타지다. 그러므로 판타지는 현실의 쌍으로 현실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현실이 판타지에 영향을 주고, 다시 판타지는 현실에 영향을 준다. 이 책의 첫장에서 저자는 르 귄의 말을 인용한다.


"판타지는 물론 진실이다. 사실에 기반하지 않았을 뿐, 진실인 것은 맞다"(62-63쪽)


사실이라고 하지 않았다. 진실이라고 했다. 즉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을 수 있는 일들을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진실이다. 진실로 가는 길이 하나가 아니지 않은가. 사실주의 문학이 사실적인 표현을 통해서 진실로 향해 간다면, 판타지는 상상을 통해서 진실로 간다.


경계 너머, 한계를 넘어서는 상상. 그러한 상상을 현실로 가져오기. 이것이 판타지가 하는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판타지 소설에는 유토피아나 디스토피아 이야기가 있고,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마법의 세계가 펼쳐지기도 한다.


마법의 세계, 허황된 것 같지만, 그러한 마법은 우리의 사고를 극한까지 몰아갔을 때 만나게 되는 지점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불교의 화두에 있는 말,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와 같다고 할까.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절벽에 서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지 않으면 그 자리에 머물 수밖에 없고, 자신이 살아온 현실을 벗어날 수가 없다. 나아가야 한다. 이런 역할을 하는 것이 판타지라고 보면 된다.


저자는 이 책에서 판타지를 보는 아홉 가지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데, 제목만 이어 보아도 책의 내용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거짓말로 진실을 말하기, 마법이 현실 세계로 뻗어 나간다면, 화합을 추구하는 결말, 갈등보다 건설적인 각본, 여성을 억압하는 북 클럽에 저항하기, 더 나은 세계가 있다는 생각, 환상 동화 속 소년 찾기, 익숙한 과거를 재구성하는 공간, 두려움 너머의 진실을 보기


그렇다. 판타지는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법이 나오지만 마법은 상대를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화합을 향하고, 갈등보다는 변화를 추구하며,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분법을 넘어 다양한 성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기를 추구한다.


여기에 유토피아란 완성된 세계가 아니라 과정 중의 세계라는 점을 보여주며, 그래서 디스토피아에서도 유토피아를 찾을 수 있게 하고 있다. 이는 과거를 보여주더라도 현재를 재구성하기 위한 것이며 우리가 마주치는 두려움을 받아들이고 함께 나아가야 함을 이야기한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통해 죽음과 그에 대한 공포에 압도되거나 지배당하지 않는 법을, 다만 두려움에 이름과 얼굴을 부여하고 우리 삶의 한 공간을 내어주는 법을 배운다'(411쪽)고 한다.


이 문장만 보아도 판타지가 현실을 바꿀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양한 판타지 작품과 자신이 설정한 아홉 가지 주제로 판타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판타지 작품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도 판타지는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보여주는 거울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관점에서 판타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게 해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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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 이 시집 제목을 읽었을 땐 즐거움이 넘치는 시들이 실려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시들다는 말이 좋지 않은 의미로 쓰이니까, 시들지 않는다는 말이 들어 있으므로, 젊고 건강하게 발랄하게 지내는 생활이 표현되어 있지 않을까 했는데...


  시집을 읽으면서 발랄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어둡다. 쓸쓸하다. 외롭다. 처연하다는 말이 먼저 떠올랐다. 왜 그럴까?


  시 구절을 이해하기 힘든데, 시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 힘든데... 마치 우주가 까만 어둠에 싸여 있듯이, 시인의 말들은 그냥 어둠 속을 배회하는 낱말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럼에도 이상하게 마음에 남는 시가 있고, 그 시들이 우주의 어둠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드무개 마을'이라는 시에서 '드무개'? 하다가 찾아보니 남해에 드무개 마을이 있단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마을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마을을 시로 표현하는데, 무언가 어둡다. 


'죽은 새끼 짐승, 어둠에 젖어, 늙은 여자의 빈 젖만 빨던, 목소리가 근심스러웠다 등등' 이런 시어들로 인해서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도 어두운 삶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여기에 '우체통'이라는 시도 그렇다. 우체통은 나와 다른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 마음을 나눠주는 역할, 그래서 설렘이 있는, 희망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하는데, 시인의 우체통이란 시를 읽으면 그렇지 않다. 쓸쓸하다. 그냥 홀로 외롭게 서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고 다 어둡지는 않다.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것. 시인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올리브 동산에서 만나요'라는 말. 그리고 날짜가 적혀 있는데 2020년 9월 10일이다. 잠깐 의문에 잠겼다. 시인은 불의의 사고로 2020년 7월 24일에 영면했다고 한다. 그런데 9월 10일이라니?


이 의문은 발문을 읽고 풀렸다. 시인의 49재 날이 바로 9월 10일. 올리브 동산은 시인이 쉬고 있는 곳, 우리는 그곳에 있는 시인을 시집을 통해서 만날 수밖에 없다. 이 구절이 어디에 있을까? 유고시집이니 시인이 시인의 말을 쓰지는 않았을 텐데...


읽다가 '환상통을 앓는 행성과 자발적으로 태어나는 다이달로스의 아이들'(62-64쪽)이라는 시 첫구절이 '올리브 동산에서 만나자'라는 것을 발견했다. 


다이달로스의 아들이 누구인가? 이카루스 아닌가. 이카루스의 날개라는 말은 많이 쓰는데, 그는 결국 추락하지 않았던가. 하늘로 날아오르기를 바랐으나 결국 땅으로 바다로 추락하고 만 이카루스. 


그렇다고 올리브 동산에서 만나자라는 말을 추락하자는 말로 이해하면 안 된다. 이 말은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잇어야 하고,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계와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사람들이 함께 지낼 수 있는 그런 장소를 만들고, 그 장소에서 서로 어울리자는 말로 해석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곳으로 어떻게 가는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진적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그때는 아이가 되지 않으니. 나이든다는 것, 그것은 어릴 적 순수함을 하나씩 잃어간다는 뜻. 즉 식물로 따지면 시들어간다는 뜻. 다르게는 익어간다고, 성숙해진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 뜻을 잠시 놓아두자.


이렇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진적으로 가다가는 올리브 동산에서 만날 수가 없다. 하늘로 비상해야 한다. 비상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적어도... 우주를 가로질러, 다른 우주로 가려면 그냥 나아가서는 갈 수가 없다. 빛보다 빠른 속도로 가더라도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럴 때 우주를 가로지르는 길로 가야 한다. 


시인은 말한다. '아이는 불가피한 귀결로 자란다. 웜홀 웜홀'('환상통을 앓는 행성과 자발적으로 태어나는 다이달로스의 아이들'에서. 64쪽)


웜홀로 가면 시들지 않는다. 아이는 아이로 다른 세계로 간다. 이것이었구나, 시인이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 것은. 이 시 구절은 '친애하는 언니'(66-67쪽)라는 시에 나온다.


그래, 웜홀을 통과해 가면 시들지 않지. 시들기 전에 다른 세계에 도달하지. 그렇게 만날 수 있지. 그러한 올리브 동산에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시인이 그렇게 웜홀을 통과했다고 믿으련다. 그는 그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기다리고 있겠지. 


그의 시 중에 '일랑일랑' 시를 읽으며 그가 이미 뿌리내리고 있는 올리브 동산을 나는 이 시집을 통해서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일랑일랑


  어린 묘목을 사왔다


  8월이 살찌고 햇살이 과수원으로 긴 숨을 불어넣던 날 줄무늬 수박이 계절의 한가운데를 가르면 눈물 많은 복숭아가 먼저 생겨 제 울음을 토해내던 날


  1,630마일을 건너 신부를 데려왔다


  늙은 삼촌은 새장가를 갔다 데려온 신부는 맨발이었다 뿌리 휑한 신부는 과수원에 자주 들락거렸다 발이 큰 삼촌이 무서웠는지 맨발인 자기 발이 부끄러웠는지 


  심장이 붉은 토마토가 온점을 찍는 날이 늘어갔다 낯선 곳에서 매미가 울었다 알 수 없는 곳으로 울음이 흘러가고 곳곳에 여름의 문장으로 환한 날이었다


  여물지 못한 안부가 이국의 단어로 속살거리는 저녁 어둠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며든다 신부는 설익은 잠을 잤다


  곯은 자두는 단내가 심했다 복숭아가 낙과하고 으깨진 과육은 개미굴의 낙원이었다 신부는 알이 작은 참외를 곧잘 깎아 먹었다


  껍질을 풀어 생애를 더듬는 이국의 당신


  우거진 넝쿨에서 포도가 자랐다 한여름 소화되지 못한 응어리가 초록으로 폭발하듯 신부는 막 깨어난 알맹이를 삼켰다 두번째 뿌리를 내릴 곳에 맨발이 닿고 온 마을에 묘목이 옮겨졌다


  또다른 지구가 태어나고 있었다


김희준,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문학동네. 2021년 1판 6쇄. 104-105쪽


일랑일랑을 찾아보니 동남아시아에서 자라는 나무에서 피는 꽃 이름이라고 한다. 향기가 좋다고 하는데... 향수의 원료가 된다고 하니.


동남아시아에서 온 꽃나무와 동남아시아에서 온 이주민이 연결되는 시. 그리고 두번째 뿌리를 내린다는 말에서, 올리브 동산은 특정한 어느 지역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사는 곳을 올리브 동산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시인이 올리브 동산으로 가자고 하고, 거기서 만나자고 한 것은 그곳을 시간이 지나서야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시간을 건너뛰어 또는 그럴 필요 없이 바로 여기를 올리브 동산으로 만들면 된다고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시가 꼭 어둡지는 않다. 우주를 채우고 있는 암흑물질(암흑에너지)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해서 암흑이지만, 그 어둠이 우주를 지탱하고 있으니, 이 시집에서 느꼈던 어둠을 우주의 어둠으로 생각하고 싶어졌다. 그러면 광활한 우주를 우리는 여행하고 있게 되니까.


김희준이라는 시인의 시집을 통해 이렇게 우주를 여행하고, 웜홀로 다른 세계로 곧장 나아가기도 한다. 그의 시에서 '일랑일랑'의 향기를 맡는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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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망상의 시대 - 자기기만의 심리학
어맨다 몬텔 지음, 김다봄 옮김 / arte(아르테)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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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고 하지만, 모든 문제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접근하지는 않는다. 대표적인 예가 '확증 편향'이다.


보통 과학적 문해력이 뛰어날수록 이성으로 감성을 제어해서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연구에 의하면 '과학적 문해력과 수리력이 늘어날수록 문화 양극화는 완화되는 것이 아니라 심화된다. 일반 대중이 과학을 더 많이 배울수록 ... 이들은 더 능숙하게 자기 집단의 의견과 관련된 경험적 증거를 찾고 - 혹은 필요한 경우 꾸며 내고 - 의미를 부여한다'(263쪽)는 주장이 있다.


이것을 인정하기 힘든가? 과학자들은 합리적이고 냉철하게 이성적인 판단을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창조과학론'을 생각해 보자. 진화론을 믿지 않는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과학적 지식들을 창조론에 꿰어맞추려고 한다. 


이런 점만 봐도 인간은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을 꼭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이렇게 인간의 합리성에 반하는 사고 경향을 이야기하고 있다.


후광 효과라는 것도 그렇다. 사람이 신이 아니고, 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한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은 다른 분야에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엄청난 비난을 퍼붓는다. 그가 자신은 그런 존재라고 이야기한 적이 없음에도.


특히 유명인들에게 이것은 더욱 심하게 나타난다. 마치 그 사람은 완벽한 존재여야 한다는 듯이, 그가 말했다 또는 그가 그렇게 행동했다가 판단 기준이 되는 경우가 있으니, 이러한 후광 효과는 인간의 이성과는 배치되지만 우리가 실생활에서 자주 만나게 된다.


후광 효과말고도 비례 편향이라는 것이 있다. '거대한 사건(과 거대한 감정)에는 마찬가지로 거대한 원인이 있기를 바라는 심리적 갈망'(53쪽)이라고 하는데, 이는 음모론과 연결이 된다. 외계인의 음모라든지 뭐라든지 무언가 알지 못하는 원인을 이야기하는 것, 이것이 비례 편향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정 선거라는 음모론이 특정 사람들을 휩쓴 적이 있다. 선거에서 패배한 이유를 자신들의 정책이 잘못되었거나 정치를 잘못했다는 쪽에서 찾지 않고 부정 선거라는 쪽으로 돌리는 것, 이것도 일종의 비례 편향이다. 


굳이 정치를 이유로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이러한 비례 편향에 빠져 원인을 외부로 돌릴 때가 많다. 힘없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는 것, 이런 생각을 지닌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


앞에서 든 것들 외에도 참 많은 생각의 오류, 판단의 오류들이 나오는데 '매몰비용 오류, 제로섬 편향, 생존자 편향, 최신성 환상, 과신 편향, 환상 진실 효과, 쇠퇴론, 이케아 효과' 등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들이 우리들의 생활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여러 사례들을 들어 보여주고 있는데...


읽으면서 맞아, 나도 그런 적이 있어.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생각을 하는 책이다. 하지만 이런 사고들이 모두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가령 이케아 효과 같은 것을 보면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이 들어간 존재에 다른 것보다 더 애착을 느낀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 존재에 쏟아부은 자신의 노력은 양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의 판단으로 제한되지 않으니 말이다. 자기가 시간과 공력을 투여한 존재에 어찌 애정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전문가가 만든 훌륭한 작품보다도 더 나에게는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높은 가치를 매길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높은 가치에는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켜주었다는,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점이 들어 있으니까. 


이러한 긍정적인 사고 경향도 있지만 우리를 부정적인 쪽으로 몰아가는 사고 경향도 많으니,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늘 합리적일 수는 없지만, 대체로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려 하지 않는가. 그것이 진화의 결과이기도 할 테니까.


그러니 이러한 사고 경향을 알아두는 것은 그런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그 상황에 맞는 사고 경향을 떠올릴 수 있고, 떠올리는 순간 그러한 사고 경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는 방법이 된다.


적어도 그러한 사고 경향을 떠올렸다는 것은 감정에 푹 빠져들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니까. 자신을 조금 떼어놓고 볼 수 있는 이성이 작동하는 시간을 확보했다는 뜻이니까.


하여 이 책에 나온 많은 사고 경향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저자가 많은 대담들을 통해 그러한 경향에 빠진 사람들과 또 자신의 경험을 적절히 조화시켜 이 책을 썼기에 이해하기가 쉽고, 그것들이 지닌 위험성을 파악하기도 쉽다. 그리고 내가 그러한 경향 속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하면서 자신을 조금은 객관적으로 보게 하고 있으니, 정보의 바다가 넘실대는 현대 사회에서 차근차근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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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소년이 파랗지는 않다
조지 M. 존슨 지음, 송예슬 옮김 / 모로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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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이자 퀴어인 남자 이야기. 자신에게 주어지는 기대와 자신의 성향이 어긋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어떤 선택을 할까?


선택을 할 수 있다면 별 문제가 없다. 이 책의 저자인 존슨은 1985년 생이다. 그렇다면 지금 40이라는 말인데, 그가 살아온 시대라면 흑인도 퀴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아니다. 그는 흑인이자 퀴어라는 이유로 언제 어떻게 배제되고 목숨을 잃을지 몰라 두려워 한다. 


하지만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두려워 하는 세상이라면 그건 잘못된 세상이다. 마찬가지로 성적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배제되는 세상이라면 그건 세상이 잘못된 것이다. 이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성적 지향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지만, 남들에게 자신의 성정체성을 밝히기를 두려워하던 존슨. 그렇다고 자신의 성적 지향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줄넘기를 좋아하지만 미식 축구도 하고, 육상 선수로 나서기도 하는 등 소위 남성성이 강하다고 하는 운동에도 즐겨 참여한다.


성적 지향에 따라 좋아하는 운동과 잘하는 운동이 따로 있을 수가 없지만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구분하기도 하니... 그 역시 자신의 성적 지향성을 밝히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신을 전적으로 지지해주는 가족이 있었음에도.


따스하게 감싸주는 가족들에게서 자란 존슨에게도 세상은 위험한 곳이었다. 경찰이었던 아빠는 그것을 더 잘 알았을 것이다. 흑인 경찰이지만, 흑인 경찰의 아들에게는 언제든 경찰 폭력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또한 이 책에는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은 흑인 남성들 이야기가 나온다. 병으로 죽는 경우도 있지만 폭력으로 죽는 경우도 있으니...


그렇지만 가족의 지지는 삶을 살아가는데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어려움을 건네주는 징검다리가 된다. 자존감을 잃지 않고 살아가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존슨은 그런 환경에서 자란 것을 축복이라고 한다.


게이 자식을 두느니 죽은 자식을 두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면서 자식을 살해한 사람 이야기도 있는데, 존슨에게는 자신을 자신으로 인정해주는 가족이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을 그냥 친구로- 친구가 되는데 성적 지향성이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 현실이었으니 - 생각하는 주변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것은 그에게 축복이었다.


이런 축복을 그는 자신의 축복만에 그치게 하지 않는다. 이 책을 쓴 이유가 그것이다. 여전히 성적 지향성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것을 밝히기를 꺼리는 청소년들도 많다는 것. 그들에게 자신이 살아온 여정을 들려줌으로써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


그래, 세상이 하나로만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다양성이 삶을 더욱 풍부하게 해준다고 하면서 유독 성적 지향성이나 피부색으로 사람들을 차별하는 경우는 무엇이란 말인가.


가족의 개념을 반려동물이나 인공지능 로봇까지로(사이보그) 확장하는 시대에 그래도 생물학적으로 같은 종인 인간을 왜 구분하면서 내치려고 할까?


이런 시대에는 오히려 더욱 더 함께하려고 해야 하지 않나. 다르다는 것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런 다름이 나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준다고...


저자가 주장하듯이 성적 지향을 선택할 수 있게 하고, 그것을 존중해주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 사회 아닌가.


여전히 차별금지법이 동성애 활성화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우리 사회에서 과연 이 책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저자의 이 말을 명심했으면 한다.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커뮤니티에 공평과 평등을 부여할 때, 피해를 보는 사람은 억압자뿐이다.' (126쪽)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 당신은 억압자이냐고? 왜 약자들에게 공평과 평등을 부여하면 안 되냐고?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그래서 교육이 필요하다. '흑인다움과 퀴어함, 그 밖에 정체성을 누르는 억압에 맞서 싸울 때 가장 든든한 도구는 바로 제대로 된 교육이다.' (93쪽)


흑인다움이나 퀴어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강자들은 그것들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식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언급을 하지 않는 것. 백인이 강자인 사회에서 백인다움을, 이성애자 중심의 사회에서 이성애자임을 대놓고 이야기하지 않으니, 여기서 흑인다움과 퀴어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차별받는 소수자임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함의 주장이다.


그만큼 '주류 사회는 순전히 다름을 억압하려고 '정상' 개념을 세운다'(13쪽)는 말이 여전히 통용되는 것이다.


흑인 남성이자 퀴어로서 살아온 존슨의 회고록, 여전히 소수자들이 다르다는 이유로 힘들게 살아가고 있음을, 이들이 이렇게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서 또 앞으로 살아갈 세대들이 이것을 의식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다. 그 점을 명심하자.


흑인여성이자 퀴어인 오드리 로드의 [자미], 백인여성이자 퀴어인 재닛 윈터슨의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도 같은 맥락의 책이다. 다들 소수자지만 그들 또한 다른 상황, 다른 삶을 살았으니 함께 읽으면 좋을 책들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례를 보여준 책을 읽어도 좋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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