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읽었던 전래 동화 중 하나. 토끼의 재판.


  나그네가 호랑이를 구해줬는데, 호랑이가 잡아먹으려 하자 다른 존재들에게 판결을 부탁한다는... 그러나 인간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던 존재들은 호랑이가 나그네를 잡아먹어야 한다고 하는데, 그때 토끼가 내가 상황을 잘 모르니 처음 상황을 보여달라고 하고, 그 상황에서 나그네에게 갈 길을 가라고 했다는...


  현명한 판결. 이러한 판결하면 솔로몬이 생각나고, 또 중국의 포청천도 생각이 나는데...


  이들의 판결이 가진 공통점은 무엇일까? 강자라고 해서 잘못을 덮어주지 않는다는, 정의를 세운다는 점. 남들이 수긍할 수밖에 없는 판결이라는 점. 


그런데, 이런 판결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나? 편견이 없어야 한다. 권력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또한 옳고 그름을 판단할 눈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약자의 처지를 살필 수 있는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 하고, 현재보다도 미래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전향적인 판결. 이는 글자에 매인 판결이 아니다. 법전을 아무리 읽어도 법전에 나와 있는 문구대로 세상은 돌아가지 않는다. 사람도 그런 글자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글자에 나와 있지 않은 것들, 그것을 읽을 수 있을 때 좋은 판결을 할 수 있다.


시대를 읽고, 사람들 마음을 읽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책만 봐서는 안 된다.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들이 읽을 책은 법전이 아니라 -법전은 이미 읽었을 테고, 그것은 필요조건이 되지만 - 사람이어야 한다. 사람책을 읽어야 한다. 


권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책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책들... 그 사람책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판결이 사람들의 판단, 감정과 시대의 흐름에 어긋날 수도 있다.


제가 알고 있는 법전 속에만 갇혀 있으면... 노력을 하지 않으면... 엘리트들이란 그래서 더욱 힘든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자기가 살아온 환경과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읽어야 하니까. 읽고 그들을 이해하고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 맞는 판결을 해야 하니까.


토끼의 판결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자신의 힘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는 그러한 존재를 응징한 것이었다고 본다. 토끼를 잡아먹기도 하는 사람이기에 사람에게 좋은 감정만 있는 것은 아니었을 터인데, 그 상황에서는 호랑이가 분명 잘못했기 때문이다. 즉 토끼는 편견에 갇혀 있지 않았다.


자신이 살아온 환경만 보지 않았다. 그런 토끼의 이야기가 계속 되어온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그런 상황에 자주 빠지기 때문이다. 호랑이를 구해준 나그네와 같은 상황.


이런 현명한 판결을 하는 존재를 법관이라고 생각했다. 법관은 정말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판결을 통해 한 사람의 운명을, 어떤 때는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러니 이들은 정말 신중해야 한다. 권력자들이 아니라 시민들을 살펴야 한다. 시대의 흐름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맞춰 시민들의 눈높이에 맞는 판결을 해야 한다.


시민들의 눈높이에도, 시대의 흐름에도 맞지 않는 판결을 하면서도 자신들이 엘리트라고, 자신들은 오류가 없는 판결을 한다고 자부한다면, 그들이야말로 판결을 할 자격이 없는 존재다. 그런 존재들이 득시글하는 곳은 바로 똥통에 불과하다.


똥통에서 그 냄새에 익숙한, 그래서 다른 좋은 냄새를 오히려 악취라고 여기는 똥파리와 같은 존재들이 된다. 자신들은 그 냄새를 맡지 못할 뿐... 남들은 다 맡고 코를 가리고 있는데...


이동재 시집 [민통선 망둥어 낚시]를 읽다가 몇 구절에서 요즘 판결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특히 '남원에서 역사책을 보다가 현실을 돌아봄'(101쪽)이란 시에서는, 햐, 이런 것들이 엘리트라고, 이런 것들을 관료라고...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는데...


작년 12월 어느 날 국무회의 장면이 겹쳐지기도 한다.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고, 자기 주장을 강하게 하지도 않고 그냥 몸보신하는 그런 회의. 마찬가지로 힘있는 자리에 있는 자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책임을 모면하려는 노력만 하는...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행동은 하지도 않으면서 자기들을 비판하면 '감히~' 하는 듯한 태도. 


이 시를 읽어보면 임진왜란 때 관료들의 모습... 저만 살려고 하는,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는 그런 관료들의 모습이 그때의 관료들과 겹쳐진다. 그러면서 그들을 합리화하려는 듯한 비슷한 족속들... 똥통 속의 그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좀 다른 상황인데, 이 시집에 엘리트라고 하는 교수 사회의 모습을 그린 '똥통에서 보낸 한 철'(105쪽)시가 있다. 어디 이것이 그곳만의 문제이겠는가마는... 지금 이런 똥통이 곳곳에 있으니... 저들만 자기들이 똥통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큰소리치고 있을 뿐.


   똥통에서 보낸 한 철

- 이 시대의 정의로운 한 인물을 기리며


그 동안 똥통에 빠져 있었던 기분이라고 했던가

이태리 유학까지 갔다왔다는 그의 목소리가

명색이 성악이 전공인 그의 목구멍에서

오 년 내내 치밀어 올랐을 욕지기

학교 문닫고 교수직에서 해임된 그가 한 말,

그가 말한 똥통이 비단 광주예술대뿐이겠는가

사방에 냄새나는 입을 쩍쩍 벌리고 있는

저들의 입이 모두 똥통이 아닌가

코 싸쥐고 싶은 똥통 천국,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으으, 너도 구더기

아악, 나도 구더기.


이동재, 민통선 망둥어 낚시. 하늘연못. 1999년. 105쪽.


* 이보령 교수는 광주예술대학 교수협의회 회장이었음.


하여 앞의 시 '남원에서 역사책을 보다가 현실을 돌아봄'에 보면 '이 벼락맞을 놈들 백성들 버리고 저만 살겠다고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는구나, 그 놈들 후손들 또 지금도 곳곳에서 뒤꽁무니 길게 빼고 좇빠지게(아마도 좆의 오타이지 않을까 싶다. 좇이 아니라 좆. 참 적절한 비속어 사용이다.) 뛰고 있는 건 아닌지 그들의 수많은 성씨가 지금 네 연구실 앞에 걸려 있는 건 아닌지 족보 좀 뒤져봐라 이 잡것들아, 책 옆에 끼고 사는 것이 정녕 부끄럽지 않은가.' (101-102쪽)라는 표현으로 나오고 있다.


소위 지식인아고 하는 것들이, 사회 엘리트라고 하는 것들이 하는 짓이 없는 사람들 등쳐먹기, 위기에 저만 살려고 도망치기, 다들 살기 힘들 때 재산 축적하기, 권력자에게 잘보이기 등이라면... 정말, 이런 자들을 어떻게 엘리트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동재 시집을 읽으며 작년 겨울과 지금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마음이 겨울로 가고 있다. 찬바람이 쌩쌩 불어온다. 방한복을 입어야 하는데, 누가 따뜻한 모닥불을 지펴줄 것인가. 엘리트들? 아니, 그건 바로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몫일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사람책은 엘리트들 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이 더 잘 읽을 테니.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사람책'을 읽을 줄 알아야 똥통에 빠지지는 않을 텐데... 적어도 자신이 똥통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 텐데...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시. 랭보가 쓴 '지옥에서 보낸 한철'을 연상시키는 제목... '똥통에서 보낸 한 철' 


우린 그렇게 다시 똥통에서 한 철을 보내면 안 된다. 정녕 그런 세월을 다시 겪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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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위픽
정보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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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교된 대학교 기숙사를 개조해서 만든 이 기계학습센터는 산골짜기 한가운데 있었다. 냉난방 비용 절감을 위해서인지 창문을 거의 판자로 막아놨지만 에어컨 호스가 연결된 곳만 한 뼘 정도 창문 유리가 노출되어 있었다.'(12쪽)


주인공이 살게 된 곳을 묘사한 부분이다. 돈이 없어서 자신의 두뇌를 업로드 하는 조건으로 입주하게 된 곳. 이곳은 '안에 들어가서 복도와 방 구조를 실제로 보고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교도소였다. 감방에는 창문이라도 있으니까 사실 교도소가 여기보다 나은지도 모른다'(14쪽)는 표현으로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해서 들어온 곳이다.


자신의 뇌를 업로드하는 조건으로 주거를 해결하고 돈도 어느 정도 받는.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결국 자신을 팔아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들이 사는 곳은 폐쇄된 곳이다. 스스로 폐쇄했다고 하기보다는 폐쇄된 공간으로 내몰린 사람들.


이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좋겠지만, 신영복 선생이 어떤 글에서 한 말처럼 한 여름의 감방 안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라고, 약자들에겐 약자들을 괴롭히는 또 다른 약자가 있다.


강한 자에게는 아무 소리도 못하면서 자기보다 약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는 강하게 구는, 그야말로 강약약강인 존재. 소설에서는 그런 이를 '또라이'라고 하는데, 이런 또라이는 특이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생활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어디에나 통계적으로 열 명 중에 한 명 정도는 또라이가 있는 법이고 주변에 아무도 또라이가 없으면 내가 그 또라이라고 하지 않던가'(17쪽)라는 표현으로, 소설은 또라이를 등장시킨다. 어떤 또라이?


바로 자신도 같은 처지이면서 약자를 더 괴롭히는, 약자를 괴롭히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그런 또라이. 915호 사람이다.


그가 괴롭히는 사람은 이주노동자인 요가 강사다. 자신의 나라에서 엔지니어였다는 요가 강사. 하지만 이 나라에 온 그는 여기저기 돈을 벌기 위해 다니는 사람일 뿐이다. 약자들에게도 무시당하는 그런 사람.


여기에 주인공을 또 만만하게 보는 915호. 그에게는 자신의 먹잇감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또라이 짓을 한다. 하지만 약자가 언제까지 약자일 수는 없는 법.


폐쇄된 공간에서 쫓겨난 915호는 이제 그곳에 있는 약자들에게 군림할 수가 없다. 그는 그런 세계에서도 쫓겨난 사람. 그걸 인지하지 못하고 강하게 굴려 했을 때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응징. 그는 약자로 전락하고 피해자가 된다.


이렇게 소설은 약자들을 보여준다. 이들은 강자에게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는다. 않는다가 아니라 못한다고 해야 하나. 그러나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 중에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강하게 나간다. 그렇게 그는 가해자가 된다. 하지만 이 가해는 언제까지 지속될 수 없다. 그 역시 약자니까. 가해와 피해가 뒤집히는 것은 순간.


이런 사회의 모습이 바람직할까?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사회는 '폐교된 대학교'라는 표현처럼 사회의 구실을 못하는 사회일 뿐이다. 그런 사회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교류하는 창문이 없다. 그 창문은 아주 조그마해서 많은 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런 사회의 모습을 정보라는 소설에서 보여주고 있다. 폐쇄된 사회에서 서로가 서로를 돕는 것이 아니라 남을 누름으로써 자기 존재를 과시하는 사람이 있음을. 그러나 그런 사람은 그 사회에서 오래 존속하지 못함을. 오히려 서로를 도와주는 관계가 오래 감을. 그것이 바람직한 방향임을.


비록 가해에 공모하지만 주인공과 요가 강사의 경우가 그렇다. 이들은 서로를 이해한다. 자신이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지만 할 수 있는 정도까지는 최선을 다해주는 요가 강사와 그런 요가 강사에게 고마워하고 그를 존중하는 주인공. 이런 관계들이 지속되어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데...


그런 관계는 조그만 창문으로 빛이 들어오는 것과 같은 관계다. 915호같은 사람과의 관계는 판자로 막아놓은 창문이고.


자 우리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 조그만 창문을 마저 가려야 하는가? 아니면 판자로 막아놓은 창문에서 판자를 떼어내야 하는가? 판자를 떼어내고 더 많은 부분을 봐야 한다. 함께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 사회를, 보여주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지 않는 부분까지 보아야 한다. 그것이 '창문'의 역할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한다. 닫힌 세계를 열린 세계로 여는 것은 결국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915호 같이 더 닫는 그런 존재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그런 소설. 짧지만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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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스 무하, 새로운 스타일의 탄생 - 현대 일러스트 미술의 선구자 무하의 삶과 예술
장우진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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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고 있지 못한 화가. 어디선가 이름은 한번 들어본 것 같은데, 그가 무슨 그림을 그렸지 했는데, 이 책에는 그의 그림이 많이 실려 있다.


화려한 그림들... 장식미술가로 알려져 있다고 하던데, 당시에 광고 그림을 그렸던 화가. 아니 광고 그림만을 그렸던 화가가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광고 그림으로 알린 화가라고 해야겠다.


그가 말년에는 슬라브 민족주의 그림을 그렸고, 또한 단지 광고만이 아니라 연극 무대의 배경이나 특이하게도 보석 디자인까지 했다고 하니...


무엇보다 이 책은 무하의 작품을 많이 실어서 좋다. 그림을 보는 재미가 너무 좋다. 이런 그림들, 어디에서도 호감을 받을 그림들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림을 보는 순간 환상의 세계로 들어선 듯한 느낌을 주고 있으니, 그림을 통해서 다른 세계를 만나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


책에 실린 그림만 봐도 디자인이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눈길을 끈다. 그리고 글자와 그림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이러니 당시에 무하의 그림을 많은 광고주들이 원했겠지. 무하가 너무 많은 작품 활동에 시달렸다고 하니...


그럼에도 무하는 정말 성실한 작가였다고 한다. 자신이 부족한 점을 그 성실성으로 메울 수 있었던... 처음으로 프레스코화를 의뢰받았을 때도 처음부터 공부를 다시 해서 좋은 작품을 남겼다고 하고, 조각을 할 때도 또 유화를 그릴 때도 그의 성실성으로 인정받는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를 장식미술가로만 취급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어쩌면 앞서 활동한 앤디 워홀이라고 해야 하나? 예술가들 중에 예술가들을 구분하는 사람들이 있다. 순수예술과 상업예술로 크게 나누고, 상업예술을 하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도 있었고...


예술을 그렇게 나눌 수가 있나? 하긴 문학에서도 장르문학이라고 해서 수준이 떨어지는 문학으로 취급한 적도 있었으니... 과거의 일이다. 지금은 그러한 구분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예술은 예술일 뿐이니... 길거리 미술, 길거리 음악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무하의 그림은 우리에게서 떨어져 있는 그림이 아니라 우리 생활에 밀착해 있는 그림이다. 그래서 더 친숙하고 반감이 가지 않는지도 모른다. 처음 보아도 와, 멋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니...


그러한 무하의 생애와 그림을 이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참 많은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도 있는 책.


그의 초기 작품 한 편을 여기 소개한다. '지스몽다'라는 작품이다. 1895년 작품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풍의 그림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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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日記 - 황정은 에세이 에세이&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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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라고 하면 한 사람만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남에게 읽히려고 쓴 글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에게 하는 말을 담은 글. 그것이 일기다. 그러므로 일기는 솔직하다. 자신의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이 드러냄. 드러냄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게 된다.


자기 성찰의 도구가 일기라면, 왜 다른 사람의 일기를 읽을까? 다른 사람의 내밀한 마음이 담긴 글을 통해 어떤 위로를 느끼려고 하는 걸까?


나같은 경우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통해 내 생각을 비춰보기도 한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의 일기는 더더욱. 그래서 이 책에 실린 세월호에 관한 글을 읽을 때는 마음이 아프다.


마음이 아픈데도 읽을 수밖에 없다. 세월호는 여전히, 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진행 중이니까. 아직도 그와 비슷한 일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니까. 그래서 작가가 이런 문장을 들고 갔다는 내용의 글을 읽을 때 먹먹하기도 했다.


'어떻게 지내십니까'(109쪽)


이것은 특정한 누구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우리 모두에게 하는 말이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는데, 그런 일들 속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삶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


누군가의 고통으로 내 행복을 만들 수는 없다는, 그런 사회는 되지 않아야 하고, 물신, 돈에 사람을 종속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데...


여기서 생각의 힘, 아니 생각을 해야 한다는 당위를 발견한다.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행동한다면,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 그것조차도 생각하지 못하고 행동하면 그것이 쉽게, 너무도 쉽게 '혐오'와 연결이 된다는 것.


사건, 사고, 혐오.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 이런 사회에서 과연 나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


너무도 쉽게 다른 존재들을 비난하지 않았던가 하는 반성. '일기'에 이런 문장이 있다. 


'조금만 경계심이 풀려도 누군가를 즉시 비난할 준비가 되어 있다'(141쪽)


경계심이 풀린다는 말,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즉각적으로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 그런 존재들이 넘쳐나는 사회에서 과연 '어떻게 지내십니까'라는 문장은 지금도 유효하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생각없음을 게으름이라고 한다면, '혐오라는 태도를 선택한 온갖 형태의 게으름을'(72쪽)이라는 문장을 곱씹어야 한다.


더 살펴보고 더 고민해보고, 더 들어보고 해야 하는데, 그것을 생략하는 게으름, 그냥 자신이 살아온 관성대로 행동하는 게으름. 그것은 나만을 고수하는 게으름이다. 오로지 나만이 있을 뿐. 하지만 나는 남이 있어야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일기'를 읽으면 그런 게으름에서 조금은, 아주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 적어도 읽는다는 일이 게으름에서 벗어났다는 말이 되니까. 그렇게 황정은의 '일기'를 읽으며 작가도 나도 건너왔던 시대를 다시 생각한다. 


그런 사회에서 어떻게 지내왔는지도 생각하면서... 무엇보다도 고정관념이라는, 편견이라는 게으름에 빠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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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없는 사람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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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랄하다. '나는 사람들을 웃기면서도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해왔다.'(12쪽)고 커트 보니것은 말하고 있다. '웃음은 안도를 갈구하는 영혼의  산물이'(13쪽)고, '유머는 두려움에 대한 생리적 반응이다. ... 어떤 웃음은 두려움에서 나온다.'(13쪽)고 하고 있으니, 보니것이 살았던 시대가 결코 행복한 시대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2차세계대전에 참전했고, 베트남 전쟁을 목격했으며, 부시가 대통령일 때 이라크를 침공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 왜 세상이 좋아지지 않고 더 나빠지냐고 분노했던 사람. 또한 인간으로 인해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고 걱정했던 사람.


그런 사람이었기에 그는 신랄한 풍자로 사람들을 각성시키려 했다. 그러한 풍자에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풍자가 아니라 비난이 될 것이다. 고도로 세련된 비난, 이것이 바로 풍자 아니겠는가. 당하는 사람조차도 웃으며 넘길 수 있는.


그러나 이러한 풍자를 아무나 할 수 없다.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더욱이 강자를 풍자할 때는. 사실 풍자라는 말은 약자에게는 할 수 없는 말이다. 약자를 풍자할 수는 없다. 약자를 풍자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사실 약자를 더 빠져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밀어넣는 것이니. 풍자는 강자에게 해야 하는 것. 강자를 풍자해 약자의 곁으로 강자를 내려보내는 것. 그것이 풍자다. 그러니 풍자를 통한 웃음은 사실 두려움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강자에 대한 두려움,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두려움. 이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 풍자를 통한 웃음.


이와 비슷한 말로 '유머는 인생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한 발 물러서서 안전하게 바라보는 방법이다'(126쪽)가 있다. 그는 평생을 웃음으로 이 세상을 이겨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풍자, 풍자를 통한 웃음은 바로 세상을 향한 그의 발언이다.


세상이 아무리 개떡같아도 살아야 한다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지금 이 순간 행복을 느껴야 한다고... 그의 삼촌이 했다는 말... "이게 행복이 아니면 무엇이 행복이랴!"(129쪽)


그럼에도 그는 절망한다. 그렇게 신랄한 풍자를 해도 세상이 바뀌지 않았기에. 그래서 뒷부분을 읽으면 슬퍼진다.


'나 역시 더이상 농담을 못 할 것 같다. 농담은 더이상 만족스런 방어 메커니즘이 아니다. ... 너무 많은 충격과 실망을 겪은 탓에 이제 나는 더이상 유머로 방어를 할 수가 없다. 웃음으로 처리할 수 없을 만큼 불쾌한 일들을 너무 많이 겪었기 때문에 까다로운 사람이 돼버린 듯하다.'(126-127쪽)


웃음으로 넘길 수 없을 만큼 세상이 망가져버렸다는 인식. 그럼에도 그는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일은 사람믈에게 웃음으로 위안을 주는 것이었다.'(127쪽)고 하고 있으니, 그는 웃음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었는지도, 그것이 안 되더라도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그는 신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는다. 신에게 맡기기보다는 현실에서 최선을 다해 살려고 한다.


'우리 휴머니스트들은 사후에 받을 어떤 보상이나 처벌을 고려하지 않은 채 최대한 점잖고 공정하고 올바르게 행동하고자 노력한다. 우리 휴머니스트들은 우리가 현실적으로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추상성에 최선을 다해 봉사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사회다.'(81쪽)


이 얼마나 현실적인 말인가? 신에게로 도피하지 않고 자신이 발딛고 살고 있는 현실에서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을 끝까지 해야 한다는 자세. 그렇게 살겠다는 자세. 그것이 바로 예술을 하는 작가들의 일이라고.


'얘술은 삶을 보다 견딜 만하게 만드는 아주 인간적인 방법이다. 잘하건 못하건 예술을 한다는 것은 진짜로 영혼을 성장하게 만드는 길이다.'(32쪽)


그렇다. 보니것의 글을 읽으면 영혼을 생각하게 된다. 사후의 영혼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영혼. 어떻게 살아야 내 영혼이 건강한가를 생각하게 하는 그러한 작품들.


보니것의 신랄한 풍자에는 사랑이 담겨 있다. 인간만이 아니라 지구, 우주의 전존재들에 대한 사랑. 그러므로 인간이 지구를 파괴하는 것에 마음 아파하고 있으며,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파괴하는 것에 반대하고 있다. 그러면 절대로 안 된다고...


그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글들이 실려 있는 이 책.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으면 좋다. 여기에 촌철살인의 경구들이 그림과 더불어 실려 있으니, 그것들을 곱씹어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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