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 오늘 불면이다
강은교 외 지음, 한국작가회의 저항의글쓰기실천위원회 엮음 / 아카이브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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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자신을 비치지 말고 사람에 자신을 비추라. 경어인(鏡於人)이라는 말로 대변되는 이 말은 물은 자신의 겉모습만 비치지만, 사람은 자신의 삶의 모습까지 비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람에게 자신을 비추어본다면,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놈이 그 놈인 세상에서, 끼리끼리, 유유상종의 세상에서 경어인이라는 말은 자신을 합리화하는데 이용될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물에 자신을 비추어볼 수 있어야 하는데, 자신의 겉모습이라도 제대로 파악해야 하는데, 과연 지금 비출 물이 있는가? 

그나마 있는 물도 '살리기'란 명목의 '죽이기'로 다 죽이고 있지 않은가. 

물에 비친 내 모습이 탁하게 보인다는 김용택 시인의 한탄이 남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문학인들을 이 책에서 최성각은 잠수함의 토끼, 광산의 카나리아라고 하고 있다. 그만큼 문인들은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하다는 말이리라. 즉 문인들을 생명의 파수꾼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강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고, 마치 자신의 일인양 괴로워하는 문인들이 그냥 지나칠 수 없다고 글들을 모아 낸 책이 이 책이다. 강에 대한, 물에 대한 산문을 모아놓은 책이다 

읽으면서 그래, 그래 맞장구를 치다가도, 이제는 강에 대한, 물에 대한 기억도 사진 속에서나, 아니면 이러한 글 속에서나 찾아볼 수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안타까움만 늘어나고 있었다. 

차창룡의 글에 '강은 지구의 창자다. 아니, 우리의 창자다....음식이 입에서 항문까지 가는데 오래 걸린다고 창자의 길을 넓힌다며 어떻게 될까?'하는 구절을 읽고, 4대강 사업에 대한 본질을 이렇게 명확하게 집어낼 수 있는 작가들이 있다는 사실에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강은 완전히 죽지 않을 거라는 위안을 느끼기도 하지만. 

초식동물의 창자를 육식동물의 창자로 만들기 위해 구불구불한 창자를 팍 잘라내어 일직선으로 펴내면 과연 그 동물이 살 수 있을까? 지구를 동물에 비유하면 육식동물이라기보다는 초식동물에 해당할텐데, 강은 그 동물의 창자일텐데...어떻게 창자를 인위적으로 넓히고, 펼 생각을 하는지... 

우리 관절의 굽는 부분에 이렇게 굽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깁스를 해버리는 상황이 지금, 4대강 사업 아니던가. 아니면 우리의 창자가 너무 구불구불하고 길다고 펴고 잘라내야 한다고 하는 상황을 4대강 살리기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장이 제대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강(江). 

말 그대로 강은 우리의 생명줄이다. 

이 생명줄을 우리 맘대로 어떻게 조작할 권리가 우리에겐 없다. 

이런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증언자로 나서 증언기록을 남기고 있다. 

자, 자신의 삶을 물에라도 비추어볼 수 있게 하자. 

제발, 사람들, 끼리끼리인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왜 비판하는지, 그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비추어보자. 그 다음 물에, 강에 자신을 비추어 보라. 그러면 과연 4대강 사업이 살리기인지, 죽이기인지 그 때는 확연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지구, 현재의 우리들 것이 아니다. 당연한 얘기 아니던가. 과거에 살았던 생명체들, 단지 생명체라 이름하지 못하는 존재들과 현재 살고 있는 생명체들, 그를 존재하게 하는 존재들과 그리고 미래에 존재할 모든 존재들의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면 당연히, 강을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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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을 꿈꾸다 나의 문화 교과서 2
정재왈 지음 / 미래엔아이세움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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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사실, 무얼 좀 알고 있어야 더 재미가 있다. 

야구장에 가도, 야구 규칙을 하나도 모르는 사람과 야구 규칙뿐만이 아니라 감독, 선수 등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경기를 관람하는데 많은 차이를 보이게 된다. 

뮤지컬이라는 자주 접하기 힘든 예술 장르는 더더욱 그렇다. 

뮤지컬이 많이 대중화되었고, 오페라에 비하면 대중예술이라고 하지만, 공연할 수 있는 극장이 필요하다는 점에 있어서는 아직도 많은 대중들이 관람하기에는 힘든 예술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도 대학로에는 많은 공연장이 있어서 그 근처에 사는 사람이라면 쉽게 관람하겠지만, 그 지역이 아닌 사람들은 한 해에 한 번 정도도 관람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이와 비슷하게 미국도 브로드웨이라는 장소를 빼놓고, 사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영화처럼 접하기는 어려운 장르가 뮤지컬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사람들은 뮤지컬에 대해서 잘 알지 못 한다.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고, 이 장르가 학교에서 다루어진 지도 얼마되지 않아, 많은 사람들에게 그다지 친숙한 예술 장르도 아니다. 

이 책은 이런 면에서 초보자들에게 상당히 유익하다.  

우선 쉽다. 뮤지컬의 역사, 종류, 그리고 특성까지 쉽게 청소년들도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고 있다. 

뮤지컬이 저 먼나라 얘기가 아니라 바로 내 곁에 있는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전문적인 내용을 빼고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뮤지컬의 특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기에 읽기에도 힘이 들지 않고, 다 읽은 다음에는 뮤지컬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또한 이 책을 읽으면 뮤지컬에 대한 흥미가 생긴다. 어 나도 한 번 관람해봐야겠네란 생각이 들게 만든다. 특히 부록으로 있는 뮤지컬 음악은 그 음악만으로도 훌륭하다. 이를 직접 공연 현장에서 듣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확실히 아는 만큼 보인다.  

그리고 많이 알면 알수록 변화를 이끌 수 있다. 

뮤지컬에 대해 많이 알고 많은 관심을 가진다면 뮤지컬 공연을 할 수 있는 장소도 더 많이 확대되고, 더 쉽게 뮤지컬을 접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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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치료의 이론과 실제
권성훈 지음 / 시그마프레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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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암울한 생각에 빠진 적이 있었다. 절망에 빠졌다고 해야 하나.  

세상이 캄캄한 암흑이고 광명은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 들어와 있는데, 앞으로도 뒤로도 끝이 보이지 않아, 이대로 이 터널 안에 갇혀 벗어나지 못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이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 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으로 자신이 점점 더 움츠러들던 때. 

이 때 이육사의 '절정'이 마음 속에서부터 나왔다. '절정'을 그 때마다 머리 속으로, 입으로 흥얼거렸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힘들고 힘든  상황을 이렇게 표현하다니, 지금 내 상황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쫓겨나고 쫓견고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상태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하지 않는다. 희망을 생각해야 한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 말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정확히 해석이 되지는 않지만 마음에 굉장한 울림으로 남아있다. 

겨울은 나에게 무지개이긴 하지만, 강철로 된, 즉 나에게 부드럽게 다가오지 않고, 나를 단련시키는 존재로 다가온다고, 그냥 그렇게, 이 겨울은 지금 나를 힘들게 하지만, 결국은 내게 무지개가 될 거라고... 

터널 속에 들어와 있다는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이미 출구를 인식하고 있다는 생각. 

그렇다면 이 절망은 언젠가는 끝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  

자, 결코 희망을 버리지 말자고... 더 앞으로 나가자고. 한 발 한 발 나가다 보면 빛이 보일 거라고. 

이렇게 시를 통해 힘을 얻었다. 이것이 바로 시치료다. 

뭐라고 제시하지 않아도 내 맘 속에 남아 필요한 순간 나에게 힘을 주는 존재, 바로 시. 

이 책은 이러한 시치료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이것을 문학이나, 철학으로 분류하지 않고 교육이야기에 넣은 이유는 바로 시의 교육적 효과에 있기 때문이다. 

시치료를 배우고 가르친다는 의미를 떠나서 시 자체에 이미 교육적 효과가 담겨 있고, 시를 읽게 하고 쓰게 하는 행위 자체가 교육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시읽기 보다는 시쓰기에서 치료 효과를 찾고 있고, 따라서 시읽기의 치료론이라기 보다는 시쓰기의 치료론이라고 할 수 있다. 시를 쓰는 과정에서 자신을 치료한다는 이야기. 

그래서 시쓰기 치료에서 작용하는 요소로 리듬, 비유와 상징, 이미지, 시적 형식을 들고, 이를 시대별 시인의 예를 통해서 내용을 이끌어가고 있다. 

일제시대에 한용운, 김소월, 이육사는 리듬을 통해서 일제라는 어둠을 어떻게 극복해나갔는가 살피고 있으며, 5-60년대 전쟁이후의 시대 어둡고 힘든 시대를 김수영, 김춘수, 서정주를 통해 비유와 상징의 시 쓰기로 어떻게 이 시대를 견뎌나갔는지 서술하고, 7-80년대는 김지하, 신경림, 신동엽을 통해 이미지를 통해 시대를 극복해나가는 모습을 전개하고, 8-90년대 민주화 시대에는 김남주, 박노해, 황지우를 통해 시적 형식의 변모를 통해 시대를 이겨나가는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다. 

시대 환경을 인간이 벗어날 수 없다면 자신의 시대를 인식하고 이 시대에 대응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이는 시대를 나름대로 극복해나가는 자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자세를 글쓴이는 시쓰기의 다양한 방법에서 찾고 있다.  

결국 시쓰기란 사물이나 현상 속에 숨어 있는 본질을 꿰뚫어 그것을 언어로 표현해 냄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런 시쓰기에는 반드시 관조와 성찰이 따르게 된다. 

관조와 성찰이라면 일종의 거리두기, 다르게 바라보기 등이니,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고, 자신의 삶을 반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반성하는 사람, 이 사람은 세상을 올바로 살 수밖에 없다. 

여기에 시치료의 의미와 효과가 있다고 본다. 

다만, 의문이 드는 점은, 일제시대에 김소월이 자신의 시쓰기로 그 암담한 현실을 나름대로 극복해냈다는 저자의 주장이 맞는다면, 그가 왜 자살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김소월은 시쓰기를 통해 자신을 완전히 치유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또 김춘수는 무의미 시는 현실부정의식의 결과물이라고 했는데, 세상이 별로 좋아지지도 않은 80년대 초반에 그는 왜 정치권에 참여했을까 하는 의문도 들고... 

서정주를 비유와 상징으로 시 치료에서 다루고 있는데, 과연 서정주를 시치료에서 다룰 수 있을까? 시치료라면 삶이 바르게 된 사람을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 서정주는 아직도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지 않은가? 정몽주나 이황을 보라. 이들은 시와 삶이 일치하지 않는가? 시가 결국 자신의 삶을 정립하는 중요한 요소라면 서정주는 좀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몇 가지 의문점을 빼고는 개인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시대와의 연관성에서 시치료를 다룬 이 책은 여러가지를 생각할 수 있게 해줘서 좋았다. 

학교에서 시를 가르칠 때, 단지 개인에게 다가오는 의미만이 아니라, 김소월 같은 경우도, 김춘수 같은 경우도, 심지어 서정주 같은 경우도 사회, 시대와의 관련 속에서 자신에게 시가 어떻게 다가오는지, 시를 통해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고 고쳐가고 있는지를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는 책이다. 

시를 읽지 않는 시대, 불행한 시대다.  

시를 읽을 수 있게, 시에 대한 여러 책들도 필요하겠지만, 우선 시를 읽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이는 학생들에게 또는 어른들에게 시를 읽어라, 읽어라 하지 말고, 읽을 시간을, 읽을 여유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쁘게만 사는 현대 삶의 방식. 다시 한 번 생각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여기서 짧은 시는 반성과 통찰, 관조와 성찰을 통해 이런 시대를 사는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에 시치료가 아니더라도, 시에 대한 교육은 반드시 필요하다. 시교육이 제대로 된다면 시치료는 무의식중에라도 자연스레 시교육에 따라오게 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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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통권 117호 - 2011년 3-4월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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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평론, 제목이 딱딱하다. 격월간지이고 벌써 117호까지 나왔다. 

디자인이 눈에 확 띠지도 않고, 종이 질이 좋지도 않은 재생지를 쓰고 있으며, 내용 또한 주류에서는 한참 벗어나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은 좋다. 사람의 인식을 바꿀 수 있고, 인식의 바꿈을 행동의 변화로 나아가게 할 수 있으며, 나에서 우리로 연대를 할 수 있게 한다. 

나만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다는 공감. 공감에서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힘. 결국 이 책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 

환경운동, 생태운동 어떻게 이름을 붙이든 녹색평론은 이러한 운동을 이끌어내었고, 또 이끌고 있다.  

격월간지. 두 달에 한 번 나와, 그 때 그 때 사봐도 좋고, 아예 정기구독을 신청해도 좋고, 아님 녹색평론 후원자로 나서도 좋다. 

많은 사람들이 읽을수록 공감대가 넓어지고, 그만큼 우리는 야만의 시대에서 인간의 시대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1999년 우연히 김종철 선생의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이란 평론집을 읽었다. 그 평론집의 내용에 공감을 하고, 녹색평론 이야기를 보고 당장 정기구독을 신청했다. 

그리고 처음 책을 받고 읽는 순간, 이 책은 내 가슴에 팍 꽂히고 말았다. 내용 하나하나가 내가 간과하고 있었던 문제를 다루고 있었으며, 그렇게 생각할 수 있구나, 그렇구나 하는 감탄사를 연발하게 만들었다. 

그 후 녹색평론은 내 생각을 정립하는 척도가 되었고, 피상적으로 넘어가던 환경, 생태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책의 장점은 단지 환경, 생태 문제만 다룬다는 데에 있지 않고, 우리네 삶을 규정하는 전반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데 있다. 

민주주의, 이것은 환경, 생태와 뗄레야 뗄 수 없으며, 시인의 마음으로 지내는 생활, 시인의 눈을 갖는 생활, 그리고 경제, 종교 등등 많은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들 문제들 중에서 관심이 있는 분야를 차근차근 읽어나가면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단지 이번 호뿐만이 아니라, 지난 호를 찾아서 읽는 재미도 느낄 수 있는 책. 

이번 호에서는 중국에 관한 특집 글들과 농업에 관한 글들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했고, 연재되는 글, 배병삼의 글이나 김성동의 글들은 이런 시각이 있구나, 그동안 너무 한 쪽으로만 생각했구나 하는 깨달음을 주고 있다. 

또 이 책의 좋은 점은 뒷부분에 있는 서평에 있다. 좋은 책, 읽고 생각해 볼 만한 책을 소개하고 있어 좋은 책을 소개받는 느낌을 지닐 수 있어서 참 좋다. 

어떤 정기구독이든, 격월간으로 그 때 그 때 구입해 읽든 형태로 읽어도 좋으니 우선은 한 번 읽어보자. 이 책을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읽고 이 책에서 말한 '타이타닉 현실주의'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면 우리는 거대한 빙산을 피해갈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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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철학으로 치료한다 - 철학치료학 시론
이광래.김선희.이기원 지음 / 지와사랑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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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치료학 시론이라고 한다. 철학으로 병을 치료한다는 학문의 기초를 마련하는 책이라고 받아들였다. 문학치료, 음악치료, 미술치료, 놀이치료 등 다양한 치료방법이 있는데, 이제 철학도 우리를 치료하는 학문으로 등장했구나 하는 생각에 읽어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 부분에서 마음과 영혼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정신의 건강을 위해 우리는 철학적 치료가 필요하다. 삶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삶의 행복을 위한 필수조건이다(184쪽)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철학치료는 자기인식을 통한 자기 배려를 하게 하고, 이를 연결하는 매체가 대화라고 한다. 이를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인용해 말하고 있는데, 철학치료의 기본형태는 우선 자신의 무지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여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과정(186)이라고 한다. 

철학은 나를 인식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가게 하는 학문인데, 나를 자각하면 또 다른 나인 남을 인식할 수 있고, 이를 확장하여 세계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가게 하면, 이는 인식에 머물지 않고 실천으로 나갈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에 갇혀 우울증이나 절망감, 허무감을 앓는 일이 없게 되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세상에 대응함으로써 자신을 대자적인 주체로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요즘 인문학 공부를 해야 한다는 주장과 이 철학치료가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철학은 인문학의 일부분이기에 인문학을 배우게 하자는 주장은 철학을 배우게 하자는 주장과 같고, 인문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자신의 생활을 바꾸어 나가듯이 철학을 배운 사람도 자신의 삶을 바꾸어 나갈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명심해야 할 내용은 철학을 단지 배우는 것에서 멈추면 안된다. 자신의 지적 만족을 위해서 철학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좀더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철학을 배우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을 앎에서 그치지 않고, 철학을 함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이 철학의 프락시스를 주장하는 이유도 이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철학을 하기 위해선 삶에 여유가 있어야 한다. 여유가 없는 삶에서 철학을 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선 생활의 여유를 찾기 위한 사회조건을 살펴야 한다. 철학을 함은 자신의 문제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임을 인식하고, 그것을 고쳐나가려는 노력을 하게 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지니고 있다면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에서 창(窓)이 없는 단자가 아니라, 우리는 각자가 창(窓)이 있는 단자가 되어야 한다. 나는 나 나름대로 완결된 존재로 살아가되, 남도 또한 완결된 존재로 여기고, 이 남과 내가 연결되는 창문을 두고 서로가 소통하는 세계를 만든다면 철학함의 좋은 모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의 3부는 개인의 문제를 떠나 사회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이 부분은 철학치료학과는 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주자학에서 실학으로 기독교로 넘어가는 모습을 사회철학의 정상과 병리, 그리고 그 병리를 극복해가는 또다른 치료라는 관점으로 이야기를 했는데, 주자학, 실학이야 철학이라 쳐도, 기독교는 철학이라기 보다는 종교라고 해야 하는데, 좀 다른 개념이 아닌가 싶다. 

시론이라는 한계 때문인지, 이 책을 읽으면서 철학치료를 어떻게 한다는 건지가 명확히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기존의 희망의 인문학, 행복한 인문학과 연결시켜보면, 그리고 이 책에서 잠시 언급하고 있는 프랭클의 의미치료와 연결시켜 보면 좀더 구체적인  틀이 보이지 않을까 한다. 

철학의 존재이유는 나를 알고, 사회를 알고, 옳은 삶을 살게 해주는데 있다. 이는 철학이 우리의 삶에서 단지 앎으로서만 존재해서는 안 되고, 철학을 함으로써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데 있다는 이야기다. 결국 우리 삶에 철학이 필수라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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