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표현한 문장 중에 슬픈, 너무도 슬픈,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어찌해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무력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현실, 그러한 사람들의 모습을 만나면서, 이런 현실이라면 이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 현실이 아직도 그렇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문장들이 화살이 되어 와 박힌다. 이들의 삶이 이런데 도대체 왜 아직도 그런 사람들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령 '감정노동자'라는 시를 보면 '빨리 지옥을 빠져나가리라 / 이 지옥을 빠져나가자, 나가자, 나가자……'('감정노동자' 중에서. 16쪽) 하지만, 지옥을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다. 


  그들은 '눈이 없는 길로 내몰리는 샌드백'(앞의 시 중에서)이 되어 '사자, 순식간에 튀어나와 / 육중한 발바닥으로 샌드백을 후려친다 / 갈기갈기 물어뜯는다 / 샌드백, 주저앉지도 못하고 정신없이 흔들리다' (앞의 시 중에서)는 표현처럼 그렇게 당하고 산다.


이것이 어디 감정노동자뿐이겠는가? 우리 사회에서 약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강자들이 휘두르는 폭력(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또는 그들은 폭력이라고 여기지도 않고 내뱉는 말들, 행동들)을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현실 아닌가.


약강강약(弱强强弱). 강자에게는 끽소리도 못하는 것들이 약자들에게 큰소리를 치고 있는 것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현실 아닌가.


그러니 이 시는 너무도 슬프게 다가온다. 벗어나야 하는데, 이것이 우리 사회의 풍경이라니... 정말, 이 시에 표현된 내용이 사실일까 의문이 든다면, 한승태가 쓴 [어떤 동사의 멸종]'을 읽어보라. 작가가 직접 경험한 콜센터 직원의 일상이 드러나 있으니까. 그러한 감정노동자들의 생활이 달라지지 않았음을, 아무리 대화를 녹음한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이런 어른들의 폭력이 아이들에게까지 번져나간다면 그 사회가 과연 가능성이 있는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모범이 되는 어른이 있는 사회, 그런 어른이 많은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는 얼마나 큰 차이를 보일지 명약관화하지 않은가.


이 시집을 읽다가 섬뜩한 마음에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시가 있는데, 그 시는 바로 '병아리'다. 병아리, 얼마나 귀여운가? 그 자체로 여리고 귀여운 생명체인데, 병아리를 대하는 아이의 모습, 이런 아이가 없다고 믿고 싶지만, 어쩌면 폭력에 무감한 사회는 이런 아이들을 키워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연신 병아리를 조몰락대던 아이 / 느닷없이 테니스공처럼 병아리를 벽에 내던졌다/ ... /하얀 백지처럼 웃으며 / 아이는 연거푸 허공에 공을 던지고 / ... /비틀거리던 몸, 안도의 숨 내쉴 때 / 아이의 손 다시 / 상자 안으로 쑥, 들어갔다'('병아리' 중에서. 59-60쪽)


이런 일이 과연 일어날까? 일어나지 않겠지. 일어나지 않아야 하겠지. 그럼에도 시인이 이런 표현을 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 사회에서 약자를 이렇게 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경고 아닌가.


그런 사람들에게 속절없이 당하고 사는 샌드백이나 병아리 같은 존재들이 이 사회에 있다고, 그것을 못 본 체해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눈 감고 살지 말라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다른 이들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 시인은 그런 사회를 바라고 있기에 이렇게 우리가 보여줘서는 안 되는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어른이 주목받고 있는 우리 사회다. 그냥 나이 먹었다고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른답게 살아가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 어른 노릇을 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시대다. 잘못 나이 먹은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 약한 사람들을 '샌드백이나 병아리'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한다.


이 시집을 통해 시인은 우리 사회의 좋지 않은 모습을 드러내 그것을 바꾸어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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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필의 진보를 위한 역사 - 진짜 진보의 지침서 & 가짜 극우의 계몽서
황현필 지음 / 역바연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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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쾌하다. 망설이지 않는다. 자신의 주장을 간단 명료하게 제시한다. 좌고우면(左顧右眄)이라고 하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지 않는다. 이리저리 재지도 않는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자료를 제시하면서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그의 말을 빌리면 진보의 입장에서 주장한다. 진보냐 보수냐에 따라 사건의 해석이 달라질 수는 있지만 사실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진보나 보수를 막론하고 역사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이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순 있겠지만, 사실 자체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선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런데 사실을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에게 필요한 자료만, 문구만 선택해서 사실이 그러한 양 꾸며대는 사람들.


이 책에서 황현필은 그런 사람들로 뉴라이트 계열의 사람들을 지목한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자료를 바탕으로 반박한다. 사실,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은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주장들을 뉴라이트 계열의 사람들이 왜곡한 경우가 많다.


그렇게 왜곡했는데도 뉴라이트들이 비판을 받으면서도 계속 살아남는 이유는, 그들의 주장에 동조함으로써 이득을 얻는 집단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해석을 통해서 이득을 얻는 집단이야 어느 사회에도 있겠지만, 왜곡된 해석으로 이득을 얻는 집단이 권력을 쥐고 있을 때에는 문제가 심각하다.


학문의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 지장을 초래하는 차원이 되는데, 그것은 이들은 차분히 증거를 따지고 논리를 따져 역사적 진실을 추구하기보다는, 언론을 통해서 또는 방송을 통해서 자신들의 주장만을 주입시키고, 사람들을 그릇된 역사관을 갖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잘못된 행동을 하게끔 유도하기 때문이다.


지금 뉴라이트들의 역사 왜곡이 도를 넘어섰다고 판단하기에 저자는 이런 책을 써서 역사 왜곡을 바로잡으려 한다. 뉴라이트들의 역사 왜곡에 동조하는 권력을 쥔 집단들이 횡행한다면 우리 사회가 더 나은 쪽으로 나가가기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뉴라이트들이 주장하는 것들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반박이 아니다. 사실이 이렇다고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역사라는 이름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


총 108개의 항목을 가지고 주장하고 있는데, 하나하나가 다 명쾌해서 이 책을 읽고서도 뉴라이트의 주장에 동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때 유럽에서는 뉴레프트라는 운동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엉뚱하게 뉴라이트라니...


진보와 보수라는 말과 비슷하게 좌파니 우파니라는 말을 쓰는데, 좌파 중에서도 새로운 이론을 들고 나온 사람들을 뉴레프트라고 했었다. 그런데 우파에서 새로운 이론을 갖고 나올 수가 있나 싶기도 한데, 자고로 우파란 기존의 것을 지키는 쪽으로 가기 때문인데 뉴라이트라니...


기존의 것이 미약하면 바꾸려고 하는 진보 쪽으로 가는 것이 맞는데, 기존의 것을 더 안 좋은 쪽으로 돌리려는 것은 보수도 아니고 수구라고 하기에도 좀 그런데... 뉴라이트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였지만 이는 퇴행에 불과하다. 


첫번째 항목이 식민지근대화론이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근대화시켰다고? 철도를 깔아주고, 산업을 부흥시켰으니 우리는 일본에 고마워해야 한다? 정말로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지경이다. 그러니 황현필이 '식민지근대화론은 소수의 거짓말쟁이가 의도를 가지고 자행한 수준 낮은 역사 왜곡에 불과하다'(27쪽)고 하지.


이 의도가 무엇일까? 자명하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 자신들의 권력을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것. 그것을 위해서 역사적 사실을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해서 갖다 붙인다. 식민지근대화론부터 시작해서 이 책은 비상계엄을 국민을 계몽시키기 위해서 했다는, 소위 '계몽령' 이야기로 끝낸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말처럼 번져나가는 현실을 역사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견딜 수 없었으리라. 그러니 그것을 바로잡아야지. 어떻게 간단명료하게, 사람들이 지루하지 않게, 전달해야지. 그래서 이 책의 각 항목은 짧다. 짧아야 읽을 테니까. 읽어야 사실을 알게 될 테니까.


그래서 때때로 저자의 감정이 여과없이 나오기도 한다. 비속어도 꽤 나오는데, 그만큼 저자의 마음이 격앙되어 있다는 뜻이다. 또한 각종 유튜브에서 걸러지지 않고 나오는 표현들, 사실 왜곡들에 맞서기 위해서 일부러 좀더 강한 표현을 선택했다는 느낌도 든다.


역사를 이야기하는 책에서 저자의 직설적인 감정표현이 바람직한가를 따질 수도 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의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 저자의 심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만큼 절박하게 역사왜곡에 대응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뉴라이트들이 장악하고 있고, 그들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이 권력을 쥐고 있다는 이유로 우리나라에서 행해지고 있으니, 역사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얼마나 분통이 터지겠는가. 


이런 분통터지는 것이 어디 역사학자들만이겠는가마는 이런 책을 통해서 왜곡된 역사적 사실들을 바로잡고, 제대로 된 주장을 하지 않으면 이런 사태가 지속될 테니... 이런 책이 많이 나와야 한다. 그리고 많이 읽혀야 한다. 그래야 터무니없는 주장이 설 자리가 없어질 테니. 더 이상 우리 속이 터지는 일도 줄어들 테고. 


그래서 저자의 이런 작업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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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를 담아 애정을 고백하는 법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살림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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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다. 그러나 거쳐야 할 일이다. 겪지 않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한에서는.


소설의 배경은 중2다. 우리나라에서 중학교 2학년 때를 사춘기가 가장 심한 때, 또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하고, 친구 관계가 가장 중요하게 작동하는 때라고 한다.


친구 관계! 정말 중요하다. 부모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길 때 제일 먼저 찾는 존재가 바로 친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구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 처음 겪게 되는 일이다. 그러니 서투를 수밖에 없다. 서툰 행동과 말 때문에 오해가 생기고 친구 관계가 틀어질 때도 있다.


서툰 행동과 말 때문에 틀어지지 않으려면 자신을 감추어야 한다. 친구에게 맞추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친구가 뭘 원하는지 알아서 그에 맞게 행동하고 말을 해야 한다. 특히 친구가 권력을 지니고 있을 때에는.


위계, 그렇다. 서열이 생긴다. 여러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지내야 하기 때문에 성향별로 또는 누군가의 주도로 몇몇끼리 모이게 되고, 그것이 굳어지면 다른 모임에 끼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에, 이미 속해있는 모임에서 떨어져 나오지 않도록 안간힘을 써야 한다.


중학교 교실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이 소설 역시 그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학생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 그것을 관찰하면서 가까스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하는 다니자와 유카. 초등학교 때 친했던 노부코는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지만 당당하게 맞선다. 자신의 소리를 낸다.


그런 노부코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다니자와. 그렇다. 숨 막힐 것 같은 교실 생활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노부코를 통해 다니자와 역시 관찰자로서 지내온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아무 것도 달라질 것이 없음을.


자신이 자신에게도 방관자였고, 자신을 자신이 가장 부끄러워하고 비난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노부코가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순간 이미 달라진 자신을 발견한다. 이제는 과거 관찰자, 방관자로만 지내던 자신과는 달라진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그것이 내가 싫어하는 나의 최후였다'(354쪽)고 말한다.


다니자와가 좋아하던 이부키와의 관계에서 위악적인 모습을 보인 것도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남을 잘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이부키에게서 이런 소리를 들으며, 다니자와는 더욱 과거의 자신과 결별하게 된다.


'제일 싫었던 건, 다니자와가 그걸 꾹 억누르면서 분명 자기가 제일 싫어할 방식으로 나에게 쏟아냈다는 거야. 네가 싫어하는 네가 나보다 상처받은 얼굴로, 자기에게 상처를 줬어' (364-365쪽)


이 구절에서 이 소설의 제목을 연상할 수 있다. '적의를 담아 애정을 고백하는 법'이라는 제목을. 이는 친구들과의 관계를 관찰하면서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그러면서는 속으로는 관찰하는 자신을 높이고 관찰당하는 친구들을 낮추는 다니자와의 모습을 표현한 말이다.


그것이 결국 자신을 낮추는 것밖에는 되지 않음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이부키를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니자와가 노부코를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노부코는 자신을 관찰자의 자리에 놓지 않고 주체의 자리에 놓고 있으니까.


주체의 자리에 선 학생은 친구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다. 아니, 친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자신을 누르지 않는다.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그런 모습을 이 소설에서 시종일관 보여준 존재는 이부키다. 그런 이부키를 통해서 다니자와 역시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중반까지는 무섭다. 여학생들 사이의 따돌림, 모임에서 떨어져 나오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그런 모습들이. 여기에 자신을 싫어하면서도 자신을 지키려 애쓰는 다니자와의 모습. 여기에 사춘기 남녀관계가 끼어들면서 더욱 힘들어지는 친구들과의 관계들이.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 자신을 바로보게 되는 다니자와의 모습. 남의 눈이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눈만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를, 살아있는 몸을 알아가는 다니자와의 모습을 통해서 소설은 무서움에서 응원으로 마음을 옮겨가게 한다. 스스로를 찾아가는 사춘기 소녀의 마음을, 행동을. 


중학교 2학년이 주요 배경인 이 소설에, 한 학급에서도 철저하게 위계가 나뉘어진 아이들의 모습, 그런 위계를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 그럼에도 그것을 없애지 못하고 있는 현실. 여기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한 소녀의 모습을 통해서, 과연 이런 일을 모두가 겪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따돌림, 괴롭힘 등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다름'과 어떻게 공존하느냐를 배우는 과정으로 학교 생활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부모에게서 떠나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할 때, 이 때 자신이 주체로 당당하게 설 수 있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하는 소설. 


다니자와처럼 자의식이 강한 사람도 힘들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그 과정을 힘들게 거쳐가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적의를 담아 애정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애정은 애정을 담아 고백할 수 있는 그러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이부키처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학창시절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학교의 모습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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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의 계절에 잠시 큐큐퀴어단편선 6
천선란 외 지음 / 큐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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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큐큐퀴어단편선6]이다. 앞서 발간된 1-5를 읽어보지 않고 이 소설집부터 읽게 된 이유는 천선란의 작품을 전부 읽겠단 욕심이 있어서였다.


빠져드는 작가가 있다는 사실을 기뻐해야 하고, 그것에 행복해 하기도 하는데, 지금은 꼭 읽어야겠다고 마음 먹은 작가가 꽤 있다. 그만큼 소설 세계에 빠져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수록된 작가와 소설은 다음과 같다.


천선란 '검은 혀', 이반지하 '잉글리시 켐퍼', 오호두 '모노의 봄',

 서장원 '흰 밤', 정보라 '지향', 박선우 '사랑의 방학'


소설을 기획한 의도에 맞게 '다름'을 다루고 있다. 퀴어란 말 자체가 다름이라는 말인데, 이 책의 제목이 된 '서로의 계절에 잠시'라는 제목의 소설은 없다. 그런데 서로의 계절이라는 말에는 이미 '다름'이 들어 있다. 그리고 '잠시'라는 말에는 내 것으로 만든다는, 영원히 소유한다는 그러한 개념이 들어있지 않다.


다름은 하나가 아니고, 영원이 아니며 그러므로 지속이 아니라 순간이고 변화다. 순간이고 변화면 그것이 어떻게 유지될까 하는데, 아니다. 바로 만남의 순간에 충실한 것이다. 그 만남의 순간에 상대의 과거-현재-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 나와 만나고 있는 존재, 그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혀가 검든 아니든 무슨 상관인가, 다양한 인종, 민족이라는 이유로 차별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나와 상태가 다르다고 내가 잘하는 것을 못한다고 내가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있는가, 왜 다름을 그냥 인정해주지 않는가.


마지막에 실린 '사랑의 방학'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학교 다닐 때 만약 방학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공부하는데 최선을 다해도 방학이 없으면 그 관계가 지속이 될까. 그리고 방학이 끝나고 나면 방학 전과 후가 같은 존재일까. 학생은 같은 학생이라고 하겠지만 분명 방학이라는 기점을 통해 달라진 학생이 된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존재는 없다. 세상에는 다 다른 존재들이 있다. 이들 존재들이 관계맺는 순간, 그것이 바로 서로의 계절에 잠시 머무르는 순간이다. 그렇게 관계를 맺는데, 그런 관계가 지속되더라도 같음을 유지하면서 지속되지 않는다.


관계의 지속이 변하지 않음의 영원함이 아니다. 관계의 지속은 오히려 다름의, 변화의, 순간 순간의 모습을 서로가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점을 '사랑의 방학'이라는 소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다른 소설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퀴어단편선'이라는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이다. 퀴어라는 말이 지닌 의미가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변했으니까. 그렇게 퀴어란 변하지 않음이 아니라 변함이니까. 순간순간 변하는 존재들, 그러한 변화를 통해서 맺어가는 관계는 내 틀 안으로 상대를 끌어들이려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신도 상대의 틀로 완전히 들어가서는 안 된다.


경계에서 서로 맞물리는 삶. 이 경계는 수축과 팽창을 지속하면서 새로운 선을 만들어간다. 그것이 바로 이 소설집이 말하는 것이리라.


하여 이 소설집에 실린 첫소설 '검은 혀'를 쓴 천선란의 작가 노트에서 한 구절을 빌린다.


'우리는 서로의 세계에 잠시 머물렀다 가는 낯선 이방인이다. ...타인의 세계를 너무 쉽게 이해하려 들지만 않으면 된다.' (37쪽)


이것이 바로 '서로의 계절에 잠시'라는 말이리라. 타인의 세계만이 아니다. 자신도 타인과 마찬가지다. 자신은 이렇다고 규정짓고, 변하지 않는 무엇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자신도 자신에게 외계인이다. 그러니 자신을 다 이해했다고, 나는 이런 존재라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나 역시 내가 모르는 '나'가 많이 있으며, 그러한 '나'는 순간적으로 변화고 방금 전의 '나'와는 '다른 나'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 점을 잘 보여주는 소설이 박새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모노의 봄'이다. 멀리 멀리 숲의 끝까지 가서 모노는 기존과는 다른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이 소설집은 다른 존재들과 어울리기 위해 필요한 전제 조건이 바로 자신을 하나로, 변하지 않는 존재로 규정짓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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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엔 원년의 풋볼 (무선)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4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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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일어나는 시간대는 셋. 하나는 만엔 원년이라고 할 수 있는 1860년. 이때 농민봉기가 일어난다. 폭력이다. 둘은 패전 직후. 우리나라로 치면 해방직후다. 이때는 조선인 부락을 습격하는 일본인들의 모습. 또다른 폭력이다. 셋은 1960년. 미국과 안보조약을 체결하는 것에 반대하는 시위. 이것 역시 폭력 시위다.


소설은 1960년대로부터 시작한다. 주인공이 거쳐온 시대를 거쳐 그는 무언가에 쫓기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아니, 그 시대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지 못하는 지식인의 부끄러움 - 해설에서는 수치심이라고도 하는데 -이 나타나 있다.


전후 일본, 이제 경제발전이 되어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일본이지만 지식인들은 미국에 종속되어 있다고 느끼고, 또한 과거 자신들이 벌인 전쟁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다는 생각도 지니고 있었으리라. 그것이 그들을 수치심 속에 살게 했을지도 모른다.


자신들을 패배시킨 나라에 의존하는 모습. 그러한 수치심을 만엔 원년에 일어났던 농민봉기와 연결짓는다. 농민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일으킨 봉기. 폭력이긴 하지만, 농민들을 누르고 있었던 것 또한 폭력 아니던가. 커다란 폭력에 대항하는 폭력. 여기에서 처참하게 패배한 농민들. 학살당하는 농민들. 그들을 지도했던 서술자의 증조부의 동생은 행방불명이 된다. 홀로 다른 곳으로 갔다고, 하여 그 후손들은 수치심을 지니고 있었는데...


패전 직후 제자리를 잡아가는 조선인 마을을 습격하는 골짜기 일본 사람들. 이들에 의해 조선인 한 명이 죽게 된다. 과연 정당한 폭력인가? 자신들의 패전에도 잘살아가는 조선인들에게 증오심을 품는 것은 그간 자신들이 조선인들에게 가했던 폭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하여 서술자의 형 S는 두번째 습격에서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한다. 그는 폭력을 폭력으로 이어가는 것에 반대했던 것이다.


첫번째 조상은 폭력 저항을 주도하다 사라지고, 두번째로 형은 폭력 현장에서 목숨을 잃는다. 이에 다시 세월이 흘러 1960년대 동생 다카시는 마을 청년들을 선동해서 조선인이 운영하는 슈퍼마켓을 습격한다. 또다른 폭력이다. 이 폭력은 양쪽으로부터 자신을 몰아 스스로 죽음의 길로 가겠다는 동생 다카시의 의도이기도 하다.


이런 폭력을 추적하면서 서술자는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는 사실. 그런 폭력이 아니라 폭력을 끊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현대에 동생 다카시에 의해 벌어진 폭력은 더이상 다른 폭력을 부르지 않는다. 조선인 주인은 그 일을 무마하고 자신이 할 일을 한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죽음의 길로 들어섰던 둘째 형도 마찬가지다. 그 형 역시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양쪽 어디에 서지 않고 폭력의 한 가운데에 자신을 놓아두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농민 폭동, 아니 혁명이라고 해야 하나, 그것을 주도했던 증조부의 동생은 어떤가?그는 폭력을 통해서 얻은 것도 있었지만, 많은 농민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거기에 대한 책임. 결국 지하 골방에서 평생을 보내는 것으로 참회를 했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참회가 되었을지는 의문이다.


다만, 그는 글을 통해 누구도 죽지 않는 혁명의 모습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이는 오에겐자부로가 폭력이 아닌 평화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런 그이기에 일본의 재무장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고, [오키나와 노트]나 [히로시마 노트]와 같은 폭력으로 인해 피해를 본 장소를 찾고 그런 민중들에게 지지를 보내게 된다.


만엔 원년의 폭동이 정당한 폭력이었는지의 여부를 떠나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는 점, 혁명은 어떠해야 하는가, 혁명을 이끄는 사람을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행동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한가? 결국 고민하고 번뇌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끝까지 민중을 책임진다는 것이 자신의 죽음으로 책임을 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죽음은 자신의 두려움, 책무를 똑바로 들여다보고 자신이 행한 결과이기는 하겠지만, 그것이 남들에게는 그러한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소설에 나온 친구의 자살 모습이 바로 그런 점을 보여주지 않을까.


진실을 말한다는 것, 진실을 본다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그것이 어떠한 폭력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 어쩌면 진실은 폭력으로 해결하는 것보다 더 힘든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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