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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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는 동양인가, 서양인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터키라는 나라가 참으로 방대한 나라이기도 하고, 그 영토가 동양과 서양에 걸쳐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터키를 소아시아라고 했단다. 소아시아라고 하는 것, 그것은 터키를 동양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터키는 이슬람 문명의 중심이었다. 오스만투르크제국이 지배한 영토 아니었던가. 이슬람을 동양 종교로 볼 수는 없는데도, 유럽인들은 터키를 동양으로 보는 경향이 더 강했나 보다.

 

반대로 우리와 같은 동양에서는 터키와 같은 이슬람은 서양으로 보고 있었으니...

 

여전히 터키는 동양과 서양의 중간에 다리를 걸치고 있다. 비록 그들은 자신이 서양에 속한다고, 월드컵 예선에도 유럽예선에 참여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영토는 동양 쪽에 더 많이 속해 있다.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 바로 이 소설 때문이다. 오르한 파묵이라는 소설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소설가인데, 그의 소설이 유럽 사람들에게는 이국적인 느낌을 주나 보다.

 

책의 뒷표지에 있는 글 중에 "오르한 파묵, 동양에서 새로운 별이 떠올랐다" -<뉴욕 타임즈>라는 글이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우리에게는 터키는 유럽이다. 같은 동양으로 잘 인식되지 않는다. 전형적인 동양에 속하는 우리가 이 소설을 읽을 때 느끼는 당혹감이 어쩌면 여기에서 오는지도 모른다.

 

유럽 사람들은 이 소설을 동양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이탈리아나 터키나 다 유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느끼는 점과 유럽인이 느끼는 점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한다.

 

이 소설의 내용이 바로 신분을 바꿔 사는 사람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해설을 보면 동서양의 갈등보다는 동서양의 융합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모두 서양일 뿐일 수도 있는데...

 

이탈리아 사람이 터키군에게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된다. 그는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 인정받는 지식인이 아니고 책을 읽고 대학교육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소설의 배경인 17세기에는 이 정도의 유럽 지식인은 동양에 가면 우월한 지식인이 된다는 사고가 팽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터키에 학문적 호기심이 왕성한 '호자'라는 사람의 노예가 된다. 호자와 그는 서로 공부를 하며 지식을 교류하지만 이탈리아 사람인 '나'가 터키 사람인 '호자'를 가르치는 쪽으로 소설의 내용이 전개된다.

 

지식의 불균형, 또는 문화를 바라보는 불균등한 관점이 드러난다. 그러나 여기서 소설이 끝나서는 안된다. 호자는 터키의 문화, 문명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는 자기네 사람들을 바보라고 한다.

 

자신의 지식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자신이 꾸며낸 허무맹랑한 이야기만이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결국에는 하얀 성을 앞에 두고 '나'와 신분을 바꾼다.

 

이런 바꿈을 위해서 둘은 외양이 닮았다는 쪽으로 시작되지만, 나중에는 누가 보아도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고 서술이 되어 있는데도 이 바꿈은 무시된다.

 

이것을 터키 사람들의 무지라고 해야 하나? 아니다. 그들은 이런 바꿈을 용인해줄 수 있는 포용력이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 사람이 '호자'인 척하면서 산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그렇게 살게 해준다.

 

반면에 이탈리아인이 된 '호자'에 대한 이야기는 짧막하게 나올 뿐이다. 그 역사 '나'로 잘 살아간다고.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무지하다고 바보같다고 이야기되는 동양이 사실은 바보스럽지 않으며 그들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문화에선 우열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특성에 맞는 삶의 형태일 뿐이라고, 그 사회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모습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문화의 우열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 소설의 화자인 '나'는 이탈리아인이지만 터키인 '호자'가 되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나'라는 사람이 겪는 모험소설로 읽어도 되고,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동서양의 융합을 그려보이고 있는 소설로 읽어도 되는 역사소설의 형태를 띤 소설이다. 그냥 17세기 터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소설로 읽어도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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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승은 동시대 한국 시의 뇌관이다.' (190쪽)

 

'황병승을 읽는 일은 희극적인 비애, 냉소적인 공감을 자아내는 '뒤죽박죽'의 체험이다. 한국 현대시의 진정성에 대한 이념과 그 지루한 표준성을 날려버릴 강력한 뇌관, 지금 그 뇌관이 타들어가기 시작한다.' (212쪽)

 

그냥 그랬다. 한 마디로 말한면 뒤죽박죽이다. 시집에 실린 시들이 그렇다. 최소한 시집을 읽고 내용을 알려면 온갖 잡다한 지식을 머리 속에 넣고 있어야 한다.

 

마치, 넌 이건 모르지 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온갖 것들을 어떤 논리적인 맥락도 없이 그냥 가져다 붙여놓은 듯한 느낌.

 

여러 대상들을 시에 들여오기는 황지우도 했지만, 황지우의 시에서는 맥락이 이해가 되었고, 시에서 어떤 논리성이 읽혀졌기에 황병승의 이 시들보다는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들의 행진이다. 우리말임에 분명한데, 우리말들이 이렇게 서로 등돌리고 한 자리에 있을 수 있나 싶을 정도다.

 

전혀 다른 대상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은 듯한데, 전체적으로는 무언가 낮은 것들, 소외된 것들, 억압받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느껴지는 시들도 있기는 있다.

 

다만, 그것이 느낌일 뿐이다. 우리나라 현실, 우리나라 정감을 느끼기 보다는 이상하게도 미국 사회 어떤 뒷골목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어떤 집회에서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나란히 나오기도 하니, 이미 우리는 미국 문화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미국의 하위문화가 우리의 하위문화가 되는 것인지, 시집을 읽는 내내 이국적인, 그것도 미국적인, 미국의 뒷골목 소위 할렘가라고 하는 그런 곳의 분위기...

 

그 할렘가도 가보지 못했지만 여러 매체에서 읽거나 본 그런 느낌이 든 시집이다. 그래서 불편했다고나 할까.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비평가들은 좋겠다고. 이런 시인이 있어서 그들 밥벌이에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일반 사람들이 마음으로 쉽게 느끼는 시들을 쓰는 시인이 대다수라면, 앞에 인용한 말처럼 '한국 현대시의 진정성에 대한 이념과 그 지루한 표준성' 때문에 비평가들이 할 일이 없어질테니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뭔소린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시를 쓰는 시인이 있다면 비평가들은 할 일이 있다. 새로움, 이질적임, 낯섬, 이해되지 않음을 비평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만 했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난해해졌는가. 그래서 시가 난해한가. 이런 난해한 시가 우리 곁으로 오는 것인가.

 

시집 뒤에 실린 이광호의 해설에서 인용한 말들이 앞에 있는데, 그 말대로 '지금 그 뇌관이 타들어가기 시작한다.'고 하면 '시'가 과연 존재할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시를 이해하기 힘든 내 시읽기 능력을 인식하며... 읽는 내내 불편, 불만이 가득했던 시집. 에라, 우리나라도 좀 간명해졌으면 좋겠다. 카뮈가 말했던가. 진실은 단순하다고.

 

우리나라가 간명하고 단순하다면 이런 난해한 시도 좀더 쉬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황병승, 황병승 해서 읽어 본 시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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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6 07: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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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6 07: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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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여인의 키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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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을 가정하자. 독재국가인데 이에 반대하여 혁명을 꿈꾸는 단체의 조직원이 검거된다. 그는 혁명조직의 일원으로 고문에도 다른 조직원을 불지 않는다.

 

교도소에서는 한 가지 방안을 생각한다. 감방에 스파이를 집어넣어 그로 하여금 정보를 빼내게 하자. 그런데, 누구를 스파이로 하지, 혁명당원이 의심하지 않아야 하는데...

 

동성애자, 게이인 사람을 감방 동료로 넣어준다. 게이, 그는 남성이면서도 여성인 사람이다. 생물학적로는 남성이지만 성향이나 감정, 행동 등은 모두 여성이다. 또한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배제당하는 존재이다.

 

혁명당원 역시 동성애자를 경멸한다. 도덕성으로 무장한 혁명당원에게는 동성애란 죄악일 수 있다. 이성적으로 만인은 평등하다고 하지만 몸으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 혁명당원에게 정보를 빼내기 위해서는 둘이 가까워져야 한다.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 교도소는 음식에 약을 타서 혁명당원이 병들게 한다. 병듦, 신체적인 허약함은 정신의 나약함을 유발하고, 이때 자신을 돌봐주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교도소측의 전략은 거의 성공한다. 혁명당원은 마음을 열어간다. 그러나 교도소측이 생각 못한 한 가지... 여성성이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돌보다 보면 자연스레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

 

스파이로 들어간 게이는 점차 혁명당원에게 마음을 열고 그를 사랑하게 된다. 그에겐 교도소측의 제안보다도 혁명당원의 손길이 더 필요하다.

 

왜냐하면 게이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차별과 무시를 당했을 뿐, 온전한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평생 동안 느낀 가장 좋은 감정은 엄마의 애정뿐이었어. 엄마는 날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또 그런 나를 사랑했어. 엄마의 사랑은 하늘이 내려준 선물과도 같았어. 난 그 사랑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거야.' (269쪽)

 

이 책에 나오는 게이의 말이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게이들의 삶이다. 과거는 그래왔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차별과 무시는 여전하다.

 

이런 게이에게 혁명당원은 사랑으로 다가온다. 특히 그를 온전한 인간, 남에게 지배당하고 복종하는 인간이 아니라 당당한 한 인간으로 살아가라고 하는 그는 또 다른 자신이 된다.

 

남성과 남성이 아닌 여성과 남성으로 관계가 전환된다. 이는 단순한 성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성관계는 사랑이 없어도 가능하지만, 게이가 원하는 것은 삽입만을 위한 성관계가 아니다.

 

그는 진정한 사랑의 표현으로 키스를 원한다. 그것은 그를 편견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존재로 인정해 준다는 의미다.

 

'키스'  이것이 그들을 감옥에서 온전한 사랑과 사랑으로 만나게 한다.

 

'넌 거미여인이야, 네 거미줄에 남자를 옭아매는……' (344쪽)


혁명당원은 게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의 처음에 나오는 표범여인, 그는 사람을 해치는 여인이라면 이 거미여인은 자신에게 스스로 다가오게 하는, 키스를 할 수밖에 없는 여인이 되는 것이다.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


냉철한 이성을 지닌 혁명당원이 게이에게 이런 말을 하고, 키스를 하게 되는 이런 관계에서 게이는 온전한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게이는 혁명당원을 위해 일하기로 결심한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남자는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결국 가석방으로 출옥한 게이는 혁명당원을 위해 일하다 죽게 되고, 혁명당원 역시 무언가를 알아내지 못한 정부당국에 의해 고문으로 죽어간다.

 

그렇게 그들의 사랑은, 우정은 끝이 나는데... 이 상황이 바로 '거미여인의 키스'에 나온 상황이다.

 

암울한 라틴아메리카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인데, 게이의 이름은 '몰리나', 혁명당원, 여기서는 좌익게릴라라고 나오는데 라틴아메리카에서 좌익은 혁명당원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혁명당원이라고 하자, 그는 '발렌틴.'

 

같은 감방에서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영화이야기를 몇 편 해주는데, 그 영화의 내용들이 소설의 내용전개와 연계가 된다.

 

서로 사랑을 하지만 결국은 함께 할 수 없는 관계...자꾸만 어긋나는 관계, 그런 관계 속에서 혁명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혁명은 무엇을 위해서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하고 있다.

 

발렌틴은 몰리나가 자신의 말을 따라 행동하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혁명을 위해서는 즉 대의를 위해서는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몰리나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자신이 거미줄로 옭아매는 거미여인이 아니라, 자신이 거미줄에 걸려든 존재이다.

 

발렌틴이라는 사람에게 걸려든 존재, 그래서 거미여인을 몰리나라고 하지만 사실 사랑을 위해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는 몰리나이고 오히려 그를 옭아맨 거미여인은 발렌틴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혁명으로 나아가게 하는 그런 거미여인... 그럼에도 몰리나는 죽을 때 행복했을 것이다.

 

그가 감옥에서 나가서 늘 바라보던 곳은 감옥이었고, 그 속에는 발렌틴이 있었을테니 그에게 행동은 곧 사랑이었고, 어머니에 이어 자신을 온전히 인정해준 발렌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혁명과 사랑이 어떻게 양립할 것인가에 대해서 더 고민을 해야 한다. 이 소설의 결말이 여운으로 남는데... 더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는 그런 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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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를 사는 시인 김시종 재일코리안총서 6
호소미 가즈유키 지음, 동선희 옮김 / 어문학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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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름이다. 녹색평론에서 그의 자서전에 대한 서평을 읽기 전까지는 그냥 지나치고 넘어갔던 인물.

 

중고서점에서 이 책을 보기는 했지만,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굳이 일본에서 일본어로 시를 쓴 재일한국인(어쩌면 그에겐 재일한국인이라는 말보다는 재일조선인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그에게 조국은 분단된 나라가 아니라 하나로 통일된 나라이기 때문이다)에게 관심을 기울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일본에서 활동한 작가들 중에 기껏 이름을 안다고 해야 김석범과 이회성 정도, 최근에는 서경식의 책을 조금 읽고 있지만, 서경식은 소설이나 시를 쓰는 작가라기보다는 에세이를 쓰는 사상가 쪽에 더 가깝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김시종에 대해 더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녹색평론을 읽다보니 김시종이 제주 4.3에 관련이 되어 있었으며, 그로 인해 일본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점, 그가 우리나라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광주시편"이라는 시를 썼다는 것이 그에 대한 책을 읽게 만들었다.

 

생각난 김에 중고서점에 들러 사서 읽기 시작한 책, 그가 일본어로 시를 썼지만 일본어에도 조선어의 흔적이 담겨 있고, 시의 내용에는 조국의 현실과 그의 삶이 처절하게 녹아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 북쪽 원산에서 태어나 일제시대에 그곳에서 살고 일본어를 조선어보다도 더 잘 구사하던 그가 갑작스레 다가온 해방으로 조선어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고, 조선어를 익히다가 다시 제주도에 살게 되어 4.3에 관련되는 파란만장한 삶.

 

그의 삶 자체가 디아스포라의 삶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남과 북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자리잡고 사는 일본에서도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시인이었다.

 

그는 본래 사회주의사상에 경도되었으나 여러 가지 일로 인해 북한 쪽과는 거리를 두게 되었고, 최근에는 남한을 방문하여 여러 활동을 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의 시에는 이러한 삶의 아픔이, 역사의 비극이 잘 드러나 있는데, 이를 그의 첫시집의 분석에서부터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이 책이다.

 

어떻게 그의 시에 4.3이 녹아들어가 있는지, 또 일본에서 재일한국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힘든 모습들, 그리고 광주민주화운동이 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를 작품을 통해서 살펴보고 있기에 김시종이라는 시인 입문서로는 적당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온몸으로 조국의 비극을 겪은 시인인 김시종은 비록 일본어로 시를 썼다고 하지만 우리 문학사에서도 소홀히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작품에서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이 조국의 현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의 분단, 이념 대결이 없었다면 어쩌면 일본에 살 수밖에 없게 된, 그래서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이런 사람들이 거의 없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이제는 이들도 우리라는 틀 안에 받아들여 우리라는 틀을 더 넓게 더 유연하게 확장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시집 중에 번역된 것도 있다고 하고, 그의 자서전도 번역이 되어 있으니 시간 나는 대로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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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관한 피카소의 명상
다니엘 킬 지음 / 사계절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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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은 피카소의 그림을 감상해 마음 속으로 느끼기보다는 '입체파'라는 이름으로 또는 '게르니카'를 그린 화가로 기억을 한다. 그렇게 배워왔다.

 

또한 그를 미술계의 천재로 기억한다. 창의적인 그림을 그린 사람으로. 천재는 요절한다고 하지만, 그 말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피카소는 오래도록 살았다. 그리고 그 오랜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천재 소리를 들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늘 변화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변화를 발전이라고 할 필요는 없지만 변화하지 않고 과거의 작품을 답습하는 것은 좋은 작품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예술가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미술교육은 피카소를 표방하면서도 피카소가 될 수 없게 교육을 하고 있다. 특히 미술 분야로 진학하는 학생들을 보라. 요즘은 몇몇 대학에서 실기를 없앴다고 하지만, 아직도 실기의 비중이 높은데 그 실기라는 것이 독창적인 작품을 알아보기보다는 얼마나 과거의 것을 잘 흉내냈느냐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지 않았던가. (아카데미란 것이 대부분 이렇다. 독창성보다는 전통성을 더 중시하니)

 

마치 운전면허 시험장에서 공식이 있어서 그 공식대로 하면 쉽게 합격이 되듯이 예고나 미대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은 학원이나 또는 교수들의 레슨을 통해 공식을 익히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런 학생들에게 피카소를 기대한다? 마치 '바담 풍 하면서 넌 바람 풍이라고 하라'는 것과 같은 이치다.

 

위대한 예술가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독창성이 발휘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하는데, 재능이 있어도 돈이 없어서 '플란다스의 개'에 나오는 '네로'처럼 도중에 사그러지고 마는 사람들도 꽤 있었을 것이다.

 

그건 아니다. 예술 교육이 바뀌어야 하는데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우리 모두가 머리 맞대고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책은 예술에 관한 피카소의 말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어려운 이론이 아니라 피카소 개인이 평소에 생각하고 말했던 말들 중에서 예술과 관련된 말을 모아놓았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피카소의 작품도 소개하고 있어서 작품도 보고 피카소 예술론도 알 수 있는 책이다.

 

그 중에서 지금 우리나라 '블랙리스트'와 관련지어 생각해 볼 만한 구절.

 

예술가는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파괴적이거나 결정적인 사건, 혹은 가슴 훈훈한 사건들을 끊임없이 의식하면서 살고 그것들로부터 자신을 형성해가는 정치적 존재이다.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으며 상아탑 속에 갇혀 그렇게도 풍부한 삶에 대해 담을 쌓을 수 있겠는가? 아니다. 회화는 거실을 장식하기 위해 생각해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적을 공격하고 수비하기 위한 무기이다.  (94쪽)

 

이 말에 따른다면 최근에 문제가 된 작품 '더러운 잠'을 여성을 비하했다거나 외설이라고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 작품은 우리 사회의 문제를 작가가 작품으로 공격한 것이기 때문이다. 피카소의 이 말처럼.

 

더하여 블랙리스트라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술의 본질을 망각한 짓이 바로 '블랙리스트'다.

 

또한 천재성은 영감, 착상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이 말에서 알 수 있다. 피카소가 천재라지만 그 천재성은 그의 생각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는 작품으로 자신의 천재성을 발휘한 것이다.

 

착상은 출발점일 뿐이다. 무엇을 그리려고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리기 시작해보아야 한다. (68쪽)

 

이렇게 천재성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여러 분야로 관심을 분산시키기 보다는 한 분야에 집중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야말로 일이관지(一以貫之)다. 하나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다음에는 자연스레 융합이 이루어질 수 있다.

 

처음부터 융합 운운해서는 안 된다. 어정쩡한 덧붙임으로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평범한 사람은 열두어 가지 사소한 일에 그 힘을 낭비한다. 나는 그것을 단 한 가지의 일, 미술에 낭비한다. (37쪽)

 

하나에 집중하게 할 수 있으려면 최소한 생계는 해결해 주어야 한다. 예술가들이 먹고는 살아야 작품 활동을 하지 않겠는가. 이 점과 관련지으면 '기본소득'은 예술가들에게 특히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에 덤으로, 그는 자신의 작품에 날짜를 적어 넣었다고 한다. 그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는 왜 창작하는 모든 것에 날짜를 적는가? 왜냐하면 예술가의 작품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 그가 그것을 창조했으며 왜, 어떻게, 어떤 상황 속에서 창조했는지도 알아야 한다. (24쪽)

 

이는 사회를 떠난 작품은 없다는 것이다. 천재도 사회의 조건 속에서 탄생한다. 그 사회 조건 속에서 탄생한 천재가 사회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릴 수는 있지만, 사회적 조건과 무관한 천재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애플을 창립한 '스티브 잡스'의 경우도 사회적 조건이 마련되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는 그 조건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천재다.

 

어느날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적 조건에서 나오되, 사회를 한 단계 더 앞으로 끌고 가는 사람, 그것이 바로 천재다.

 

이렇듯 예술에 관한 피카소의 명상에서 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데,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 또는 피카소에 관심이 있는 사람, 이 책을 읽으면 피카소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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