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과 피의 나라 러시아 미술 Art Travel 1
이주헌 지음 / 학고재 / 200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에게는 덜 알려진 러시아 미술에 대해서 소개해주는 책이다. 사실 우리나라 미술 시간에 배우는 화가들은 몇 나라로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학교에서 미술을 배우고 나서 머리 속에 남아 있는 화가들은 주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또는 인상파, 피카소로 대표되는 몇몇들 뿐이다.

 

러시아 화가들은 거의 미술 시간에 배우지 않을 것이다. 배워도 러시아 화가로가 아니라 세계적 미술의 흐름에서 그들의 이름과 작품을 언급하는 정도로 넘어간다. 적어도 내가 다닌 학교에서는 그랬다.

 

대표적인 러시아 화가라고 할 수 있는 샤갈을 누가 러시아 화가로 생각하겠는가. 대부분 사람들은 아마도 그를 프랑스 화가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니 러시아 미술은 우리에게는 너무도 먼 나라 미술이었다.

 

최근에 러시아 화가로 일리야 레핀에 대한 책을 읽고, 그의 그림을 보고, 알게 모르게 다른 미술 관련 책에서 러시아 화가들의 그림을 많이 보았다는 생각을 했고, 러시아 미술이 유럽 미술에서 변방에만 치우치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은 러시아 미술을 체계적으로 소개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러시아 미술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많이 준다.

 

특히 통사적으로 시대의 흐름을 따라 주욱 설명을 하지 않고, 미술관을 중심으로, 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작품을 중심으로 설명을 해주기 때문에 더욱 쉽게 러시아 미술에 접근할 수 있다.

 

가장 핵심적인 미술관은 두 곳이다. 트레티야코프 미술관과 러시아 미술관. 이 둘은 모두 국립미술관으로 엄청난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이 자료들을 바탕으로 러시아 미술의 역사를 작가와 작품을 중심으로 보여주고 있다. 뒤에 간추린 러시아 미술사에서도 나오지만 이 책은 '이콘'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17세기-18세기, 19세기의 그림들로 넘어간다.

 

'이콘'에서 시작한 러시아 미술사를 서유럽과의 교류를 통해 유럽화되는 미술의 변천, 그럼에도 러시아 특유의 미술 발전을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설명도 간결하고 명료하지만 그림들이 잘 제시되어 있어서 읽고 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풍부한 러시아 미술을 감상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여기에 두 미술관을 더 소개하고 있는데, 에르미타슈 박물관과 푸슈킨 미술관이다. 그런데 이 두 곳은 러시아 미술과는 좀 거리가 있다.

 

왜냐하면 이 미술관에도 물론 러시아 미술품들이 소장되어 있겠지만, 이 책에서 소개하는 두 미술관의 작품들은 러시아가 아닌 다른 나라, 특히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화가들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앞의 두 미술관은 러시아 미술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러시아 작가들과 작품들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면, 뒤의 두 미술관은 러시아가 소장하고 있는 세계 미술, 특히 유럽 미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근대 초기까지 러시아 미술은 세계 미술사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그 다음은? 냉전 시대 이후 러시아 미술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이 책에서도 다루지 않는다. 아마 그들도 나름 작품활동을 했겠지만, 그것은 좀더 세월이 지난 다음에 정리가 될 듯하다.

 

눈과 피의 나라라고 하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러시아는 추운 나라다. 혁명의 나라다. 그런 사람들의 성정이 그들의 그림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을 읽는 시간은 러시아 그림에 대해서 보고 읽고 즐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 호에서 가장 마음에 와 닿았던 구절은 "시민이 아닌데 어떻게 민주시민이 될 수 있어요"다.

 

  학생들에게 민주시민교육을 해야 한다고, 교육과정에 넣어야 한다고, 교과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을 하는데, 과연 민주시민교육이 가능한가?

 

  형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교육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민주 시민이 탄생하는 교육이 과연 지금 시대에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

 

  사실 학교교육이 아니라 광장에서 학생들은 이미 민주시민 교육을 받았다. 그들은 이미 민주시민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그들을 또 교육하라고?

 

이 말에 대해서 이런 말이 돌아온 것이다. "시민이 아닌데 어떻게 민주시민이 될 수 있어요?"

 

한 발 더 나아가고 싶다. 학생들은 이미 시민, 민주시민이 되었다. 그런데 이들에게 또 무슨 교육이 필요한가? 오히려 민주시민 교육이 필요한 사람들은 학생들이 아니라 바로 이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아닌가.

 

이미 기득권을 지니고 있는 어른들, 정치세력들이 민주시민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이들은 아직도 학생들은 미숙하다고 어른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만 한다.

 

그래서 이들이 바르게 자라도록 교육을 해야 한다고 한다. 이에 시민으로 인정도 해주지 않으면서 민주시민이 되라고 한다, 먼저 자신들을 시민으로 인정해 달라고 학생들은 또 청소년들은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교육 말고 자신들을 온전한 시민으로 대우하라고, 그러면 된다고... 시민으로 청소년을 대우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우선 선거권 연령을 만 18세로 낮추라고. 고등학생이 운운하지 말고.

 

이것조차 하지 않으면서 민주시민 교육 운운하는 말은 위선에 불과하다. 결국 민주시민은 학교 교육으로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자라나는 것이다.

 

자라나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 기르려고만 하면 안 된다. 청소년들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다. 민들레 이번 호에서 이 점을 잘 짚어주고 있는 것이고.

 

이번 호 특집 제목은 "민주, 시민, 교육"이다. 제목 잘 붙였다는 생각을 했다. 민주시민교육이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민들레 모토인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하려면 이렇게 민주와 시민과 교육이 서로 대등하게 연결되어야 한다.

 

학생, 청소년이기 전에 시민이고, 이들은 모두 민주주의를 실현할 권리와 의무가 있으며, 배움으로 전환되는 교육은 시민들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특집 기사 말고도 교육에 관한, 삶에 관한 다른 글들이 있다. 한 편 한 편 읽으며 생각할 거리가 꽤 있다. 읽어보면서 삶에 대해, 교육에 대해, 민주주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 한 시에 꽂혀버렸다. 그냥 이 시 하나로 이 시집을 읽은 것을 후회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이 시집에는 마음에 드는 시가 여럿 있다. '실천문학사'라는 출판사 시집답게 우리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시들이 꽤 있다. 그런 시들을 읽으며 지금 내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시들보다 이 시 하나로 됐다. 그냥 그렇게 이 시는 내게 다가왔고, 내 맘에 박혔다.

 

  탄식했다. 차라리 땅콩은 단단해 자신의 속에 있는 내용물을 보호하기라도 하지...이건 뭔가.

 

  땅콩을 보며 그것이 우리나라 지형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시인의 관찰에 감탄을 했고, 땅콩이 아래 위로 나뉘어 있음에 다시금 감탄을 했다. 아래 위로 나뉘어 있는데 그 사이에 또다시 벽이 있고, 다시 갈라진 속에 들어 있는 땅콩 알들도 좌우, 동서로 나뉘어 있으니...

 

이거야 완전 우리나라 아닌가. 생긴 것만 닮은 것이 아니라 아예 우리나라를 이 열매가 대변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다.

 

  땅콩

 

땅콩 껍질 속에는

뼈가 있다

 

한반도 지형을 닮은,

둥근 땅콩 껍질을 부수면

남북으로 나뉜 땅콩 두 알이

다시 동서로 갈라진 몸을 뒤척이며

누워 있다

 

땅콩 껍질 속에는

먹을 수 있는

단단한 뼈가 있다

 

박후기,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실천문학사. 2006년. 25쪽.

 

땅콩 껍질 속에 있는 알들은 먹을 수 있기라도 하지, 한반도 내에서 죽기살기로 다투는 사람들은 도대체 뭔가?

 

땅콩은 서로 갈라져도 영양가는 다르지 않고 또 서로 잡아먹으려 하지 않고 한 속에 들어있고, 함께 붙어있기라도 하지, 이 놈의 한반도는 남과북이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고, 여기에 외부세력까지 끌어들이고 있으니...

 

오히려 자신들보다는 외부의 힘으로 껍질을 깨려 하고 있으니, 땅콩 껍질이 외부의 힘에 의해 깨지면 그 속의 알들도 무사하지 못한데...

 

깝질이 단단한 이유는, 껍질 사이에 벽이 있는 이유는 서로를 단절하려는 것보다는 외부의 힘에 좀더 효율적으로 버티려는 안간힘일텐데, 위 아래로 갈라진 땅콩들이 아래 위에서 서로 들러붙어 있는 것은 둘이 갈라지면 더 약해지기 때문일텐데...

 

남과 북으로도 모자라서 동서로 너니 내니 싸우고 있는 꼴이라니...

 

땅콩은 서로 붙어 더욱 단단해지고 있는데, 우리는 떨어지지 못해 안달이니, 땅콩보다도 못한 모습이라고 해야 하나.

 

땅콩이 아래 위로 분리되어 있다고 하지만, 벽이 있다고 하지만 결코 꽉 막히지는 않았는데, 그들은 서로 나뉘어 있어도 통하려고 길을 내고 있는데, 그 길마저 막아버린 지금은... 동서로 나뉘었다고 하지만 껍질로 다시 동서가 하나로 붙어있는데... 그래서 그들은 분리되었으되 통합되어 있는데.

 

그래 땅콩은 단단하기라도 하지, 도대체 이렇게 분열되어 자신들의 안전을 외부에 맡겨버리면서 그것이 보수라고 하는 이 모순을 어찌할 건지.

 

박후기의 이 '땅콩'이란 시를 읽으며 땅콩보다도 못한 현실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해지기만 했는데... 여기서 다시 시작해야지... 그게 시를 읽는 자세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밥 딜런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5
마이크 마퀴스 지음, 김백리 옮김 / 실천문학사 / 200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년 말 광화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을 때 함께 하는 가수들이 있었다. 그들은 공연을 통해 시민들과 함께 했고, 시민들의 마음을 위로했다.

 

1987년 민주화 투쟁,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왔을 때 노래도 함께 뛰쳐 나왔다. 많은 노래들이 불렸고, 그 노래들을 저항가요라 불렀다.

 

노래는 민중들과 함께함께 하고, 민중들과 함께 한 가수들은 민중들의 가슴에 살아남았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가수와 노래의 경향은 변해갔지만, 다시 사람들이 광장으로 모였을 때 사람들은 또다시 노래를 불렀고, 가수들과 어울렸다.

 

그렇게 세상은 다시 가수를, 노래를 광장으로 불러내었다. 그런 가수들 중에 유명한 사람, 어쩌면 연말에 발표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더 유명해진 사람 밥 딜런.

 

그의 노래도 일종의 저항가요로 우리가 많이 불렀다. 지금 젊은이들은 그를 잘 모르겠지만 김광석이 부른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의 원곡자가 바로 그라는 것을 이야기하면 '아하' 하곤 한다.

 

특히 그의 노래 중에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노래는 '바람만이 아는 대답'인데... 이 노래는 예전에 많이 불려지기도 했다.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후 그에 대한 책이 많이 쏟아져 나와 그 전에 나온 이 책은 그를 더 높게 평가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읽다보면 비판적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만큼 이 책은 평전이라는 특성에 걸맞게 밥 딜런의 생애 중에서 저항가수로서의 그를 다루고, 어느 순간 그의 음악적 변모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저항가수로 알려진 밥 딜런이 정작 자신은 저항가수로 자리매김 당하고 싶지 않았다는 사실, 그는 시대에 맞는 음악을 한 자유인이었다는 사실, 한 사람의 삶을 일관되게 설명하기 힘든 아주 복잡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는데...

 

이 책은 밥 딜런의 생애 중에서 1960년대에 주목한다. 혜성처럼 등장해 저항가수의 기수가 되고, 그런 그가 어느날 저항성을 포기한 음악을 하게 되고 잠적하는 과정까지, 그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 함께 한 음악가들, 그를 이어서 저항가수라는 이름에 걸맞게 활동한 가수들을 다뤄주고 있다.

 

뒷부분에 가서야 최근의 밥 딜런을 이야기하는데 간략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자서전과 출연한 영화까지 언급하지만 이제 밥 딜런은 1960년대의 저항의 상징이 아니라 그냥 가수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또한 자서전에서도 명확하게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그만큼 밥 딜런 자신조차도 자신의 삶을 정리하기 힘들어한다는 얘기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의 음악적 변모가 아무렴 어쩌랴? 1960년대, 그는 분명 시대 흐름의 한복판에 있었고, 그 한복판에서 시대정신을 노래로 불렀고, 시민들과 함께 했음은 분명하다.

 

다만, 시대 흐름에 갇히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길을 가고자 했을 뿐이다. 자유인으로 살기를 원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이름을 거부하고, 자신이 이름을 붙이고자 했다고 보면 된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광장에서 노래 불렀던 가수들에게 딱 한 가지의 이름을 붙여서는 안 된다. 그들은 '저항'가수 이전에 '가수'다. 자신의 마음을 노래로 표현하는 자유인. 그렇게 인정해 주면 된다.

 

시대가 격류처럼 흐를 때 그 흐름을 무시할 수 없어 함께 하는 가수들이 있고, 그 가수들의 대표로 밥 딜런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저항성만 난무하는 노래를 했느냐 하면 아니다. 그에겐 서정성 넘치는 노래들이 많다.

 

시대에는 저항도 있지만, 사랑도 있고, 평화도 있고, 온갖 것들이 다 있다. 이들이 함께 공존한다. 가수에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 모순된 것들을 온몸에 지니고 살아온 존재가 바로 밥 딜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평전이다.

 

그의 개인적인 생활은 이 책에서 다루지 않는다. 대신에 그와 동시대의 음악인들, 특히 저항가수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다뤄주고 있어서, 1960년대와 그 이후 미국의 저항음악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가수를 한 방향으로 규정짓지 않고 복잡한 모순된 존재로 볼 수 있게 해주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한 방향으로 가수를 가두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 책이기도 하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밥이 되어 밥벌이의 소중함을


치익~

밥이 다 되었음을 알리는

김 빠지는 소리

치익~

밥벌이 장소로 가라고

밥벌이 장소에 도착했다고

문 열리는 소리

치익~

밥통이 열리면

완성된 밥이 온기를 내뿜으며

먹고 힘내라고 우리를 부르지만

치익~치익~

문이 열리면

이러저리 부대껴 열에 들뜬

발그레한 얼굴들이 밥벌이를 위해

종종 발걸음을 옮긴다


밥을 벌기 위해 밥이 되어야 하는

밥솥에서 부대끼는 곡식처럼

대중교통 속에서 부대끼는

밥이 되었기에 밥의 소중함을 아는

날마다 밥이 되는

밥의 뜨거움이 삶을 이어주듯

밥벌이의 괴로움이 삶을 이어줌을

밥이 되어 밥의 소중함을 아는

그런 사람들.

서민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