쳇바퀴만 돌린 교육


저곳이 고지라고

몇 십 년 동안 전력을 다해 달렸다

그러다 지쳐 멈추고 보니

제자리,

얼마나 힘들게 뛰었는지

더 이상 뛸 힘도 남아있지 않다


앞으로 달렸는데

그 자리만 맴돌고

혁신 개혁 변화 진보

죽어라 외치며

달리기는 했으나

달리면 달릴수록 더욱 빨라지는

쳇바퀴만 돌리면서

몸과 마음이 지쳐가면서

변했다고

착각하며 달린 것 아닐까


딱 멈추고 보니

쳇바퀴만 돌리고 있었구나

우리네 교육은

우리네 교사는

우리네 학생은

우리네 학부모는

우리네 교육관료는

우리네 사회는

모두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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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쪼가리 자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1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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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읽기. 이번엔 "반쪼가리 자작"이다. 제목 그대로 반쪽이 된 인간 이야기다. 참으로 환상적인 이야기지만 생각할거리는 많다.

 

사람이 반으로 쪼개진다. 육체만 쪼개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까지도 쪼개진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처럼 자신의 내면이 분열된 사람이야기는 있었지만, 이렇게 몸이 정확하게 반토막난 사람과 그 반토막이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사람의 이야기는 이 소설을 통해 처음으로 접했다.

 

반쪼가리가 된 자작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에게는 누구나 다 선과 악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다. 반쪼가리가 된 자작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어쩌면 온전한 몸을 지닌 우리들 역시 반쪼가리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아닐까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작을 제외하고는 모두 온전한 몸을 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이들이 온전한 정신을 지니고 있을까? 이들에게 일방적인 선이나 일방적인 악은 없다. 이들은 이 둘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 이중적인 모습, 어쩌면 인간 본연의 모습을 반쪼가리 자작의 분열된 모습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악만 남은 자작과 선만 남은 자작. 그러나 이 둘은 모두 사람들에게 배척당한다. 선과 악이 공존하지 않는 절대악과 절대선은 인간사회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것이다.

 

하다못해 이들은 문둥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악은 악으로 선은 선으로 인해 그들을 괴롭게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카톨릭에 탄압받아 피신한 위그노 신자들에게도 악은 악으로 선은 선으로 부담으로 다가온다. 즉 절대적인 악과 선은 모두에게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그러므로 결론은 이 절대적인 악과 선이 결합하는 것이다. 사람은 그만큼 모순적인 존재이고, 이런 모순적인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바로 사람이기 때문이다.

 

반쪼가리들이 서로 결투를 하는 것, 그러나 선과 악, 어느 것도 승리할 수 없다. 둘 다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데, 이들을 의사가 결합해서 살려낸다. 이제는 선과 악이 한 몸에 있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면서 갈등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이렇게 칼비노의 이 소설은 환상적이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을 그는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삶이 선과 악, 어느 한쪽으로만 기울어서는 안 됨을.

 

인간들의 삶에는 선도 악도 모두 함께 하고 있음을, 우리 내면에는 지킬박사와 하이드씨가 모두 있음을, 그리고 그런 삶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함을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사랑에 빠진 파멜라 역시 이 둘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는 것도 이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 중에 선과 먼저 결혼식을 하지만 결국 선하고만 살 수는 없음을 파멜라와의 결혼 장면을 통해서 보여준다.

 

다만, 선하고 먼저 결혼하는 것으로 보아 우리네 삶에서는 그래도 선이 조금 더 우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확히 선과 악이 반반이 아니라 비중이 엇비슷하지만 그래도 선이 우리에게는 조금 더 필요하다는 생각, 내 안에 있는 선과 악 중에서 선이 더 잘 활동할 수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길지 않은, 겨우 120쪽을 채운 소설인데, 환상적인 이야기를 통해 재미도 주고, 생각도 할 수 있게 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우리의 선조들' 3부작 중에서 1부라고 한다. 이제 남은 것은 3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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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특정한 개인에게만 책임을 전가하고는 자신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 양 행세하는 정치인들을 보면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국무총리부터 장관들, 그에 준하는 사람들의 청문회를 보면서 도대체 청문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깨끗할까 하는 생각을 한다.

 

자신들이 얼마나 흠결이 없으면 상대방을 저토록 파렴치범으로 몰까 하는 생각.

 

자기들처럼 만만한 짜장면이 나올 줄 알았는데, 세상에 자기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삼선짜장면이 나왔다는 건가. 이건 지금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 값을 치를 능력이 없다고.

 

그래서 이렇게 물고뜯는 것일까. 자신들이 잘못한 것은 사과조차 하지 않고. 여전히 자신들이 잘못하고 있음을 인정하지도 않고.

 

깔끔하게 사과하고, 잘못을 고치려는 행동을 해야 하는데, 구태의연한 방법으로, 이미 지나갔다는 태도로 다시 정치에 임하는 그들을 보면서, 똥 묻은 개들이 겨 묻은 개를 욕한다는 생각을 했으니.

 

'나라다운 나라'

 

물론 깨끗한 사람들, 흠결 없는 사람들이 '나라다운 나라' 만드는데 동참했으면 좋겠지만, 이미 지나간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으니, 그 과거를 사과하고 고쳐서 행동하는 사람이면 충분히 동참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마저도 거부하고 있으니, 정작 사과해야할 족속들이 도리어 큰소리를 치는 형국이라니. 그렇게 다시 그들의 사과 없는 큰소리로 '나라다운 나라' 시작을 하기도 힘드니...

 

그런 그들을 보며, 김이듬의 '사과 없어요'란 시를 적용할 수 있단 생각을 했는데... 물론 시와 지금 현실의 방향은 많이 다르지만.

 

다만 우리는 우리가 잘못 발음했다고, 잘못 행동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잘못에 공동 책임이 있는 자들에게 그 책임을 제대로 물을 시간이 아직 오지 않았을 뿐이라고, 그 시간이 오면 그 책임을 반드시 물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과하고 고치면 괜찮을텐데,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요, 미래일테니, 그렇게 사과하고 함께 가면 더 좋을텐데...

 

 사과 없어요

 

  아 어쩐다, 다른 게 나왔으니, 주문한 음식보다 비싼 게 나왔으니, 아 어쩐다, 짜장면 시켰는데 삼선짜장면이 나왔으니, 이봐요, 그냥 짜장면 시켰는데요, 아뇨, 손님이 삼선짜장면이라고 말했잖아요, 아 어쩐다, 주인을 불러 바꿔달라고 할까, 아 어쩐다, 그러면 이 종업원이 꾸지람 듣겠지, 어쩌면 급료에서 삼선짜방면 값만큼 깎이겠지, 급기야 쫓겨날지도 몰라, 아아 어쩐다, 미안하다고 하면 이대로 먹을 텐데, 단무지도 갖다 주지 않고, 아아 사과하면 괜찮다고 할 텐데, 아아 미안하다 말해서 용서받기는커녕 몽땅 뒤집어쓴 적이 있는 나로서는, 아아, 아아, 싸우기 귀찮아서 잘못했다고 말하고는 제거되고 추방된 나로서는. 아아 어쩐다, 쟤 입장을 모르는 바 아니고, 그래 내가 잘못 발음했을지 몰라, 아아 어쩐다. 전복도 다진 야채도 싫은데

 

김이듬, 히스테리아, 문학과지성사. 2014년.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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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요즘 시들을 읽다보면 이 시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왜 이렇게 시들이 어려운 거야, 하는 불만이 치밀어 올라온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학교에서 현대시처럼 어려운 시들을 배운 기억이 없다. 기껏해야 이상의 시 정도.

 

그런데, 이상의 시는 초현실주의 시라고 치고, 그래서 무의식을 발로라고 배운 것으로 끝낼 수 있지만, 요즘의 시들을 학교에서 배우면 무어라고 가르칠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이토록 우리 삶이 해석하기 힘들어졌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하기도 하고. 어쩌면 우리 삶이 복잡해지고 어려워졌기 때문에 현대시들도 이렇게 난해해졌는지 모른다.

 

우리는 하루 앞을 내다보기도 힘든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불확실성의 시대. 그것이 바로 현대고, 불확실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사람들이 바로 현대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 점을 시인들이 포착해서 시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르고.

 

이런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그냥 우리에게 일어난 어떤 사건을 보여주고 있는 시가 있다. 2013년 현대문학상을 탄 이근화의 '제발 이 손 좀 놔주세요'란 시다.

 

손을 놔달라고 말하는 듯하지만, 손을 놔달라는 말을 못한다. 그것은 안타까움이 자신에게로 왔기 때문이다. 자신과 처지가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시는 그냥 우리가 일상에서 목격할 수 있는 일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 보여줌 속에 따스함이 함께 하고 있다. 

 

  제발 이 손 좀 놔주세요

 

호박죽 포장을 들고 있었다

오토바이가 쓰러졌고 한참을 미끄러져 나갔다

쿵 소리가 먼저였던가

 

계산하던 아줌마가 영수증을 건네주다 놀라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아이고 어떡해 어떡하지 어떡하냐

헬멧을 벗은 사람은 초로의 남자였다

오토바이 밑에 깔린 다리를 빼지 못했다

 

설탕 트럭을 피하려다가 속도를 줄이지 못한 걸까

트럭 운전수가 오토바이를 들어 올렸다

사람들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경찰서인지 병원인지 모를 곳으로 손가락을 눌렀다

 

호박죽은 식어가는데

죽집 아줌마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가야 하는데

혈압이 오르락내리락 엄마한테 가아 하는데

 

얼마나 다쳤는지 보험은 들어놨는지

걱정은 누구의 몫일까

영원히 일어서지 못하면 어떡해

설탕 트럭이 걱정을 우수수 쏟아냈다

 

아줌마 제발 이 손 좀 놔주세요, 말하지 못했다

죽은 식어가는데 엄마가 오르락내리락 기다리는데

남자의 죽은 누가 포장해 갈지

빗쟁이 딸이 있으면 어떡해

달콤하지 않은 걱정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2013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현대문학. 2012년. 18-19쪽.

 

어쩌면 우리가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갈 때 이렇게 서로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아무런 실용성도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서로의 손을 잡는다는 것은 일종의 유대다. 손과 손을 통해 마음이 통하는 것이다.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을 봤을 때, 직접 행동하지 않더라도 이렇게 서로 손을 잡게 되는 것은, 그것이 꼭 남의 일만이 아니라는 것, 시에서 '달콤하지 않은 걱정들이 쏟아지고 있었다'라고 할 정도로, 남의 일을 내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시의 화자는 '제발 이 손 좀 놔주세요'란 말을 하지 못한다. 맞잡은 손 속에서 불확실성의 시대를 견뎌내는 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정이 필요한 시기가 아닌가 한다.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는. 각자가 각자의 삶만을 산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 우리는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이렇게 서로 손을 잡음으로써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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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0 1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6-10 1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무 위의 남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7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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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로 칼비노가 쓴 소설 중에 두 번째로 읽은 소설이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라는 다소 모호한, 환상적인 소설을 읽은 기억으로 그의 다른 소설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고른 책.

 

우리의 선조들 3부작이라는데, 어쩌다 보니 두 번째에 해당하는 이 책을 먼저 읽게 되었다.

 

"나무 위의 남작"이라? 나무에서 살아간 사람의 이야기겠거니 짐작하고 집어들었는데, 그 짐작이 맞았다. 어릴 시절 나무에 올라갔다가 죽을 때까지 내려오지 않은 사람의 이야기다.

 

그냥 단순하다면 단순한 이야기일 수 있는데, 이 소설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이 프랑스 대혁명기  전후의 이탈리아 어느 도시이니 시민혁명이라는 역사의 흐름을 벗어날 수는 없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고,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지만 달팽이 요리를 거부하고 나무로 올라간 이래 내려오지 않은 '코지모'라는 형의 이야기를 동생의 관점에서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그냥 나무 위에 사는 특이한 사람의 이야기라고 하면 되겠지만 여기에 프랑스 대혁명기 전후의 여러 사람들 이름도 나오고, 그 시대 상황도 나온다. 물론 구체적으로 그 시대 상황에 휩쓸려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라 나무 위에서 어느 정도는 관조하는 그런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렇다고 시대의 흐름을 빗겨가지는 않는다. 귀족임에도 공화주의를 지지하는 코지모, 그를 통해 시대의 변천을 느낄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나무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 그로 인해 우리는 그 시대 상황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께 된다.

 

시대 상황에 몰입하지 않고 거의 60년에 이르는 시기를 그냥 흘려보내게 된다. 이런 전개 속에서 왕정이든 공화정이든 땅에 붙박혀 사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정치체제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 그들에게는 하루하루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느 정치체제로 바뀌어도 나무 위에서 생활하는 코지모의 생활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늙어서 죽어갈 때 결국 기구의 밧줄에 매달려 어디론가 사라진다.

 

이렇게 그의 삶을 살펴보면 땅에서 나무로 올라가고 나중에는 하늘로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나무를 보자. 나무는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존재 아니던가.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나무는 신성한 존재이기도 했다.

 

우리를 하늘과 연결해 주는 존재였으니. 그렇다면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에서 나무 위에서 살기로 결심한 코지모는 알게모르게 인간세상에서 나아가 하늘을 추구하는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내려올 기회가 있을 때에도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이는 다시는 땅에 발을 딛는 삶을 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고, 그의 삶은 이미 이런 땅의 세계에서 떠났음을 알려준다.

 

우리들이 원하는 삶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힘들다는, 이상의 세계는 다른 곳에서 이루어진다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소설에서 코지모와 관계되는 사람들은 나무에서 내려온다. 이상은 꿈꿀 수 있지만,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땅에 내려와야 함을 생각하게 하는데... 사람들은 땅을 벗어나 살 수 없음을 다른 인물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결국 코지모는 자신이 꿈꾸었던 이상이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으니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뒤 그가 살던 곳에 나무는 베어지고 숲은 없어지게 된다. 이제 우리는 자연과 함께 공존하던 시대에서 자연을 정복하는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이상을 꿈꿀 수 있는 나무가 사라진 시대가 되는 것이다. 그 나무에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존재로 살아갔던 코지모와 같은 인간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결말이기도 하다.

 

이렇게 이 소설은 그냥 나무 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로 흥미롭게 읽을 수도 있고, 이상과 현실의 중간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로 읽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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