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인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4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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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9쪽) 란 말로 소설은 시작한다.

 

책 한 권의 영향으로 삶이 송두리째 바뀐 사람의 이야기는 많다. 그래서 소설은 처음부터 호기심을 자극한다. 도대체 무슨 책이야? 궁금증을 유발한다.

 

책을 읽고 주인공인 오스만은 방황을 한다. 그는 이미 기존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에 접어들었음을 깨닫는다. 자신이 살고 있던 세계는 더이상 자신의 세계가 아니다.

 

그는 다른 세계로 가야 한다. 그 세계로 가기 위해 같은 책을 읽었던 사람을 찾는다. 자난이라는 여성에게서 사랑을 느끼고, 그 여성을 통해 메흐메트라고 하는 먼저 책을 읽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그들의 관계는 어긋난다. 메흐메트와 자난이 그에게서 사라진다. 오스만은 그들을 찾아다니다 자난을 만나다. 자난과 함께 메흐메트를 찾는 여행을 한다. 그 여행이 현실적이지 않다. 그들은 버스를 타고 터키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다른 사람들을 만난다.

 

그 과정에서 도대체 새로운 인생이 무엇인지 밝혀지지 않는다. 마치 청춘의 방황처럼 이들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움직이긴 하지만 무엇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깨달음은 없다. 결국 메흐메트의 아버지를 만나게 되는 오스만.

 

여기서 과거와 현재의 터키가 중첩된다. 서구화되는 터키를 막고자 하는 메흐메트의 아버지인 나린 박사. 하지만 그 역시 책으로 인한 아들의 방황을 인정하지 못한다. 아들의 행동을 감시하는 사람을 붙이고, 서구화되어 가는 터키를 반대하는 일을 하는데...

 

오스만은 나린 박사와도 함께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서구화된 터키를 인정할 수도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젊은이, 그것이 바로 오스만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그가 읽은 책 '새로운 인생'은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인생을 제시해주지 못한다.

 

여기서 나중에 밝혀지는 '새로운 인생'이라는 카라멜이 나오는데, 책과 카라멜이 같은 제목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쓸모가 비슷하다는 얘기 아닌가. 젊은이들에게 달콤함을 주지만 결국은 사라지고 마는.

 

카라멜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 판 사람은 나중에 장님이 되지만 그래도 건강하게 잘 살고 있는 반면에, 책 '새로운 인생'을 쓴 사람은 총에 맞아 죽게 된다. 한때의 달콤함이라지만 어린이에게 주는 달콤함은 그 해악이 죽음에 이를 정도는 아니라는 얘기?

 

그렇다면 청년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는 책을 쓰는 일은 목숨을 거는 일과도 같은 일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래서 책에 대해서는 역대 정권에서, 특히 독재정권에서 더 심한 탄압을 하는지도 모른다.

 

탄압이 심할수록 청년들은 이런 책에 더욱 흥미를 지니고 읽게 되고, 책에 쓰여 있는 일들을 실현하려는 노력을 한다. 책에 있는 인생을 현실에서 실현하려는 욕구, 그것들이 바로 청년들이 지닌 욕구고, 그것이 바로 '새로운 인생'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 소설엔 '새로운 인생'이 세 번 펼쳐진다. 주인공 오스만이 읽고 영향을 받은 책'새로운 인생', 어린 시절에 오스만이 먹었던 카라멜 '새로운 인생', 마지막으로 그것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이 소설 '새로운 인생'

 

우리는 이 '새로운 인생'을 읽으며 새로운 인생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결말은? 새로운 인생은 없다. 모두 덧없음이다. 사라짐이다.

 

오스만은 책의 끝부분에서 천사를 만난다. 그가 젊은시절 만나려 했던 천사를 죽음에 이르러 만나는 것이다. 천사는 삶과 함께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천사는 죽음과 함께 존재한다. 그것을 '자난'이 잘 보여주고 있다.

 

자난'은 터키어로 '천사'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주인공 오스만은 자난을 사랑하고 자난과 함께 하고 싶어하지만 그들은 함께 할 수 없다. 이는 천사는 삶에서 함께 할 수 없는 존재다. 물론 잠시는 함께 할 수 있다.

 

우리 안의 천사들이 작동하는 때가 바로 그런 때이다. 그러나 이런 때는 지속적이지 않다. 우리의 인생에서는 천사보다는 삶의 일상성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오스만이 새로운 인생을 찾아 헤매지만 그가 만나는 인생들은 현실의 삶들일 뿐이다.

 

일상에서 살아가는 일, 자난이 떠난 뒤 오스만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일상으로 복귀한다. 그런 그에게 다시 과거를 회상시키는 일이 생기는데...

 

젊은시절에 새로운 인생을 찾아 헤매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는 현실에서 배척당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해야 할 일이라는 지지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딱 젊었을 때까지다. 이미 일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새로운 인생을 찾아 가는 일, 또는 자신의 과거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때는 죽음만이 새로운 세계로 이끌 수 있다. 오스만 결국 그는 천사를 보게 된다.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의 꿈을 안은 채.

 

처음에는 서구화냐, 전통고수냐를 놓고 젊은이와 기성세대간의 갈등이 주를 이룰지 않을까 했다. 중반까지도 그랬다. 터키의 역사와 소설의 내용을 생각하면서, 메흐메트를 감시하는 사람들 이름에 시계 이름을 붙여준 것에서 그럴 것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소설은 이것만으로 전개되지는 않는다. 터키의 역사와 기성세대와 젊은세대의 갈등도 다루고 있지만, 도대체 어떤 것이 새로운 인생인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새로운 인생'이라는 책도 '새로운 인생'이라는 카라멜도 모두 '새롭지 않다'고 할 수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이들도 역시 기존의 것들을 융합한 것일 뿐이다.

 

우리들 인생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은 기존에 살아온 사람들과 전혀 다른 세상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인생은 없다. 그들이 살아온 인생, 방식에 내 삶을 살짝 얹는 것 뿐이다.

 

그래서 결국 이 소설을 읽으며 끝부분에서 이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새로운 인생은 없다. 우리는 모두 함께 아주 조금 다르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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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시대만큼 목숨의 가치가 없는 시대가 있을까? 길지 않은 인생을 사는 인간들이 제 목숨 하나도 우연에 맡겨야 하는 시대가 되지 않았나.

 

도처에서 테러, 재난,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렇게 사람들의 목숨값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시대인데...

 

인간이 아닌,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을 제외한 다른 생명들은 어떤가? 이들은 인간에 의해 멸종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는가.

 

자기 종족이 병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당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동물들... 인간의 삶터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어야 하는 식물들.

 

이런 생명들의 목숨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생각하고 있을까? 이런 목숨들의 값어치를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인간 본위로 살아가는 지금 이 시대는 결국 인간의 목숨값마저도 하찮게 여기게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넘쳐나는 책들... 그 책들. 책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책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로서는 가끔 책을 쌓아두면서 나무들의 목숨값을 내가 이렇게 지니고 있어도 되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장철문 시인 역시 그런 생각을 했나 보다. 그의 시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다만, 시인은 나무의 목숨에서 더 나아가 나무와 관련된 다른 생명들까지도 이야기한다.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쓰러졌을까?

얼마나 많은 벌레들이 집을 잃고

햇볕에 말랐을까?

 

한 뭉치에 백권씩 이백 뭉치의 책더미를, 아니

나무 등걸을

숲을

천장에 닿을 때까지 쌓는다

개미핥기의 입김만으로도 태풍이 되고

원주민 일부의 오줌발만으로도 노아의 홍수가 되는

보이지 않는 숨결들의

부서지고 으깨지고 표백되고 잉크가 찍힌

집을 쌓는다

 

이 중에 몇 권이 꼭 만날 사람을 만나

그를

얼마나 오랫동안 창가에, 혹은

길모퉁이에 세워둘까?

 

그 많은 교정지를 넘기면서도 듣지 못했던

환청을

책을 쌓으며 듣는다

 

얼마나 많은 새들이 어지럽게 날아올랐을까?

얼마나 많은 짐승들이 숲의 끝까지 달렸을까?

 

이슬 한방울로 하루치 양식이 넘치고

깊은 숲이 조율하는 바람구멍이 아니고는,

그 작은 파닥거림을

하늘에 비칠 수 없는 것들

 

얼마나 많은 숨결들이 여린 살과 노래를 잃었을까?

 

장철문, 바람의 서쪽. 창작과비평사. 1998년. 50-51쪽.

 

우리는 모두 남의 목숨으로 살아가고 있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미생물이든 우리들의 삶은 다른 생명체의 죽음에 기반하고 있다.

 

늘 그것을 생각하고 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가끔은, 아주 가끔은 내 삶이 다른 생명들의 죽음 위에 있다는 생각을 하자.

 

그리고 다른 생명들을 바라 보자.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끼자. 그러면 약간이라도 생명파괴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장철문의 시집을 읽으며, 이 시를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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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9 08: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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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9 09: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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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 않는 기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9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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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로 칼비노가 쓴 소설 중에 네 번째로 읽은 소설. "우리의 선조들"이라는 제목으로 묶인 소설 중에 마지막 3부작이라고 한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 전에 읽은 소설처럼 환상적이다. 어찌보면 요즘 드라마에서 보는 막장 드라마적인 요소들도 있다.

 

가령 주인공들의 한 축인 나중에 사랑에 빠진 토리스먼드와 소프로니아의 이야기. 토리스먼드는 소프로니아를 자신의 어머니로 알고 있으나, 사실 알고 봤더니, 이복 누이였고, 어머니가 같은 줄 알았더니, 토리스먼드의 어머니는 소프로니아를 키워준 양모에 불과했으니 둘은 핏줄이 섞이지 않은 이복남매라는 사실.

 

요즘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내용이 이 소설에도 등장하는데, 이 내용이 중심을 이루지 않고 주변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막장드라마와는 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아질울포, 랭보와 브라다만테를 중심으로 소설은 전개된다. 제목인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아질울포이고, 그를 사랑하는 브라다만테와 그를 추종하는 랭보.

 

아질울포는 어쩌면 원리원칙을 대변하는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불쾌히 여겼다'(14쪽)고 하듯이 그는 철저한 원칙주의자다. 갑옷 속에 존재하지 않는, 오로지 갑옷만 존재하는, 그래서 살이 있는 사람이 아닌, 규칙과 규정만 있는 존재.

 

그런 존재는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그가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피가 흐르는 육체가 필요하다. 감정이 있는 인간이 필요하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에서 '존재하는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존재로 변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본래 원리원칙이란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들에게 유용한 원리원칙이 되기도 하고, 사람들을 구속하는 원리원칙이 되기도 한다.

 

아질울포가 깨끗한 하얀 갑옷으로만 존재했을 때는 사람들을 구속하는 원리원칙에 불과했다. 대표적인 예가 프리쉴라의 성에 도착했을 때 그가 한 행동이다.

 

그는 사랑을 육체를 도외시한 원리원칙에만 해당하는, 글 속에만 존재하는 그런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 그가 소프로니아를 구한 다음에도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보통 기사소설은 위기에 처한 공주 또는 귀부인이 자신을 구해준 기사와 서로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소프로니아를 남겨두고 떠날 뿐이다.

 

하지만 소프로니아는 영원히 처녀로 살 수 없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기사'처럼 인간의 존재를 포기한, 마치 자신들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성배 기사단'과 같은 존재로 남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에 빠져 처녀성을 잃은 소프로니아를 보는 순간 그는 더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영원한 처녀, 성처녀로 남아야 할 여인이 사랑에 빠져 처녀성을 잃었음을 알게 된 순간, 원리원칙만을 주장하는 아질울포는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원리원칙이 없어져야만 할 것인가? 아니다. 원리원칙은 필요하다. 다만, 인간의 현실에 맞게 변용되어야만 한다.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랭보'다. 랭보는 아질울포의 갑옷을 입고 전쟁통을 누빈다. 그가 누비면 누빌수록 갑옷은 점점 더 깨끗함을 잃어간다.

 

이는 원리원칙에 사람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원리원칙을 맞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랭보'를 통해 보여준다. 랭보가 그 갑옷을 입고 전투를 치르면 치를수록 갑옷은 랭보에게 꼭 맞게 변해간다.

 

아질울포의 갑옷을 입은 랭보. 그는 이제 아질울포를 쫓는 브라다만테를 자신에게 오게 할 수 있다. 아질울포라는 원리원칙을 추구하던 브다다만테는 사라진 아질울포와 그의 갑옷을 입고 그 갑옷을 자신의 몸에 맞춘 랭보를 발견하고는 수녀원을 박차고 랭보를 따라 나선다.

 

이제 원칙은 사람을 따라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예다. 원리원칙만 따지던 아질울포는 다른 사람들에게 배척당한다. 그러나 그것에서 벗어난다면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게 할 수 있다.

 

늘 아질울포를 따르던 랭보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자신이 쫓던 브라다만테로 하여금 자신을 쫓아오게 만드는 것, 그것은 원리원칙에 빠진 삶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원리원칙이 따르게 한 결과일 것이다.

 

참, 환상적인 소설이고, 다양하게 해석이 될 수 있는 소설이기도 하지만, 여기서 '존재하지 않는 기사'를 나는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원리원칙'의 문제로 대입하여 읽었다. 그렇게 읽어도 나름 생각할거리를 제공하니, 소설이라는 문학은 이렇게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지금까지 살아남았는지도 모른다.

 

한 가지 더, 이 소설은 약간의 추리소설적 면을 지니고 있는데, 소설의 서술자가 누구인지 궁금증을 유발하는 것이다. 수녀가 자신이 겪고 들은 이야기를 글로 쓰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도대체 그 수녀가 누구인가 계속 생각하게 한다. 그 수녀가 누구인지는 소설의 맨 마지막 부분에 나타나 있다. 읽어보면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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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살아온 나날들. 문득 멈춰 서서 나를 보게 되면 내 가슴 속에 누군가가 있다.

 

또 하나의 나. 그런 나는 잘 보이지 않는다.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안 보이지도 않는다. 분명 있다. 내 가슴속에 누군가가.

 

그 누군가가 걸어간다. 그냥 내 가슴 속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면 어느새 걸어가고 있는 그가 나인지, 내가 그인지 알 수가 없게 된다.

 

그렇게 늙어가고 낡아가고, 그와 나는 우리가 된다.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냥 우리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삶이다. 수많은 '나들'을 만나는 것, '나' 밖에서도 나를 만나고, 내 안에서도 나를 만나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이지 않을까 한다.

 

가끔 물끄러미 거울을 보면 친숙하면서도 낯선 나를 발견한다. 거울 속의 그를 나라고 해야할지 잘 모를 때, 그에게 도대체 '넌 누구니?'라고 물어보기도 한다.

 

그가 누군지 알면서, 그는 또다른 나임을 알면서 그렇게 부러 질문을 한다. 홍영철의 시 '너 누구니?'를 읽는 순간, 이런 '나들'이 생각났다.

 

이 시는 이런 '나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특히 내 외부의 세계가 쓸쓸할 때는 더욱.

 

   너 누구니?

 

가슴속을 누가 쓸쓸하게 걸어가고 있다.

창문 밖 거리엔 산성의 비가 내리고

비에 젖은 바람이 어디론가 불어가고 있다.

형광등 불빛은 하얗게

하얗게 너무 창백하게 저 혼자 빛나고

오늘도 우리는 오늘만큼 낡아버렸구나.

가슴속을 누가 자꾸 걸어가고 있다.

보이지 않을 듯 보이지 않을 듯 보이며 소리없이.

가슴속 벌판을 또는

멀리 뻗은 길을

쓸쓸하게

하염없이

걸어가는

너 누구니?

너 누구니?

누구니, 너?

우리 뭐니?

뭐니, 우리?

도대체.

 

홍영철, 가슴속을 누가 걸어가고 있다. 문학과지성사. 2010년 초판 4쇄. 17쪽.

 

세상은 황량한데, 그 황량함 속에서도 나는 홀로이지는 않다. 바로 내 가슴속에 누군가가 있고, 그가 내 가슴속에서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걸어가고 있음, 살아있음, 그 살아있음을 느낌으로써 나 역시 살아있는 것이다.

 

가슴속의 그에게 '너 누구니?'라고 묻지만, 이 너는 곧 나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우리 뭐니?'라고. 나와 그는 '우리'가 된다. 각자 독립된 '나들'이 화합하게 되면 그때 '우리'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세상은 쓸쓸하다. 힘들다. 거칠다. 그런 세상에 나만 걸어가는 것은 아니다. 나 밖의 나와 내 안의 내가 함께 걸어간다. 우리들, 서로 뭐니? 도대체 뭐니?라고 질문을 하면서도 함께 간다.

 

그렇게 가는 순간만큼 우리는 살아 있다. 살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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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6 12: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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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6 12: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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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50살이네요 - 몸과 마음, 물건과 사람, 자신과 마주하는 법
히로세 유코 지음, 박정임 옮김 / 인디고(글담)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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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지천명(知天命).

 

몸이 서서히 늙어감을 느끼는 나이. 사회에서도 이제는 퇴물 취급을 받을 나이. 자신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분야에서 서서히 밀려갈 나이.

 

우리나라에서 50은 정치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런 것을 경험하는 나이다. 우리나라뿐이 아니라, 전세계에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한다.

 

일본 여자 작가가 50이 되어서 느낀 점을 쓴 책이다. 무겁지 않고 가볍게 읽을 수 있다. 하긴 가뜩이나 50이 되어 인생의 무게가 짓누르고 있는데, 글까지도 무거우면 읽기에도 너무 힘들겠다는 생각을 한다.

 

인생을 그래프에 비교하곤 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위로 올라갔다가 어느 순간 정점을 찍은 다음부터는 내려오는 그런 그래프.

 

정점이 언제일까? 확실한 것은 50이면 이제는 정점을 지나 내려올 때라는 거다. 대부분의 직장에서는 20년 남짓 근무를 하고 이제는 퇴직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나이이고, 가정에서는 자식들이 어느 정도 자라서 독립을 하기 시작하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앞만 보고 달렸던 인생에서 이제는 뒤돌아볼 곳이 더 많아진 나이이기도 하다. 속도도 예전처럼 빠르지 않은데, 다만 죽음을 향해 가는 속도만은 점점 빨라지는 그런 나이.

 

그렇다고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나이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가는 50이 되어 생각나는 바를 글로 썼다. 내용을 읽지 않고 작은 제목들만 읽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몇몇 작은 제목을 인용해 보자.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해도 괜찮습니다

용서하고 용서받으며 살아갑시다

각자의 나이에 멋지게 어울리는 것은 있기 마련입니다

과거의 기억들을 소중하게 간직합니다 

어떤 일이든 단정부터 짓지 않습니다

변해가는 몸의 상태를 받아들입니다 

소중한 것들을 기억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여전히 좋은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그렇다. 50이라는 나이는 더하기보다는 덜어내기가 더 어울리는 나이다. 덜어내기가 어울리기에 무리를 할 필요가 없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 결과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자신을 바라보면서 주변을 바라보면서 조금 느리게 자기 속도에 맞게 살아가는 나이다.

 

어쩌면 이런 덜어내기는 자신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덜어냄으로써 더해가는 나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나이, 여유있게 자신을 즐기며 남들과 함께 살아가는 나이, 그것이 바로 50이다.

 

꼭 50이 된 사람이 읽을 필요는 없다. 이 책은 살아가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들을 말하고 있다. 세상에 단 한 번뿐인 삶. 그 삶을 즐기며 바람직하게 살아가고 싶은 사람, 그런 사람이 천천히 읽으며 자신의 삶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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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5 08: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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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5 09: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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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똘 2017-06-15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좋은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kinye91 2017-06-15 20:27   좋아요 0 | URL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단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좋은 어른이 될 수 있는 조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오거서 2017-06-15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0이 정점일까요… 뜬금없이 드는 생각입니다. ^^;;

kinye91 2017-06-15 20:26   좋아요 0 | URL
저는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싶어요. 어떤 사람은 40이 정점일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60이, 어떤 사람은 70이 정점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그렇지만 통상적으로 50정도 되면 정점이거나 정점에서 약간 전이거나 후이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