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이다.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확실히 지구온난화가 진행되고 있나 보다. 6월부터 30도가 넘는 더위라니.

 

  지구는 점점 더 더워지고 있다. 그런데, 세계 곳곳에서 이상징후가 나타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참으로 낙관적이다. 하다못해 미국 대통령인 트럼프는 세계 기후협약에서 미국이 탈퇴하겠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오염을 시키는 나라가 지구 환경에 무관심하다니... 아니, 무관심을 넘어 파괴를 더 가속시키려 하다니... 도대체

 

 사람들은 부러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인지, 환경에 대해서 모르쇠로 일관한다. 환경은 제도가 갑자기 바뀐다고 나아지지 않는데... 대통령이나 또는 다른 권력자들이 환경에 관심을 가진다고 확 바뀌지 않는데...

 

환경은 우리의 생활 하나하나가 변할 때 바뀔 수 있는데... 좋아질 수 있는데...

 

덥다고 에어컨을 틀고, 대중교통이 더 덥다고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일도 환경에 많은 영향을 주는데...

 

우리가 잘 먹자고 숲을 없애버리고 있는 현실, 그런 현실이 결국 우리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데...

 

땅이 숨쉴 수 없게 포장해버리는 현실... 도대체 땅은 언제 숨을 쉬나, 저렇게 두터운 옷을 입고 있는 땅이 어떻게 부드러워질 수 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게다가 그 땅을 누르는 무거운 건물들... 건물들에서 나오는 열기...

 

가뭄이 심하다고 한다. 논이 쩍쩍 갈라지고 있다. 이렇게 재앙에 가까운 가뭄이 지속되는 것도 역시 우리가 저지른 일일테다.

 

도대체 4대강은 어디 갔는가? 가뭄과 홍수에 대비한다고 수많은 돈을 들인 그 4대강은 이런 가뭄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으니... 이 역시 우리가 초래한 결과 아닌가.

 

요즘 상황과 반대인 시를 읽었다. 홍수... 그러나 홍수나 가뭄이나 결국 우리가 초래한 결과일 수 있다. 시인은 이를 '오늘의 밥값'이라고 한다.

 

우리는 종종 밥값을 해야 한다고 한다. 밥값, 그것은 우리가 살기 위해 치러야 하는 당연한 값이다. 그러니 가뭄이든 홍수든, 결국 우리가 치러야 할 밥값이라는 생각을 하면 환경에 무덤덤할 수는 없을텐데...

 

  오늘의 밥값

 

장대비를 든 물길이 흉흉하게 몰려간다

몸집을 키운 뒤에 사람의 집부터 털고 다니는,

폭우가 순식간에 폭도로 변한 것이다

뉴스는 또 그 지겨운 환경 이야기를 꺼낸다

환경의 역습이라는 말은 얼마나 우스운가

인간이 먼저 먹어치웠으니 밥값은 치러야지

식당에서 아스팔트 지구로 나선다

내려도 갈 곳 없는 빗줄기들

관상을 보아하니 딱히 할 일도 없어 보인다

땅에 뿌리내려야 할 물의 씨앗들,

생명의 군불이 될 불씨들이

신발에 이마를 문지르다 하수구로

지구의 아득한 지하로 떨어진다

이렇게 도시에 내린 비 대부분은 대가 끊긴다

비바람이 구긴 우산, 망쳐버린 시험지처럼 들고 걷는다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 다시 지구로 돌아온 저녁

나무와 나무 사이가 멀다

 

박지웅,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 문학동네. 2012년. 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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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군 2017-06-25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연관이 있나 읽어봤습니다.
좋은 평 감사합니다 ㅎ

kinye91 2017-06-25 14:06   좋아요 0 | URL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17-06-25 1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6-25 2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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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가정을 꿈꾸는 부부. 때는 1960년대. 이들은 아이를 많이 낳고, 전원주택에서 대가족의 삶을 꿈꾼다. 마치 중세의 귀족 가족들이 자신들만의 성에서 삶을 살아가듯이.

 

남들은 아이를 많이 낳는 것에 대해서 반대를 한다. 지금 시대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하지만 이 부부에게는 많은 아이와 함께 살며 다른 가족들까지 불러 모아 잔치를 하는 것이 행복한 가정생활의 모습이다.

 

그렇게 그들은 경제적으로 준비가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집을 장만하고 아이를 낳는다. 하나, 둘, 셋, 넷. 이때까지만 해도 부인인 해리엇은 지쳐가지만 그래도 행복한 가정은 유지한다. 표면상으로 이들은 아직은 행복한 대가족이다.

 

시대는 이미 1970년대가 되었다. 중세의 삶에서 멀리도 온 때. 이 때 다섯째 아이를 임신한다. 이 아이는 임신 때부터 다르다. 부정적인 감정이 든다. 왜 아니겠는가. 이미 1970년대는 인구 억제정책을 쓰는 때다.

 

많은 아이가 자랑인 시대가 아니라 부끄럼인 시대다. 이런 모습을 해리엇의 동생이 다운증후군 아이를 낳는다는 얘기로 형상화된다. 정상성을 벗어난 가족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운증후군 아이는 보호를 필요로 한다. 명확하게 장애임이 표가 나기 때문이다. 이 부부가 원하는 가족은 이렇게 표가 나는 상태는 아니다. 그냥 이들은 많은 아이들과 행복하게 지내고 싶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 행복은 지속될 수 없다. 다섯째 아이는 지나치게 크고 힘이 센 상태로 태어난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정상적인, 아니 의사가 판단하기엔 정상범주에 드는 아이지만 이 가족의 기준에 다섯째 아이는 정상이 아니다.

 

아이에게 정상의 시선을 주지 않는데 어떻게 아이가 정상적으로 자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아이를 내치지 못하는 모성. 이 아이 하나로 인해 친척들이 멀어져 간다. 나머지 아이들도 하나하나 가정을 떠나간다. 남편 역시 가정에서 멀어진다. 그리고 어머니인 해리엇 역시 가정의 행복에서 멀어진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저 다섯째 아이가 남들과 조금 다르게 태어났을 뿐인데, 가정이 해체되어 버린다. 그 해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만 결국 집을 팔기로 결정하는 것으로 가정 해체는 기정사실이 되어 버린다.

 

다름이 비정상이 되는 사회가 된 것이다. 그 아이를 버리든지, 다른 아이를 포기하든지 선택의 기로에 선다. 어느 선택도 행복한 가정이 될 수는 없다. 어느 하나를 버리는 것은 이미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름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 사회, 이미 정상의 범주를 정해놓고, 그것에서 벗어난 아이를 다르게 바라보는 시선, 그 시선 속에서 아이는 정상의 범주에 들어올 수 없다. 들어오지 않고, 그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는 오히려 정상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자꾸만 어긋나는 관계... 가족은 다름을 포용하고 함께 하는 것인데, 다름을 배제로 바꾸어버리는 순간 이 가족은 깨질 수밖에 없다. 해리엇이 모성으로 아이를 받아들이려 하지만, 그 모성을 다른 가족들은 자신들에 대한 배제로 받아들이지만, 해리엇조차도 다섯째 아이(벤)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므로 다섯째 아이인 벤은 가족을 해체한 아이, 남과 다른 아이가 될 수밖에 없다. 이 아이에게는 자신을 받아들여주는 사람에게서 편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들과 함께 할 수밖에 없다.

 

결론을 내지 않는다. 소설은. 그게 더 소설답다. 결론은 없다. 이 결론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다름을 우리는 배제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지...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다름이 있는지... 그 다름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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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진실에 맞서 길 위에 서다 - 민중의 카타르시스를 붓 끝에 담아내는 화가 홍성담, 그의 영혼이 담긴 미술 작품과 글 모음집
홍성담 지음 / 나비의활주로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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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카타르시스를 붓 끝에 담아내는 화가 홍성담. 그의 영혼이 담긴 미술 작품과 글 모음집'

 

책 표지에 이렇게 적혀 있다.

 

'예술은 논란을 만들어야 한다. 만약 상식적이면 예술이 아니다. 상식이면 왜 그리고 만들겠는가? 예술가는 항상 사회적 금기와 터부를 마음껏 넘나들어야 한다. 국가의 운명이 파시즘으로, 독재로 흐를수록 풍자는 많아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정치인들을 신성시하고 절대화하면 국가주의 파시즘이 번식한다.' (222쪽)

 

화가, 홍성담. 참 험난한 시대를 건너왔다. 그는 늘 길 위에 있었다. 길 위에 있어야 민중과 함께 할 수 있다. 자신의 작업장에만 있는 예술가는 민중과 함께 할 수 없다.

 

길 위에 있는 예술가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는 늘 진실을 마주하고 그 진실을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가는 진실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예술가는 진실을 예술적으로 표현한다. 그것이 풍자든 해학이든 자신의 작품으로 진실을 이야기한다.

 

그 작품을 가지고 이렇다저렇다 말을 하는 사람들은 주로 진실이 불편한 권력자들이거나 권력자를 추종하는 자들 뿐이다.

 

이런 자들에 의해서 블랙리스트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예술을 정치에 종속시키려 한다. 그렇게 엄혹한 시절을 겪기도 했다. 그런 시대에 미술가들은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침묵을 지키고만 있었던가.

 

아니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홍성담과 같은 화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끊임없이 진실의 편에 서서 진실을 표현하려 했다.

 

책은 모두 여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우리나라 민중미술인 걸개 그림에 대해서 보여주고 이야기한다. 시작부터 민중과 함께 한다. 그 다음, 우리가 잊을 수 없는, 잊어서는 안 되는 일들을 작품으로, 글로 보여준다.

 

세월호, 일본제국주의 침탈로 인한 비극들, 우리 현대사들 통해 겪어 왔던 일들, 환경 파괴, 그리고 촛불...

 

이 책에 실린 그림들, 글들은 길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모두 길 위에 있다. 길 위에서 민중과 함께 한다. 마치 예술은 민중과 함께 해야 한다는 듯이.

 

하여 책을 읽으며 보며 우리 현대사를 생각하게 된다.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예술이 어떠해야 하는지, 왜 정치권력을 쥔 자들이 예술에 대해서 그토록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이 책을 보면서 알 수 있게 된다.

 

천박한 정치인들은 예술과 외설을 구분하지 못하고, 예술적 표현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지도 않고 겉모습만 보고 탄압하려 들지만, 오히려 그것이 민중에게 예술의 효과를 보여주는 역할만 하기도 한다.

 

신랄한 풍자를 통해 민중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자신들의 마음 속에 응어리져 있던 것들을 예술을 통해 풀어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해주는 예술가야 말로 민중들에게 사랑받는 예술가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홍성담은 민중들에게 사랑받는 예술가다. 그의 그림을 보며 통쾌함을 느낀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예전에 보았던 그림을 책에서 다시 보는 내내 나 역시 그런 통쾌함을 느꼈다. '불편한 진실에 맞서 길 위에 선' 화가 홍성담, 그의 그림과 글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책, 한 번 보길 권한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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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을 켜다 삶창시선 48
손병걸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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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걸 시인.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선천적인 것이 아니고, 어느 순간 빛을 잃었다고 하는데...

 

하여 시인은 눈으로 보지 않고 통증으로 본다. 시인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는 길, 그것은 바로 '통증을 켜는' 일이다.

 

손가락에 느껴지는 통증, 손가락에 켜는 통증으로 시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

 

이런 통증들이 잘 느껴지는 시집이다. 읽으며 마음이 따스해진다. 그냥 내 처지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를 느끼고, 그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 시집에서 '입동 무렵'이란 시... 이런 삶의 자세를 지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시다.

 

 입동 무렵

 

모두 다 춥다 춥다 껴입을 때

나무는 이파리를 다 벗는다

 

생활의 옳고 그름을

옷매무시 한 가지로 따질 수는 없겠지만

내 삶 오롯이 알몸인 적 없었다

 

삶을 온전히 살아낸다는 말

언 바람을 베어대는

저 나무의 당당한 목소리다

 

깡마른 가지를 휘두르며

때로는 뚝뚝 부러져나가도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듯

나무는 결코 눕지 않는다

 

종내엔 뿌리의 내력을 송두리째 드러내고

딱 한 번 유언을 오롯이 남기겠다는 듯

어둠을 움켜쥔 체 꼿꼿한

전라의 나무 한 그루

 

또 한 겹의 나이테를 여미고 있다

 

손병걸, 통증을 켜다. 삶창. 2017년. 50-51쪽

 

어쩌면 살아가면서 자꾸만 덧씌우기만 한 것이 아닐까. 삶은 이렇게 자꾸 자신을 덧칠하기보다는, 자신을 덮고 있는 것들을 덜어내는 일 아닐까.

 

추울수록 더 입는 것이 아니라, 추울수록 다 떨어내는 나무들처럼 그렇게 우리의 삶도 어려운 때를 만나면 덜어내고 덜어내서 깡마른 알몸으로 버틸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나무에게서 삶의 자세를 보는 시인, 그런 시인의 시를 읽고 삶의 자세를 생각하게 된다.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이다. 너무도 고맙게 잘 읽었다. 마음에 새겨둘 시들이 한두 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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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이! 아, 엉덩이!

-그리스 여인들의 풍성한 엉덩이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상이 이랬지.

풍만한 가슴과

더 풍성한 엉덩이.

인류의 생명이 여기에 달려있는 양

가슴과 엉덩이는 더욱 커지고

자손들이 번창하게 되었지.

너무 많은 자손들,

이제는 넘쳐나

그만, 그만 하게 되는데,

다산과 풍요의 상징인

가슴과 엉덩이는 이제,

비만과 혐오의 상징이 되었지.

하지만 아직도

그 풍만한 엉덩이를

지니고 있는 여자들,

거리에 즐비한

바오밥나무들,

제 발로 걷지 않는

그리스 여자들,

그 풍성한 엉덩이,

아, 엉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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