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아리랑


산 좋고 물 좋은 동네

숲이 우거지고 나무들은 뗏목이 되어

한양으로 한양으로

사람 살게 하는 재목이, 땔감이 되고

그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강을 가던

정선은 뗏목꾼들의 목숨값을 노래로 달랬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이 산 좋고 물 좋던 고장은

나무 대신 땅 속에서 석탄을 내어

탄광으로 막장으로

다른 이들의 생명을 잇기 위해

다른 이들의 겨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정선은 광부들의 목숨값을 노래로 달랬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폐광이 늘고 인부들이 떠나 폐가만 늘어

정선은 버려진 곳

레일바이크로 다시 사람을 불러 모았으나

어찌어찌 산 좋고 물 좋은 이 곳에

강원랜드, 카지노를 만들어

정선은 사람들의 도박값을 노래로 달래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정선은 여전히 산 좋고 물 좋은데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고(길재의 시조)

뗏목도 석탄도 아닌 도박으로

도박값이 목숨값을 대신하는

그런 곳이 되었지

목숨값이 넘치던 내 기억 속 정선은

이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정선아리랑으로만 남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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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2 10: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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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2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 현대예술에 대한 거침없는 풍자
에프라임 키숀 지음, 반성완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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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글쓴이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힘들지만, 많은 부분에서는 공감한다. 사실 현대미술은 너무도 어렵다.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미술이 아니라 눈으로 보되 머리 속으로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는, 정서에 호소하기보다는 이성에 호소하는, 그것도 고도의 지능을 요구하는 그런 미술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미술관에 자주 가보는 편이 아니지만 마음 먹고 가본 미술관에서 현대미술을 보고는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적이 있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해가 되지 않으니 마음 속에 다가오지 않고, 미술에 대한 흥미도 생기지 않는다. 이런 것을 현대인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그래도 나같은 보통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미술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현대미술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었다. 도무지 현대미술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에서 가장 유명한 앤디 워홀이라든지, 릭텐슈타인의 그림을 누가 아름답다고 느끼겠는가. 그냥 상품을 나란히 배치했다든지, 만화를 조금 더 크게 그렸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잭슨 플록의 그림을 보면서 감흥을 느끼는 사람,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그냥 물감을 흩뿌린 그의 작품들을 보면서 어떻게 감흥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인지...

 

마찬가지다. 청계천 앞에 서 있는 커다란 스프링, 우리 눈에는 기껏해야 대형 고동이나 다슬기 정도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그것을 수많은 돈을 주고 세웠다니.

 

이 책의 저자가 비판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현대미술을 하는 작가들이 자신들이 좋아서 하는 것은 뭐라 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엄청나게 많은 돈을 들여 사들이는 지역자치체들이 문제다. 이에 영합하는 비평가들까지.

 

이들에게는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작품은 자신들의 지식을 드러낼 가장 좋은 기회다. 돈을 더 올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 이렇게 현대미술은 돈이라는 것에 의해 오염되었다고 보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꼭 돈에 오염된 것이 현대미술만은 아니겠지만, 사람들에게 감흥을 주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것만은 사실이지 않을까 싶다.

 

현대미술의 추상성에 대해서 풍자하고 있는 이 책은, 현대미술 앞에서 주눅이 들었던 나같은 사람에게 위안을 준다. 나만이 현대미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 그리고 미술이 어떠해야 할지 더 생각해 보는 계기도 마련해 주는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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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1 08: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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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1 09: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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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7-11 0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책이네요. 키숀 작가의 책을 좋아해서 부러 찾아서 봤던 기억입니다. 미술이 자본과 결탁하면서 더 이상, 예술의 가치를 구현하지 못하고 있는 게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피카소는 자본에 영혼을 판 대표적인 선수가 아닐까 싶네요.

kinye91 2017-07-11 09:45   좋아요 0 | URL
예술이 삶과 동떨어져 자본으로 전환되는 시대가 현대인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럼에도 예술을 자본과 독립된 자신의 삶에 직결시키는 현대예술가들도 상당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그 점을 구분하게 해주는 것이 비평가의 몫이지 않을까 싶고요.

하나 2017-07-11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정 수준 공감이 가는 이야기가 많네요.

2017-07-11 1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kinye91 2017-07-11 10:2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야기로만 듣던 영화, '옥자'를 봤다. 참 보기 힘든 영화인데... 운 좋게도 봉준호 감독의 무대인사도 보고... 참...

 

  세상이 변해가면서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보다는 이제는 집에서 보는 영화가 대세로 자리를 잡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영화는 극장에서 보아야 한다. 집에서 혼자 또는 몇몇이 볼 때와 여러 사람이 한 공간에서 볼 때는 차이가 있다.

 

  상영관에 가서 본 '옥자'는 볼 만했다. 동물과 사람이 별개의 존재로 되어가는 세상에서 '옥자'는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피터 싱어였던가, 동물해방을 주장한 학자가. 이런 학자들 이외에도 영화에 등장한 것처럼 동물해방을 위해 노력하는 단체들도 있다는 것.

 

  인간이 인간만으로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영화를 보면서 영화 '매트릭스'를 패러디한 '미트릭스'가 생각이 났고, '미트릭스'가 짧은 단편들 시리즈로 구성되어 있다면, '옥자'는 동물과 인간이 교감하는 모습을 우리나라 정서에 맞게 잘 펼쳐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유전자조작된 돼지 '옥자'. 그러나 유전자조작이 되든, 되지 않았든 '옥자'가 어엿한 생명을 지닌 생명체임에는 틀림없다. 생명체의 생명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영화의 후반부에 가면 이런 돼지들이 어떻게 도살되는지 잘 나온다. 도대체 생명에 대한 경외심은 쥐꼬리만큼도 없는, 그런 도살 장면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생명체들에게 못된 짓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영화에서 '옥자'는 살아남는다. '옥자'는 이미 주인공인 미자에게 가족인 셈이다. 그 가족은 독립영화 '워낭소리'에서처럼 죽을 때까지 함께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니 '옥자'가 살아남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렇게 '옥자'가 살아남았다고 다른 동물들 역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영화에서 다른 유전자조작된 슈퍼돼지들은 모두 죽음의 길로 들어선다. 자신들의 죽음이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새끼 돼지를 울타리 밖으로 내보내 살게 하지만, 그것은 예외일 뿐이다.

 

이런 대량 살육이 벌어지는 공간이 바로 공장식 축산이다. 공장식 축산, 이것을 없애는 방법은 미자가 한 것처럼 '옥자'를 구해내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비록 옥자는 살았지만 다른 돼지들은 죽음에 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우리의 식생활 습관이다. 우리가 식생활 습관을 고치지 않으면 옥자에서 나타난 그런 살육은 언제든 일어날 수밖에 없다. 우리 개인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꾸어야 한다. 그렇다고 극중 등장인물처럼 방울토마토 하나 먹는데도 망설이자는 것은 아니다.

 

생명은 다른 생명을 바탕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른 생명을 빼앗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음밖에 없다.

 

살기 위해서 생명을 해쳐야 하는 현실, 그렇다면 내가 죽인 생명들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살아있음은 다른 생명들의 목숨으로 뒷받침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먹는 것 하나, 행동하는 것 하나도 이렇게 다른 목숨들의 목숨값임을 명심해야 한다. 영화 '옥자'를 보면서 우리가 수많은 목숨들로 목숨을 이어가고 있음을 생각했다. 내 목숨은 이렇게 다른 생명들에게 빚지고 있음을.

 

그래서 말 그대로 정말 잘 먹어야 함을, 잘 살아야 함을 생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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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7-10 16: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장식으로 생산되는 육식도 끊어야겠고,,, 영화도 이젠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완전히 탈피하려는가 봅니다.

kinye91 2017-07-10 16:26   좋아요 0 | URL
공장식으로 생산되는 육식은 끊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적어도 제 몸에 들어오는 목숨들인데, 그 목숨값을 제대로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거든요.
 
파도 - 너무 멀리 나간 교실 실험
토드 스트라써 지음, 김재희 옮김 / 서연비람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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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시간에 나치의 만행에 대한 영상을 보여준다. 학생들이 질문한다. 왜? 도대체 왜? 그런데 역사 선생은 대답할 수 없다. 대다수의 독일 사람들이 어째서 나치에 동조했는지, 그 이유를 본인도 모르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역사 선생은 실험을 하기로 한다. 일사분란. 나치의 모습을 수업에 재현하는 것이다. 처음에 아이들은 장난으로 참여한다. 그러나 그것이 점점 더 확산이 되어 이제는 "파도"라는 조직이 된다.

 

"파도"에 가입한 아이와 가입하지 않은 아이가 극명하게 갈린다. "파도"는 조직의 이름으로 개인들을 통제한다. 개인의 자유는 없다. 오로지 공동체란 이름으로 활동할 뿐이다.

 

이쯤에서 문제제기를 하는 학생이 나온다. 당연한 일이다. 인간이란 100%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의문을 제기하는 인간, 그런 성찰하는 인간이 꼭 있다. 아니, 꼭 있어야 한다.

 

그런데 성찰하는 인간, 의문을 제기하는 인간은 공동체에서 배척당한다. 그는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다. 왜냐, 공동체의 결속을 깨뜨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파도"에 대해 비판적인 학생들에게 위협을 하기 시작한다. "파도"에 가입하지 않은 학생들은 두려움을 느낀다. 위화감과 두려움. 공동체에서 밀려날 것 같은 두려움.

 

자연스레 "파도"는 학교에서 가장 강력한 집단이 된다. 집단 최면에 빠진다. 이때 수업을 시작한 교사는 끝을 내려 한다. "파도"의 지도자가 나타난다고 한다. 학생들이 기대하고 있는 그 순간. 그 지도자는 바로 '아돌프 히틀러'

 

세상에! 자신들이 수업시간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지 과거에 일어난 일일 뿐이라고, 현대에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자신들에게 일어났던 것.

 

자신들 역시 그런 광기 속에서 생각없음으로 살아왔다는 것. 성찰하지 못하고 조직의 흐름에 그냥 휩쓸려 가고 말았다는 것, 깨달음은 한 순간에 왔다. 하지만 과연 그 깨달음이 성찰의 결과였떤가?

 

아니다. 성찰의 결과가 아니라 교사에게서 주어진 또다른 해답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한 결과 학생들에게 성찰의 힘을 보여주었지만, 성찰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준 사람은 역시 교사다.

 

소설의 한 부분을 인용한다.

 

  애초에 벤 로스가 시작한 건 역사 수업을 듣는 하나의 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사소한 실험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실험을 통해 벤은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믿음을 남의 손에 내맡기는지를 확인했다. 그것은 분명 몹시 시리고 아픈 경험이었지만, 그러하기에 벤 로스는 교사로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인간의 본성에 그처럼 허약한 면이 있다면, 이른바 자기 성찰의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자 임무라고 확신하게 된 것이다. 만약 교사들이 그 일을 방기하면 언제라도 같은 비극이 반복될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249-250쪽)

 

벤 로스 선생은 실험을 끝냈다. 그것은 실험을 끝냈을 뿐이다. 교육은 그리고 배움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학생들은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면서 토론을 해야 한다. 토론을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허약한 존재인지,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쉽게 속에서 개인을 말살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 깨달음은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지혜의 차원이다. 온몸으로 배우고 익힌 것이다. 이런 학생들은 이제 집단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개인에 대한 침해에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지니게 된다. 적어도 한 번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성찰하는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이것이 벤 로스 선생이 목적한 바일 것이다. 이게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성찰하는 힘, 이것이 결국 교육의 목표 아니던가. 지식은 이런 성찰을 하게 하기 위한 기반에 불과하지 않나. 따라서 학교는 지식을 주입하는 곳이 아니라 지식을 기반으로 생각을 하게 하기 위한 곳이다.

 

인용한 말에 교육의 본질, 교사의 자세가 담겨 있다. 이를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 아무리 교육적 의도가 좋아도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실험은 고려해 보아야 한다.

 

벤 로스 선생은 말한다.

 

"전적으로 제 실수였습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역사 수업은 과학 실험과는 다르다는 걸 깊이 깨달았습니다.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특히 실험의 일부가 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시작한 건 더 큰 잘못입니다." (227쪽)

 

그렇다. 소설 속에서 벤 로스 선생은 이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아마도 학생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투여해서 그들의 마음을 치유해야 했을 것이다.

 

"푸른 눈, 갈색 눈"이라는 차별에 대한 수업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에게 차별이 얼마나 쉽고 간단하게 일어날 수 있는지 인지시켜주기는 했지만, 이들이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벤 로스 선생의 실험은 실제 미국에서 일어난 일을 기반으로 한 소설이라고 하지만,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학생들에게 경험을 통해 깨우치게 한다고 하지만 경험을 할 것이 있고, 해서는 안 될 것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찰의 중요성을 알까? 바로 이런 소설을 통해서다. 소설을 읽고 생각하게 해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쉽게 집단이라는 이름에 넘어가는지, 집단 속에 숨어서 다른 개인을 공격할 수 있는지,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유명해진 말, '악의 평범성'을 이런 소설을 통해서 인식하고, '성찰의 힘'을 생각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이 왜 올해에야 번역되었는지... 독일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소설이 학교에서 수업 교재로 쓰이고 있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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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0 13: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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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0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별족 2017-07-10 0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66872, 저 비댓이 이걸지도 모르겠네요-_-;;;
2006년 번역되어 나온 책을 제가 읽었거든요^^

Runa 2020-03-22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2006년에 번역된 책입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이 있다. 아무리 붉은 꽃이라도 십일 이상 붉을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을 거꾸로 해석을 해 보면 아름다움이란 이렇게 순간일 때 쓸 수 있는 말이라고 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영원히 붉은 꽃이 있다면 그 꽃을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아름다움은 그 순간에 발산되는 것이다. 그것이 계속 지속된다면 아름답다는 마음이 들지 않고 그냥 하나의 풍경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이런 아름다움은 곧 위태로움에서 온다. 금방 사라질지 모를 위태로움.

 

어쩌면 꽃은 십일 이상 붉지 않아서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네 인생은 어떤가. 무언가를 자신이 잘한다고 계속 그 자리를 지키면 아름다울까.

 

한 사람이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 그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추함이다. 공포다. 결코 자신의 위태로움을 인정하지 않는 것. 위태로움을 인정하고, 자신의 자리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순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 이형기 시인의 '낙화'에 나오는 구절처럼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아름다운 사람이다.

 

또한 편한 길만 가는 사람, 역시 아름다울 수 없다. 아름다움은 위태로움 속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냥 편한 길에 있으면 그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일상에 지나지 않는다.

 

아름다움 그것은 아찔한 현기증이다. 위태롭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 자리를 지키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서 아름다움을 본다.

 

가야 할 때인데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 그에게서는 추함만을 본다. 그에게서는 어떤짜릿한 현기증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천수호의 시집을 읽다가 제목이 된 구절이 들어 있는 이 시, '빨간 잠'을 보며 사람의 아름다움도 어쩌면 이렇지 않을까. 우리는 위태로움 속에서 그것을 꿋꿋하게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느끼지 않을까.

 

그들의 삶에서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지만, 그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생각을 했다. 반면에 제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는 사람, 편한 길만 가려고 하는 사람, 그들에게서는 추함을 느낄 뿐이라는 생각.

 

고추잠자리를 보고 쓴 시, 이것은 고추잠자리에 빗댄 사람 이야기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빨간 잠

 

그녀의 아름다움은 졸음에 있다

 

빳빳 헛헛한 날개로 허공을 가린 저 졸음은

겹눈으로 보는 시각의 오랜 습관이다

 

'아름답다'라는 말의 벼랑 위

붉은 가시 끝이 제 핏줄과 닮아서

잠자리는 잠자코 수혈받고 있다

 

링거 바늘에 고정된

저 고요한 날개

잠자리의 불편한 잠은

하마, 꺾이기 쉬운 목을 가졌다

 

아름다움은 저렇게

알면서도 위태롭게 졸고 싶은 것

등이 붉은, 아주 붉은 현기증이다

 

오래 흔들린 가지 끝

저기 저 꿈속인 양 졸고 있는

등이 붉은 그녀

 

그녀의 아름다움은 위태로움에 있다

 

천수호, 아주 붉은 현기증, 민음사. 2009년 초판 2쇄. 18-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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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8 07: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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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8 09: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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