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니발은 예외다. 일상에서의 일탈이다. 그것도 허용된 일탈.

 

무엇이든 통용되는 이런 일탈을 경험하지 않는다면 아마 숨막혀 죽었을지도 모를 고대, 중세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 이루어낸 축제가 바로 카니발이다.

 

그러나 이런 카니발은 일시적이어야 한다. 영속적이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축제가 아니라 혼돈만이 남게 된다.

 

조동범 시인은 자신의 시집 제목을 '카니발'이라고 했다. 카니발이라고 하면 흥분과 즐거움, 일탈 등이 시집 전면에 나타나야 할 것 같은데...

 

시집에 흐르고 있는 정조는 죽음이다. 죽음, 세계 곳곳에 넘쳐나는 죽음, 그것도 자연사라고 하기보다는 살육, 또는 사고사가 이 시집에 넘쳐난다.

 

어느 편을 보아도 죽음이다. 이렇게 죽음이 넘쳐나는 세상, 이것이 지금 우리의 세상이라고 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런 죽음이 넘쳐나는 세상은 '카니발'처럼 일시적인 일탈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인류가 생존할 수 있다. 죽음이 넘쳐나는 세상이 일상이 되는 순간, 인류는 멸종의 위험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카니발'이라는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은 축제의 밤이야 / 검은 피와 불꽃이 빛나는 / 불행한 장미의 밤이지' - 카니발의 첫 3행. (108쪽)

 

축제와 검은 피, 어울리지 않는 말들이 함께 들어 있다. 그리고 피는 붉은 피라는 표현이 더 어울려야 하는데, 검은 피라고 한 것은 이미 흘러 굳어진 피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피들이 흘러 넘쳤는지, 우리는 이런 카니발을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질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이 이렇게 세상의 어둠을, 죽음을 시로 썼다는 것은 세상에 절망하고 있다는 말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세상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그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알아야 하기 때문에, 애써 눈 감아 보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시인은 이렇게 '카니발'이라는 말을 통해 우리에게 현세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살육, 죽음의 세상이 '카니발'처럼 일시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다. 카니발이 영속된다면 무질서만 난무하는 세상이 되고, 오히려 즐거움이 아니라 두려움과 고통이 판치는 세상이 되듯이, 지금 죽음이 난무하는 이 세상은 곧 끝나야 한다.

 

우리 인류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도. 세계 각지에서 자행되고 있는 죽음의 행진들, 이제는 멈추어야 한다.

 

시인은 '카니발 너머에는 / 동굴처럼 길고 막막한 / 어둠이 기다리고 있지 / 어둠을 향하면서도 / 끊임없이 즐겁고 유쾌한 / 카니발의 행렬' (카니발 부분. 109쪽)라고 하고 있지만, 카니발 너머에 있는 것은 단지 어둠만은 아닐 것이다.

 

예전에 카니발은 그런 어둠을 잊기 위한 축제였다면, 지금 세상의 카니발은 어둠 속에서 벌어지는 카니발이다. 빛을 향해 우리가 나아가야만 하는, 끝내야만 하는 그런 카니발이다.

 

어둠을 잊기 위한 카니발도 순간이었듯이, 죽음이 판치는 카니발 역시 순간이어야 한다.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시집에 나타나 있는 수많은 죽음들이, 이 시 '카니발'을 민중들이 고통을 잊기 위해 즐기는 축제로 읽게 하는 대신,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혼란을 카니발 식의 혼돈으로 읽게 하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카니발은 끝나야 함을... 우리는 밝음을 향해, 이 카니발을 끝내야 함을, 그렇게 시집의 다른 시들과 연관지어 받아들이게 하고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덧글

 

특별판을 중고서점을 통해 구입했는데... 책이 너무 크다. 시집은 한 손에 들 수 있고, 작은 가방에도 넣을 수 있어서 언제 어디서든 꺼내 읽어볼 수 있어야 하는데, 특별판은 너무도 커서 한 손으로 들고 읽을 수도 없고, 작은 가방에는 들어가지도 않는다. 시집의 크기는 조금 작아지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한다. 시집 크기는 작아도 그 시집 속 내용은 너무도 클텐데... 왜 책크기까지 이토록 커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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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 (반양장) 주니어 클래식 3
사계절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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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도 잘 읽지 않는 책'(4쪽)이라는 비아냥을 받는 것이 고전의 한 측면일지도 모른다. 너무도 유명해서 그 이름은 알고 있지만, 그래서 내용도 다 아는 것 같지만, 사실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책. 그것이 바로 고전이라는 말이리라.

 

논어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나라가 조선을 통해서 성리학 중심의 나라였고, 유교는 우리나라 핵심 사상을 이루고 있어서, 조선시대 사대부들에게 논어는 필독서였겠지만, 지금의 우리에게는 과거의 유물일 뿐이다.

 

지금 논어를 읽는다고 하면 왜? 그런 이미 지나간 시대의 사상을 읽는다는 거지 하는 의아한 눈길을 받을 수가 있다. 또한 유교는 우리나라를 문약에 빠뜨린 사상이라고도 생각하고 있으니...

 

내게도 마찬가지다. 논어를 읽어본 적은 있다. 분명 처음부터 끝까지 한글 번역본으로도 읽었고, 한문으로도 잘 이해를 하지 못하고, 해석도 하지 못했지만 읽으려 노력한 적이 있었다. 몇몇 구절은 머리 속에 박혀 나가지도 않고.

 

그 유명한 논어의 첫구절은 학창시절에 한문 시간에 배우고 외웠으니...더 말할 나위도 없고. 하지만 논어의 사상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내게 논어는 조선시대 당파싸움이라는 색안경을 낀 눈으로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루한, 자기 사상에 갇혀 다른 사상을 전혀 용납하지 못한, 사상이 다르다고 사람까지 죽이는 그런 사상. 그렇게 유교는 편협한 사상으로 각인되어 있었고, 그런 사상의 출발점이 논어라고 생각했기에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녹색평론에 연재된 배병삼의 글을 읽으며 유교에 대해, 아니 공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글을 읽으며 조선시대 실학이 주자의 눈으로 본 공자가 아니라 공자의 저술을 통해 본 공자를 주장하기도 했다는 것을 어디선가 들었다는 것을 떠올리기도 했다.

 

배병삼은 공자의 말로 공자의 사상을 이해하려고 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가 논어를 정리해 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논어가 총 20편인데, 그 20편을 한 편 한 편 분석해서 설명해 주고 있다. 그렇다고 공자시대의 논리만 따라간다는 것은 아니다. 이 책 역시 배병삼의 눈으로 본 공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책을 읽으면서 주의할 점은 배병삼의 논리를 무조건적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무슨 주장을 하는지 이해하고, 그 다음에 우리의 눈으로 논어를 읽는 것이다.

 

남의 말만을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읽고 이해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논어의 첫번째 구절과 상통하는지도 모른다.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이와 더불어 논어를 함께 토론할 사람이 있으면 더욱 좋다. 역시 논어의 첫번째 장 두번째 구절이다. '멀리서 벗이 찾아오면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그렇다. 고전을 읽는 이유는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고전을 통해서 현재를 잘 살아가기 위해서다. 고전에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과 답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 제목도 "논어, 사람의 길을 열다"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책을 통해 한 가지는 깨달았다.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것. 공자는 먼저 설명하지 않았다. 제자가 물어보았을 때 그 제자의 수준에 맞는 대답을 해주었을 뿐이다. 질문이 없는 학교... 지금의 학교를 생각해 보면 우리의 교육이 얼마나 그릇된 길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지식 전수만이 학교의 목표가 아니다. 학교는 사람의 길을 열어주는 곳이다. 그렇다면 학생들로 하여금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길인지를 질문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교육이 살 수 있다.

 

질문이 없는 학교에서는 결국, 공자의 제자 중에 공자의 길을 배반한 염유와 같은 기술자들만 양산할 수밖에 없다. 공자는 자신의 제자들이 이런 전문기술자로만 머무는 것을 반대했다. 전문가가 아니라 군자가 되기를, 자신을 바로 세워서 남도 바로 세우는, 나와 남이 다른 존재가 아니라 남을 통해서 내가 존재함을 깨닫게 되기를 바랐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관계가 중시되는 이 사회에서 공자의 이 논어는 마냥 무시할 수 없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관계맺어야 하는지 이야기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디딤돌로 해서 논어를 다시 읽는 그런 기쁨을 누리도록 해야겠다. 다시 읽는 논어는 예전의 논어가 아니라 새로운 현대에 맞는 고전이 논어가 될 거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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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155호다. 여전히 녹색평론에서 할 말이 많은 것을 보니, 우리나라 상황이 여전하다고 할 수 있다.

 

시민들은 깨어있는데, 정치인들이 시민들의 의식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 그래서 시민들은 한 발 앞서갈 준비가 되어 있는데, 정치인들은 앞서가려는 시민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상황이 현재의 상황 아닌가 한다.

 

일자리 창출부터 친환경 산업, 핵발전 포기, 남북관계 개선, 교육의 난맥상 타개 등등 정말로 촛불을 통해 탄생한 정부가 할 일이 많은데, 그 전에 선출직이라고 뽑힌 정치인들이 과거의 생각으로 과거의 행동만을 거듭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국회의원 소환제 같은 시민들의 참여정치제도가 없는 상황에서 다음 선거까지 기다려야 하는 이런 일이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시민들의 의식과 행동을 따라가지 않아도 되게 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녹색평론은 시민들이 계속 깨어 있게 한다. 시민들이 깨어 있어야 다음 선거에서 제대로 된 정치인을 선출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선출직을 언제든지 잘못하면 소환할 수 있는 그런 제도를 마련하려고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속적으로 녹색평론에서 제기한 승자독식의 선출직이 아니라 비례대표로 소수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들도 정치권에 들어갈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지 못한다고, 국회의원들에게 국회의원 선출방식, 즉 선거제도의 개선을 맡길 수는 없다. 그것은 국회의원이 아닌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권력을 위임하고는 더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금의 제도가 아니라.

 

이번 호에서는 '되돌아보는 러시아혁명'을 기획으로 삼았다. 러시아혁명 100주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러시아혁명이 근현대 역사에 끼친 영향이 프랑스혁명만큼이나 크기 때문이다.

 

지금 다시 러시아혁명을 이야기하면 무슨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냐고, 이미 망한 나라, 망한 제도를 언급하는 것은 돈키호테가 풍차를 보고 돌진하는 모습과 같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혁명은 사회주의혁명으로 한 시대를 바꾸어놓은 혁명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러시아혁명 100주년에 대한 총론격인 박노자의 '100년 후에 되돌아보는 러시아혁명'이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 혁명에 대해서 공과를 명확히 구분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러시아혁명으로 인해 자본주의가 복지국가의 모습을 지니게 되지 않았던가.

 

노동자와 농민, 여성 등의 권리에 대한 자각이 생기지 않았던가. 많은 나라들이 식민지에서 벗어나지 않았던가. 이런 긍정적인 면이 있었지만 제도의 경직화, 관료들의 권력독점, 부패 등의 부정적인 면도 있었음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러시아혁명으로 인해 초반에 러시아에서는 급속한 경제성장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는 사회주의의 성공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자본주의 관점에서 러시아혁명을 판단해도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50년이라는 기간 동안, 소련은 국내총생산(GDP)을 9배나 증가시켰다. (앨런 우즈, 러시아혁명, 무엇을 성취했고 왜 좌절했나.133쪽.)

 

이런 자본주의 성장지표 가지고 사회주의를 평가하다보면 자연스레 사회주의 권도 성장 프레임에 갇히게 된다. 문제는 성장이 아니다. 더글러스 러미스의 책도 있지 않은가.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녹색평론사)라는.

 

그래서 러시아혁명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최근 최저임금 시급 1만원 주장 구호를 생각해 봤다. 1만원 인상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최저임금이란 최소한의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임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도입된 것 역시 러시아혁명의 공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 구호에 한 가지 더 첨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고 또는 구조 조정 없는 최저임금 인상.

 

아파트 경비직들이 최저임금 인상으로 해고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임금은 올랐는데, 지출총액은 같기 때문에 경비원들의 숫자를 줄이는 것이다. 그러면 임금은 올랐지만 누군가는 해고가 되고, 남은 사람들은 해고된 사람들의 몫까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노동강도는 더 강해지는 현실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다. 근무조건 변형없는 최저임금 인상이 구호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노동시간이 더 줄어야 한다. 러시아혁명이 목표로 했던 것이 바로 노동시간의 감축 아니었던가.

 

보통 4시간 일하고 4시간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그런 사회를 꿈꾸었지 않은가. 그런데도 세계 최장시간의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우리나라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노동자들이 살 만하게 노동시간 감축, 구조조정없는 임금인상이 더불어 이루어져야 한다. 그 점이 바로 지금 우리가 주장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한다.

 

녹색평론에서 다룬 러시아혁명 100주년에 대한 글을 통해 이런 점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러시아혁명은 이제 끝났다고 하지만 이번 호에 있는 박노자의 말처럼 '혁명의 종착지는 또하나의 혁명의 출발지'일 것이다. 그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이것과 더불어 이번 호에서 다룬 글 중에서 한윤정의 '중국의 생태문명 실험'이란 글의 내용 중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 구절이 있었다.

 

'원자력, 태양열, 풍력, 조력, 지열 등 비화석연료 비중 역시 2014년 11.2%에서 2030년 20%까지 늘인다는 계획이다.' (46쪽)

 

그런데 원자력이 이러한 생태문명에 함께 포함되어야 하는지... 최근 중국은 원자력 발전이 청정하고 안전한 발전이라면서 더욱 확대하겠다고 했다던데... 이것은 반생태정책이 아닌지...

 

생태문명과 원자력이 함께 한다는 생각은 해본적이 없는데, 이 글을 쓴 사람은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오히려 중국의 생태문명 실험이라는 것이 또 하나의 생태 파괴 운동은 아닐지 고민해야 하는 것 아닌가.

 

좀더 심도 깊은 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녹색평론의 관점에서 보면 원자력은 반생태적인 발전일텐데. 그 점이 좀 아쉽다.

 

우리나라는 이번 정권에서 핵발전 폐기 쪽으로 가고 있는데, 중국은 반대로 핵발전 유지 및 확대로 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해야 하는 것이 녹색평론 아닐까 하는 생각. 좀 녹색평론의 방향과 맞지 않는 글이 '중국의 생태문명 실험'이란 글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물론 내가 잘 몰라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이 밖에 4대강 사업에 대한 통렬한 비판... 그래, 이것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 책임질 사람들은 반드시 책임져야 한다. 그 점에 대해서는 김정욱의 '4대강 사업 '그 총체적 사기극을 돌아보며'가 좋다.

 

한 꼭지 한 꼭지 음미하면서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내 생각이 굳지 않게, 적어도 시민의식을 지니고 있게 해주는 책이니, 참 귀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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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7-07-14 14: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구독할 때는 꼬박꼬박 챙겨 읽었는데, 배송 사고가 워낙 잦아서 구독 끊고 나니, 자꾸 잊어버리게 되네요. 끊을 때는 그래도 챙겨 보겠지 싶었는데 말이죠.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kinye91 2017-07-14 15:31   좋아요 0 | URL
정기 구독을 하지 않으면 챙겨 보기가 만만치 않더라고요... 두 달에 한 번 그래도 녹색평론을 읽으면서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아요...

무해한모리군 2017-07-14 17: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번호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부동산문제나 복지 문제같은 분명해 보이는것도 사회적 합의가 쉽지 않은 것을 보면 나같은 소시민은 무엇부터 하면 좋을까 같은 생각이 들곤합니다.

kinye91 2017-07-15 11:45   좋아요 0 | URL
사회적 합의는 쉬울 수가 없다고 봐요. 원전 문제만 해도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켜 쉽지 않으니까요. 이럴 때일수록 개인들인 우리 소시민들이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사후생 - 죽음 이후의 삶의 이야기, 개정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지음, 최준식 옮김 / 대화문화아카데미 / 200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잎이 필 때는 꽃이 없고, 꽃이 필 때는 잎이 없어서 서로를 볼 수 없는 '상사화'

 

어쩌면 죽음과 삶 역시 이러한 상사화 같을지도 모른다. 서로를 볼 수가 없으니 말이다. 어느 한쪽만 존재하게 된다. 한쪽이 오면 한쪽은 물러나야 한다. 그럼에도 삶은 자신이 살아 있음으로 볼 수 있지만, 죽음은 자신이 볼 수 없다.

 

죽음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죽음 이후의 삶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도대체 죽음 뒤에 어떤 삶이 있을까?

 

그냥 없어진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고, 무언가가 있다는 사람도 있고, 분명 새로운 삶이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누구의 말이 옳은지는 죽어보아야만 알 수 있으니 여전히 죽음은 사람에게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이다. 미지의 세계, 그래서 우리에게 두려움을 준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는 수많은 죽어가는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죽음에 대해서 연구를 했다. 어쩌면 그는 근사체험(近死體驗)을 한 사람들을 통해, 또 자신의 근사체험을 통해 죽음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죽음은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니라고. 또 다른 사랑의 이름이라고. 온전하게 사랑하지 못한 사람은 죽음에 이르기도 쉽지 않다고.

 

그래서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는 온전한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우리나라에서 쓰는 말들 역시 이와 비슷하지 않나.

 

악하게 행동하던 사람이 갑자기 착하게 행동하면, ' 저 사람 죽을 때가 되었나, 왜 저렇게 행동하지'라는 말을 하지 않던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존재와 함께 하면서 죽음의 길로 가게 된다고 하는 로스 박사의 말은, 많은 과학자들은 찬성하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그것을 죽어가는 사람의 소망이 담겨서 환각으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로스 박사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러가지 사례를 들어 그것은 상상이나 환각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죽음은 실제라고 말을 한다.

 

영적 존재는 분명 존재한다고, 우리에게는 누구나 다 가장 사랑하는 영적 존재가 있고, 그 존재와 죽음의 순간에 함께 하게 된다고, 그 때는 사랑으로 충만해진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런 로스 박사의 말을 믿으면 죽음은 두려운 일이 아니다. 다른 세계로, 이 책에 나오는 용어로 하면 우선 육체라는 고치를 벗고 영혼이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다른 세계에서 온전한 존재로 살아가게 되는 일, 그것이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질적인 변환을 하는 시작이라는 것이다.

 

이런 죽음, 그렇다면 사람들이 굳이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우리나라처럼 묘지나 화장터가 혐오시설이 되는 나라에서는 로스 박사의 이런 책이 반드시 읽혀야 한다.

 

어차피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온다. 세상에서 가장 평등한 것이 죽음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서 늘 생각하는 문화를 지니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죽음을 그냥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 그래서 어려서 부모를 잃은 아이들 이야기가 이 책에 나오는데, 이럴 땐 부모의 죽음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함께 죽음을 애도하고,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에 대한 바른 태도라고 한다. 그래야만 아이도 바르게 성장할 수 있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한 번은 꼭 찾아오는 죽음, 그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우리는 여전히 모른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다. 마냥 행복한 것으로 그려져 있지만,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로스 박사의 말을 들으면 그렇다. 우리는 잘 살 수밖에 없다. 죽음에 이르러서 나를 심판하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삶이라고 하니 말이다.

 

결국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삶을 잘 살기 위한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누구나 가야 할 길이지만, 갔다가 돌아와 이야기해주지 못한 그 삶에 대해 이렇게라도 근사체험을 통해 들려주는 이유는 바로 지금 잘 살기 위해서라는 생각을 한다.

 

읽어볼 만하다. 읽어봐야 한다. 잘 살기 위해서라도. 잘 죽는다는 것, 그것은 잘 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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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3 08: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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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3 09: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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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선 아리랑


산 좋고 물 좋은 동네

숲이 우거지고 나무들은 뗏목이 되어

한양으로 한양으로

사람 살게 하는 재목이, 땔감이 되고

그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강을 가던

정선은 뗏목꾼들의 목숨값을 노래로 달랬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이 산 좋고 물 좋던 고장은

나무 대신 땅 속에서 석탄을 내어

탄광으로 막장으로

다른 이들의 생명을 잇기 위해

다른 이들의 겨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정선은 광부들의 목숨값을 노래로 달랬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폐광이 늘고 인부들이 떠나 폐가만 늘어

정선은 버려진 곳

레일바이크로 다시 사람을 불러 모았으나

어찌어찌 산 좋고 물 좋은 이 곳에

강원랜드, 카지노를 만들어

정선은 사람들의 도박값을 노래로 달래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정선은 여전히 산 좋고 물 좋은데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고(길재의 시조)

뗏목도 석탄도 아닌 도박으로

도박값이 목숨값을 대신하는

그런 곳이 되었지

목숨값이 넘치던 내 기억 속 정선은

이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정선아리랑으로만 남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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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2 10: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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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2 11: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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