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품격 - 말과 사람과 품격에 대한 생각들
이기주 지음 / 황소북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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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격 떨어지는 사람과 대화를 하다보면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그만큼 나 자신도 격이 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대화란 보통 일반적으로 한 사람이 할 수 없고(자신이 속으로 자신과 주고받는 말도 대화로 볼 수 있다고 바흐친은 주장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일반적으로), 둘이 주고받는 말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오고가는 말 속에서 어떤 품격을 느낄 수가 있기 때문이다.

 

품격이 낮은 말로 대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자신이 쓰는 말 역시 품격이 떨어진다는 것이니, 자신을 비추어보고 싶으면 물이 아니라 사람에 비추어보라고 한 말이 있듯이, 주고받는 말에는 일방적으로 품격이 낮은 말만 쓰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서로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그러니, 품격 낮은 대화가 이루어질 때는 상대에 대한 짜증이 아니라 나에 대해 짜증이 나는 것이다. 나 역시 이 정도로 품격이 낮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써온 말 중에 격이 높은 말이 얼마나 있었을까 생각해 보면 아찔해진다. 그냥 내뱉은 말들이 더 많지 않았을까. 그냥 마음 속에서 생겨난 말들을 거르지 않고 밖으로 표출한 말들이 더 많지 않았을까.

 

남에게 상처주는 말들을 많이 했다는 생각. 이 책의 한 부분인 '지적'이라는 제목을 지닌 글에서 남을 지적할 때 손가락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엄지를 빼고 나면 네 손가락 중에 지적질을 할 때 한 손가락 주로 검지 손가락은 상대를 향하고 있지만, 나머지 세 손가락은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글.

 

그만큼 자신을 세 번 정도 되돌아 본 다음에 남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그 정도는 되어야 말에 품격이 실릴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는데...

 

사람에게도 품격이 있어서 그를 '인품'이라고 하듯이 저자는 말에도 품격이 있다고, 즉 '언품'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

 

언품을 높일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현란한 말하기 기술을 익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듣기부터 시작하는 일이다. 그렇다. 모든 말하기는 결국 듣기다. 듣기가 잘 되어야 말하기를 할 수 있다.

 

듣기, 이는 상대를 내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찬찬히 상대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 마음의 문을 여는 것, 그것이 바로 듣기다.

 

말의 품격은 그래서 듣기, 경청으로부터 시작한다. 잘 듣기가 곧 잘 말하기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공적인 장소에서 듣기보다는 제 말만 하는 사람을 많이 보아왔고, 도대체 말도 안 되는, 격 떨어지는 말들을 뱉어내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만큼 말이 품격을 잃은 시대이기도 한데, 말이 품격을 잃었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어지럽다는 것이다. 공자가 왜 이름을 바로잡겠다고 말 했겠는가.

 

이름을 바로잡겠다는 말, 그 말과 행동이 일치하도록 하겠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말만 앞세우는 그런 사회가 아니라는 말이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회,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 자신의 말보다는 남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이 많은 사회, 그런 사회는 품격이 높은 사회다.

 

'말의 품격' 이 책은 그런 품격있는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 사회지도층이라고 자부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말을 막해서 사방에서 비판을 받는 그런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제발, 품격있는 말 좀 쓰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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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3 11: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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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3 13: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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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가 2017-08-05 0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막말하는 사람들 보면 님처럼 저도 화가납니다. 온 오프라인을 통틀어 상대의 인격을 무시하는 발언들을 하는 사람들 보면 그렇게 말을 해야만 자기의사를 표현할수있나 싶습니다.

언어학자인 노암 촘스키는 생각이 말을 만드는것이 아니라 말이 생각을 만드는 것이라 하더군요. 결국 막말을 하는 사람은 그런 말을 함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저급화 시키는 자해를 하는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kinye91 2017-08-05 08:26   좋아요 1 | URL
결국 막말이, 저급한 말들이 난무하는 사회는 저급한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과 생각이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화려하고 세련된 말이 아니라, 상대를 배려하는 진심이 담긴 말들을 하는 사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르침은


가르치는 건

배우는 것이다


눈에 띄지 않는

빛을 띠는 별들

앞에 서서

빛들을 모으고 내비쳐

보이게 만드는 것


빛들이 모이고 모여

하나로 묶여 장엄한

우주를 이루게 하는 것

저 모습 저 대로가

별이라는 걸, 우주라는 걸


배우는 것은,

가르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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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온도 (100만부 돌파 기념 양장 특별판) - 말과 글에는 나름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있다
이기주 지음 / 말글터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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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장면 하나

 

뉴스를 보는데, 낙서 문화에 대해서 나온다. 그래피티가 아니다. 공공장소에 낙서하는 것을 그래피티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뉴스는 그래피티로 이야기하지 않고 몰상식한 행위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오이도에 있는 등대에 가보면 사람들이 한 낙서로 가득하다고 한다. 방송에 나온 등대 속은 온갖 언어들로 가득차 있다. 아무리 지워도 지워도 또 그런 언어들로 채워진다고 한다.

 

이 언어들은 어떤 온도를 지니고 있을까? 따스함일까? 차가움일까? 부드러움일까? 날카로움일까? 사람들이 빙그레 웃음을 짓게 할까, 찌푸리게 할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언어들에서 어떤 감정보다는 낙서라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될 것이고, 자연스레 차가움과 날카로움을 느끼고 얼굴을 찡그리게 될 것이다.

 

장면 둘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 숲에 갔다. 하얀 자작나무들이 줄지어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한여름이라 주변은 온통 푸른데, 나무 줄기들이 하얗게 서 있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곳에 있는 팻말들에 적혀 있던 문구. 자작나무가 아프단다. 왜냐? 자작나무의 하얀 줄기를 무슨 도화지로 착각을 했는지, 온갖 언어들로 장식을 해놓기 때문이란다.

 

하얀 껍질을 벗겨 가는 사람도 있지만, 그 희디 흰 줄기에 자기의 이름을 써놓는다든지, 누구 왔가 감이라고 써 놓는다든지, 누구야 사랑해라고 사랑 고백을 자작나무 줄기에 해놓는다.

 

자작나무에 새겨져 있는 언어, 무슨 온도를 지니고 있을까? 오이도에 있는 등대에 있는 낙서와 자작나무에 있는 낙서가 다를까?

 

장면 셋

 

잘 알려진 산에 가 보면 바위 곳곳에 이름이 적혀 있다. 한자어로... 바위에 새겨놓은 이름들, 그 언어들.

 

자기가 왔다 간 흔적을 남기고 싶었는지, 도처에 이름들이 있다. 가끔은 아는 이름을 만나고서는 - 그것은 역사적인 인물이다. 유명한 사람 - 반갑기도 하지만, 도대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온갖 이름들이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사람들, 자신의 행적을 언어로 남기는 데는 일가견이 있나 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끔 텔레비전에 나오는 북한 장면을 보면 세상에! 그 좋은 명산인 금강산에 온갖 구호들이 적혀 있으니...

 

그 언어들은 무기가 되어 우리들에게 다가든다. 그렇게 느껴진다.

 

이런 장면들을 자꾸 떠올리게 하는 책이 바로 이기주의 이 책, "언어의 온도"였다. 세 장면에서 나타나는 언어들은 나에게 따스함을 주지 못했다. 그것은 따스함이 아니라 불쾌감만을 주었다.

 

하지만 언어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나와 나를 잇는 역할도 하지만, 나와 남을 잇는 역할도 한다. 이런 역할을 하는 언어에도 온도가 있다고 한다.

 

적당한 온도... 사람에게 따스함을 주는 온도, 그런 온도를 지닌 말. 그런 말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글을 써야 하지 않겠는가.

 

그럴 때 언어가 나와 나, 나와 남을 이어주는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은 그래서 따스한 언어들이 총출동한다.

 

그냥 휴가 때 이 한 권을 들고 떠나 조용히 읽고 싶어지는 책이다. 마음을 따스하게 덮어주기 때문이다. 일상에 지쳐 모난 마음을 잠시 내려둘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책에서도 나오지만 작가의 언어를 기록한 이 종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 있는 것이다. 나무의 목숨값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 목숨값이 헛되지 않도록 언어를 종이에 새겨야 하는 것 아닌가.

 

종이에 새겨진 언어들이 사람들의 마음에 따스하게 새겨질 때 나무의 목숨값은 헛되지 않게 되고, 그 때서야 비로소 언어는 따스함이라는 온도, 부드러움이라는 결을 지니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이 책은 그 값을 하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말들, 글들은 참 따스하다. 우리 마음을 스르르 녹여주는 언어들이다.

 

그래서 마음이 거칠어질 때 책의 어느 한 편을 들춰 읽고 싶어진다. 아무 쪽이나 괜찮다. 거칠고 차가운 마음을 잘 보듬어 줄테니까.

 

나무의 목숨을 언어의 온도로 잘 감싸주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냥 조용히 한적한 곳에서 이 책을 펼치면 더 좋을 것이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아마도 등대나 자작나무, 또는 바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언어에도 온도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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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1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01 1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거장과 마르가리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4
미하일 불가코프 지음, 정보라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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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도 이런 착각이 없다. 제목을 보자마자 '와, 이건 벨라스케스에 관한 소설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으니... '달과 6펜스'가 고갱에 관한 소설이듯이, 마르가리타라는 이름은 벨라스케의 그림인 '시녀들'에 나오는 공주 이름이니...

 

거장은 벨라스케스이고, 마르가리타는 공주이겠고, 그렇다면 이 그림이 어떻게 그려졌는가를 중심으로 소설이 전개되겠지, 배경은 스페인일테고 하는 얼토당토 하지 않은 생각을 하게 된 것.

 

아니다. 해설을 조금 보니 스페인이 배경인 화가 이야기는커녕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야기다. 거장은 화가가 아니라 그냥 거장이라고 불리며, 그는 소설가이다. 그리고 마르가리타는 공주가 아니며 거장을 좋아하는 유부녀이다. 그뿐이다.

 

여기에 '거장과 마르가리타'가 소설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그다지 크지 않다. 마르가리타는 그래도 많이 나오는 편인데, 거장은 아주 적은 부분에서만 나온다. 그럼에도 그가 주인공인 이유는 소설 속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본디오 빌라도' 이야기가 그의 소설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소설과 또 소설 속의 소설로 구성되어 있으며, 1930년대에 구상되고 쓰여졌다고 할 수 있는 소련 소설에서 보기 힘든 환상적인 모습을 많이 지니고 있다. (이 소설의 작가인 미하일 불가코프는 1940년에 사망했으며, 이 소설은 그가 살아있을 때 나오지 못하고 죽은 다음에도 한참 지나서 그의 세번째 아내 덕분에 출간되었다고 한다. 원고 역시 그가 아내에게 구술한 내용이라고 하고)

 

사회주의가 막 건설되고 자리를 잡아가려고 할 때 악마와 신이 등장하는 소설이라니... 당시에 발간이 안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악마든 신이든 이들은 인간과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이들은 바로 우리 인간이 지닌 양면인 것이다. 인간의 양면성... 소비에트 사회의 양면성... 이것이 바로 이 소설에 등장하는 환상적인 인물이 지닌 모습이다.

 

주인공은 볼란드라는 악마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분명 악마다. 악마 하면 우리 인간을 유혹하고 해를 입히는 인물로 나타나야 하는데, 이상하게 소설을 읽어갈수록 그는 인간에게 해로운 존재가 아니라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된다.

 

그와 함께 다니는 다른 수행원들이 인간 사회에 못된 짓을 하지만, 그 과정에서 소비에트 사회가 지닌 모순들이 함께 드러난다. 그들의 악행이 모순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사회에서 인정받고 있는 인물들이 어떻게 안 좋은 행위들을 하고 있는지가 그들을 통해서 하나하나 까발려진다.

 

사회주의적 인간, 이타적인 인간, 공동체를 사랑하는 인간, 그런 소비에트의 모습을 기대했다가는 실망하게 된다. 어쩌면 이 소설이 출간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사회주의가 정착, 발전되어 가야 할 시기인 1930년대 소련 사회는 오히려 사람들의 곤궁이 드러나고, 곤궁으로 인한 탐욕이 발현되는 사회, 또다른 특권층이 대두하고 있는 사회임을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특권층이 나오고, 그들은 일반인들과는 다른 삶을 살고, 공동체에 대한 사랑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악마를 통해서 너무도 잘 드러난다.

 

세상에 자본주의의 반대 편에 선 사회주의에서 소비를 지향하는 군중들의 모습과 돈이라면 어떻게든 지니려고 덤비는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서 당시 사회가 사회주의 건설에 실패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을 떠난 사회는 선전과는 달리 더 힘든 사회임을... 악마를 통해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악마는 나중에 주인공들에게 평안을 준다. 세상에 악마의 힘으로 평안을 얻는다? 어떻게 가능할까?

 

소설의 말미에 신(예수로 추정되는)의 심부름꾼이 악마에게 와서 그들에게 평안을 주라는 부탁을 한다. 악마 역시 수락하고. 이는 두 가지 면에서 평안을 얻게 되는데...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반대되게 한 빌라도가 평안을 얻는 것과, 그런 소설을 쓴 거장과 마르가리타가 평안을 얻는 것.

 

방대한 분량이긴 하지만 읽기 시작하면 빠르게 읽어갈 수 있다. 그만큼 이야기의 몰입도가 높다. 악마라는 환상적인 인물이 등장하여 사건을 마치 마술과 같이 전개해 가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이런 환상성 속에서도 진실을 찾을 수가 있으니...

 

어쩌면 지금 우리 사회는 신을 추방한 사회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신은 추방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신을 추방했다면 악마 역시 추방했어야 하는데, 우리 주변엔 이런 악마의 유혹에 굴복한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그렇다면 추방당한 신을 다시 불러올 때다. 우리 눈 앞에 보이는 신이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존재하는 신... 그것을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좋다. 다만, 우리 현실에서 보이는 수많은 탐욕들이 바로 악마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런 악마의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악마에게서 벗어날 궁리를 하게 된다.

 

그 궁리 속에서 우리에게 신은 다시 돌아온다. 우리의 평안을 위해서. 하여 이 소설을 악마가 이끌어가고 있지만, 다른 쪽에서 보면 신이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 점을 '본디오 빌라도'이야기가 소설 속의 소설로 들어간 이야기일 것이다. 그를 고통으로 해방시켜주는 쪽으로 소설의 결말이 나니까.

 

이 소설은 악마의 관점에서 우리를 바라보게 한다. 볼란드는 어느 나라든 갈 수 있다고 했으니.. 탐욕에 가득차 있으면 그는 언제-어디서건 나타난다. 이 소설에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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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릴 거라는 예보에, 오히려 더 잘됐다고, 사람들이 많이 몰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무작정 떠난 인제 여행.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가겠네'라는 말이 있듯이 참으로 먼 곳이다. 분단이 된 나라에서 최북단에 해당하는 곳이라고 보면 된다. 온통 군부대들이 있는 곳이기도 하고.

 

그러나 인제에는 박인환이 있다. 비록 그가 그곳에서 얼마 살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곳은 그의 고향이 아니던가. 또한 그의 문학관이 있는 곳이기도 하고.

 

보통 문학관 하면 작가의 생애를 연표를 통해서 보여주고, 그 작가의 책들과 육필 원고를 모아놓고 만다. 어느 문학관을 가든 거의 비슷한 유형을 지닌다.

 

그런데, 박인환 문학관은 좀 다르다. 그의 작품이 별로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활동했던 공간을 축소해서 모아놓았다.

 

다른 문인들과 함께 어울렸던 서점, 다방, 술집 등등... 그래서 다른 문학관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 점이 좋았다고나 할까. 무엇보다도 문학관 입구가 넓다. 여유가 있다. 거기서 박인환과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그것으로 만족.

 

인제 여행에서 박인환 문학관보다 더 좋았던 곳은 바로 '원대리 자작나무 숲'

 

처음 시작점에서 윗길로 올라갈 때는 이게 뭐야, 자작나무 구경하기 힘드네 하면서 갔는데... 자작나무 숲에 도착하자마자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여름이라 주변은 온통 파란데, 수없이 많은 자작나무들이 하얀 빛깔을 자랑하고 있으니...

 

온통 하얀 빛. 자작나무들 사이를 걸으며 백석의 시를 떠올렸다.

 

산중음(山中吟)이란 시 제목에 딸려 있는 백화(白樺)란 시... 백화는 자작나무의 한자어이다.

 

백화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모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너머는 평안도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이동순 편, 백석 시전집, 창작과비평사. 1989년 재판. 72쪽.

 

백창우가 이 시에 곡을 붙여 노래로 만들었지. 참 경쾌하게 들리던 노랜데... 원대리 자작나무 숲에 가서 이 시를 떠올렸다. 온통 자작나무.

 

온통 푸른 색이 세상을 지배하는데, 거기서 자신의 흰색을 함껏 드러내고 있는 자작나무. 그렇다. 모두가 다 자작나무였다. 너무도 즐거운 자작나무 숲.

 

하얀 안개와 하얀 자작나무 기둥들... 너무도 하얗게 다가오는 그 숲. 눈에 마음에 담아온 자작나무 숲.

 

백석의 시처럼 온통 자작나무... 그런 곳. 강원도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 숲.

 

이곳에서 하루 묵은 다음, 만해를 찾아 백담사로 갔으니... 좋은 공기, 맑은 물소리를 실컷 듣고 온 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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