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다. 무더위에 긴 책을 읽다가는 더위뿐만이 아니라 책에도 눌려 몸이 견뎌내질 못할 것 같다.

 

  책을 고른다. 짧은 책. 그러나 결코 짧지 않은 책.

 

  시집이다. 시를 읽으며 더위를 잠시 잊기로 한다.

 

  제목이 재밌다. "나는 맛있다" 사람을 맛으로 표현하다니. 하긴 사람을 냄새로 표현하기도 하니, 맛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제목이 된 이 시를 본다. 근데 맛이 없다. '생각 속에 물고기들이 산다'로 시작한다.

 

  생각 속의 물고기. 먹을 수가 없다. 그래도 생각 속, 머리 속의 물고기를 생각하니 조금 시원해진다. '물고기들은 날마다 싱싱해진다. / 물고기들은 자지 않고 헤엄친다.'고 한다.

 

생각 속의 물고기를 생각한다. 물고기가 눈 앞에서 헤엄을 친다. 싱싱한 물고기가 생생하게 물을 헤치며 나아간다. 다가온다. 물의 이미지. 그래, 더위 앞에서 물은 어느 정도 더위를 식혀 주지. 조금 안심이 된다.

 

시집을 계속 넘긴다. 때로는 어떤 시에서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숲을 오르다 쉼터에서 숨을 고르듯 어떤 시는 나에게 조금 쉬어가라고 한다. 이땐 쉬어야 한다. 쉬지 않고 계속 가다간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진다.

 

그러다 한 시를 만난다. 뭐야 이 시?

 

'레이싱 마을의 전력 질주'란 시다. 지금까지 우리는 전력 질주를 해오지 않았던가. 그렇게 해왔기에 허덕거리며 끝도 모를 종착지를 향해 달리기만 하지 않았는가.

 

경주마처럼 앞 옆을 가리고 오로지 앞만 보며 달리기만 강요당한 삶을 살지 않았는가. 지금까지이 우리 사회는 이런 '레이싱 마을'이 아니었던가.

 

얼마나 심한 '레이싱 마을'이었으면 문재인 대통령의 휴가를 다 쓰겠다는 말에 사람들이 신선한 충격을 받았겠는가. 물론 대통령이 낸 휴가가 진정한 휴가라고 하기엔 좀 그랬지만, 그래도 대통령이 자신해서 휴가를 내고, 전력 질주를 멈추어도 된다는 신호를 보냈으니 그나마 다행이긴 하다.

 

시가 참... 각종 마을 구성원이 나오는데... 이게 참... 어떤 비유라고 해도 좋고, 아니라도 좋다. 하지만 우리 사회를 연상시키는 것만은 확실하다.

 

레이싱 마을의 전력 질주

 

내가 피리를 불며 달린다.

영희가 인형놀이를 하며 달린다.

베르테르가 권총을 들고 달린다.

 

잠깐, 베르테르가 소리친다.

내가 당신들과 함께 달린다는 건 전혀 낭만적이지 못하오.

 

베르테르가 총알을 맞고 즐겁게 달린다.

 

달리기는 계속된다.

 

무대가 기타를 치며 달린다.

재떨이가 담배를 피우며 달린다.

가위가 이발을 하며 달린다.

출발점이 결승점을 들고 달린다.

 

잠깐, 가위가 소리친다.

대머리가 되는 건 전혀 우아하지

말을 막으며 그들이 소리친다.

입 닥치고 달리기나 해.

 

가위가 하여간 달린다.

 

달리기는 계속된다.

 

철수가 팽이를 돌리며 달린다.

팽이가 연필을 깎으며 달린다.

연필이 칼을 갈며 달린다.

칼이 지우개를 지우며 달린다.

 

잠깐, 지우개가 소리친다.

이렇게 사라지는 건 전혀

입 닥치고 달리기나 해.

 

지우개가 막무가내로 달린다.

 

박장호, 나는 맛있다. 랜덤하우스, 2008년 초판 2쇄. 89-91쪽. 

 

 

이제는 달리기만 하지 말자고 한다. 걷기도 하자고, 쉬어도 가자고. 앉아도 보고 누워도 보고, 아예 그 자리에 멈추기도 하자고. 굳이 앞으로만 앞으로만 쉬지 않고 달리지는 말자고.

 

그런 세상이 이제는 되었다고. 쉬어야 오히려 달릴 수 있다고. 쉼이 달림보다 더 중요하다고. 그런데도 아직 이렇게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입 닥치고 달리기나 해.'

 

하지만 우린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쳐야 한다. '너나 입 닥치고 그만 멈취.' 

 

그렇다. 지금은 멈춰야 할 때다. 쉬어야 할 때다. 무턱대고 앞으로만 달리는 시대는 지났다.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앞으로만 달리라고, 전력 질주 하라고 했다. 종착점은 없다.

 

대학이 종착점인 줄 알았는데, 아이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0인 출발선에만 서도 좋겠다고 한다. 이미 이들은 종착점이라고 도달한 곳이 출발점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게 우리 사회는 '출발점이 결승점을 들고 달린다'는 표현처럼 지내왔다.

 

이젠, 아니다. 이 시 읽어보자. 도대체, 무엇을 위해 달리는가. 왜 달려야 하는가. 꼭 달릴 필요가 있는가.

 

누가 우리에게 '입 닥치고 달리기나 해.'라고 하는가. 그 사람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입 닥치고 멈춰.'라고.

 

무더위. 쉴 때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 시, 읽으며 정말 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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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고양이가 내게로 왔다 낮은산 키큰나무 14
김중미 지음 / 낮은산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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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존재들을 감싸안는 이야기. 소설을 통해서 상처를 치유하고 있다. 이 소설은 그렇게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 소설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사회복지사. 남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지만, 정작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복지사의 업무가 너무 과중에서 과로로 쓰러진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남을 위하는 사람조차, 자신을 위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게 일하는 현실에서, 이보다 더한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게 살아갈까. 우리는 가끔 자신의 상처에 가려진 남들의 상처를 보지 않으려 한다.

 

그런 남들의 상처를 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소설이 바로 이 소설이다. 고양이를 통해서, 고양이와 함께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 소설에 등장하는 고양이는 여러 마리지만 이 중에서 모리와 크레마(나비), 마루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여기에 사람으로는 연우, 연우 아빠, 은주가 중심이 되고.

 

결국 고양이들은 모두 연우네 집에 모이게 되는데, 이런 고양이들로 인해 닫혔던 연우의 마음이 열리게 된다. 연우가 자신의 상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상처, 다른 존재들의 상처도 볼 수 있게 된다.

 

첫자식들을 잃고 연우네로 들어오게 된 모리는 친구가 된 고양이 또롱이를 이웃 개에게 잃게 된다. 또롱이를 유일한 말상대로 여기던 연우가 충격을 받고 더 마음을 닫게 되는 과정이 소설의 첫부분에 나온다.

 

엄마도 잃고, 사랑하던 고양이도 잃고, 아빠는 먹고 살기 바빠서 마음을 열고 서로 대화할 시간도 부족하고, 그렇게 닫힌 마음을 지닌 연우.

 

이런 연우의 행동이 모리를 더욱 힘들게 하고, 모리 역시 또롱이를 잃은 슬픔과 연우 가족의 상처 속에서 상처를 받게 된다. 작은 몸집이 지나치게 비대해지고 온갖 질병에 걸리게 되는. 활동성을 잃게 되는 모리.

 

두번째 부분에서 은주와 크레마(나비)이야기가 펼쳐진다. 길고양이 수컷 나비... 철거를 반대하는 은주네를 만나게 되는데... 마음씨 좋은 은주가 주는 음식으로 은주와 나비는 마음을 열고 만나게 된다. 그러나 철거반대투쟁 과정에서 마음을 다친 아빠로 인해 은주네는 파탄나게 되는데...

 

지지리도 가난한 사람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 그 사람들을 한 순간에 내쫓는 재개발, 재개발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 오히려 더 피해를 보는 원주민들... 그 과정에서 어떻게 한 가정이 파탄이 나는지... 은주네를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여기서 나비는 시력을 잃게 되고, 연우네로 입양되게 된다. 크레마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마루 역시 마찬가지다. 가난한 사람과 함께 살았던 집고양이. 그럼에도 가난 때문에 함께 살 수 없게 된 마루. 집고양이로 어미 없이 새끼 때부터 사람과 살았기에 고양이로서의 표현을 할 수 없는 마루.

 

이 마루가 연우네 집으로 입양되어 다른 고양이들과 지내는 과정.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 소설에서 잘 전개되고 있다.

 

결국 새끼 고양이인 레오까지 네 마리의 고양이들이 자신들의 상처를 안고 상처를 받은 연우와 함께 살아가게 되는 이야기. 이 과정에서 연우가 차차 마음을 열고,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다른 존재의 상처까지 볼 수 있게 되는 이야기다.

 

다른 존재의 상처를 볼 수 있게 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상처에 갇혀 지내는 것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비록 상처를 없앨 수는 없지만, 그 상처로 인해 또 다른 상처를 받지는 않게 된다.

 

소설은 그래서 상처를 바로보게 한다. 고양이들의 상처를 통해 연우의 상처를 치유하듯이, 우리 역시 소설을 통해 우리가 지니고 있는 상처들을 대면하게 된다. 그런 상처를 인정할 때 비로소 다른 존재들의 상처들도 눈에 보이고 마음에 다가오게 된다.

 

여기서 공감이 시작된다. 공감이 시작되면 서로 마음을 열 수 있다. 마음을 열고 지내는 관계, 이것이 공동체다. 이런 공동체에서는 이제 상처는 서로가 함께 보듬고 나아가야 할 대상이 된다.

 

그런 과정... 이 소설은 고양이의 관점에서, 사람의 관점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마음이 따스해지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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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택시운전사"를 보러 갔다. 최근에 읽은 책과 본 영화가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것들이라 이 영화가 개봉한다는 소식을 듣고 꼭 봐야지 했었다.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영화가 몇 편이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광주는 우리에게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고, 전두환이 자신도 피해자라는 엉뚱한 소리, 정말로 돌 맞을 소리를 한 책을 출간하기도 한 이 때에, 다행스럽게도 광주에 관해 언급한 부분을 빼야지만 전두환 회고록인지 무엇인지를 유통할 수 있게 했다고 하는데...

 

  다시 보면서 광주민주화운동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단지 목적의식적으로만이 아니라 영화적인 재미로도 보아야 할 영화란 생각을 했는데... 믿고 보는 배우 송강호, 약방의 감초 같은 역할을 하는 유해진, 그리고 요즘 인기가 있는 류준열이 나온다고 하고, 외국인 배우로도 꽤 알려진 사람이 나오니...

 

특히 광주민주화운동을 언급할 수 없었던 때 대학가에서 몰래 상영하던, 또는 전시하던 다큐멘터리나 사진이 이 영화의 주인공인 독일기자에 의해서 촬영된 것이라고 하니...

 

그 기자가 광주에 들어가 촬영하고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택시운전사가 서울에서 광주로 실어날라주고, 다시 김포공항까지 태워오는 과정에서 보고 듣고 느낀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

 

사실에 기반했지만 영화적인 요소도 놓치지 않은, 눈물을 빼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특유의 해학이 담겨 있는 영화다.

 

비극이지만 결코 비극으로만 끝나지 않은, 그 비극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우리나라 사람들의 모습이 잘 담겨 있다고나 할까.

 

몇 가지 장면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주인공인 택시운전사가 독일인 기자를 버려두고 혼자 서울로 향하다가, 자꾸 광주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울먹거리는 장면. 평범한 소시민, 자기 딸만을 두고 내려운 아빠, 꼭 서울로 가야만 하는 아빠인 주인공이 광주의 모습, 광주 사람들의 모습을 마음 속에서 떨쳐내지 못하고 번민하는 그런 모습.

 

그렇다. 어떻게 버려두고 떠날 수 있겠는가. 버려두고 떠났다면 마음이 편했겠는가. 제대로 살 수 있었겠는가. 자기 딸에게 당당한 아빠가 될 수 있었겠는가.

 

택시를 획 돌리기 전까지의 그 장면은 먹먹한 장면이었다.

 

또 하나의 장면. 몰래 떠나가는 서울택시기사를 원망하지 않고, 잘 가라고 번호판까지 바꿔주는 광주기사의 모습. 광주를 빠져나가는 지도를 손에 건네주는 모습.

 

자신의 위험에 처했더라도 다른 지역 사람마저 위험에 처하게 하지는 않겠다는 마음. 그런 마음이 전해지는 그 장면.

 

여기에 서울넘버를 확인하고도 길을 열어주라는 중사의 말.

 

광주민주화운동 때 무고한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아낸 군인들이 있었지만, 시민들에게 차마 총을 쏘지 못한 시민들도 있었고, 이 중사처럼 알면서도 눈 감아 준 군인들도 있었음을 보여주는 장면.

 

비록 명령에 따라야 하지만 그 명령이 정당하지 않다는, 자신들의 행위가 결코 정당할 수 없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는 군인도 있었다는 것, 그것이 어쩌면 우리나라를 희망으로 이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많은 장면들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지만, 유독 이 세 장면은 더 깊게 각인되어 있다. 그만큼 사람들은 옳고 그름, 또 사람에 대한 이해, 공감을 해야 한다는 것. 사람에 대한 공감이 바탕이 되면 어찌할 수 없이 올바른 방향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것.

 

더 많은 사람들이 봤으면 좋겠다. 이런 영화는.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기에.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되기에. 광주는 아직도 완성되지 않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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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공동체입니다 비행청소년 8
장성익 지음, 신병근 그림 / 풀빛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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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홀로 살 수 없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홀로 되는 것 아니겠는가.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자신이 소외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지 않은가.

 

그만큼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처럼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간다. 여기에 우리 인간이 지구상에서 최강의 강자로 살아남게 된 이유 역시 소통하는 능력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어떤 특정한 때에만 대화하고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시도때도 없이 소통하는 존재였기에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존재가 되었다고 한다.

 

시도때도 없이 소통하는 존재, 그런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공동체다. 그렇게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왔고, 공동체를 통해서 자신들의 삶을 누려왔다. 근대화, 산업화가 되기 전까지는.

 

근대화, 산업화는 이런 공동체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동체는 방해가 되었다. 따라서 공동체를 해체해야 했다. 사람들을 노동력으로 부려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서로 협동하고 소통하며 살아간다면 노동력을 확보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여 근대화 되면서 사람들을 공동체에서 떼어냈다. 그것을 개인주의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공동체는 낡은 것, 개인의 자유를 옭아매는 것이라는 선전도 빠뜨리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파편화된 개인이 탄생했고, 공동체는 무너져 갔다. 무너져 간 공동체 속에서 사람들은 앞만 보고 달렸다. 주변의 사람들은 함께 가는 사람들이 아닌 제쳐야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살아왔는데, 행복을 추구했는데, 전혀 행복하지 않은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왜지? 이런 의문이 생겼고, 여기서 경쟁과 이윤으로만 점철된 삶이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런 생활은 자신뿐만이 아니라 사회에도, 지구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다시, 공동체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임을, 연대하고 소통하는 동물임을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그렇게 공동체들이 생겨났고, 그런 공동체를 확산시켜 나갔다.

 

이 책은 그런 공동체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알려주고 있는 책이다. 청소년들에게 읽힐 목적으로 쓰인 글인데, 공동체의 뜻부터 시작하여 전통적인 공동체, 지금의 공동체, 공동체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협동조합에 대해서 살피고, 이런 공동체에 대한 다른 시각도 소개한다.

 

공동체가 그렇게 낭만적이지만은 않다는 것, 공동체에도 수많은 난관이 있다는 것, 해체된 공동체도 있다는 것, 지금 공동체는 다시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 그러나 공동체는 늘 위기를 겪어왔고, 그것을 극복해 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 청소년들은 바로 이런 상황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것, 그래야 사회가 변할 수 있으니까. 나만 잘사는 사회가 아니라 우리가 잘사는 사회를 추구하는 것이 공동체이기에, 위기 상황에 공동체가 빠져 있다고 하더라도 머리를 맞대고 위기를 극복해나갈 수 있다는 것.

 

우리나라 공동체, 협동조합 운동 뿐만이 아니라 세계의 협동조합 운동도 소개해주고 있다. 그래서 공동체에 대한 시각을 넓힐 수가 있는 책이다.

 

이 책은 맺음말 부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공동체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가 되기도 할 것이다.

 

지금 이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두 가지 기둥은 권력과 통치와 지배의 논리로 무장한 국가 시스템, 그리고 이윤과 경쟁과 효율의 논리로 돌아가는 자본주의 시스템입니다. ... 이에 맞서, 나아가 이를 넘어서서, 이윤이 아닌 호혜와 협동을 경제 규칙으로 만들고, 경쟁이 아닌 연대와 공생을 사회 원리로 만들며, 지배가 아닌 자율과 자치를 정치 규범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공동체 운동입니다. (286-287쪽)

 

우리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꾼다면 바로 이런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공동체는 한번에 훅 하고 오지 않는다.

 

공동체는 각 개인의 꾸준한 노력으로 오게 된다. 밑에서부터, 작은 것에서부터, 지속적으로 행해질 때 강한 힘으로 어느 순간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그래서 저자는 학생들이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몇 가지 제시해주고 있다.

 

성공해도 좋고, 실패해도 좋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공동체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알아보는 것, 무언가를 해보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 운운하며 인공지능 운운하며, 인간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간다고 하는 이 때, 인간이 설 자리를 찾는 것, 그것은 바로 인간이 살 자리를 찾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답은 '공동체'에 있다.

 

이런 공동체에 대해서 청소년들이 관심을 갖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공동체의 앞날은 밝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아마도 이 점을 생각했으리라.

 

이제는 개인주의를 넘어 공동체주의가 필요한 때다. 그 점을 명심하고, 이 책을 읽으면 우리 사회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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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5 08: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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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5 09: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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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일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4
장 주네 지음, 박형섭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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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라고 하면 인물들 간에 일어나는 사건이나 갈등이 잘 드러나야 하는데, 이 소설은 한 인물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것도 과거 회상으로, 어떤 특이한 사건을 경험할 수는 없다.

 

그러니 주절주절대는 주인공의 목소리를 한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다. 지리한 소설. 그리고 비도덕적 소설. 아마도 도덕적인 생각을 지닌 사람이라면, 또 소설을 통해서 무언가를 얻으려 한 사람이라면 이 소설은 실망만을 안겨줄 것이다. 끝까지 읽지 않고 중간에 뭐 이 따위 소설이 다 있어 하면서 집어치울 것이다.

 

제목 그대로 "도둑일기"니까. 도둑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니까. 소설에서도 직접 이런 구절이 나온다.

 

'배반과 절도와 동성애가 이 책의 근본 주제이다.' (245쪽)

 

이것이다. 고아로 자란 주인공이 고아원에서 또는 감옥에서 동성애에 빠지게 되고(?) 수많은 도둑들과 동성애들을 만나 온 과정을 이야기해주고 있는 소설. 학교 교육을 충실히 받은 소시민적 도덕관을 지닌 사람에게는 이 책은 너무도 비도덕적인, 청소년들을 타락으로 몰고가는 나쁜 소설일 것이다. 아마도 어떤 이는 왜 이런 소설이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되느냐고 따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장 주네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장 주네의 삶이 실제로 이랬다고 하니, 이 소설의 주인공은 어느 정도 장 주네라고 할 수 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가, 사람이 환경을 만드는가라는 고전적인 질문은 필요없다. 자신의 필요에 의해 살아온 인물의 모습, 환경이나 사람이 아니라, 그냥 자신의 욕구대로 살아온, 어쩌면 그것을 본능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살아온 한 인물이 바로 이 소설에 나온다.

 

환경 탓을 하지도 않고, 사람 탓을 하지도 않는다. 그 시간, 그 공간에서 그냥 자신에게 필요한 삶을 살아갈 뿐이다.

 

없으니 훔칠 뿐이고, 남자가 좋으니 남자를 사귈 뿐이고, 필요가 없어지면 배신할 따름이다. 진실한 관계? 그런 것은 없다.

 

그냥 필요에 의해 만나고 이용하고 헤어질 뿐이다. 여기에는 경찰도, 도둑도, 강도도 모두 똑같을 뿐이다.

 

그런 삶에서 어떤 도덕을 발견하려고 하면 안 된다. 도덕적 설교를 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그게 그냥 삶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데란 말이 자꾸 떠오른다. 장 주네는 결국 감옥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글을 쓰기 시작함으로써 그는 도둑의 세계에서 문학, 문화의 세계로 나오게 된다.

 

그가 이런 도둑일기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단지 악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함이 아닐 것이다. 악의 세계를 절대악이라고 할 수 없음을, 오히려 그들의 삶에도 선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사랑이 있는 것이다.

 

사랑때문에 괴로워하기도 하고, 배신 때문에 괴로워하기도 하고, 자신의 삶에서 수치심을 느끼면 견딜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이들은 그냥 악할 뿐이다.  선이 무엇인지, 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배운 사람들이 지닌 알량한 도덕심은 없다.

 

알량한 도덕심으로 무장한 배운 사람들, 그들은 도덕을 무기로 오히려 약한 사람들을 더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지 않는가.

 

장 주네가 이 소설을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이 사회에서는 비록 '악의 세계'에 속해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없애버려야 할 절대악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의 어두운 면이라는 것 아니겠는가.

 

즉, 그들이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들 삶에 함께 하는 존재들이라는 것, 장 주네의 삶을 통해 보면 이들 역시 우리와 같이 울고, 웃고, 사랑하고, 행복해지길 바라고 있다는 것.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무언가 근원적인 접근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들을 그냥 나쁜 놈들이라고 욕하기는 쉽지만, 그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그들 역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그것을 장 주네가 자신의 삶을 기록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도둑일기"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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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4 08: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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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4 08: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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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4 09: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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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4 09: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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