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에 관한 글이라기보다는 삶에 대한 다양한 글이 실려 있어서 좋다. 삶과 교육이 떨어져 있을 수가 없겠지만, 이번 호에 실린 대안학교 학생의 글은 삶과 교육에 대해서 더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분명 '삶과 배움'이 아니라 '삶과 교육'이다. 대안학교에서 배움을 지향하고 있지만, 그들이 실천하고 있는 것은 교육인 경우가 있다는 것을 이 글에서 느낄 수가 있는데...

 

  '어제는 밭을 갈고 오늘은 바느질을 했지만'(들주)이란 글인데... 대안학교 학생들이 교육과정의 일환으로 무를 심고, 그 무로 무말랭이를 만들어 먹고 있지만, 사실 무말랭이는 잘 먹지 않으며, 자신들이 무를 키운 것이 아니라, 교사가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이라는 것.

 

마찬가지로 바느질을 해서 옷을 만들었지만, 옷을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시키는 대로 한 결과물일 따름이라는 것. 이런 내용이다. 결국 대안교육은 삶과 배움이 하나가 되기를 지향하지만, 자발적인 배움이 일어나지 않으면 교육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상하게 교육이라는 말에서 수동성과 강제성이 느껴지니, 대안교육이 어디까지 왔는지, 물론 이 글은 그 중의 한 가지 부정적인 예에 불과하겠지만, 한번 생각해 보는 기회였고...

 

최근에는 교사들의 성추행(성폭력)이 계속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는데, 이들이 어디까지가 성추행인지 잘 모른다면 과연 어떻게 교사를 할 수 있는지, 알면서도 했다면 그들을 교사라고 할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되는데...

 

'성폭력을 바라보는 시선'(조아라)은 성폭력에 대해서 여러모로 생각하게 한다. 자칫 잘못하면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더 큰 피해를 입게 되는 그런 시선들과 태도들에 대해.

 

어쩌면 성폭력을 당한 행위만큼이나 그 뒤 사람들의 시선, 특히 가까운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을 힘겹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여기에 '고라니의 염치'(채효정)라는 글에서 시장지상주의적 사고를 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기도 했다. 그렇다.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 속에서 나도 모르게 시장을 우선시 하는 그런 사고방식을 지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해서 생각하는, 어쩌면 우리는 지금 행복도 돈으로 환산해서 계산하고 있지는 않은지.. 블루베리 농사에 얽힌 여러 이야기들을 통해서 돈에 잠식된 인간의 염치, 부끄러움, 정의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글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번 호의 특집은 '덕후'다. 오타쿠라고도 하는 덕후. 한 가지에 빠져 전문가적 소양이나 행위를 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다.

 

사람을 한 줄로 세우는 시대는 지났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아직도 한 줄 세우기를 한다. 이 한 줄 세우기를 무너뜨리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덕후다.

 

누가 뭐래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 자본에 종속되지 않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대신 집요하게 철저하게 하는 사람.

 

꼭 자격증이 있어야 전문가라고 할 필요는 없다. 이 덕후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이미 전문가다. 이런 덕후들이 예전에는 사회부적응자라는 소리를 들었으나 요즘은 사회에서 인정받는다고 한다.

 

덕후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가 이번 호에 실려 있어서 부정적인 시각에서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뀐 덕후들에 대해 알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어느 한 분야에서는 모두 덕후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우리 삶의 일부분이기도 하겠고.  

 

여러 글들,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고 있다. 읽을 만하다. 민들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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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감에 대하여 -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 철학자의 돌 1
장 아메리 지음, 김희상 옮김 / 돌베개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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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골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라니. 멋모르는 어린아이 시절에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

 

어른이 되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혈기왕성한 청춘 시절에는 그 시절에 흠뻑 빠져 나이들어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청춘 시절은 현재만이 있는 시절이다.

 

어쩌면 어린시절은 미래가 더 많이 보이는 시절이라면 청춘은 현재에 몰입한 시절이다. 그런 시절이 지나고 서서히 늙어가면 이제는 현재에서 미래를 보고, 과거를 보게 된다.

 

미래는 조금, 과거는 많이. 과거가 많이 보일수록 더 늙었다고 할 수 있다.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자신이 살아온 세월이 앞으로 살아갈 세월보다 훨씬 많음에도 불구하고 과거는 빨리 압축되어 존재하고, 미래는 느리게 펼쳐서 존재하길 바란다.

 

어느 순간 나이듦에 대해서 저항하기 시작한다. 과거를 그리워하기 시작하고, 현재가 지속되기를 바란다. 이때부터가 늙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저항한다고 해도 늙지 않을 수가 없다. 이 늙음의 끝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죽음, 그것은 무(無)다. 도무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언어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이다. 칸트 식으로 말하면 '물자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절대로 인식할 수 없는. 경험할 수도 없는.

 

사람은 누구나 늙고 죽어간다는 것에서 경험할 수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경험은 우리가 언어로 다시 전달할 때 의미가 있다. 그런데 죽음은 일회성이다. 불가역적이다. 다시는 돌이킬 수가 없다. 그러므로 언어로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다. 경험을 하되 경험했다고 할 수가 없다.

 

이런 상태가 눈 앞에 보이기 시작한다. 저항을 안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아무리 저항해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몸은 자꾸만 중력의 법칙에 따르게 된다. 땅과 점점 더 가까워진다. 점점 더 중력이 몸에 강하게 작용한다.

 

그러니 결국 체념할 수밖에 없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과정이 두려운 것이라는 말처럼 사람들은 늙어감에 대해서 자신이 서서히 죽음이라는 구멍을 향해 가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게 된다.

 

청년기를 지나고 장년기를 지나 노년기에 접어들면, 아무리 수명이 늘어났다고 해도 인간이 영원히 살 수는 없으니까, 사람들은 늙어감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신이 아무리 젊다고 생각해도 이미 뒤쳐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젊은이들의 언어를 이해하기 힘들어지고, 최근에 나온 책들의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어진다. 부정하려고 해도, 자신의 언어와 젊은이들의 언어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상태가 되면 체념이라기보다는 받아들여야 한다. 수용해야 한다. 우리의 삶이 일회적인 것 아니겠는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삶이라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

 

어떻게? 그것은 사람마다 다르겠다. 이 책에서는 많은 문학작품이 언급된다. 거기서 늙어감, 죽어감에 대해서 생각을 이끌어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일회적인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이 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죽음과 더불어 산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유한함을 깨닫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또 무의 무의미함에 익숙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저 공허하고 잘못된 기대, 자기기만을 되풀이하는 연습에 익숙해질 뿐이다.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은 자신이 이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를 한사코 부정하며 자기기만의 희생자가 된다.  204쪽.

 

늙어가는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벗어날 수 없음을 잘 알면서도 자신과 거짓말 타협을 하며 살아간다. 207쪽

 

이것을 꼭 자기기만이라고 해야 할까. 현재를 살면서 현재에 과거와 미래를 불러올 수 인간이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과연 제대로 살 수 있을까.

 

그렇기에 인간은 현재를 잘 살기 위해서 자기기만을, 거짓말 타협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언젠가는 오겠지만 아직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체념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수용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겠단 생각을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늙어감이 그렇게 유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깨달았지만, 그래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니,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처럼, 유한한 삶, 일회적인 삶을 잘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어차피 올 미래를 미리 당길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미래는 현재에는 없는 것이다. 내가 살아간다면, 늙어가고 있다는 것 자체도 이미 죽음이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것, 살아갈 시간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니...

 

그럼에도 우리는 늙어감, 죽음에 대해 계속 생각해야 한다. 만약 죽음이라는 미래를 생각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지금보다 나아질까... 그 점을 생각하면...

 

늙어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있는 책이긴 하지만, 서양문학에 대한 지식이 바탕이 되어야지만 그래, 그래 하면서 읽을 수 있겠단 생각을 했다. 프루스트, 괴테, 토마스 만 등의 소설이 기본 바탕이 되고 있으니... 원. 그래서 내게는 많이 난해한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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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 2017-08-12 1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은 읽어보지 못했지만 kinye91님의 이 글에 공감하는 내용이 참 많아요. 과거가 더 많이 보일수록 더 늙었다고 할 수 있다는 말씀도, 자신이 아무리 젊다 생각해도 어느 순간 이미 뒤처진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씀도 느무느무 공감했어요. 저는 제가 나이가 들더라도 태생이 철이 없어서 죽을 때까지 철없이 살다 죽을 거라 생각하는데, 그런 것과 무관하게 어느 순간 꼰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제 모습을 볼 때가 있거든요. 그럴수록 나이듦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kinye91 2017-08-12 14:13   좋아요 1 | URL
이 책에 나와 있는 글들이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어요. 저도 적어도 꼰대가 되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요... 노력해야겠지요.

돌아온탕아 2017-08-12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리뷰네요. 잘 읽고 갑니다. :)

kinye91 2017-08-13 10:0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나이듦을 자연스레 받아들이자는 말을 많이 했다. 나이듦이 무슨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왜 애써 감추려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도 했다.

 

  그런데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나이듦이 이상하게도 자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듦이 자랑이 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이루었어야 한다는 거창한 생각은 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사회에서 꼰대 소리를 들으면 안 되지 하는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나이 먹은 사람들 가운데 정말 나이값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고, 그들이 지금까지 먹은 밥값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나이듦이 결코 자랑일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나이듦은 시간이 지나서 그냥 몸의 노화가 진행되는 육체적인 문제로만 취급한다면야 사람이라는 존재, 모두가 겪어야 하는 일이니 별로 억울할 것은 없는데...

 

나이듦이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까지도 쇠하게 만들어버린다는 생각을 하니, 참으로 억울하다. 나만이 아니라 대부분 나이듦은 익어가는 것, 성숙되어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싶어하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서 육체는 자꾸만 뒤로 달아나고, 정신 역시 시대를 따라가지 못해 가만히 있어도 뒤쳐지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러니, 겉으로라도 나이들지 않았다고, 아직은 젊다고 외치고 싶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흰머리를 하고 직장 생활을 하면 대뜸 염색 좀 하라고 하는 말을 듣는다.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흰머리는 나이듦을 상징하고, 직장생활에서 흰머리로 대변되는 나이듦은 아주 고위직이 아니면 추함, 곧 나가야 함을 의미하기도 하나 보다.

 

그러니 기를 쓰고 흰머리를 감추려고 하지. 이것은 개인이 지닌 취향을 넘어서 사회적인 분위기가 아닐까 한다.

 

사회적 분위기, 나이 먹은 사람들이 나이값을 하는 모습, 지금까지 자신이 먹은 밥값을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바뀌지 않을까?

 

이제 나이 먹은 축에 드는 나 역시, 밥값ㅡ나이값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이 시를 읽으며 생각해 보았다.

 

염색

 

나보다 앞서 세는 아내의 머리를

새벽에 염색해준다

 

안개가 피어오르듯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모래톱의 흰 왜가리들처럼 외발로 서서 졸고 있는

흰 머리카락들, 고개를 들기 전에

깜장 물 들여 검은머리물떼새로 바꿔놓는다

 

잠시  잠깐 그렇게 속여두어야 한다

흰 왜가리 떼가 눈을 뜨고 제 몸빛을 찾아 두리번거릴 때까지

검은머리물떼새를 머리에 얹고

저 거리와 시장을 젊은 피로 누빌 아내를 위해

 

새벽에 하는 아내의 염색은

하느님도 눈감아주어야 한다

 

부처님이 머리 기른 제자를 두지 않듯이

박박 삭발해버린 미련은 늘 머리카락으로 치렁치렁해지는 것

깨닫는 머리와 흐느끼는 머리카락 사이에

써레질하듯 염색약을 비벼대는 빗 하나 들고

 

창밖을 보면

허공을 잘 빗으며 내리는 빗줄기,

늙지 않고 물들이지 않아도 될 머리카락이

참 길게도 끊어 내린다

 

유종인, 수수밭 전별기, 실천문학사. 2007년 초판 2쇄.  36-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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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1 1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11 12: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든 생명은 서로 돕는다 - 수의사 아빠가 딸에게 들려주는 생명, 공존, 생태 이야기
해를 그리며 박종무 지음 / 리수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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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말에는 '사람 사이'라는 말이 들어 있다고 한다.

 

'인(人)'이라는 글자 역시 서로를 받치고 있는 모습이니까 사람이란 하나가 아닌 둘 이상이어야 한다는 것, 즉 자신 홀로가 아닌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의미라고 하는데, 여기에 '간(間)'이라고 하여 사이란 뜻을 하나 더 첨가하고 있으니, 인간은 결국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관계라는 것이 사람과 사람만의 관계가 아니다. 사람이 사람 사이에서만 존재할 수는 없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존재들과 관계맺는다는 것이다.

 

책의 닫는 글에서 '아인쉬타인은 꿀벌이 사라지면 그때부터 4개월 후에 지구상의 인류도 사라질 거라고 이야기했단다.'(282쪽)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은 자기들끼리만 잘 살면 될 줄 알지만, 꿀벌이 사라지면 인간도 살 수 없게 된다는 것, 이 책이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은 그래서 만물은 서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 그 관계가 이루어지지 못하면 생물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우주에 확장하면 우리는 우주의 어느 행성이 지구와 비슷한 환경이라면 그곳에 제2의 지구를 만들어 이주해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유인즉슨, 우리는 우리 인간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에 존재하는 박테리아를 비롯한 수많은 생명체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꿀벌뿐만이 아니라 많은 미생물들이 없다면 인간이 살 수 없을 거라는 얘기다.

 

그만큼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들과도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인식하든 인식하지 않든, 우리의 삶을 유지시켜주는 것은 하나의 요소가 아니라 수많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신이 가장 위대한 존재라고 생각하여 인간 이외의 생명들을 무시하고 억압하고 멸종시키고 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이용하기만 하고 있다. 그런 결과 지금 인간들도 살기 힘든 상황으로 지구를 몰아가고 있다.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체들을 무시하고, 배제하기만 하면 결국 인간 자신도 살아갈 수 없음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가축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학대, 동물원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학대, 병원균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배제하는 온갖 박테리아, 미생물들, 자신들의 편리란 이름으로 뭉개버리는 자연들...

 

이들을 이렇게 무시하고 배제하기만 하면 인간이 살기 힘든 환경이 된 지구라는 결말에 도달한다. 여기에 우주의 다른 별들을 개척한다고 해도 인간이 잘 살아간다는 보장은 없다. 우리가 지금껏 관계맺어 왔던 다른 생명체들이, 또 무생물들이 그곳에 존재한다는 보장이 없고, 존재한다고 해도 인간이 적응이 되기까지는 살기 힘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딸의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인간과 생명, 진화,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이다. 많은 질문들이 있지만 이것은 하나로 귀결된다.

 

인간만이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 우리의 생명은 다른 생명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것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려고 하면 그 결과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의 생활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삶, 대량 축산에 의지하는 육식 위주의 삶을 버리지 않고서는 우리의 삶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

 

그렇다. 우리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그런 관계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인간들과이 관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들과의 관계, 또 무생물들과의 관계. 그 관계 속에 바로 우리 인간이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청소년들이 읽고서도 이해할 수 있게 쉽게, 생명들의 관계에 대해서, 서로가 서로를 도와야지만 살아갈 수 있음을 저자는 잘 설명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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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만이의 삶


옛사람들은 사람을 평가할 때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고 했는데

몸도 말도 글도 판단도 고만 고만한

고만이는

옴니암니 삶을 따져보니

애면글면 살며

곰비임비 쌓으려 했으나

올망졸망 그저그런 삶에 머물러

자신은 사회에

그냥저냥 살아가고 있는데

가멸찬 삶을 사는

거만이들이 이런

고만이를 무시하나

교만하지도 거만하지도

그렇다고 그만두지도 않는

고만이의 삶이

존중받는 사회,

그런 사회가 바로

중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고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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