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보이는 창 112호"(2017년 가을)를 읽다.

 

이번 호에는 주로 '노동'과 '임금'에 관한 글이 실렸다. 우리는 과연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받고 있을까 하는 생각.

 

최저임금 1만원 시대를 열겠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3년에 걸쳐 만원이 되게 하겠단다. 그래도 올해 최저임금은 많이 올랐다고 하는데(이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라고 한다), 여전히 만원이 되기에는 멀다.

 

내년에 과연 최저임금이 더 오를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하면 부정적인 답이 나올 것 같다고 한다. 왜냐하면 최저임금을 올려서 내수를 진작시키고, 이를 경제가 성장하는 원동력으로 삼아야 하는데, 내수도 늘지 않고 생산력도 향상되지 않으면 자본은 이익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임금을 올리려는데 저항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 특히 자본가들과 보수 정당들이 한 목소리를 낼 거라는 예상(한지원, 최저임금의 경제)

 

그런데 최저임금을 꼭 노동의 대가로 생각해야 할까? 노동력의 대가로 생각해야 하지 않나, 또한 경제가 성장하지 않음에도 최저임금을 인상하라는 요구는 그동안 불평등하게 분배되었던 이익을 재구성하자는 요구가 아닐까? (김도현, 노동과 임금의 재구성, 제갈현숙, 여성노동력의 대가로서 최저임금 인상)

 

이렇게 관점을 바꾸면 최저임금은 노동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아니 한 사람이 최소한으로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기본적인 소득, 사회의 책임, 사회 구성원의 의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최저임금과 관련하여 생각할 것이 이번 호에 실린 박경미의 글이다. 성서의 관점에서, 또 예수의 관점에서 본 최저임금이다. (박경미, '하느님나라'와 노동)

 

생각할 것이 많은 글인데...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라는 작은 제목을 단 글을 보면 노동과 임금에 대해서 특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자본주의가 수치로 계량화하여 임금을 지급하지만, 그것이 과연 인간적인가 하는 질문...

 

하루 종일 일한 사람과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이 동등하게 1데나리온을 받았다. 주인은 자신이 자비롭다고 했는데... 이 자비는 하루 종일 일하고도 같은 돈을 받은 사람에게서 온 것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공동체라는 것. 예수가 꿈꾼 세상은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을 나눌 수 있는 것.

 

하여 내 생활만큼 다른 사람의 생활도 보장해주는 것이 바로 노동으로 인한 임금이라는 것. 지금 우리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어 많은 임금 격차가 있고, 여성과 남성의 임금 차이가 있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임금 차이가 있는데...

 

이런 기계적인 노동생산성의 차이가 아니라 노동을 통한 생활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서로가 더 행복한 세상을 만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 글이다.

 

  하루 종일 장터에서 누가 자신을 사주기만 기다리다가 저녁 무렵 오늘도 식구들이 끼니를 거를 생각을 하며 힘없이 돌아서려는 순간에 누군가가 자기를 불러주었다는 것은 더할 수 없는 자비이자 은혜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인의 선함, 자비로움은 먼저 일한 사람이 자기도 1데나리온을 받는 것으로 만족 할 수 있어야만 실현 가능하다.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먼저 일을 시작한 사람과 나중 일한 사람이 자발적으로 서로 돕는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있고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다. 그리고 기계적인 평등주의에 대항하고,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가치의 위계질서, 인간의 위계질서를 뒤집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다. (삶이 보이는 창 11호. 74-75쪽)

 

이번 호가 '노동과 임금'을 특집으로 삼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공동체가 살 수 있는 길, 그것은 내것과 네것을 엄격하게 나누고, 시간으로 나눠서 이익을 가져가는 그런 행위들이 아니라, 삶을 중심에 놓고, 서로 살 수 있는 돈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사회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 발 나아가면 '기본소득'으로 갈 수 있다. 결국 기본소득은 공짜로 주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공동의 이익 배분인 것이다.

 

여전히 노동자들은 살기 힘들다. 청년들도 힘들다. 학생들도 힘들다. 이렇게 서로 힘든 때, 서로가 서로에게 어깨를 기대고 함께 천천히 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 첫걸음이 아마도 최저임금(이것은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살아갈 수 있는 기본적인 소득이라고 해야 한다)이 아닐까 한다. 적어도 만원은 되어야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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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9 11: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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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9 11: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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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7-10-19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라는 말이 큰 울림을 주네요..

kinye91 2017-10-20 08:16   좋아요 0 | URL
성경에 나오는 이 구절이 사람들이 서로 양보하며 더불어 사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밥, 다름을 통한 하나됨


흰쌀, 현미, 보리, 콩, 조,

하다못해 은행까지……

한 통에 섞인

부대낌.


물을 붓고는

문질러 대는

손, 손놀림……

부대끼는 알갱이들.


아야, 왜 이래?

가! 저리 가!

몸부림칠수록

더 부딪히는 몸들.


부딪혀,

껍데기가 사라지고

뜨거운 불길에

끈끈하게 묶이는

알갱이들,

밥,

영양분들.


다 달라,

다름을 지닌 채

하나가 된

우리 하늘,

우리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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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 자기 반이 아닌 다른 반에 들어가면 타반 출입금지 조항을 어겼다고 벌점을 부과한다.

 

  같은 학교 학생인데, 같은 학년인데 반이 다르다는 이유로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공간이 된다.

 

  공동체 교육을 한다면서 이렇게 벽을 쌓아놓는다. 학생들은 자기 반이 아니면 공동체 구성원이 아니다.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국경들이 설치된다. 반마다.

 

  다른 반 친구를 만나려면 문 바깥에서 친구를 불러내야 한다. 이런 곳이 바로 학교다. 공동체 의식을 함양한다는 학교다.

 

  그런데 이런 국경이 학교에만 있겠는가.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더 많은 국경을 만나게 된다.

 

나와 다른 사람들, 그런 사람들로부터 나를 분리해놓는 국경들.

 

국경은 단절이다. 얼마나 많은 단절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표적인 거주 형태인 아파트만 보아도 그렇다. 아파트 역시 대표적인 국경을 지닌 공간이다.

 

2011년에 나온 좋은시 100선이라는 책에서 박주택의 이 시를 발견하고는 그렇지 하는 생각을 했다.

 

    국경

 

이웃집은 그래서 가까운데

벽을 맞대고 체온으로 덮혀온 것인데

어릴 적 보고 그제 보니 여고생이란다

눈 둘 곳 없는 엘리베이터만큼 인사 없는 곳

701호, 702호, 703호 사이 국경

벽은 자라 공중에 이르고 가끔 들리는 소리만이

이웃이라는 것을 알리는데

벽은 무엇으로 굳었는가?

왜 모든 것은 문 하나에 갇히는가?

 

문을 닮은 얼굴들 엘리베이터에 서 있다

열리지 않으려고 안쪽 손잡이를 꽉 붙잡고는 굳게 서 있다

서로를 기억하려는 것이 큰일이나 되는 듯

더디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쏘아본다

엘리베이터 배가 열리자마자

국경에 사는 사람들

확 거리로 퍼진다

 

2011올해의 좋은시 100선, 아인북스, 2011 초판. 박주택, '국경' 전문. 106쪽.

 

우리는 사는 곳에서부터 국경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학생은 학교에 가면 반이라는 국경을 지니고, 어른이 되어 직장생활을 하면 부서라는 국경을, 또 같은 업종끼리는 경쟁이라는 국경을, 같은 직장에서도 경영자와 노동자라는 국경을 지니게 된다. 나라와 나라를 가르는 국경을 제외하더라도.

 

이렇게 국경이 많을수록 사람들 관계는 멀어진다. 교류할 수 있는 수단은 많아지는데 이와 반대로 사람들은 점점 더 개인적이 되고, 고립되어 간다. 이게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공동체는 점점 멀어진다. 이런 국경을 없애야 한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있는 국경이 아니라 우리들 삶에 있는 국경을 없애야 더 행복해질 수 있다.

 

물리적인 벽이야 어쩔 수 없다쳐도 우리들 마음 속에 세워진 국경은 없애야 한다. 그래야만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이 '국경'이라는 시, 먼 과거에 있었던 한 풍경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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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7 09: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17 12: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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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의 동아시아 평화기행 - 한국, 타이완, 오끼나와를 가다
서승 지음 / 창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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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벌한 말들이 난무하는 시대다.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나 북한의 김정은이나 여기에 일본의 아베나 모두 험악한 말들을 쏟아붓고 있다. 우리나라 보수 집단도 마찬가지다.

 

이 말들에 의하면 이미 한반도에는 폭탄이 여러 번 터지고도 남았을텐데, 다행스럽게도 아직 실제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말 폭탄들만 터지고 있을 뿐.

 

그러나 방귀도 자주 뀌면 똥이 나올 수 있다고, 이런 평화와 거리가 먼 말들이 오고가는 중에 말이 아닌 폭탄이 오고 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지금 동아시아는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위기를 중재할 나라가 없다는 것도 문제고. 예전에는 6자회담이다 뭐다 했는데, 미국이나 일본은 중재할 생각이 전혀 없고, 오히려 갈등을 부추기고 있으며, 사드 배치 문제로 중국과 우리나라 역시 갈등 국면으로 치닫고 있으며, 러시아는 나 몰라라 하고 있는 상태고, 북한은 오로지 제 길을 가련다고 핵폭탄 제조에 열을 올리고 있으니.

 

동아시아의 평화는 참으로 요원하다. 이럴 때 평화를 생각한다는 것은 곧 우리의 생존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전쟁은 모두의 파멸일 뿐이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평화뿐이니 말이다.

 

조금 오래 되었지만 서승의 동아시아 평화기행이라는 책을 지금에야 읽었다. 지금만큼 평화가 필요한 때가 없는데, 최근 십 년간은 더욱 평화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때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인 서승은 재일교포로 우리나라에 와서 19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일본에서는 한국인으로 차별을 받았으며, 한국에서는 간첩이라는 누명을 받고 감옥 생활을 한 그는 감옥에서 나온 다음에 일본에서 교수로 살아가고 있다.

 

단지 학문을 연구하는 교수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확대하여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무언가를 하는 지식인으로서의 교수로 살아가고 있다.

 

이 책은 올해 나온 이명원의 책과도 연결이 된다. 이명원이 오키나와와 우리나라를 연결시키고 있다면 그 전에 나온 이 책에서는 오키나와와 우리나라 뿐이 아니라 타이완까지 연결시키고 있다.

 

모두 일본의 식민지 경험을 한 나라들이고, 일본으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받은 나라다. 오키나와는 지금도 진행형이지만 타이완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보니 타이완 역시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만큼 일본이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과는커녕 오히려 더 큰소리를 치고 있는 형국이니, 미국을 뒷배경으로 하는 것치고는 좀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

 

서승은 일본이 이렇게 된 데에는 과거청산을 하지 못한 것이 크다고 한다. 천황제를 유지하고 있는 그들은 과거로부터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과는 곧 천황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고, 이는 천황을 비롯한 과거를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니, 이들에게는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저지른 일을 사과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기막히게도 그들은 피해자 의식을 지니고 있다. 자신들이 저지른 가해보다는 원자폭탄을 맞았다는 피해의식만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북한에 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남북분단의 책임이 자기들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서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북한이 일본인들을 납치한 책임만을 묻고자 한다. 이를 빌미로 북한과의 어떤 대화도 잘 하지 않으려 한다. 자신들이 오히려 피해자란다.

 

이런 후안무치한 행위들로 인해 타이완, 오키나와, 그리고 우리나라는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고 이웃 나라들에게 진정한 사과를 한 다음에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데 일본이 첫발을 내딛지 않기 때문이다.

 

서승의 이 책에 그런 주장이 잘 나와 있다. 그렇다. 지금은 평화가 절실한 때이다. 험악한 말들의 폭탄이 그냥 사라지게, 평화가 정착되게 할 때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부터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그리고 일본에게도 강하게 요구해야 한다. 재무장하지 마라고... 북한을 위협하는 발언도 하지 말라고... 또한 미국에게도 마찬가지로 요구해야 한다. 남북한 문제가 세계적인 문제이기는 하지만 우선은 당사자인 우리가 주도적으로 풀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분명 타이완, 오키나와, 우리나라는 피해자다. 이들 나라에 대한 가해자는 일본이다. 그것을 명확히 해야 한다. 일본은 미국에게는 피해자일지 모르지만 우리들에게는 아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은 분명 가해자다. 그것부터 인정해야 한다. 인정하게 해야 한다.

 

서승은 감옥에서 나온 뒤부터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여러 활동을 해왔다. 그가 해온 활동들에 대한 글들을 묶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비록 어떤 글은 10년 전에 발표되기는 했지만 이 글에서 주장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만큼 동아시아 평화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이제는 동아시아에서 평화가 정착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모두가 잘살 수 있다.

 

이 책은 동아시아의 평화를 생각할 수 있도록 자극을 준다. 지금 같은 때에는 더욱 절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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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6 14: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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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6 17: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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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도둑 김소진 문학전집 3
김소진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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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읽은 김소진의 소설집이다. 김소진 소설의 특징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단편들이 주를 이루지만 단편 속에 곁가지로 뻗어가는 많은 사건들이 중첩되어 있다.

 

이런 중첩은 장편소설에 더 잘 어울리는데 단편소설에 이런 사건들과 인물들이 나와 이야기의 끝맺음이 잘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지식인 소설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는 생각이 많은 소설이라는 뜻이다. 짧은 것에서도 여러 가지를 다 이야기하고 싶은 욕구.

 

여전히 등장인물들은 지식인들이다. 그리고 과거로 향해 하고 있다. 제목이 되는 '자전거 도둑'만 해도 단편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사건이 과거와 현재로 나뉘고 있다. 많은 과거들과 회상이 중첩되어 있어 짧은 소설에도 여러 사건들을 만나볼 수 있다.

 

단편소설에서는 그래도 많은 이야기들이 짧은 분량에 녹아 있기에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는데, 이 전집에 실려 있는 '양파'라는 소설은 단편을 넘어섰는데, 이 소설을 읽으며 민중들의 삶과는 괴리가 있다는 느낌믈 강하게 받았다.

 

김소진 작품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일반 민중이 아니라 지식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 민중들의 삶은 과거에나 존재하고, 그것도 어린 시절 자신의 경험 속에만 존재하는데, 어른이 된 자신은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상태.

 

민중들의 삶에서 떠난 자리에서 있는 주인공들이 '양파'에 등장한다. 한때 운동권이었지만 지금은 사회에서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 어느 정도가 아니라 인정받는 자리라는 표현이 어울리겠다. 정치인이 되어 꽤나 유명해졌고, 화가로서 자신의 입지를 마련했으며, 의사, 기자 등등이 된 인물이 등장하니 말이다- 인물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들을 통해서 민중들의 삶이 스쳐지나가듯 나오지만 주된 서술의 방향은 이들이 어떻게 사회에 적응해 가는가 하는 점에 있다.

 

변절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사회의 변화에 맞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읽기에 불편하다. 차라리 단편에서 느꼈던 어두운 분위기, 과거의 그 어두침침한 모습들에서는 과거 우리 모습을 발견하고 현재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할 수 있었는데, 이 '양파'라는 소설에서는 자신을 잃어가는 지식인의 모습을 통해 민중들의 삶이 소설에서 사라졌다는 아쉬움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 역시 완성이 되지 않았다. 완성이 되었다면 민중들과의 현재 삶이 더 표현되었을텐데, 그 점은 좀 아쉽다.

 

이 전집을 통해 김소진의 소설 가운데서는 단편들이 더 생각할거리가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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