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자베르가 아닌 미리엘 주교가 되어야


이런 생각을 한다


학교는 춘추전국시대

교사는 제자백가

학생은 백가쟁명 속 백성

다름이 배제와 추방이 되어

다름과 함께 가는 삶은

유토피아일 뿐


오로지 통일을 위해

법, 령, 조례, 교칙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규정은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법가가 득세하고

자베르가 활약하여

백성은 장발장이 되어

고통받는 학교


황제의 눈

사상가의 눈

자베르의 눈이 아닌

백성의 눈

장발장의 눈으로 학교를 보면

학생들의 깨달음, 성장을 위해

선생은

법가가 아닌 유가, 도가, 묵가

자베르 경감이 아닌

미리엘 주교가 되어야 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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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형대에 걸린 시
김수영 지음, 김종욱 엮음 / 아라(도서출판)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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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형대에 걸린 시'

 

김수영 전집에 실리지 않은 글들을 발굴해 모아놓은 책이다.

 

책형대, 지금으로 말하면 십자가 정도라고 하면 되겠다. 책형(磔刑)은 기둥에 묶어 세우고 창으로 찔러 죽이던 형벌이라고 하니, 책형대는 그런 형벌을 당하는 기둥에 해당할 것이다.

 

자신의 시를 책형대에 걸어두었다는 것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관심하지 않고 할 말을 하겠다는 것이다. 전집에 있는 글에서 '시란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했던 시인의 정신과 어울리는 다짐이다.

 

4.19가 일어나고 이승만의 하야 선언이 있은 뒤 김수영은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고 이 글에서 말하고 있다. 

 

'4.26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통찰하지 못하는 사람은 미안하지만 시인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불쌍한 사람들이 소위 시인들 속에 상당히 많이 있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다' (35쪽)

 

'시대의 윤리의 명령은 시 이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거센 혁명의 마멸 속에서 나는 나의 시를 다시 한 번 책형대 위에 걸어놓았다' (36쪽)

 

이런 치열함이 지금까지 김수영 시를 읽는 이유가 되고 있다. 시인이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이 글이 김수영의 미수록 원고 제목이 된 이유이기도 하겠다.

 

산문만이 아니라 미수록 시도 세 편이 실려 있고, 번역한 글들과 좌담이 이 책에 실려 있다. 특히 산문 중에서는 김수영의 포로생활을 잘 알 수 있는 글들이 - 시인이 겪은 포로 생활, 나는 이렇게 석방되었다 - 있다.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가 포로로 잡혀 거제도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그때의 김수영을 만날 수 있어서 좋다.

 

여기에 실린 소설가 김이석의 죽음에 따른 문인들의 생활에 대한 좌담은 문인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지가 잘 나와 있는데... 예나 지금이나 문인들은 풍족하게 살기 힘든 것이 현실이니.

 

얼마 전에 최영미 시인의 말이 논란이 되었다. 생활하기가 힘든 시인이 자신에게 호텔방 하나를 빌려주는 호텔이 있으면 좋겠다는 말... 그러면 자신을 만나러 온 사람들 때문에 호텔 홍보도 되고, 호텔의 영업에도 도움이 될테니 방 하나를 자신에게 빌려주었으면 한다는.

 

그런데 시인이 무슨 벼슬이냐고, 다른 문화인들은 어떻게 하느냐고... 참 많은 반론들이 나왔고, 시인에게 호텔방을 제공하는 업체는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때도 문인들이 먹고 살기 힘들어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그런 좌담을 했는데, 이들이 제시하는 것이 신간이 나오면 도서관에서 구입하도록 하는 도서관법 제정이다. 책이 많이 팔리면 인세로 작가들이 먹고 살지 않을까 하는 그런 바람.

 

꼭 문인만이 아니더라도 모든 사람이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사회적 토대를 마련해야 하는데... 그런 정책이 많이 나오고 있으니 잘 살펴서 실현가능하게 하는 것도 우리의 일이겠다.

 

그동안 누락된 김수영의 글들을 모아놓았다는 의미... 김수영의 포로생활을 시인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것, 그리고 4,19에 대한 김수영의 생각 등을 다시 한 번 만나게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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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차미혜 사진 / 난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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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소설이라고 해서 읽었는데, 소설로 보기가 참 힘들다. 짧은 글들이 이어져 있을 뿐이다. 물론 이 짧은 글들을 꿰고 있는 소재는 바로 '희다'이다.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은 '흰' 것들에 대한 단상.

 

'나, 그녀, 모든 흰' 이렇게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읽다보면 이어지는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흰'이 밝음 보다는 어둠 쪽에 더 가깝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보통 '흰'은 밝은, 깨끗한, 순수한, 맑은, 가벼운 등등의 의미를 불러일으키는데, 이 소설에서는 영어 제목부터가 '어두운, 무거운, 슬픈' 등등의 느낌이 나게 한다. 영어로 표기되어 있는 것이 'The Elegy of Whiteness'다.

 

엘레지(Elegy), 사전을 찾아보면 '비가(悲歌)'라고 나온다. 슬픔의 노래라는 뜻이다. 흰이 비가라니... 그렇다. '흰'은 어떤 슬픔을 불러일으킨다. 1부인 '나'로부터 시작하지만 이 '나'는 부재의 나다. 없는 나다.

 

바로 나자마자 세상을 뜬 아이로부터 시작한다. 그렇게 시작해서 다시 아이로 간다. 결국 없음에서 시작에 없음으로 가는 인생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없음에서 시작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있음으로 만들지만, 그 있음 역시 없음 속에 존재하게 된다.

 

'흰'은 다양한 색채들과 함께 존재하지만 그 색채들을 다시 '흰'으로 만든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이다.

 

굳이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아도 된다. 지금 내게 있는 수많은 색채들은 바로 '흰'을 바탕으로 한다. '흰'을 바탕으로 하지만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 '흰'으로 돌아간다.

 

'흰'을 우리는 거부할 수가 없다. 세상에 나온 아이가 처음으로 보는 것은 '흰'일 것이다. 빛... 세상의 빛, 그 다음 아이는 '흰'것으로 자신의 몸을 감싼다. '배내옷'이다. 이렇게 자신을 감싼 것에서 이제 새로운 '흰'이 나온다.

 

바로 엄마의 젖이다. 젖으로 아이는 생명을 유지한다. 그러나 젖은 외부에서 온다. 자신의 '흰'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 때 나오는 '흰'이 바로 이다. 우리 삶을 유지시켜줄, 음식을 씹을 수 있게 해주는.

 

그러다 다시 '흰'이 나오기 시작하면 이제는 처음에 왔던 없음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 검었던 머리가 하얘지고, '흰' 이들이 하나둘 빠져나갈 때... 이제는 다시 한 줌의 재가 될 준비를 한다. 나중에 이 재조차도 없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텅 빈 흰으로.

 

'없음'에서 태어나 다시 '없음'으로 가는 길, 이 길에서 우리는 수많은 '흰'들을 만난다. 짧은 글들 속에 온갖 '흰'들이 나오지만 이 '흰들'은 바로 우리 삶이다. 

 

하여 소설 속에서 '나와 그녀, 그리고 모든 흰'으로부터 우리는 삶을 만나게 된다. 자신의 삶을 보게 된다.  

 

짧은 글들의 모음이고, 이 글들이 작가의 슬픔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지만, 그 슬픔으로 해서 '흰'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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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번 생기면 그것을 없애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 재개, 중단에 대한 시민참여단 공론조사 결과를 보고 다시 한 번 느꼈다.

 

  원전이 생기기 전에 공사를 했으면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이미 건설 중인 원전에 대한 공사 중단을 하기에는 여러모로 문제가 많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공론조사위 결과가 어제(20일) 발표되었다. 오늘자 한겨레신문에 의하면 1차 시민참여단 의견조사를 했을 때, 재개 36.6% 중단 27.6% 판단 유보 35.8%였는데, 최종결과를 살펴보면 재개 59.5% 중단 40.5%로 공사재개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판단을 유보했던 사람들 가운데 더 많은 사람들이 공사 재개 쪽으로 자신의 의견을 바꾸었다는 얘긴데... 그만큼 이미 실시되었던 것을 없애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임을 알 수 있다.

 

원자력발전이라는 말을 핵발전이라는 말로 하고, 핵발전이 인류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 더 많은 고민을 하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상황에서 시민참여단은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재개 쪽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 의견에 대해서 더 가타부타 말할 필요는 없고, 정부에서도 공론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했으니 원자력 발전소 두 기에 대한 공사는 곧 재개될 것이다.

 

하지만 여론은 그래도 탈핵 정책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 이유로 공론화위원회에서 다룬 핵발전 정책 방향에 대한 선호 의견 추이를 들고 있다.

 

1차에서는 핵발전 축소 45.6% 유지 32.8% 확대 14.0% 잘 모르겠음 7.5%였는데... 최종결과로 핵발전 축소 53.2% 유지 35.5% 확대 9.7% 잘 모르겠음 1.6%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핵발전 확대와 잘 모르겠음이라는 의견을 냈던 사람들 가운데 더 많은 사람들이 핵발전 축소 쪽으로 움직였다는 얘기다.

 

그러니 이미 건설하고 있던 핵발전소는 계속 건설하되, 더이상 핵발전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이 공론화위원회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는 신고리5,6호기 건설 재개를 하겠지만, 더이상의 핵발전소 건설을 추진하지 않을 명분을 얻었고, 그것도 사회적 갈등 상황을 시민들의 의견을 통해서 결정을 했으니, 일종의 '숙의민주주의'를 실현했다고도 할 수 있다.

 

이제는 핵발전이 아닌 다른 발전에 대한 정책을 펼칠 수 있고, 또 그쪽으로 연구를 하도록 지원할 수 있게 되었으니... 비록 기존에 있던 것을 없애지는 못했지만, 조금은 좋은 쪽으로 움직인 공론화위원회 활동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렇게 한번 만들어진 것은 시민들의 의견을 모으는 공론화 과정을 통해서도 쉽게 없앨 수가 없으니, 만들어지기 전에 공론화 과정을 먼저 거쳐야 한다는 것에 대해 합의가 되어야 한다.

 

정부가, 앞으로 이런 일이 있을 때는 공론화 과정을 거쳐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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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1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21 1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상의 절반이 여성이라고 한다. 한때 하늘의 절반이라고까지 외쳤다. 그만큼 여성은 남성에게 억압받는 존재였다.

 

  함께 존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쪽이 없으면 살아가지 못하면서도 남성이라는 이유로 여성을 무시하거나 억압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을 집 안이라는 공간에 가둬놓고 사회 생활을 못하게 한 적도 있었고,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여 투표권을 주지 않은 적도 있었다.

 

  아주 먼 미래 이야기 같지만, 아니다. 아주 가까운 미래다. 여성들에게 참정권, 선거권이 주어진 것은 1900년대가 되어서였다.

 

  그럼에도 여성들이 남성들과 동등한 권리를 지녔는가 라는 질문을 하면 긍정적인 대답을 하기가 망설여진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세상의 절반이라고까지 주장했음에도 그러는데,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더욱 힘든 일이 우리에게 있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생물학적인 성 말고, 사회적인 성, 또는 자신이 선택한 성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비난들이 쏟아지고 있다.

 

세상에 두 성만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 이들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세상에는 한 성만이 존재한다는 듯이 행동한다. 한쪽을 완전히 자신에게 종속되어 있는 존재로 여기니 말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적 지향성이 다른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아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존중이란 없다. 오로지 제거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우리 사회는 혐오사회가 되었다.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들이 청문회장에서 기껏 질문한다는 것이 '동성애를 찬성하냐?'는 것이고, 여기에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학교에서 페미니즘 교육을 하는 교사에게 비난을 쏟아붓는 일도 생기고 있으니, 다름이 인정되고 있지 않은 사회가 바로 우리 사회 아닐까 한다.

 

일각에서는 이제는 '종북'이 아니라 '동성애'가 사람을 배제하는 말이 되었다고 자조하기도 한다. 이렇게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 어쩌면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시간을 보내야 했던 학교에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학교에서는 정말로 철저하게 다름이 인정되지 않는다. 획일성만이 학교의 존재이유라는 듯이 학교에서는 무조건 동일성을 강요한다.

 

똑같은 교복을 입고 - 조금이라도 교복을 줄이거나 박음질을 하거나 하면 가차없이 벌점이나 처벌을 하는 학교들!!! - 같은 교과서로, 같은 시간에, 같은 속도로 배우는 학생들.

 

이들에게 다름은 없다. 다름은 튄다는 것이고, 튄다는 것은 배제의 대상이 된다. 이렇게 10년이 넘는 기간을 동일성, 획일성 속에서 지내다 보니, 다름은 멀리해야지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시나브로 몸에 배게 된다.

 

남자들은 군대에 가면 또 한 번 이 다름이 문제가 되는 현실에 맞부딪힌다. 다름은 곧 배제다. 군대에서는 똑같이 행동해야 한다. 그것을 몸으로 철저히 익힌다. 마음 속 깊이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배제하는 생각이 박힌다.

 

그렇다. 공존의 기술은 바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교육기관에서 기를 쓰고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니 사회가 다름을 인정하기 힘들어진다.

 

교육은 문화, 사회, 정신의 재생산인데, 이런 과정을 거치고 있으니, 국민을 대변한다는 국회에서조차도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민들레 113호에서 다른 이번 호의 특집 제목은 '공존의 기술, 젠더 감수성'이다. 세상이 두 성으로만 나누어져 있어도 다름을 잘 인정하지 않았는데, 두 성보다 많은 성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지금,  세상을 여전히 두 성으로만 가두려고 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반성하게 하고 있다.

 

젠더 감수성에 대해서 언제 우리가 교육받았던가. 이제부터는 달라져야 한다. 남학교에서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며 페미니즘 교육을 하는 남교사 이야기도 이번 호에 실려 있으니, 우리 사회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민들레가 이런 바람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을 만하다. 이번 호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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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0 09: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0-20 1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