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기의 괴로움. 어쩌면 시를 읽으며 세상을 해체한다는 것에 대해, 해체된 세상을 다시 재구성한다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명확하지 않은 시, 시인의 머리 속에서 이리저리 찢겨버린 시들을 읽을 때는 편안하지가 않다.

 

그럼에도 세상이 갈가리 찢겨져 있는데, 어찌 시가 온전할 수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 이런 시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시인은 잠수함의 토끼요, 광산의 카나리아라고 하지 않았던가. 시인이 이런 시를 쓸 수 밖에 없는 상황. 그것이 바로 현 시대 상황이 아니겠는가.

 

최치언의 시를 읽으며 참 많이도 해체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세상은 온전하지 않다. 세상은 단순하지도 않다. 세상은 밝지도 어둡지도 않다. 이게 바로 세상이다.

 

혼돈, 카오스. 그러나 카오스에서도 질서를 찾는 것, 그것이 바로 시인이다. 아니 우리 인간들이다. 태초에 어둠이 있었을텐데, 이 어둠에서도 말은 있었다. 성경에서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하지 않나.

 

아무리 혼돈이라도, 암흑이라도, 갈가리 찢긴 세상이라도 말이 존재하는 한, 세상은 재구성된다. 재탄생된다.

 

이런 재탄생의 주인공, 그가 바로 시인이다. 이 시집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다.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는 시집의 제목과, 그 제목이 된 이 시집의 첫번째 시를 읽으며 이렇게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는 것.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것. 이념으로 나뉘어져 있으면 결국 그것은 죽음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됐다.

 

시를 보자.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

 

우리는 모두 우측으로 걷고 있었다. 그때 좌측에서 소리가 들렸다

듣지 마라

소리는 계속해서 우리들의 귓전을 때렸다

귓속에서 시뻘건 태양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좌측은 연필의 힘을 믿는다

나무의 치졸함을 믿고

의사당의 순결을 믿는다

좌측은 형제들의 오만을 믿는다

그러므로 좌측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우리가 늙는다는 것도

너희들이 여자이었다가 남자가 되고 그리고 여자로 사랑하는 나약한 방식을 믿는다

 

귀를 도려내라

 

그리고 우리는 귀 없이 계속 걸었다. 그때 좌측에서 움직였다

보지 마라

움직임은 계속해서 우리들의 눈꼬리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담장의 덩굴이 눈알을 휘감아 낚아채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걸었다

 

좌측은 우리들 반대쪽으로 기울어 있다

높은 담장을 드리우고 좌측은 아무것도 치료하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좌측의 말이

칼처럼 우리 몸을 찌르고 들어왔을 때 우리들은 어처구니없게도 많이 순진해졌다

우리가 더 이상

선한 꿈을 꾸지 못한다는 건 좌측에게 우리들의 악몽을 맡겼기 때문이다

움직일 수 있을 때

눈알을 파라

 

눈알 없이 우리들은 우측으로 걷는다

좌측이 우측이 될 때까지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우리는 우측하고만 싸웠다

그리고

모두 죽었다

이것이 좌측이 준 선물이다

 

최치언, 어떤 선물은 피를 선물한다. 문학과지성사. 2011년 초판 2쇄.  10-12쪽.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맹목의 상태. 이것은 이념의 늪에 빠진 사람의 상태다. 이런 맹목의 상태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세상은 다양함으로 구성되어 있고, 다양함으로 인해 존재하게 되는데, 이를 어거지로 하나로 통일시키려 하는 것, 이것은 곧 죽음이다.

 

좌측이 준 선물이 죽음이라면, 우측이 준 선물 역시 죽음이다. 좌와 우가 함께 존재해야만 삶으로 갈 수가 있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이 시.

 

툭하면 종북, 종북하는 이 나라는 우측이 준 선물이 너무도 가혹하다. 그러나 좌측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상대의 소멸을 바란다. 상대와 공존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귀도, 눈도 없어야 한다.

 

오로지 자신들의 말만 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니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된다. 이 시집의 제목을 거꾸로 읽는다.

 

피를 요구하는 선물은 거부해야 한다로...  시가 발표된 지 꽤 됐을텐데... 지금 우리나라 상황을 보면, 이 시에서처럼 어쩌면 피를 요구하는 선물이 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 안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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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 속의 외침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4년 1월
평점 :
절판


위화의 작품으로는 세 번째, 소설로는 두 번째 읽은 책.

 

두 번째로 읽은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 소설을 읽으며 '허삼관 매혈기'에 나오는 장면과 연결시킬 수도 있었고, 또 위화의 그 책에 나온 자신이 성장하면서 겪었던 일들이 소설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입양이 되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 그 아들의 눈으로 보게 되는 집안일과 어른들의 세계, 그리고 자신들의 성장과정.

 

중국의 어린이들이 어떻게 성장해왔는지를 이 소설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어찌보면 한 손씨 집안의 내력을 이야기해준다고 할 수도 있는 소설이다.  중국판 '삼대', '태평천하'라고 할 수도 있는데...

 

삼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우리나라 '삼대'나 '태평천하'에서는 할아버지 세대는 돈을 많이 벌어 떵떵거리며 살게 되고, 아버지 대에서 흥청망청 돈을 물쓰듯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할아버지도 쫄딱 망해버리는 상태로 나온다는 것이 다르다.

 

또한 아버지 세대는 좌절된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우리나라 소설인데, 위화의 이 소설에서는 아버지 역시 제대로 배운 것이 없는 무지랑이에 해당한다는 것이 다르고...

 

그러나 아들 세대는 역시 배우고 무언가를 해보려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삼대의 맨 마지막 세대의 눈으로 소설을 전개하고 있어서 그런지, 그 점에서는 위화의 이 소설이나 우리나라 '삼대, 태평천하'가 비슷한 점이 있다.

 

다만 위화의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아들 세대는 우리나라 아들 세대보다 더 세속적인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 다르다.

 

이 소설은 이처럼 할아버지 손유원, 아버지 손광재, 그리고 그의 아들 셋 손광평, 손광림, 손광명의 이야기에 덧붙여 소설의 서술자인 손광림이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참 본능에 충실한,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사는 민초들의 모습이라고 해야 할지, 가난으로 인해 파탄에 이르지만 그럼에도 최소한의 정을 끊지는 않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살이가 이토록 지난하지만, 그럼에도 살만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온갖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는 손광평이지만 결국 자신의 아버지를 어쩌지는 못하고, 동생이 대학에 들어가 도시로 갈 때 배웅해 주는 모습이라든지, 첫째 형을 닮았지만 자신보다 어린아이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손광명이라든지... (그것이 비록 자신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위선적인 행동이었을지라도)

 

여기에 주인공의 친구들, 이들 역시 버림받거나 가난에 찌들어 살게 되는데... 그런 시대를 중국이 거쳐왔다는 것.

 

이 소설에도 도회지에 대한 부러움이 드러나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창 개발이 될 때 서울로, 서울로 올라왔듯이, 중국 역시 도시로, 도시로를 외치기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어른이 되어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것, 위화는 자신의 어린시절을 되돌아보면서 이를 소설로 형상화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어린시절을 되돌아보게 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독자들에게 자신들이 거쳐왔던 과거에 대해 다시 한번 상기시키면서 그 시절을 잊지않도록 하고 있다고나 할까.

 

이미 변해버린 시절에 대한 그리움, 그 시절이 지금의 자신들과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는 소설. 이것이 위화의 이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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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들레 114호를 읽으면서 갑자기 몇 주 전의 장면이 생각났다. 포항 지진으로 인해 수능이 연기된 날.

 

  수능 전날 자신들이 공부하던 참고서, 문제집들을 모두 버렸던 수험생들... 그러나 시험이 연기되자 부랴부랴 다시 자신의 문제집을 찾으러 가야만 했던 수험생들.

 

  하지만 책들의 산더미 속에서 자신의 문제집을 찾는 일은 한강 모래밭에서 바늘 하나 찾는 격.

 

  결국 다른 학생의 문제집, 참고서를 들고 온 수험생들이 많았다는 후문.

 

한데... 수능이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중요하지만, 그 수능으로 인해 버려지는 수많은 책들, 그 책들을 이루는 종이들에 대해서, 그런 소비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은 있는지.

 

언제든가 학교에서 교과서 물려주기 운동을 한답시고, 쓴 사람의 이름을 적게 한 적이 있었는데... 교과서를 후배들이 물려받은 적이 있단 얘기를 들은 적은 거의 없다. 아주 적게... 극소수의 학교에서 이루어졌다는 얘기는 들은 기억이 있지만...

 

교과서나 참고서, 문제집들의 종이질을 본 적이 있는지... 한 번 쓰고 버려지는 그 책들이 고급스런 종이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재생용지로 만들어도 충분한 교과서를 이상하게 화려하게 만들어야만 채택이 된다는 식으로, 겉으로 번지르하게 만들고 있으니...

 

수많은 나무들이 목숨을 바쳐 학생들의 공부를 돕지만, 일회성으로 그치고 말 뿐. 책들은, 예전에 그렇게도 귀했던 책들은, 돌려보고 돌려보고, 베껴쓰곤 했던 그 책들은 이제는 너무도 흔한 소비물품이 되어 쓰레기가 되든지 재활용 공장으로 보내지든지 한다는 사실.

 

이번호 특집이 '윤리적 소비'에 관한 것인데... 대부분의 학생들이 거쳐온 학교에서 가장 비윤리적인 소비를 하고 있지 않은지...

 

이미 비윤리적 소비를 생활에서 하고 있던 학생들에게 윤리적 소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소비란 바로 생활 아니던가. 그런데 배움이 이루어지는 공간에서조차 윤리적 소비를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윤리적 소비에 관한 책을 소비한다면... 이 엄청난 배움과 실천의 괴리, 앎과 실천의 괴리, 글과 생활의 괴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

 

'윤리적 소비'에 관한 글들을 읽으며 마음이 뜨끔했다. 나 역시 윤리적 소비와는 거리가 먼, 쓰레기를 양산하는 삶을 살고 있으니 말이다.

 

가능하면 조금 덜 쓰자고 하지만, 여전히 많이 쓰고 있는 형편이고, 생산은 없고 소비만 하고 있는 삶을 살고 있으니... 이런 내 생활 방식을 바꾸지 않고 윤리적 소비 운운하는 것도 모순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럼에도 '뜨끔' 하니, 무엇을 소비할 때 한번 더 생각하는 태도를 지니게 될 것이라는 생각.  

 

'민들레'를 청소년들이 읽었으면 좋으련만, 대부분의 독자들은 '어른'이다. 반성할 준비가 되어 있는 어른. 그러므로 민들레를 읽는 독자들은 이 윤리적 소비를 주제로 다룬 글을 읽으며 '뜨끔'하겠지만 정작 뜨끔해야 할 사람들은...

 

농축산업을 살린다는 명목으로 농축산물에 관해서는 상한가를 10만으로 올린다는 국민권익위원회의 결정... 이것과 '윤리적 소비'를 생각하면 과연 이 방침이 옳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니,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신자유주의적 소비 생활'에 빠져들고 있는 상황이니... 한번에 흐름을 바꿀 수 없겠지만, 이런 소비의 풍토에 작은 저항이라도 할 수 있는 이 민들레를 뿌려봄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하고.

 

이런 '윤리적 소비'에 관한 글도 마음을 움직이게 했지만, 무엇보다도 짠한 글은 농아인 대안학교 '소리를 보여주는 사람들'이란 글이었다.

 

왜 농아인들에게 우리와 같은 말을 하도록 강요를 하는가? 그들에게는 그들의 언어인 수화가 있는데... 오히려 그들이 자유롭게 수화로 대화를 할 수 있게 하고, 일반인들도 수화를 배워 함께 대화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들의 대화 방식을 인정하고, 일반인들이 음성언어로 이야기를 하듯이 그들 역시 수화로 대화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그런 다름을 다름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글...

 

지나치게 일반인으로 표준화된 대화 방식만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그들을 위해 인공귀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대화 방식을 먼저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 글이었으니.

 

다양함,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이고, 그것이 바로 민들레의 표어인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하는 그런 사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 글이다.

 

본질을 잊고 되는 대로 살아온 삶을 반성하게 하는 민들레다. 이번 호를 읽으며 많이 '뜨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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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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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의 작가, 위화... 그의 책 가운데 두 번째로 읽게 된 책이다. 이 책은 소설은 아니다. 사실을 기록한 책이라고 해야 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 이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될 당시까지는, 지금은 모르겠다 - 출판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나라에도 '금서'라고 읽혀서는 안될 책들의 목록이 존재했듯이 중국에서도 '금서(禁書)'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왜 금서가 되는가? 그것은 주류 사회를 비판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듣고 싶지 않은 것을 말하고, 읽고 싶지 않은 것을 쓰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건전한 비판은 사회를 발전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아는 지도자라면 금서를 지정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것들을 장려해야 한다. 그런 비판이 더이상 나오지 않도록 사회를 바꾸어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변에 자신과 비슷한 환경에서 지내 비슷한 눈과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렇게 다른 시각에서 비판한 글을 읽어야 한다.

 

이것이 지도자의 기본자세라고 생각하는데... 세계 강대국으로 발돋움한 중국도 아직까지는 이렇게 열린 자세를 지닌 지도자가 있는 사회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 잠깐 언급이 되지만 경제 발전과 정치체제 사이의 거리, 모순이 크게 존재하는 나라가 중국이기 때문이다.

 

위화는 이 책의 후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그가 이 책을 쓴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었을 때, 나는 진정으로 인생이 무엇인지, 글쓰기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 고통만큼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쉽게 소통하도록 해주는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통이 소통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사람들의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서 뻗어 나오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나는 중국의 고통을 쓰는 동시에 나 자신의 고통을 함께 썼다. 중국의 고통은 나 개인의 고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353-354쪽)

 

유마경에 나오는 구절처럼 세상이 병들었으니 자신도 병들었다는 말, 또는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나왔던 "아프냐, 나도 아프다."는 말... 그리고 영화 '터널'에서 오줌을 마셔도 된다는 전문가의 말에, 자신이 먼저 마셔보는 구조대장의 행동 등등.

 

타인의 아픔을 나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과 소통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민중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길 수 있는 지도자만이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수 있다.

 

과연 중국은 그랬는가? 중국은 커다란 아픔을 겪어왔다. 이 책에서 그런 커다란 아픔 중에서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 나온다. 위화의 생애에서 겪게 된 가장 큰 아픔. 그리고 중국을 바꿔놓은 고통 두 가지.

 

하나는 문화대혁명이다. 이는 위화가 어린 시절에 겪은 일이다. 또 다른 하나는 천안문 사태다. 이는 위화가 어른이 되었을 때 겪게 된 일이다. 이 책의 제목이 되는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는 말은 이 책의 첫번째 꼭지인 '인민(人民)'에서 나온다.

 

'그 전까지 나는 빛이 사람들의 목소리보다 더 멀리 전달된다고, 또 사람의 목소리는 사람의 몸보다 에너지를 더 멀리 전달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스물아홉 살이던 그 밤에 나는 내가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민이 단결할 때 그들의 목소리는 빛보다 더 멀리 전달되고 그들 몸의 에너지가 그들의 목소리보다 더 멀리 전달되는 것이다. 마침내 나는 '인민'이라는 단어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39쪽)

 

비극으로 끝난 천안문 사태, 그 비극 직전에 광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서 느낀 감정이 바로 위 글이다. 우리나라 촛불을 연상시키는 장면.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의 촛불을 통해서 이를 깨닫지 않았던가.

 

작은 촛불들이 모여 거대한 횃불이 되었는데, 이 때 이런 빛보다도 더 멀리 간 사람들의 목소리, 더 큰 에너지를 낸 서로 함께 한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에너지를.

 

위화 역시 이를 겪었고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 그의 경험이 자신의 작품 속에 잘 녹아들었다고 할 수 있다.

 

하여 이 책은 위화의 작품을 읽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겨우 허삼관 매혈기 하나만 읽었을 뿐이지만 이 책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들이 허삼관 매혈기에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마다 책을 읽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다른 작품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리라 생각한다. 여기에 민중에 대한 애정, 중국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도 있어서, 이 책은 위화가 살아온 중국 현대사를 자신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지만, 이것을 통해서도 중국이 만만치 않은 나라임을 알 수 있게 되기도 한다.

 

열 개의 낱말로 자신이 지내온 중국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인민, 영수(領袖), 독서, 글쓰기, 루쉰, 차이, 혁명, 풀뿌리, 산채(山寨), 홀유(忽悠)

 

이 단어들을 통해 그는 자신이 어린 시절에 겪었던 문화대혁명부터 현재의 중국까지를 우리에게 이야기해주고 있다.

 

그것이 어떻게 자신을 성장시켰는지도... 무엇보다도 이 책의 한국의 독자들에게 제목인 '5월 35일'을 읽으면 마음이 아파오기도 한다. 우리나라 광주민주화운동이 떠오르기도 하는, 황지우의 시 '묵념, 5분 27초'를 떠오르게 하는 제목이기 때문이다.

 

달력에 없는 날, 그러나 실제로 존재하는 날, 이것이 바로 위화 작품을 이루는 요소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 제목이다.

 

이 날은 '1989년 6월 4일'이다. 검열을 피하기 위해 만든 날... 민중들이 절대 잊지 못할 날. 여기를 기점으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위화는 사실에 기반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이 책은 소설이 아니다.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다시 위화 소설의 기반이 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위화 소설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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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의 무게

-용문사 은행나무 아래서


나는 보았다.


대웅전을

마주하고 있는

천 년의 무게를.

천 년의 세월을.


한과 한이

어우러져

온몸으로

한들을 싸안은 세월을.

그 약속을.


극락의 꿈을

키우며

버티어낸 인고의 세월.

한없는 기다림.


세월의 무게에

한들의 모임에 지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웅장함.

그 비극.


나는 보았다.


천 년의 세월을

극락의 꿈을 꾸던

세월의 무게를.

꿋꿋이 버티어 낸

우리들의 사랑을.


우리들의 영원한 기다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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