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 2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휴머니스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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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형제2 - 개혁개방기 길이 달라지다

 

고아가 된 형제가 이제는 성인이 되어서 길이 달라지는 장면이 2권이다. 이광두와 송강 형제가 외모만큼이나 다른 성격을 지니고, 삶의 방향도 완전히 달라지는 장면.

 

어쩌면 중국의 두 얼굴을 두 형제가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친형제가 아닌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 중국이 정치는 공산주의로, 경제는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방향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함께 하지만 한 핏줄은 아닌 것, 그러므로 이들의 길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 길이 달라졌지만 어렸을 때 겪었던 고통들로 인해 완전히 관계를 끊을 수는 없는 것. 이것이 바로 한 핏줄이 아닌 두 형제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이들 사이에 사랑이 개입한다. 임홍이라는 아름다운 여자. 두 형제의 관계를 파탄나게 하는 여자.

 

이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임홍. 남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이 여인을 두고 이광두는 적극적으로 구애활동을 한다. 하지만 이런 이광두에게 관심이 없는 임홍. 오히려 조용한 송강에게 마음을 주고.

 

송강은 이광두에 대한 형제애와 임홍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갈등을 하지만 결국 임홍을 선택한다. 이광두와 이렇게 헤어지게 되는 송강.

 

이광두는 자신에게 돈을 버는 재주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여러 사업을 벌이게 된다. 물론 처음부터 성공할 수는 없다.

 

마을 사람들에게 빌린 돈을 몽땅 날려버리고 그들에게 온갖 구박을 받기도 하지만 고물장사로 그는 다시 일어난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이광두를 도와주는 송강. 하지만 송강은 임홍과 헤어질 수 없기에 더이상 이광두와 관계를 맺지는 못한다.

 

고물장사로 돈을 벌기 시작하는 이광두는 일본에 가서 옷을 구입해와 떼돈을 번다. 이 장면이 참으로 해학적이다. 중산복을 벗어던지고 양복으로 복장을 바꾸는 중국인들. 일본 중고 옷을 가지고도 그 옷에 새겨진 이름들을 보고 마치 자신들의 신분인양 으스대는 모습들. 일반 민중들만이 아니라 향장을 비롯한 관료들도 그러한 모습을 보이니...

 

이광두에게는 그야말로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는 양아치, 개망나니이긴 하지만 의리는 있다. 날려버린 마을 사람들의 돈을 빚이라 생각하고 돈을 벌자 이자까지 붙여 갚아주고, 그들에게 돈을 더 벌 기회를 주고자 한다.

 

또한 송강이 진실하게 살 것을 알고 그에게 자금 관리를 맡기고자 한다. 자본주의 삶에 완전히 녹아든 이광두의 모습. 그러나 형제를 잊지 않고 있는 모습이다.

 

송강은 이를 거절한다. 그에게는 이제 이광두와 더이상 얽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내인 임홍이 싫어하기 때문. 또한 그는 자본주의적 사고보다는 공산주의적 사고에 더 익숙한 사람. 나라에서 주어진 일을 하면서 착실히 살아가고자 한다.

 

이렇게 형제의 길은 달라진다. 2권에서는 주로 이광두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어떻게 돈을 버는지... 이 돈을 버는 과정은 우리나라 재벌의 탄생과 별다를 게 없다.

 

미약한 처지에서 시작하지만 권력과 유착하여, 그것도 외국의 물품을 싼 값에 사들여 비싼 값에 파는 유통을 통한 자본의 축적. 그 다음에는 생산으로 나아가는 것. 이광두 역시 고물 사업에서 다른 사업으로 확장한다.

 

자본의 냄새를 귀신같이 맡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개방기 중국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반면에 송강처럼 자본의 냄새를 맡지 않고 그날그날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이런 생활의 차이가 결국 그들의 경제적 차이를 빚어내고 마는데...

 

중국에 2006년에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스촨성에 갔었는데... 그때 중국은 우리나라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가 한 성에 공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같은 논인데도 어떤 데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력이나 소를 이용해 경작을 하고, 어떤 데서는 트렉터를 이용해 경작을 하는 등 엄청난 차이를 보였고, 낡아서 곧 쓰러질 것 같은 집과 으리으리하게 높은 아파트가 함께 있는 그런 사회.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나? 공산주의를 표방하면서도 돈이 있고 없고에 따라 이런 차이가 있나? 이것이 개혁개방의 결과구나 하는 생각.

 

이런 개혁개방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사람들, 권력과 경제력이 어떻게 유착하는지, 부패해가는 관료들의 모습 등을 이 소설 2권에서 만나볼 수 있다.

 

정치권력이 우세했던 문화대혁명기를 다룬 것이 1권이라면 경제권력이 우세를 점하기 시작하는 개혁개방기를 다룬 것이 바로 2권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3권은... 경제권력으로 완전히 넘어간 중국의 모습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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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의 죽음을 꿈꾸며

- 어느 먼 앞날에 알량한 생각의 권리는 무덤 속으로 가고, 우린 좋은 건 무조건 함께 갖고 느끼게 되었나니


좋은 건 나누자.

내 것, 네 것이 아니라

우리 것.

함께 하는 것일 뿐이다.

함께 읽고, 느끼고

권유하는 것

왜 가운데 돈이 있어야 하나.

쓸모를 살리고

돈에서 벗어나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보게 하자.

줄 수 있다는 것,

대가 없이 그냥, 그냥,

좋아서 준다는 것

사람이 사람인 이유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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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온 2018-01-17 0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좋은 것을 만드는 것이 생업이고 그것으로 생존을 지탱받는 예술가, 창작자들을 위해서는 필요하죠. 너무 낭만적인 생각이에요.

kinye91 2018-01-17 08:21   좋아요 1 | URL
너무 낭만적인 생각이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들의 생존, 생활에 필요한 대가는 반드시 지불해야 하죠. 물론 돈을 떠나 재능을 기부하는 사람들도 많고요. 하지만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해요. 저작권이라는 것에 너무 옭아매여있지 않나 하는...

2018-01-17 0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1-17 1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형제 1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휴머니스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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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형제1 - 문화대혁명기 고아가 되다

 

위화의 글은 읽기에 편하다. 간결하면서도 해학이 넘치는 문체가 편하게 읽게 만든다. 그는 비극을 다루면서도 비극에 온 마음이 빠져서 허우적대게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비극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의 소설은 우리나라 고전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해학'이 있다. 슬픔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삶.

 

위화는 중국 현대사를 비켜가지 않는다. 그는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를 정면으로 다룬다. 그럼에도 소설이라는 문학을 충분히 활용한다.

 

문화대혁명기때 중국인이 겪어야 했던 갈등, 혼란 등을 소설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는 있지만, 그것에만 매몰되지는 않는다. 그런 혼란 속에서도 사람이 있다는 것,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삶은 어떤 시대에도 있었다는 것.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위화의 수필이 중국에서 출간이 되지 않고 있지만, 이 소설 '형제'는 출간이 되었다고 한 글을 읽었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소설이기 때문이다.

 

소설이 아무리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소설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은 문학이기 때문에 허구라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허구는 곧 사실이 된다. 문학적 허구는 문학적 진실이고, 이는 우리에게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소설을 이제 막 1권을 읽어서 뒤의 내용이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지만, 1권은 문화대혁명기를 중심으로 그것이 사그러질 때까지 어머니인 이란의 죽음까지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은 이광두. 그리고 그의 형제 송강. 왜 성이 다른 사람들이 형제일까 했더니 어머니 이란이 송범평과 재혼을 했기 때문이다.

 

송범평의 죽음과 어머니 이란의 죽음을 관통하는 문화대혁명이 1권의 배경이다. 이웃으로 지내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죄인이 되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

 

처음에는 단죄하는 처지에 있던 사람도 어느 순간에는 죄인의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을 장발 손위와 그의 아버지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데... 문화대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비인간적인 행동들이 자행되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도대체 혁명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이 골고루 잘 사는 사회, 그들이 행복하게 웃으며 사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혁명을 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의 과거를, 출신성분을 가지고 그를 죄인 취급하는 것이 혁명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 질문을 하게 하는 1권이다.

 

교사로 동네에서 인정받고 착하게 살고 있던 송범평, 그는 어느 순간 죄인으로 전락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지주 집안 출신이라는 것이다. 이런 연좌제... 과거의 끈을 벗어던져도 자신을 옭아매는 집안 내력.

 

그의 죽음은 충분히 비극적이다. 이런 비극을 겪는 두 아이, 이광두와 송강은 이 비극에 온몸이 젖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 어린 나이에 이런 일을 겪기 때문이다. 아버지 송범평이 잡혀가 온갖 고초를 겪게 되는 장면에서도 너무도 천진한 이들 형제의 말과 행동때문에 우리는 비극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게 된다.

 

송범평의 죽음 이후에 어머니는 그와의 사랑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 그러나 어머니 이란 역시 오래 살지 못한다. 송범평의 죽음 이후 7년 뒤 어머니 이란 역시 아들 이광두의 앞날을 걱정하며 송강에게 이광두를 잘 보살피라고 하면서 죽음을 맞이하는데.

 

동네 양아치인 이광두이지만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지극하고, 이런 이광두를 한 살 많은 송강이 잘 돌봐주겠다고 이란의 무덤 앞에서 다짐하는 장면으로 1권은 끝난다.

 

그런데... 소설은 이미 늙은 이광두의 시점에서 시작하고 이다. 그리고 곧장, 한 쪽이 지나자마자 과거로 돌아가 버린다.

 

소설 처음에서 이광두가 억만장자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에게는 이제 남은 가족이 아무도 없다. 송강 마저 3년 전에 죽었다고 나오니.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남겨줄 가족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소설은 이광두의 과거 이야기로 시작하고, 전개된다. 우리의 양아치 이광두가 어떻게 성인이 되어 억만장자가 되는지, 그것과 중국 현대사를 연결지으며 읽으면 된다는 생각이 든다.

 

2권과 3권에서는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는 중국의 모습, 그 속에서 적응해가는 이광두의 모습이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

 

과연 중국은 문화대혁명을 적절하게 극복했는지... 그들은 모두가 골고루 행복한 사회를 만들었는지 질문을 하면서 읽어야겠다. (위화가 쓴 머리말을 보면 이미 답은 정해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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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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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말한다. 자신의 삶을 소설로 쓰면 대하소설은 충분히 된다고. 그렇게 우리네 삶은 모두들 자기만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특히 격랑의 한국 현대사를 살아온 사람들은 소설보다도 더 진한 이야기를 살아온 사람들인데, 이들의 이야기가 곳곳에서 소설로, 영화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때로는 진한 슬픔을, 때로는 가벼운 웃음을, 때로는 쓴 웃음을 지닌 그런 이야기들이 우후죽순처럼 나오고 있는데...

 

김훈이 쓴 이 소설 역시 우리나라 현대사를 살아온 가족의 이야기다. 마동수-마차세 부자를 중심으로 소설이 전개되는데...

 

일제시대에 태어나 박정희가 죽은 해에 죽은 마동수는 흥남철수 때 가족과 헤어진 이도순과 만나 마장세, 마차세를 낳는다. 그러나 마동수는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머무를 곳을 찾지 못해 평생을 떠도는데, 그래도 정기적으로 집에는 들어오지만 그가 정착했다고는 할 수 없다.

 

죽음의 순간에도 홀로 죽어가는 그는 평생을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어렸을 때는 일제시대라 제 장소를 찾지 못했고, 해방이 되어서는 전쟁이다 뭐다 하여 다시 변방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삶.

 

이도순 역시 마찬가지다. 피란민이라는 존재는 이미 밀려난 존재다. 이들은 자신들이 영원히 머무를 장소를 마련하지 못한다. 비록 남쪽에서 가정을 꾸렸을지라도 정신을 잃어가는 치매 상태에서 이도순은 피란 올 때 잃어버린 딸을 찾기만 한다.

 

죽을 때까지 살아온 남쪽이 이도순에게는 정착한 장소가 아니라 언제든 비워주어야 할 공간에 불과했던 것이다.

 

본래 살던 곳이 서울이었던 마동수가 일제시대와 전쟁을 통해 장소를 잃었다면, 이도순은 피란으로 장소를 잃었다.

 

장소를 잃은 사람들이 잠시 머무르던 곳, 그 공터에서 태어난 형제, 마장세-마차세. 이들 역시 부모들의 삶과 다를 것이 없다.

 

본디 가진 것이 없으면 정착하기 힘들다. 큰아들 마장세는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외국에 남아 산다. 그에게 한국은 '거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가 살고 있는 동남아 역시 그가 머무를 장소는 되지 못한다.

 

그곳 역시 그에게는 '공터'에 불과하다. 잠시 머무는 곳. 그래서 그는 한국으로 압송되어 감옥으로 가게 되는데.. 이것이 그의 귀향이다. 귀향이라고 해도 그는 역시 머무르지 않는다. 교도소가 평생을 사는 곳도 아니고, 이곳 역시 머무르다 떠나야 할 공터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래도 끊임없이 장소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보이는 이가 바로 둘째 아들 마차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그는 자신에게 얽혀 있는 인연의 끈들로 인해 괴로워하지만, 그렇다고 형처럼 그 끈을 끊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공터'를 '장소'로 만들어가야 할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의 아내가 되는 박상희와 첫딸인 '누니'다.

 

하얀 눈이 오는 날 태어났다고 해서 누니라고 붙인 이름. 그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세상의 때를 덮는 눈처럼 맑고 깨끗한 세상이어야 한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공터를 '장소'로 만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이 역시 쉽지는 않다. 마차세가 직업을 잃고 임시직으로 다시 배달일을 하는 데서 소설이 끝나는 것은 이들이 공터를 장소로 만드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암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설 제목은 '공터에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때 공터는 바로 우리가 살아온 우리나라, 그리고 우리나라 현대사인 것이다. 이것이 장소가 아니고 공터인 것은, 우리 모두 이 공터의 주인인 것처럼 살아왔지만, 실상 우리는 잠시 머물다 떠나는 사람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공터는 곧 빈곳이고 진공이다. 무엇이나 다 빨아들이는 진공, 그러나 진공은 다시 뱉어내야 자신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공터'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누구도 머물 수 없는 곳이다. 우리 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역사의 주인이라는 것은 자만에 불과하다. 우리는 잠시 머물다 갈 뿐이다.

 

그걸 모르고 자신이 그 공터의 주인인 양 행세했던 마차세의 친구이자 사장이었던 오장춘의 최후는 비참할 뿐이다. 역사에 영원히 머무를 수는 없으니, 그는 죽음으로 퇴장할 수밖에 없다.

 

이런 공터에서 가족이라는 인연으로 묶인 끈은 무엇보다도 질기다. 쉽게 끊기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마장세가 그토록 부정하고 버리고 싶었지만 버리지 못했던 것, 마차세 역시 그 관계를 버릴 수가 없다.

 

공터가 이어주는 그런 관계들, 역사들... 그 속에서 조금씩의 변화는 일어나겠지만 공터가 없어지는 변화가 일어나기는 힘들다. 그러니 힘겨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계속 힘들게 살 수밖에.

 

이게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민중들이 살아온 모습이다. 그런 모습을 김훈은 그의 간결한 문체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문체의 간결성, 전혀 끈적거림이 없는 그의 글들로 인해 마치 한 편의 파노라마, 그것도 현재진행형이 아닌 이미 끝난 과거의 일들을 아무 감정 없이 그대로 전달해주는 느낌을 받게 하는 소설이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거리를 두고 살필 수 있는 소설이라고나 할까. 소설의 인물들에게 감정이 들어설 수 없게 만들고 차분히 우리나라 현대사를 살아온 사람들의 모습을 멀찍이 떨어져서 보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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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전히 농익음을 거부함. 그것은 바로 끝이기 때문이다. 더이상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더이상 발전이 없게 될 때, 그때는 썩어들어갈 수밖에 없다. 사라져야 함. 사라지지 않고 버티게 되면 그것은 추함에 불과하다.

 

  사과를 빨강과 일치시킨다. 빨간 사과, 빛에 반짝이는 그 붉은 빛을 보면 잘 익었다고 생각한다.

 

  잘 익은 사과, 땅과 하늘과 바람과 사람의 노력이 한데 모여 결실을 이룬 것.

 

  이 결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잘 익음이 얼마나 중요한가. 잘 익어서 다음을 이루는 것들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럼에도 개인으로 보면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함께 가는 것을 거부할 수도 있다. 모든 사과가 빨개야 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최문자의 시를 읽으면서 개인이 추구하는 목표는 다양할 수밖에 없음을, 그 다양함을 인정해야 함을 생각한다.

 

어쩌면 지나치게 한 방향으로만 달리게 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이 시를 통해 부정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태양과 푸른 사과

 

푸른 사과만 열리는 사과나무 한 그루 심고

푸른 사과가 열리기를 기다려 왔다

끝내 타지 않으려는 껍질과

끝내 웃지 않으려는 슬픔이

새파랗게 앙다물고 있으면

반드시 붉어진다는 사과들의 가설을 어기고

붉은 사상들을 지나

혼자만 새파란 얼굴 지킬 거라고

푸른 사과를 기다려 왔다

 

푸른 사과만 골라서 사 먹은 적이 있다

뜨겁게 졸이면 무작정 붉어지는

맹목의 순종이 섬뜩해서

전에는 풀의 열매였을지도 모를

풀의 기억 하나만으로

발개지지 않는

사과의 푸른 정신을 사 먹었다

태양을 절취한 둥근 손바닥에

어지러운 듯한 짙푸른 사과 향

태양보다 그걸 더 사랑했다

나는

 

최문자, 사과 사이사이 새, 민음사. 2012년. 100-101쪽

 

세상은 이렇게 주류에 반대해 자신을 지키는 사람들에 의해 더 다양해진다. 이런 사람들로 세상이 더 살 만해진다. 그렇게 다양함, 그것을 찾고 알려주는 일, 시인이 한다.

 

모두가 한 방향으로 갈 때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그곳으로 갈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도 존중받는 그런 사회, 그것이 바람직한 사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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