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무너짐

- 삶과 죽음


선이 있다고

명확한 경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삶을 충실히 살고,

죽음을 향해 가야한다고,

한 면과 다른 면이

같지 않다고,

만나지 않는다고,

선을 넘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안과 밖이

하나임을,

한 쪽을 달리다 보면

이미 

다른 쪽에 와 있음을,

선과 선이

엉켜있음을,

삶이 곧 죽음인 것을

나이 들어

비로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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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4 09: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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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4 09: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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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비밀
홍명진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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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편의 단편소설들이 묶여 있는 소설집이다. 다른 내용들이지만 소설을 흐르는 주된 흐름은 상처받은 사람들의 삶이다.

 

자기만의 방을 갖고 싶은 사람,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 사회에서 소외되고 상처받은 사람들, 불현듯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위기에 처한 사람 등등.

 

하나같이 우리 사회에서 중산층 이하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나온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정규직 비율이 50%가 안 되는 나라에서,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직장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 - 이것은 곧 생계와 직결이 된다 - 한창 경제활동에 종사해야 할 사람들도 이렇듯 실직의 위험을 곁에 두고 있는데, 이보다 나이 든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삶을 허덕이며 유지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고, 이 과정에서 받은 상처들이 자신의 삶을 환하게 드러내지 못하게 하고 있다.

 

첫번째 소설에서부터 그런 모습이 나타난다. 자원봉사로 야간에 전화상담을 하는 주인공이 나오는 소설 '사소한 밤들'

 

주인공 역시 비정규직으로 생활하다가 해고가 된 뒤에 자원봉사로 상담활동을 한다. 상담활동을 할 때는 마치 다 안다는 듯이 말해서도 안되고, 가르치려는 듯이 이야기해서도 안된다. 그냥 말하는 사람에게 곁을 주면 되는 것이다.

 

말할 틈, 말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게 들어주는 일, 남의 상처를 터뜨리지 않고, 그렇다고 그 상처를 무시하지도 않고 그냥 온전히 받아들이는 일.

 

상담자원봉사를 하는 주인공은 이것을 깨닫는다. 이렇게 남의 상처 곁에 조용히 머무를 수 있다는 것, 자신의 상처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시간'에서는 죽음으로 떠나간 동창생 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않았던 친구들. 그들은 같은 시간을 살았지만, 같은 공간에 있기도 했지만 함께 했다고 할 수가 없다.

 

결국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함께 지내기는 했지만 서로에게 열려 있지 않았기에, 자신들만의 시간을 살았기에 이들이 함께 한 시간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시간이 된다는 것 아니겠는가.

 

육체적으로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함께 한다고 할 수 없음을, 동창생들의 삶을 통해 알려주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렇게 형식적으로 함께 보내는 시간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마음과 마음이 통하지 않을 때 어떤 삶이 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소설이 바로 '조용한 생'이다. 주인공 순조는 소박하고 조용한 생을 원했지만, 보여주는 삶을 추구하는 그의 아내 모란과는 맞지 않는다.

 

이러니 이 부부는 함께 살고 있지만 함께 살고 있지 않은 그런 생활을 하게 된다. 이것이 어쩌면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곁에 있는 사람의 상처를 보아줄 시간, 마음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관계가 아닐까 한다.

 

제 상처가 있지만 다른 사람의 상처를 제 상처처럼 아파할 수 있는 사람도 있음을 '당신의 비밀'에서 보게 된다.

 

삼남매를 키웠지만 늘그막에 홀로 지하방에서 사는 노인. 그에게 자식들은 애물단지다. 그러나 그런 애물단지라도 자신에게는 귀한 자식일 뿐. 그런 점을 옆집에 사는 성범죄자를 자식으로 둔 엄마를 보면서 동병상련의 아픔을 겪는 주인공.

 

그렇다. 세상 모든 부모들에게 자식은 그냥 자식일 뿐이다. 아무리 사회에서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부모에게는 사랑스런 자식일 뿐. 자식들의 상처를 감싸주고 싶을 뿐.

 

이런 자신의 마음을 자원봉사자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식들이 다른 사람의 입질에 오르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부모의 마음을 제대로 아는 자식이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 이렇게 소설집에 나오는 소설들은 각자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나온다. 그리고 주로 자신의 상처를 통해 다른 사람의 상처를 보게 된다.

 

'마순희'라는 소설이 그렇다. 청각장애인인 마순희를 통해 주인공은 자신의 상처를 보듬게 된다. 동종요법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은 마순희가 그럼에도 제 삶을 사랑하는 모습을 통해 주인공은 자신의 삶을 바로 보게 된다.

 

'해피크리닝'에서 아무런 대가없이 상처를 보듬는 모습이 나오고, '너무 멀리 가지 마'에서 결국 능선을 넘지 않는 모습, 저 멀리에서 자신의 삶을 다시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곳에서 내 삶을 살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는 모습이 나온다.

 

상처, 외면하고 싶지만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 내 상처든, 남 상처든 그 상처를 인정하고 함께 할 수밖에 없음을. 그래서 그냥 상처를 껴안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 삶임을.

 

소설을 읽으며 이런 상처입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럼에도'라는 말을 떠올리며 상처를 보듬고 함께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함을 생각했다.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책이다. 즐겁게 잘 읽었다. 우리들 삶을 이렇게 보여주는 소설, '삶창'다운 소설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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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3 17: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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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3 17: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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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 - 일리노이 주립대 학장의 아마존 탐험 30년, 양장본
다니엘 에버렛 지음, 윤영삼 옮김 / 꾸리에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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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기독교를 선교할 목적으로 아마존 밀림 지대에 살고 있는 피다한 족을 찾아가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함께 생활한 사람의 이야기.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하면 끝인데, 여기에 기독교와 원주민들의 신앙, 그리고 언어에 대한 이론이 겹쳐져 여러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럼에도 간단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그가 들어가 산 마을인 피다한 부족들의 언어는 지극히 간단하니까 말이다. 말을 길게 할 필요가 없다.

 

원주민을 선교할 목적으로 그들의 언어를 배웠지만,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면서 선교보다는 그들의 삶의 방식이 옳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즉, 그들과의 생활은 저자의 생활과 신념을 바꾸었다. 이것이면 된다.

 

저자인 다니엘은 젊은 나이에 가족을 이끌고 피다한 마을로 들어가 그들의 말을 배운다. 그들의 말을 배우는 목적은 단순하다. 그들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읽게 하는 것.

 

결국 성공한다. 그는 피다한 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게 되고, 피다한 말로 마가복음을 번역한다. 그들에게 녹음하여 들려주기도 한다.

 

그런데 결과는? 피다한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다. 오히려 더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예수는 직접 경험한 사람이(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직접 경험한 일만을 믿는 그들에게 기독교 성경은 허황된 이야기다.

 

그러니 선교는 실패할 수밖에. 선교가 실패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저자인 다니엘은 자신의 믿음이 흔들린다. 이들에게 어떤 결핍을 깨닫게 해야 하는데,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그들은 직접적인 경험을 믿고 또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다. 죽음도 그들 삶의 일부다. 죽어가는 사람을 억지로 살리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이 이겨내지 않으면 죽을 뿐이다. 이런 그들에게 내세를 가르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과연 내세를 위해 현세를 고민하며 사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저자인 다니엘은 기독교를 포기하고 만다. 그 결과로 가족들을 잃었을지라도, 그는 문화의 다양성, 신념의 다양성, 언어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남에게 강요한다.(?) 그들은 절대로 강요라고 하지 않지만, 자신의 믿음이 옳고, 자신의 신은 절대진리라고 하고, 다른 신들은 우상이고, 다른 믿음은 미신이라고 여긴다.

 

여기에 다양성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오로지 하나로 수렴하는 운동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로 수렴하기 위해서는 다양함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함을 포기하게 해야 한다. 수천 년, 수백 년 살아오면서 형성한 믿음, 다양성들이 한 순간에 포기되겠는가.

 

그렇다면 더 큰 힘이 작동하게 된다. 다양함을 단순함으로 수렴하는 데는. 그것이 오랜 시간에 걸친 선교사들의 희생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다고 해도, 거기에는 폭력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결국 선교활동은 폭력일 수밖에 없다. 잘 살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잘살지 못해, 너희는 불행해!라고 끊임없이 강요하는 활동이 아무리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다고 해도 그건 폭력에 불과할 뿐이다.

 

다니엘은 결국 이 점을 깨닫게 된다. 그가 기독교를 포기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는 피다한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생활한 것이다. 피다한 사람들의 말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같은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 책에도 나와 있는데..

 

"피다한 사람들은 풀을 먹지 않아. 네가 우리말을 잘하지 못하는 건 그것 때문이다. 우리 피다한 사람은 우리말을 아주 잘하지. 우린 풀을 먹지 않아." (372쪽)

 

피다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말은 자신들처럼 사는 생활 속에서, 또는 다른 피다한 사람들과 맺는 관계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자신들처럼 생활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들의 말을 한다고 해도 진정으로 말을 할 줄 아는 것이 아니다. 마이시 강 유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려한 마코 앵무새처럼 그저 '소리'를 따라 흉내 내는 것일 뿐이다. 혹은 전화기에 녹음된 메시지처럼 정해진 말만 되풀이하는 것으로 간주할 뿐이다. 그들이 보기에 나는 영리한 앵무새나 녹음된 전화메시지에 불과했다. 이방인인 나는 진정으로 자신들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러한 피다한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서 언어와 문화의 관련성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373쪽.

 

이런 고민들이 이 책에 잘 나타나 있다. 자신이 피다한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을 이해하고 공감해가는 과정. 결국 자신의 신념을 되돌아보는 과정.

 

이것은 다양성을 인정한다면서도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단순함으로 수렴하려던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심지어 자신의 종교까지도.

 

그는 가족을 잃고, 친구를 비롯한 문명의 많은 것을 잃었을지도 모르지만, 사람이 어떻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기도 하고.

 

피다한 원주민들에게 어떻게 다가갔고, 그들과 생활하면서 겪은 일들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단 책의 뒷부분에 언어-문법 이론에 관한 내용은 읽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한다.

 

전문적인 언어학자인 저자와 언어학자와는 거리가 먼 우리의 차이를 인정한다면 이 부분은 과감히 생략하는 것이 더 좋겠다. 촘스키의 문법이론부터... 너무도 전문적인 문법이론이 나오는데... 그냥 피다한 사람들의 삶에 저자가 어떻게 동화되어갔는지를 살피면서 읽으면 더 좋은 책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이미 지구촌이라는 말이 통할 정도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연결이 다양성을 인정하고 살리는 쪽이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다. 점점 다양성을 잃어가고 있는 이 세계에서 다양성이 왜 중요한지 이 책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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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2 10: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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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2 11: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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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시다."

 

  이렇게 주장하고 싶다. "이것은 절대로 현실이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싶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파이프를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제목을 붙이면, 당연하지 그건 그림이지 무슨 파이프야 하고 대답을 할 수 있는데...

 

  이 시를 보면 '이건 시야, 현실이 아니야!'라고 말을 할 수가 없다. 시 속의 표현이 너무도 현실이다.

 

  얼마 전 영화 "1987"이나, "남영동 1985"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이들 역시 영화일 뿐이라고 하면 되겠지만, 아니다. 영화는 사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사실로 밝혀지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것은 시다. 현실이 아니다. 왜냐, 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연 이런 고문만 고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갑자기 '일기장 악몽'이 아니라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의 악몽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일기장 악몽

 

또 잡아갈라 또 탈탈 털어가서는

시월 이십구일 다섯시부터 일곱시 사이에 뭘 했는지

시월 한달 뭘 했는지 하나도 빼지 말고 전부 쓰라고

언제 어디서 누구하고 무엇을 육하원칙대로 쓰라고

 

속을 들여다보는 눈빛을 하고 다 안다는 눈빛을 하고

때가 되면 육개장을 된장국을 먹여가며 을러가며

다시 쓰라고

또 다시 쓰라고

 

콧속으로 물이 입으로도, 비명을, 숨이 ……비명을,  ……컥!

칠성판에 묶여 개구리처럼 빠둥거리다

넙치처럼 도다리처럼

오줌을 싸며 기절하는 거 아닐까

모를 리 없다고 모를 리가 없다고

잘 생각해보라고

친구 꾐에 빠졌을 뿐

너는 억울한 줄 우리가 잘 안다고

그러니 솔직히 그놈이 뭐라고 했는지

그놈이 무슨 생각이었는지 말해보라고

 

식은땀 흘리며 벌떡 깨네 벌써 삼십년

말발타 살발타!

 

김사인, 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 2016년 초판 7쇄. 106-107쪽. 

 

이제는 이런 고문은 사라졌다. 이건 시에 불과하다. 이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직접 육체에 고통을 가하는 고문은 적어도 우리나라 경찰, 검찰에서는 사라졌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더욱 교묘한 고문이 남아 있다. 그것은 법의 이름으로 없는 사람을 고문한다. 시위했다는 이유로, 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날아드는 고문. 이 고문은 법의 이름을 하고 있고, 법의 이름으로 집행이 된다.

 

그리고 법망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일반 서민들은, 힘없는 민중들은 법망에 갇혀 꼼짝없이 고통을 당한다.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까지도, 주변 사람들까지도.

 

합법적으로 이루어지는 고문, 그것은 바로 소송이다. 손해배상 청구다.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법을 이용하게 만드는 교묘한 고문.

 

그리하여 손해배상 청구라는 고문은 민중을 여전히 공포 속으로, 절망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자신의 몸에 가해지던 고문은 홀로 감내하고 어떻게든 버텨내려 하기도 했지만, 이건 법의 이름으로 가족의 파탄을 이끌어내니 견딜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시가 아니다. 우리 현실이다. 다른 쪽으로 본다면 삼십년 전에 신체에 가해지는 고문은 사라졌을지 몰라도, 법의 이름으로 생활에, 생존에 가해지는 고문은 여전히 살아 있다.

 

불행하게도. 이 시를 지나간 과거를 회상하며, 마치 군대에 갔다 온 사람이 다시는 군대에 갈 일이 없지만 꿈에서 군대에 다시 가는 꿈을 꾼 것처럼 그냥 웃으며 지나갈 수가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또다른 고문도 없어져야 한다. 약자들에게 가해지는 생존, 생활 고문. 그것은 법의 얼굴을 하고 있으므로 더 무섭다.

 

거기까지 나아가야 한다. '고문'에 대해 생각할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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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0 08: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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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20 10: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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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3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휴머니스트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형제3 - 자본 중국을 점령하다

 

2권까지 경쾌하게 읽혔던 소설이 3권에 와서는 무거워졌다. 그만큼 중국 현대사가 쉽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해학적인 면에서 풍자로 넘어가는데, 풍자는 사실 사회비판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비판하기 위해서는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마주쳐야 하기 때문이다.

 

돈때문에 사람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아무리 가벼운 표현으로 서술한다고 해도 읽는 사람 처지에서는 무겁기 그지 없다. 그것이 사람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참으로 암담하기 때문이다.

 

돈을 번 이광두가 류진이라는 마을을 완전히 장악해 가는 과정이 2권이었다면, 이제 3권에서는 경기가 끝났다. 이광두의 장악은 완료되었으며, 사람들은 점차 돈의 노예가 되어 간다. 여기에 사회주의적 인간, 또는 보편적 인류애를 구현하는 인간은 없다.

 

두 형제 중 송강의 편에서 이 3권을 보면 송강의 죽음은 필연적이다. 그는 이런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자의든 타의든 그는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 작가가 그를 자살로 이끈 것은 당연한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현실이니까. 그는 죽어서 자신의 순수함을 지켰다고나 할까... 사실 자신의 아내 임홍을 위해 그 역시 자본주의의 한 쪽면을 담당하기도 했다. 돈을 위해서 자신의 양심을 파는 행위.

 

하지만 오래 하지 못한다. 그는 여전히 순수한 사람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은 자본이 득세한 사회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죽음과 함께 퇴장하는 송강.

 

그의 죽음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과연 얼마나 갈까? 이미 되돌릴 수 없을 지경으로 자본의 맛을 본 사람들은 다시 옛날로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지금이 얼마나 편리한데 왜 불편한 과거로 돌아가려 하겠는가. 그러니 자본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된다.

 

송강의 아내 임홍 역시 마찬가지다. 순수했던, 사랑을 추구했던 여인이 육욕에 눈 뜨고, 자본의 맛을 알게 되니, 성을 상품으로 자신의 이윤을 불려가는 삶을 산다.

 

송강의 죽음으로 이제는 순수함이란 사라져 버린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3권은 자본의 완전한 승리로 끝난다. 현대판 불가사리가 등장한 것이다. 이 불가사리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은 돈에 얽매이지 않은 생활을 되살려야 한다. 공동체, 인류애, 상호부조 등등.

 

이것이 얼마나 먼 길인지 소설은 '그리고 남은 이야기'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이 사회에 잘 적응해 살아가고 있는지를.

 

그래서 읽기에 불편하다. 해학은 슬픔 속에서도 웃음을 유발해서 마음이 편해지는데, 풍자는 웃음을 유발하기보다는 분노를 유발한다. 이렇게밖에 할 수가 없는가 하는.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의 높은 벽에 절망하기도 하고.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두 형제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소설인데... 정치가 우세한 과거에서 경제가 우세한 현재로... 과연 어떤 삶이 행복한가 하는 질문을 하게 한다.

 

마치 최인훈의 광장에서 '밀실과 광장'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삶에 대해, 사회에 대해 성찰하게 했다면, 이 소설은 '정치와 경제'에 대해서,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도대체 정치와 경제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성찰하게 한다.

 

작가인 위화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두 시대가 만난 이후 태어난 소설이다. 앞부분은 유럽으로 치자면 중세에 해당하는 문화대혁명 시기의 이야기이고, 정신의 광기, 본능을 억압하는 처참한 운명의 시대에 관한 이야기다. 뒷부분은 현재에 관한 이야기다. 오늘날의 유럽보다 더한, 윤리가 전복되고 경박한 욕정을 추구하는 만물군상의 시대. 한 서양인이 사백 년을 살아야 경험할 수 있는 양극단의 시대를 한 중국인이 겪는데 걸린 시간은 겨우 사십 년. 사백 년간의 온갖 풍파와 천변만화가 이 사십 년에 농축되어 있다. 이것은 매우 진귀한 경험이다. 그리고 이 두 시대를 연결하는 것이 바로 형제 두 사람이다. (314쪽)

 

이것이 어찌 중국에서만 일어난 일이겠는가. 우리나라도 중국과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래서 이 소설은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금은 자본이 기승을 부리는 시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보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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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9 09: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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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9 12: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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