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눈처럼


사랑은

이처럼 왔으면


나에게로 

단 한 번에 오지 않고

이길 저길 다니면서

부드럽게

소담스럽게

하얀 미소를 띠고

나에게 닿았으면


격하게 

온몸을 내던지는

길은 오직 하나

나를 향해 돌진하는

비처럼

닿자마자

나를 상처내고

저도 상처받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나도 즐겁고

남도 즐거운

사랑은,

눈처럼 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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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4 09: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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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4 10: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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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출판사에서 시집을 500권을 내기 힘든데... 게다가 40년 동안 쉬지 않고 시집을 냈으니.

 

500호 기념 시집이라고 해야 한다. 그동안 발표된 시집 중에서 사람들에게 많이 읽힌 시집을 고르고, 그 중에서도 다시 두 편 정도를 골라 총 130편의 시를 모아 놓은 시집이다.

 

어느 시를 읽어도 출간될 당시 꽤 읽혔던 시들이고, 지금도 꽤나 알려진 시들이다.

 

이 시들을 엮으면서 엮은이는 황지우의 시(이 시집에도 수록되어 있다. '게 눈 속의 연꽃'이란 시다)에서 구절을 따와 제목으로 삼았다.

 

내가 그대를 불렀기 때문에, 이는 독자가 시를 불렀기 때문에 시집들이 이렇게 계속 우리 곁에 머무를 수 있다는 의미도 되고, 시가 독자들을 불렀기 때문에 독자가 시를 떠나지 않았다는 의미도 된다.

 

이렇게 시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고 힘들어도 시는 우리 곁에 있다. 시집을 엮은이는 이렇게 말한다.

 

시를 읽거나 쓰는 일이 우리의 삶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만들지는 못해도,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도록 할 수는 있었던 것이다. (256쪽)

 

그렇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 우리 곁에 시가 있게 된 이유겠다. 또한 우리가 끊임없이 시를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고, 시가 우리를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 즉 가능성을 보고 살아가는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 아니던가. 그런 가능성을 믿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시라는 것.

 

그런 역할을 충실히 한 시들이 여기에 있다. 꽤나 긴 시간에 걸친 시들이니, 공통점과 더불어 차이점도 느낄 수 있다. 천천히 시 하나하나를 음미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시집이 우리를 부르고 있으므로, 우리도 읽어줌으로써 다시 시를 불러내야 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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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와 르네 샤르의 편지
알베르 카뮈.르네 샤르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의숲 / 2017년 11월
평점 :
품절


'지음(知音)'이라는 말이 있다. 자신의 속마음을 알아주는 친구. 음을 알듯이 마음을 아는 친구가 있음은 그야말로 행복이다.

 

이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논어에서도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면 그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멀리서 찾아오는 나를 알아주는 친구. 그런 친구가 있음은 기쁨이요, 행복이다. 세상에 자신을 알아주는 친구를 단 한 사람이라도 만났다면, 그런 친구가 있다면 인생 제대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알베르 카뮈는 우리에게 '페스트'나 '이방인'의 작가로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이 소설들 말고도 '시지프의 신화, 반항하는 인간'으로도 알려져 있고. 무엇보다도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으로 더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노벨문학상에 전세계가 열광하지만 우리나라만큼 열광하는 나라도 없는 듯하니, 먼 프랑스에 살던 작가도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하게 다가온 것은 그가 쓴 작품도 작품이지만 노벨문학상이라는 이름이 한몫 더했을 것이다.

 

반면에 르네 샤르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카뮈와 관련된 인물로 '장 그르니에'는 많이 알려져 있어도 시인인 '르네 샤르'는 생소한 이름이다.

 

그런데 이런 르네 샤르라는 시인이 카뮈에게는 '지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처음 만나서 카뮈가 죽을 때까지, 아니 카뮈가 죽고나서도 우정을 지속한다.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인정하고 공감하면서 함께 행동도 한다. 문학에서도 정치적인 면에서도 그들은 서로의 행동에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고 동조한다.

 

카뮈의 후반기 삶에서 르네 샤르는 늘 함께 하는 그런 친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르네 샤르가 우리에게 덜 알려진 이유는 그가 시인이라는 점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프랑스 시를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쉽지 않을테니 말이다. 외국 시를 번역하는 일도 힘들지만 그렇게 번역된 시를 읽으며 감동을 받기도 쉽지 않다. 게다가 르네 샤르는 노벨문학상을 받지도 않았으니...

 

편지글 곳곳에서 카뮈는 르네 샤르의 시를 칭찬한다. 너무도 좋은 시라고... 르네 샤르 역시 카뮈의 작품을 칭찬하고.

 

이들의 칭찬이 한때 우리나라에서 유행했던 말인 주례사 비평과 다른 점은 그들은 그들 서로의 작품이 어떻게 쓰여졌고, 어떤 표현방식과 주제를 택하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작품만이 아니라 서로의 기질과 행동도 잘 알기에 작품을 작품으로만 보지 않고 사람과 작품을 하나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이러한 작품에 대한 이야기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소소한 일상이 잘 담겨 있다. 편지만큼 자신의 내면을 잘 드러내는 글이 어디 있겠는가.

 

성인이 되어 만난 그들이 우정을 이어가면서 주고받은 편지에서는 그들의 삶 자체가 잘 드러나고 있다. 그렇게 이 책을 통해서 카뮈의 개인적 생활을 알 수 있고, 그가 어떤 고민을 하는지 알 수 있다.

 

 이렇게 우리는 이 책에 실린 두 사람의 편지를 통해 카뮈라는 작가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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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오래 전에 경쟁에서 최종 우승한 사람에게 자동차 열쇠를 골라 전시되어 있는 자동차를 열게 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었다. 문이 열리면 그 자동차의 주인이 되는 것.

 

  경쟁도 힘들었을텐데, 그 경쟁에서 우승해서 주어진 열쇠가 눈 앞에 있는 자동차에 맞는 열쇠인지 아닌지를 여러 열쇠 중에서 자신이 선택해야 하는 것.

 

  신중하게 열쇠를 골라 자동차를 열려고 하는데, 대부분의 경우는 맞지 않는 열쇠였다.

 

  열쇠는 열쇠이되 전혀 열 수 없는 모양만 열쇠인 금속. 어떤 자동차에는 맞는 열쇠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자동차에는 맞지 않는 열쇠였다.

 

  시집을 읽으며, 많은 시들을 보며 시들이 내 삶을 다른 쪽으로 열어젖히는 열쇠 역할을 하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내게 주어진 수많은 열쇠들을 가지고 여러 문들을 열려고 한다. 열쇠를 문 자물쇠에 갖다 댔는데, 철컥 열리는 문이 있고, 도무지 열릴 생각을 하지 않는 문도 있다.

 

자기가 지니고 있는 세계를 보여주지 않는, 열쇠를 준다고 하지만, 직접 맞는 열쇠를 주지 않고 어느 열쇠가 맞을지 찾으라고 하는... 또 하나의 도전.

 

김중일의 '아무튼 씨 미안해요'란 시집도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열쇠를 가지고 문에 갖다 댔는데 이건 열쇠가 자물쇠 구멍에 들어가지도 않는 경우.

 

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경우. 낭패다. 기껏 시세계 근처까지 와서 문 앞에 섰는데, 문이 열리지 않아 정작 들어가지 못하다니...

 

이런 안타까움에, 어떤 열쇠를 찾아야 할지 고민을 하지만... 대부분은 열쇠 찾기를 포기하고 만다. 열쇠 찾는다는 것에 이미 힘을 다 빼려 문이 열려도 들어갈 수 없는 상태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집 자체가 굳건한 문으로, 내게는 맞지 않는 열쇠밖에 없으므로, 할 수 없이 시집의 첫시를 본다. 제목은 '물고기'다. 그런데 '열쇠'다. 이 놈의 열쇠... 열지도 못하는 열쇠라니...

 

  물고기

 

나는 물고기였으니

 

어머니가 살집을 다 발라내시면 드러나는

잃어버렸던 앙상한 열쇠였으니

 

물 속에서 온몸을 비틀어

물의 금고를 열었던

열쇠의 형상을 한 물고기였으니

 

금고 속엔 물거품과 백지만 가득했으니

 

몸속에 꽁꽁 숨겨온 자물통 같은

어머니 자궁 속에 꽂힌,

한 늙은 극작가가 불행 속에 쓴

희극의 첫 막을 열었던 열쇠였으니

 

그리하여 여기 발밑에 버려진

오래된 극장의 열쇠였으니

 

김중일, 아무튼 씨 미안해요. 창비. 2012년.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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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1 09: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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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1 13: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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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0
니꼴라이 고골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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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꼴라이 고골의 작품으로 많이 언급되는 '검찰관'

 

읽어야지 하면서도 희곡이라 선뜻 손에 잡지 못했던 작품인데, 뇌물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이번을 기회로 삼아 읽기로 했다.

 

고골의 작품이 그 당시 러시아를 풍자한다면, 그리고 이 작품이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면 그것은 러시아 사회에 국한되지 않고 인간 사회 전반에 통용된다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썩어문드러진 관료사회를 이토록 우습게 비판하고 있는 작품이 있을까? 너도나도 썩어버린 세상, 특히 권력을 쥔 자들의 모습을 이토록 우습게 그리다니... 역시 풍자다. 러시아에서 이 작품을 발표하고 당분간 피신해 있었다고 하니 당시에도 찔리는 사람이 많았나 보다.

 

작은 마을 시장에게 편지 한통이 도착한다. 신분을 감춘 검찰관이 온다는 소문. 검찰관은 우리나라 조선시대로 치면 암행어사에 해당할 터.

 

이런 편지를 읽고 검찰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을 때 어리석은 마을 지주가 여관에 검찰관으로 여겨지는 사람이 묵고 있다는 사실을 전달한다.

 

부랴부랴 여관으로 찾아가는 시장, 그는 수많은 권력형 비리를 저질렀기 때문에 자신의 죗값을 받게 될까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이다. 시장만이 아니다. 동네 유지라 할 수 있는 자들 모두가 다 비리를 저지르고 있다. 자선병원장, 교육감, 판사 등등.

 

시장이 찾아간 사람은 하급관리. 도박으로 돈을 탕진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돈이 없어 그냥 여관에 머무르고 있던 사람. 허풍이 심한 이 사람을 시장을 비롯한 마을 관료들은 검찰관으로 착각한다.

 

착각은 신념이 되고, 하급관료가 하는 말이 모두 검찰관의 말로 들린다. 그리고 다음 날, 그들은 한 명씩 찾아와 자신의 신상에 관한 부탁을 하려고 한다. 두려움에 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이들에게 하급관료가 하는 말, 돈 좀 빌려달라고... 그들은 군말 않고 수백 루블씩을 준다. 그들이 주는 이 돈은 바로 뇌물이다. 자발적으로 주는 뇌물. 자신들을 잘 봐달라고 하는. 다른 목적은 없다.

 

명목은 빌려달라와 빌려준다지만 받을 생각도 없고 줄 생각도 없는 그런 뇌물 거래다. 엄연한 자발적 뇌물 공여인 셈이다.

 

자, 이 말이 강압적 뇌물 강요로 들리는가. 시장, 판사, 병원장, 교육감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눈치껏 돈을 주었을 뿐이다. 자신의 안녕을 위해서.

 

이들이 나중에 재판을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검찰관이라는 직위를 이용한 사람의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준 뇌물이니 무죄라고 할까?

 

아니면 자신의 이익과 안녕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준 뇌물이니까 유죄이고, 돈의 액수에 따라서 형이 결정될까?

 

판사라는 사람도 뇌물을 주었으니, 이들의 판결은, 혹 희곡이 계속된다면 강요에 의한 뇌물 상납이기에 최소한의 형량을 받고 끝날 것이다. 이것이 당시 러시아 상황이니까. 그리고 대다수 나라가 지니고 있는 '유전 무죄, 무전 유죄'의 현실이니까.

 

하급관료를 설정해서 한 바탕 희극을 연출한 고골의 솜씨가 놀랍다. 이 희곡을 통해 당시 러시아 관료 사회가 얼마나 낡고 늙었으며 부패했는지를 알 수 있고, 그들이 얼마나 허약한지도 알 수 있다.

 

장사꾼들과 다른 민중들이 검찰관으로 추정되는 하급관료에게 와서 청원서를 제출하지만 이들의 일이 해결된다는 기미는 없다. 하급관료는 이런 사태를 즐기고 떠날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희곡의 마지막 부분에 진짜 검찰관이 나타나 시장을 소환한다. 이 검찰관은 그 동안의 일을 다 지켜보았으리라. 하지만, 과연 그가 제 직무를 수행했다고 해도 이들을 처벌하고 사회를 바꿀 수 있었을까?

 

시골 마을의 관료들이 이토록 부패했다면 중앙에 있는 고급관료들은 더 부패했다는 말이 되니, 조선 후기 그토록 많은 암행어사가 파견되었지만 조선의 멸망을 막을 수 없었듯이, 제정 러시아가 붕괴되어 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희곡이다.

 

180년도 더 전에 쓰인 희곡이지만 여전히 유효하다. 그만큼 사회는 발전해 왔지만 권력을 쥐고 있는 자들의 행태는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했으니까. 거기에 기생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이 작품을 읽으며 자꾸 우리 사회의 모습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특히 요즘 재벌에 대한 재판 결과가 생각나는 것은?

 

법관들이 이런 작품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

 

덧글

 

여전히 러시아 사람들의 이름은 어렵다. 시장의 이름은 '안똔 안또노비치 스끄보즈니끄드무하노프스끼'라고 하고, 또 다른 주인공인 검찰관으로 오해받는 하급관료 이름은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흘레스따꼬프'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름을 외우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그래서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 표기를 과감하게 포기했다. 왜 이리 이름들이 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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