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젊은 시인들의 시를 읽다보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단 생각을 한다.

 

  이 시집 역시 마찬가지다. 계속 머리로 생각하게 하는 시집을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사실 시가 마음을 울리지 않고 머리에서 계산하게 하면 우리가 학교 다닐 때 골머리 썩였던 이상의 시와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난 여전히 이상의 시에서 감동을 받지 못한다. 마음을 울리기보다는 눈을 먼저 괴롭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이나 비평가들이 좋아할 만한 시. 일반 독자들은 도대체 뭔 소리야 하면서 외면하는 시.

 

  이 시집을 읽으며 왜 자꾸 들뢰즈라는 사람이 떠올랐을까? 아니 들뢰즈 철학을 잘 모르니 들뢰즈라기보다는 그의 철학을 해설한 사람들이 들려준 '리좀(rhizome)'이라는 말이 생각났다고 해야 한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상태. 나무 줄기가 명확하게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어서 우리가 보고 판단하기가 편하다면 뿌리 줄기라 할 수 있는 리좀은 어디로 향할지 알지 모른다는 상태.

 

체계적으로 뻗어나간다기보다는 그냥 스스로도 존재하면서 어디로도 뻗어가면서도 서로 연결이 되는 상태라는 것.

 

젊은 시인들의 시는 요즘 이런 상황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성향을 지닌 사람들에겐 잘 이해가 될까? 나로서는 의문이긴 하지만...

 

유희경의 이 시집에서도 이해 못할 시들이 많았고, 마음을 울리는 시를 발견하기는 힘들었다. 다만, 뜻이 무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시... '우산의 반대말'

 

 우산의 반대말

 

고이면 좋겠어

잠든 도시의 가슴팍에

의심이란 거지 우리가

찾아볼 수 없는 흔적

 

이렇게 끝내주는 소리는

천년 전의 것

용서하라 모든 이빨을

비가 내일을 잡아 뜯고

눈썹을 파르르 떨어

써놓은 문자를 내놓는다

 

쏟아져 내리는, 입말

놀라는 눈과 감기는 물

 

비가 내리는 만큼

입을 다문 사람

그게 아니더라도

이런 날씨 앞에서는

누구나 넓고 너무 투명하다

 

떠오른다 침묵하지 않는,

하고 싶은 말 지우고,

젖어간다 모서리부터

 

유희경, 오늘 아침 단어, 문학과지성사, 2011년 초판 4쇄. 98-99쪽.

 

우산은 가리는 것. 비를 막는 것. 그러니 우산의 반대말은 가리지 말라는 것. 빗소리, 제대로 듣기가 힘든 요즘.

 

비는 자신의 말을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지만 우리는 우산으로 막거나 또는 건물들로, 그리고 아스팔트로 철저히 비들을 막아 하수구로 흘려보내고 만다. 비가 하는 말을 듣는 것은 먼 과거의 일.

 

이만큼 우리는 어쩌면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는지도 모른다. 비가 좍좍 내릴 때 잠시 침묵하는 것. 비가 하는 소리를 듣는 것. 그러나 결국 비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우리에게 전달하지 못한다.

 

우산이 없더라도 비는 고이지 못하니까. 그가 쓴 글씨는 곧 사라지고 마니까. 그래서 그의 언어는 문자언어, 글말이 아니라 입말일 수밖에 없다. 순간성을 지닌 말.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어렵다. 그냥 이 시는 그래도 자꾸 읽고 싶어진다. 의미를 명확히 파악하지는 못하겠지만 무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게 하기 때문이다.

 

리좀이다. 이 리좀에 대해서는 세대가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힘든지도 모른다. 디지털 원주민과 디지털 이주민, 또 디지털에서 추방된 사람들이 서로 의사소통하기가 힘들어지는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시 읽기 어떨 땐 참 좋기도 하지만, 어떨 땐 고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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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보의 마지막 날 (문고본) 마음산 문고
이자벨 랭보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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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튀르 랭보. 그는 내게 글자의 색을 알아보는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어쩌다 음운에 색깔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단 말을 들었고, 랭보의 '모음'이라는 시에서 각 모음에 색깔을 그가 입혔음을 발견했다.

 

특이하다고 해야 하나,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그리고 그가 일찍 죽었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그게 다였다. 프랑스 상징주의 시는 나하고는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이상 정도 되지 않을까 하는, 시도 그렇지만 행동도 기이한, 일찍 죽은 점에서 비교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그의 마지막 모습을 기록한 책이 나와서 읽게 되었다. 암으로 다리를 절단하고, 그 암이 온몸으로 퍼져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어가야 했다는 사실을.

 

죽음의 순간, 사람들은 솔직해진다고 한다. 천재로 알려진 작가가 마지막에 보이는 솔직한 모습에 대한 궁금증도 이 책을 읽게 하는 데 한몫했다.

 

동생 이자벨 랭보가 쓴 책인데... 이자벨 랭보가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와 랭보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랭보가 죽기 전에 했던 마지막 여행에 대한 짧은 글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처절한 고통 속에서 죽음을 바라보고 있는 랭보를 간호하는 이자벨. 이자벨이 본 랭보. 랭보가 이자벨에게 했다는 말이 마음을 울린다.

 

"난 땅속으로 갈 테고, 넌 태양 속을 걷겠지." (50쪽)

 

너무도 젊은 나이에 유명한 시인이 되고, 곧 시를 포기하고 - 그는 프랑스에서 문학으로 성공할 가능성을 보았지만 청춘기의 작품을 계속 이어가지 않은 걸 흡족해 했다. 왜냐하면 "졸작이었으니까."(98쪽), 병에 걸려 다리를 절단하고, 온몸에 퍼진 암 때문에 고통 속에 괴로워하다 세상을 뜬다.

 

그가 살았을 때 낸 시집이 별로 많지 않고 젊은 시절에 쓴 작품 이외에는 별다른 작품도 없다. 우리나라 이상이나 나도향, 김유정 등이 20대에 삶을 마감한 것에 비하면 조금 더 오래 살았다고 할 수 있지만, 작품 활동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너무도 조숙한 천재였던가. 그러므로 세상과 화합할 수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여기저기 방랑생활을 했다는데, 나중에는 무기 판매상까지 했다니, 그런 삶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없지만 그가 세상에 정착하기는 힘들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 실려 있는 '랭보의 마지막 여행'은 그가 치료를 받으러 로슈에서 마르세유로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글이다.

 

통증으로 옴짝달싹 못하는 랭보가 어찌어찌 마르세유로 가는 과정, 그것이 바로 랭보의 마지막 여행이었다.

 

평생을 자유롭게 살고자 했던 사람이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고, 죽음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기차를 타고 통증과 함께 하는 여행. 그 과정을 함께 하는 동생 이자벨의 마음이 잘 전달되고 있는 글이다.

 

어쩌면 랭보의 삶은 그 자신의 시집 제목처럼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일지도 모른다.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바로 지옥 자체였을 터이니. 꼭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아니더라도 그에게 삶은 지옥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렇기때문에 여기저기 방랑생활을 했을 테고.

 

랭보에 관심이 있는 사람, 랭보의 마지막 순간을 기록한 이 책을 읽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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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백서 - 1980년 광주에서 기록된 최초의 항쟁백서
소준섭 외 지음 / 어젠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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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에 공식 출판이 아닌 지하 출판으로 사람들에게 배포되었다고 한다. 이 책의 대표저자로 알려진 소준섭의 기록으로,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널리 알리게 되었다고.

 

이 책으로 인해서 광주에서 일어난 일은 지역을 넘어 전국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 책을 토대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라는 책, 우리에겐 '넘어 넘어'로 잘 알려진 책이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뭐, 또 광주냐, 아직도 할 이야기가 남았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작년에 개봉한 영화 '택시운전사'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듯이 여전히 광주는 진행형이다.

 

이 책에서도 말한다. 광주는 진행형이라고. 이는 완전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인들이 총을 쏘았는데, 발포 명령자가 밝혀지지 않았고 분명 책임 있는 자리에 있던 자들은 모두들 책임을 회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서 광주민주화운동을 폄훼하는 자들까지 있으니 여전히 할 일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뒤늦게 공식 출판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수많은 기록들이 나오고 있지만 당시의 현장감을 살린 기록을 보존하여 우리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는 것.

 

최근에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도 개정판이 나왔고, 황석영의 '수인'에서 그 책을 만들기까지의 과정도 나오는데, 이 광주백서에서도 그 과정이 잘 서술되어 있다.

 

서로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이들을 비교하면 광주에 대한 기록들이 어떻게 정리되어 갔는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이 책은 최초의 기록으로 의미가 있다. 이 책을 토대로 다른 책들이 나왔다고 보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은 광주의 참상을, 광주시민들의 민주화 운동을 전국적으로 알렸다는 데도 의의가 있으니.

 

어디선가 본 듯한 역사는 기억의 싸움이라는 말이 있다. 기억은 기록을 통해서 더 오랫동안 보존된다. 우리가 기록을 중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광주백서가 있었기에 광주에 대한 다른 기록들이 더 잘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록을 통해 기억을 하면 역사의 왜곡을 막을 수 있다. 이 책에서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다. 혹 이 책이 북한의 책을 베낀 것이 아니냐고... 기록자는 이 광주백서는 1982년에 나왔고, 북한에서 발간된 책은 1985년이니 베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한다.

 

'...명백한 팩트는 '광주백서'가 1981년 초 광주에서 기록하여 1982년에 팸플렛으로 제작 배포되었고, '광주'와 관련된 북한의 책들은 1985년에 비로소 출판되었다는 것이다.' (192쪽)

 

여기에 기록자인 소준섭은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중국에 유학할 때도 북한과의 관계가 될 만한 만남이나 일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6년에 걸쳐 중국 상하이에 있는 푸단(復旦)대학교에서 유학을 했다. 하지만 북한과 가까이 위치한 중국의 동북지방에는 아예 가지도 않았고 북한 사람들과 한 번 조우한 적도 대화 한 마디 나눈 적도 없다. 나의 이러한 일종의 '비정상적인' 행동 또한 이 땅에서 수십 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종북몰이'의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유신 시절부터 체득화된 비극이기도 하였다.' (194쪽)

 

그러니 이젠 북한의 책동이니 간첩이 와서 일으킨 폭동이니 하는 소리들을 하지 말자. 이미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는데, 사실조차도 왜곡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니까 말이다.

 

이 책에는 기존에 나온 '광주백서'에 부록으로 자료를 덧붙여서 좀더 두꺼운 책으로 내었다. 그 중에 읽어보고 생각해 볼 만한 내용이 바로 '5.18민주화운동의 왜곡과 '기억의 형법' (박학모)이라는 글이다.

 

유럽에서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법을 '부인 금지법'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인종차별이나 학살을 옹호하는 발언들은 표현의 자유를 넘어 사회적 범죄라는 인식에서 피해자의 고소가 없어도 처벌할 수 있다고 규정한 법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법에 대해서 논의가 되고 있는 모양인데, 찬반이 갈리고 있는가 보다. 이 글을 읽으면서 이런 법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법보다는 먼저 아예 그런 생각, 그런 표현을 하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하고, 그런 발언을 하는 사람이 경원당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겠지만.

 

이런 문제가 해결되어야 '광주'는 과거형이 된다. 그 전까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 책은 그 점을 다시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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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02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03 0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험감독

 

우리는 이를 시감이라고 부른다. 인간이 기계가 되는 순간, 사제지간이 경찰과 범죄자의 관계로 전도되는 순간, 그리고 그 순간을 관장하는 점수의 권능. 점수 앞에서 생명 없는 기계 수준으로 떨어지는 인간들, 그들을 누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랴.

 

머리 속을 텅 비워라!

오직 눈만을 크게 뜨고

허튼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웃지도 말고

믿지도 말고

다른 행동을 하지도 말고

오직 아이들만을 쳐다보아라.

 

 

믿음, 인간의 신뢰

점수 앞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잠시도 쉬지 말고 감시 카메라를 작동시켜라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총탄.

반사적으로 펼쳐지는 방탄복.

 

점수를 끄집어 내려라

우리들의 사랑으로

우리들의 믿음으로

알고 싶은 것,

알아야 할 것을

얼마나 알고 있나를

잘 알고 있나를

평가해 보는 것

점수는 중요하지 않아

몰랐던 것,

부족했던 것은

다시 보충하면 되지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들이 함께 하면 되는 거지

 

 

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네가 좋은 학교 보내 줄 거야!

 

 

 

슬픈……

너무도 서글픈 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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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호는 작은 제목이 '디지털 원주민과 리터러시 교육'이다. 아무래도 올해부터는 중학교에서부터 코딩 교육이라고, 컴퓨터 교육이 의무가 되었으니, 디지털이 학교 교과목으로 들어온 원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아이들은 스마트폰으로 디지털 원주민이 된 지 오래인데, 가까스로 디지털 생활에 들어온 디지털 이주민으로 불리는 기성세대들은 디지털도 기존의 학교 교육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4차산업혁명 운운하면서도 여전히 교육은 학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19세기식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으며, 하나만 잘해도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이 나온 지가 벌써 20년이 되어가는데도, 하나만 잘해서는 도저히 먹고 살 수 없다고 인식하고 모든 것을, 특히 학교 성적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는 우리 현실이다.

 

하나만 잘해서는 먹고 살 수 있다와 지금 세대들은 적어도 두세 개 이상의 직업을 가질테니 하나만 잘해서는 먹고 살 수 없다는 의견으로 나눌 수 있지만, 적어도 지금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지금의 세상과는 너무도 다를 것이라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한다.

 

지금과 다른 세상, 그 세상이 어떤 세상일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만 예측만 할 뿐인 상황에서 기성세대들은 자신의 관점에서 새로운 세대들을 교육하려 한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상황, 새로운 기술에서 새로운 세대들이 무엇을 어떻게 배우려고 하는지를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자신들이 지금껏 배워왔고 지내왔던 것을 통해서 새로운 세대들에게 무언가를 주입하려고 한다.

 

학교에 '코딩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이 들어온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민들레 이번 호에서 이런 디지털 문제는 적절하게 잘 다루어줬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디지털 세상이라고 해서, 또 디지털 리터러시라는 이름을 지닌 교육이라고 해서 인간 생활의 본질을 벗어나지는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학교가 지닌 명백한 잘못은 배움보다는 교육을 앞세웠다는 것인데, 이를 디지털 교육에서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배움은 스스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배움은 지혜와 연결이 된다. 이런 지혜를 이번 호 우치다 타츠루의 글에서는 '교양'이라는 이름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스스로 깨우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 바로 지혜, 교양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교육은 지식과 관련이 된다. 타츠루가 이야기하는 온갖 퀴즈 프로그램에서 측정하는 것이나, 우리나라 학교 시험에서 측정하는 것, 그리고 수많은 무슨무슨 지식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책들은 지식만을 추구한다. 이런 지식을 외우게 한다. 이게 교육이다.

 

컴퓨터에 관해서, 디지털에 관해서 많이 알게 하는 것이 지금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의 목표는 아니리라. 목표는 바로 우리 삶을 윤택하게 하는 디지털 사용법, 또는 디지털 사용 환경이리라.

 

이것이 바로 배움이고 교양이고, 지혜가 될 것이다. 이런 것들이 다를까? 전통교육과 디지털 교육은 다를까? 아니다. 본질은 같다. 배움이 우선하면서 그것을 외우기보다는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실생활에 적용하는 것, 그런 지혜를 갖춘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

 

그러므로 디지털 교육이라고 해서 위축될 필요가 없다. 디지털 이주민이라고 해서, 디지털을 잘 모른다고 해서 새로운 세대들과 소통이 안 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디지털은 세대를 아울러, 공간을 아울러, 계층을 아울러 모두가 잘 소통되도록 하기 위해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교육 역시 마찬가지고, 디지털 리터러시는 이런 디지털의 본질을 제대로 알고 활용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번 호를 읽으면서 공자의 말을 떠올렸다. 논어 어느 편인지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오도 일이관지(吾道 一以貫之)'라는 말.

 

공자도 자신의 도는 하나로 관철될 수 있다고 했다. 교육 역시 마찬가지다. 디지털이라고 아날로그와 다르지 않다. 그 점을 이번 호를 읽으면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교육보다는 배움을 우선해야 하고, 지식보다는 지혜를 우선해야 한다는 것, 그런 사람들로 새로운 세대들이 자라도록 환경을 조성해야줘야 한다는 것. 이번 호를 읽으며 한 생각이다.

 

이번 호에서 마음이 아픈 글이 하나 있다. 이게 어쩌면 우리나라 제도권 교육, 학교의 현실이라는 생각. 상호 불신, 자신의 욕심만이 판치는 학교 현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 교사들 역시 하루라도 빨리 학교를 벗어나고 싶어한다는 마음이 잘 드러난 글

 

양영희 '가르치는 이들의 자리는 어디일까' 자신을 가르치는 교사를 존중하지 않으면 그만큼 자신의 아이들 역시 존중받기 힘들다는 사실... 많이 생각해 보아야 할, 학교 현실에 대한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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