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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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삶이 바뀌었을까?

 

이 소설을 읽으며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소설 속에서 대학 때 등산동아리에 속했던 주인공이 만났던 여자 선배 차승연이 했다는 말.

 

등산 동아리에서 여자 회장이 나오는 걸 보겠다... 결국 10년이 걸렸다는 말로 전개가 되지만, 대학 동아리 회장을 여성이 하는 데도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대학을 졸업한 김지영이 입사한 회사에서 여성들이 처한 위치는 이보다 더하다고 할 수 있다.

 

유일한 여성 팀장은 김은실 팀장이 지내온 과정은 여성을 지우는 과정이었고, 그 팀장이 여성의 처우개선을 위해 노력을 하지만 그건 개인의 노력일 뿐이고, 회사에서 구조적으로 양성평등을 이루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무려 2000년대에.

 

1960년대 태어난 사람들은 자신들이 어른이 되면 세상은 많이 달라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들이 대학 다닐 때 민주화 운동이 한참이었고, 이 소설의 주인공인 김지영이 태어난 때인 1980년대 생들이 사회 생활을 할땐 이들이 사회의 주축이었다.

 

자,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사람들이 사회의 주축을 이룬 시대에 과연 여성들이 살아갈 세상은 변했는가? 양성평등이 민주주의를 이루는 기본이라면, 과연 그러했는가? 이런 질문에 우리는 부정적인 답을 할 수밖에 없다.

 

지금 봇물터지듯이 나오는 #미투 운동 역시 우리 세상이 여전히 여성들에게는 불리하게 돌아갔다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는 그러한 여성의 삶을 파노라마 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물론 소설에서 느끼는 인물과 인물의 갈등, 인물과 사회의 갈등이 첨예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소설이라기보다는 보고서, 다큐멘터리 대사를 듣는 듯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 한 여성이 정신질환을 앓게 되기까지 사회가 가한 폭력에 대한 보고서.

 

나중에 의사인 남자가 서술자로 등장해 이런 느낌을 더 전해주고 있는데, 그래서 어떤 긴장감 없이 그냥 주욱 읽어나갈 수 있지만, 그럼에도 여성이 살아오고 또 살아갈 세상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꼭 여성이 아니더라도 소수자들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편견에 차 있고, 고통스러울지를 생각할 수 있다. 세상의 절반이라고 추켜세우면서도 그들을 소수자로 늘 배제하고 편할 때만, 필요할 때만 자신들에게 끌어오는 사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고나 할까.

 

이 소설에서 가장 핵심은 바로 여기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나름 여성의 삶을 이해해 준다는 남편 정대현과 아내 김지영이 임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김지영 씨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 그러니까 출산 이후에도 직장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과 벌써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데에 대한 죄책감을 남편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정대현 씨는 차분히 아내의 말을 듣고 절절한 순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지영아,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얻게 되는 걸 생각해 봐. 부모가 된다는 게 얼마나 의미 있고 감동적인 일이야. 그리고 정말 애 맡길 데가  없어서, 최악의 경우에, 네가 회사 그만두게 되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책임질게. 너보고 돈 벌어 오라고 안 해."

  "그래서 오빠가 잃는 게 뭔데?"

  "응?"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라며. 나는 지금의 젊음도, 건강도, 직장, 동료, 친구 같은 사회적 네트워크도, 계획도, 미래도 다 잃을지 몰라. 그래서 자꾸 잃는 걸 생각하게 돼. 근데 오빠는 뭘 잃게 돼?"

  "나, 나도…… 나도 지금 같지는 않겠지. 아무래도 집에 일찍 와야 하니까 친구들도 잘 못 만날 거고. 회식이나 야근도 편하게 못할 거고. 일하고 와서 또 집안일 도우려면 피곤할 거고. 그리고 그, 너랑 우리 애랑, 가장으로서…… 그래, 부양! 부양하려면 책임감도 엄청 클 거고." (136-137쪽)

 

이런 차이가 있다. 남자는 자신이 직장을 그만둔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집안일이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통 남자보다 좀더 낫다고 할 수 있는 소설 속 정대현 역시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에게 집안일은 돕는 것이고, 직장을 그만두는 사람은 당연히 아내인 김지영이어야 하는 것이다.

 

사고방식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여전하다. 그리고 사회 역시 변하지 않았다. 여성들이 공무원이나 교사를 직업으로 원하는 이유는, 육아 문제에서 그래도 조금은 낫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분야에서 일한다고 전적으로 양성평등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는 없다. 단지 다른 직업 분야보다는 좀 낫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이 정도 되는 직업이 우리 사회 모든 직장이 지닌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소설에서 이런 모습을 드러내는 구절이 있다. 바로 소설의 서술자인 정신과 의사가 하는 말. 김지영에 대한 상담을 하고 있는 이 남성의사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라도 육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여직원은 여러 가지로 곤란한 법이다. 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 (175쪽)

 

김지영이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지, 여성이 어떻게 해서 정신질환까지 앓게 되었는지를 상담하는 정신과 의사인 남성이 마지막에 하는 말은 바로 이것이다.

 

여전히 남아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양성평등을 개인에게만 미루어서는 안 된다. 사회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82년생 김지영은 계속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런 김지영을 둘러싼 남성들도 계속 나올 수밖에 없고.

 

#미투 운동과 더불어 다시 한 번 양성평등에 대해서, 진정한 민주화에 대해서, 적어도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기성세대가 된 사회에서, 또 그들 뒤에 기성세대가 된 사회에서는 민주주의를 이루는 기본은 양성평등, 소수자 차별이 없는 사회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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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2 09: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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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2 10: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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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사랑은 머리에서 오지 않는다

저 먼 곳

표현할 수 없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

조금씩 조금씩

솟아나온다

이미 나왔을 땐

걷잡을 수 없어

이성으론 어찌할 수 없는

가슴 시림, 설렘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마음 아픔으로

눈 멀고, 귀 먹고

벙어리가 되어 버린다

세상 모든 것이

사랑에게 있어

감정마저도

제 것이 아니게 되는

사랑은

사랑은 바로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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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속일 수 있을까

 

'동공'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본다. 제목에도 시에도 한자어가 쓰여있지 않아도 뜻은 '눈동자'라는 확신이 들지만,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에 찾아본다.

 

'시간의 동공'이란 제목을 가진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 구절을 통해 아마도 제목이 만들어졌으리라.

 

'언제든 배반할 수 있는 시간의 동공들' (26쪽)

 

그래서 찾아보기로 한 것. 꼭 눈동자로만 보기도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의 눈동자를 우리는 언제든 배반한다고.

 

사라지고 말 것들이 사라지지 않는 양 보일 수도 있다는 것, 그렇기도 하지만... '동공'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국립국어원, 표준대사전) 다섯 개의 '동공'이 있다. 이 중에 이 시에 어울릴 만한 '동공'은 둘이다.

 

하나는 '눈동자' 그리고 또 하나는 '동공(洞空)'이라고 쓰는 '공동(空洞)'이라고도 하는 텅 비었다는 뜻.

 

그렇다. 우리는 시간을 이길 수 있을까. 우리가 시간의 눈동자를 배반한다고 해도, 그 눈동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는 시간의 눈동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 치지만 결국은 시간의 눈동자를 결코 벗어날 수없다.

 

시간의 눈동자를 벗어날 수 없을 때, 우리는 텅 비게 된다. 무(無)로 돌아가게 된다. 그렇게 시간은 우리와 함께 하며 우리를 서서히 또는 급작스레 사라지게 한다.

 

시간 속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시간은 스러짐, 사라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시간의 눈동자를 의식하고 살아가야만 하는데...

 

가끔은 자신이 영원할 것처럼, 시간의 눈동자를 속일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시간의 눈동자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깨닫고 허무한 마음에 빠지기도 한다.

 

이 시집의 첫시가 바로 그렇다. 시간 속에서 사그라지는 우리들 운명을 이야기하고 있단 생각이 든다.

 

폐점

 

문을 닫은 지 오랜 상점 본다

자정 지나 인적 뜸할 때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인형

한때는 옷을 걸치고 있기도 했으리라

그러나 불현듯 귀기(鬼氣)가 서려오고

등에 서늘함이 밀려오는 순간

 

이곳을 처음 열 때의 여자를 기억한다

창을 닦고 물을 뿌리고 있었다

옷을 걸개에 거느라 허리춤이 드러나 있었다

아이도 있었고 커피 잔도 있었다

 

작은 이면 도로 작은 생의 고샅길

오토바이 한 대 지나가며

배기가스를 뿜어대는 유리문 밖

 

어느 먼 기억들이 사는 집이 그럴 것이다

어느 일생도 그럴 것이다

 

박주택, 시간의 동공, 문학과지성사, 2009년.  11쪽.

 

시간은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있다. 나는 시간의 눈을 피할 수 없다. 시간에서 도망칠 수 없다. 내가 아무리 숨어도 어떤 틈으로도 시간은 나를 보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잘 살아야 한다. 시간을 벗어날 수 없기에 시간 속에서 잘 살아야 한다. 나를 시간에 맡기고 그 속에서 내 삶에 충실해야 한다.

 

언젠가는 텅 비어버리는 '동공'이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늘 시간의 눈동자(瞳孔)를 의식하면서 그렇게 살아가야겠다.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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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0 15: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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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0 17: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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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 사전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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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이란 말에서 시작하고 싶다. 책을 내는 것도 펜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펜은 이렇게 설명된다.

 

펜이 칼보다 강할 수는 없지만 펜이 칼이 될 수는 있다. 펜을 가장한 칼이 도처에 가득하다.

 

이게 현실이다. 말이 칼이 되고 있는 현실. 이런 현실 속에서 마음을 도닥여 줄 말을 찾게 된다. 그런 글을 찾게 된다. 펜이 펜 역할을 하는 너무도 당연한 현실을 찾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며 한 글자를 통해 마음을 읽게 된다. 또한 세상을 보게도 된다. 가령 이런 말이 있다. 칼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펜이 칼이 되지 않는 책을 만나면 반갑다. 이 책은 이렇게 펜을 펜으로 남아 있게 한다.

 

그것이 힘들지라도 적어도 그런 척을 해야 한다. '척'이라는 말은 이 책에서 이렇게 등장한다.

 

그러는 척을 반복해서 하다 보면 서슴없이 척척 잘할 수 있게 된다.

 

착한 척을 해야 한다. 착한 척을 하다보면 어느 새 착하게 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척들이 모여 행동을 바꿔놓았을테니 말이다. 이런 '척'과 반대편에 서 있는 말이 있다. 바로 '징'이다.  

 

울림이 오래가기 때문에 한 장단에 한 번 쳐야 한다. 그러니까 제발 좀 징징대지 마.

 

여기서 징은 한 번으로 끝내야 한다. '지잉~~~~~'하는 울림을 느껴야 한다. 그런데 그 울림을 기다리지 못하면 징징이 된다. 우리네 삶은 어쩌면 이렇게 변해왔는지도 모른다.

 

지금 그냥 바쁘게만 산다. 우리는 징 소리가 내는 여운이 있고 울림이 있는 소리 '지잉~~~~~'하는 소리를 기다리지 못한다. 그 소리가 끝나 마음 속에 머무를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그럴 틈이 없다. 틈이 메워지고 있는 삶을 살고 있다. 틈이 없는 삶은 여유가 없는 삶이다. 살기 위해서 바쁘게 생활과 생활 사이에 틈을 만들 틈을 내지 못하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틈을 메우는 또 하나의 존재가 등장했다. 바로 핸드폰이다. 스마트폰이라고 하는.

 

생각날 틈 없이 핸드폰으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연인. 생각할 틈 없이 핸드폰을 열람하는 사람들. 모든 틈은 핸드폰이 점령했다.

 

무서운 현실이다. 우리는 조금의 틈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 틈을, 여운을, 울림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 틈은 메워야 한다. 메워져야만 한다.

 

이게 지금 현실이다. 한 글자를 통해서 이렇게 현실을 마주볼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여유를 둘 수 있다.

 

이렇게 한 글자들을 통해서 마음을 들여다보게 된다. 마음뿐만 아니라 세상도 들여다 보게 된다. 이 말을 읽으면서 절로 감탄하게 됐다. 우리들이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야 할 것. 그러나 지금 교육에서는 사라져 버린 것.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쪼개어 알나내는 것이 아니라 심고 물을 주어 키워가며 알아내는 것.

 

이것이 바로 교육 아니겠는가. 우리는 학생들이 자신의 내부에서 자신을 발견하도록 물을 주어 키워가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빨리 학생들 내부에 무엇이 있는지 알기 위해 어거지로 쪼개고 있지는 않은지.

 

모든 존재들에게 바로 이런 자세로 대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래야 틈을 낼 수 있고, 틈을 내는 척이라도 해야 여유가 우리에게 온다는 것.

 

시인이 말하는 한 글자들을 읽으며 마음을 읽게 된다. 그리고 세상도 읽게 된다. 말이 칼이 되는 세상, 펜이 칼보다 더한 짓을 하는 세상에서 말은 사랑이 되고 펜은 위로가 되는 그런 세상을 꿈꾼다.

 

이 책을 읽으며 아무 쪽이나 펼쳐도 좋다. 그리고 마음을 다독이면 된다. 나만이 할 수 있는 표현을 찾아도 좋다. 그러면 자연스레 마음에 틈이 생기고, 그 틈 속에 다른 것들이 깃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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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9 09: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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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9 11: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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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곳에 영원히 머무를 수 없다. 인간이 지닌 숙명이라고 해도 좋다. 어차피 인생은 한계가 정해져 있으니.

 

  이 세상에 산다고 해도 다른 존재들에게 자리를 물려줘야 한다. 물려주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다.

 

  삶이 그러하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집도 마찬가지다. 영원히 내것으로 소유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 물려줘야 한다. 예전과 달라서 지금은 평생동안 이사를 여러 번 한다. 예전에 한 집에 태어나 그 집에서 죽는 경우가 많았다면, 그것도 장남에 한정해서이겠지만, 지금은 자신이 태어난 집에서 죽는 경우는 너무도 드물다.

 

이사를 할 때 내가 남겨놓은 뒷자리 모습은 바로 내 삶을 보여주는지도 모르겠다. 이사할 때 당연히 깨끗하게 모든 것을 싸서 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서수찬 시집 "시금치 학교"를 읽다가 '이사'란 시를 발견하고, 이사가 모든 것을 깡끄리 싸서 깨끗이 치우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뒷사람을 위해서 남겨놓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사

 

전에 살던 사람이 버리고 간

헌 장판을 들추어내자

만 원 한 장이 나왔다

어떤 엉덩이들이 깔고 앉았을 돈인지는 모르지만

아내에겐 잠깐 동안

위안이 되었다

조그만 위안으로 생소한

집 전체가 살 만한 집이 되었다

우리 가족도 웬만큼 살다가

다음 가족을 위해

조그만 위안거리를 남겨 두는 일이

숟가락 하나라도 빠트리는 것 없이

잘 싸는 것보다

중요한 일인 걸 알았다

 

아내는

목련나무에 긁힌

장롱에서 목련꽃향이 난다고 할 때처럼

웃었다.

 

서수찬, 시금치학교. 삶이보이는창, 2007년. 45쪽.

 

따스하다. 내가 떠난 자리에 다른 사람이 깃들어 살텐데,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뒤에 올 사람들이 잠시라도 웃을 수 있는 그런 이사.

 

꼭 이사만이 아니어도 그렇다. 삶에서 다른 사람에게 위안을 주거나 웃음을 주거나 편안함을 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면 좋겠다는 생각.

 

작은 것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우리들 삶이니... 이제 봄이다. 세상이 따스해지기 시작한다. 삶도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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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7 10: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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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17 10: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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