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시간이 초 시간이 되어


예전에 약속을 할 땐

시계탑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만큼 시계는 귀했고

초로 나누지 않는 시간에

몸은 계절을 시간으로 삼았다

눈보다는 몸으로 느끼는 시간들

어느 순간

몸 시간이 눈 시간으로 바뀌었다

계절의 시간이

초 단위 시간으로 바뀌어

어느 곳에도 존재하게 되었다

시계가 넘쳐나자

현재를 살던 사람들이

미래를 살기 시작했다

째깍째깍

자꾸 내달리는 초침을 보며

시도때도 없이 알려주는 시간을 보며

멈출 수가 없게 되었다

바로 눈 앞에 미래가

시계를 통해 알람을 통해

다가오게 되자

현재는 미래에 밀려나

쉼 없는 삶이 되었다

몸 시간이 눈 시간이 되고

계절 시간이 초 시간이 되어

미래로 달려가야만 하는

멈춤 없는 현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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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8 09: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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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8 11: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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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사라진, 그러나 아련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어쩌면 멸종되었다는 호랑이를 본 사람이 있다는 말을 믿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나라에 살던 동물이니, 우리나라에서 사라졌다는 말은 너무 슬프기 때문이다.

 

  어찌 호랑이뿐이랴. 호랑이처럼 사람 앞에 군림했던 동물도 사라졌는데, 그보다 약한 동물들이랴. 동물이 아니라 눈에 잘 띄지도 않았던 식물들이랴.

 

  이런 아련한 그리움, 아쉬움. 여기에 하나 더하면 빗소리도 마찬가지다.

 

   처마 밑에서 조용히 빗소리를 들은 기억. 이제는 처마를 지니고 있는 집을 만나기도 힘드니,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빗소리를 듣기는 참 힘들다.

 

또는 대청마루에 누워 빗소리를 듣는 일. 하늘에서 땅으로, 다시 땅에서 하늘로 튀어오르던 비들을 보는 일.

 

비들이 함성을 지르며 온세상을 누비는 모습을 보는 일, 그들의 함성을 듣는 일.

 

손택수 시집을 읽다가 이제는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그런 아련한 그리움을 만났다. 빗소리... 이런 빗소리를 탁구공으로 비유하다니.

 

빗방울이 톡톡 튀어오르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나 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비라는 존재를 통해 세상 모든 존재들의 소중함을 말하고 있다.

 

  통도사 빗소리

 

탁구공 튀는 소리다

스님들도 목탁대신

탁구를 칠 때가 다 있네

절집 처마 아래 앉아 비를 긋는 동안

함께 온 귀머거리 여자는

영문을 모른 채 그저 숫저운

미소만, 미소만 보이는데

통도(通度)라면 인도까지 갈까

저 빗소리, 내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그 머나먼 서역까지 이를까

흙이 아프지 말라고

흙의 연한 살이 다치지 말라고

여자는 처마 아래 조약돌을 가지런히

깔아주고 있는데, 그

위에서 마구

튀어오르는 빗방울,

저 빗방을

하늘과 땅이 주고받아 치는 탁구공 소리다

 

손택수, 호랑이 발자국, 창작과비평사, 2003년 초판 3쇄. 99쪽.

 

서로 밀쳐내는 탁구공이 아니라, 너에게 이르라고 보내는 탁구공 소리다. 도(道)를 서로에게 보내는. 받기 싫어서가 아니라 네가 먼저 받으라는.

 

좋은 것을 나 먼저 갖지 않고 다른 존재에게 먼저 보내는 그런 마음, 그런 행동. 어쩌면 시인은 통도사에서 빗소리를 통해 그런 마음을 엿보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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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7 17: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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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7 18: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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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칼이 될 때 - 혐오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
홍성수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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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칼이 될 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다시 말이 칼이 되면 자신도 상처를 입는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하리라'라는 말이 있듯이.

 

혐오표현은 말이 칼이 되는 것이다. 상대를 해치려고 입에서 나가는 말들이 바로 칼이다. 그것도 의도적으로. 또는 의도적이지 않더라도 자신도 모르게 칼이 된 말을 쓸 때가 많은데, 이것들이 바로 혐오표현이 지닌 위험성이다.

 

왜 그런 표현이 위험한지, 왜 그런 표현이 상대에게 두려움을 주고, 상대를 움츠러들게 하고, 상대로 하여금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못하게 하는지 자신은 생각도 못하고 한 말이 혐오표현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부정한다.

 

나는 그런 뜻이 아니었어.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니야 하면서. 하지만 혐오표현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이 없다. 말은 말하는 사람의 입을 떠나는 순간 사회적 존재가 된다. 이렇게 사회적 존재가 된 말이 칼로 작동하는 것, 그것이 바로 혐오표현이다.

 

그러니 말 한마디 한마디 조심해서 해야 할 일이다. 자신이 쓰는 표현이 혹 소수자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 아닌지, 우리가 흔히 자라면서 들어왔던 말들 가운데 혐오표현이 꽤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만 말이 칼이 되지 않을 수가 있다.

 

지금 자신이 뱉은 말이 얼마나 날카로운 칼인지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칼들이 난무하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럴 때 말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주는 책. 바로 이런 책. "말이 칼이 될 때"

 

이 책은 혐오표현에 대한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다. 혐오표현이 무엇인지, 그리고 혐오표현이 왜 문제인지, 또 혐오표현을 어떻게 분류할 수 있는지, 혐오표현을 억제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등등에 대해서 고민한 내용을 정리해주고 있다.

 

혐오표현을 처벌하는 것과 표현의 자유가 상충하고 있는데,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정리해주고 있는데...

 

우리 사회에서도 혐오표현이 상당히 많이 나돌고 있는데, 여전히 이들을 처벌하는 법조항은 없다. 표현의 자유가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지 여러 나라 사례를 들고 있는데, 이들을 참조해서 우리나라에서도 혐오표현을 막을 방법을 법이나 제도 또는 사회, 문화적인 압력을 통해서 마련해야 한다고 한다.

 

혐오표현은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는 상대를 죽이겠다고 덤비는 사람에게 행동의 자유가 있으니 보장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니까.

 

그만큼 혐오표현은 상대의 목숨을 위협하기까지 하는 아주 위험한 흉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혐오표현인지, 왜 혐오표현이 문제가 되는지에 대해서 지속적인 교육과 홍보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혐오표현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표현에 대해서도 성찰할 수가 있고.

 

우리 사회의 관습이라는 말로,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 말로 합리화 될 수 없는 것이 바로 혐오표현이다.

 

차근차근 혐오표현에 대해서 정리를 해보고 싶으면 이 책을 읽으면 된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자신이 한 말과 자신이 지닌 생각이 혐오표현에서 얼마만한 거리에 있는지 생각하면 된다.

 

책을 읽지 않더라도 이 점을 명심하면 된다. 내가 한 말이 칼이 되면, 그 칼은 언젠가는 다시 내게 돌아온다. 왜냐하면 그 칼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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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호를 읽으면서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자꾸 생각났다. 농촌이라는 장소.

 

  젊은이가 살아가야 할 장소가 바로 농촌이라는 것. 이번호 제목은 '농본주의가 세상을 살린다'다.

 

  영화에서는 농촌이 그들을 살린다. 그렇게 농촌은 젊은이들을, 노인들을 살린다.

 

  녹색평론에서 농본주의를 주장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이제 4차산업혁명이라고 호들갑들을 떠는데 인공지능은 우리들 일자리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일자리를 뺏는다는 것.

 

기계화된 사회에서 인공지능에게 일자리를 빼앗긴 사람들이 살아갈 장소는 어디일까? 그곳은 바로 농촌일 수밖에 없다.

 

자신들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 농사다. 그래서 우리는 농본주의가 세상을 살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농본주의다. 단순한 농업이 아니다. 이번 호에서도 산업농, 기업농과 소농을 비교하고 있다. 우리가 추구하는 농본주의는 소농이다. 소농들이 1000명 농촌에 있는 것이 대농, 기업농 100명이 있는 것보다 훨씬 좋다는 것.

 

우리들 생명을 이어가는 데는 이런 소농들이 필요하다는 것. 소농들도 관행 농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태 농업을 해야 한다는 것.

 

단지 유기농업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함을 이번 호를 읽고 깨닫게 되었다. 농약과 같은 화학제품을  안 쓰는 것에서 멈추면 안 된다는 것. 생태순환농사의 길로 가야 한다는 것, 그것은 바로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농본주의다. 정치권이 어느 정도 민주적이 되었다면 이제는 우리가 지속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정치가 필요할 때다.

 

성장은 갈수록 줄 것이라는데 세계 경제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한다면 성장이 안 되었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준비해야 한다.

 

그 준비는 바로 농업에서 시작해야 하고, 기업농이 아닌 소농, 생태 순환이 되는, 서로 나눌 수 있는 그런 농본주의가 확립되어야 우리가 지속가능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농업에 관심을 가지고 농업에 관한 제대로 된 정책을 마련할 때다. 녹색평론에서 주장하는 '농민기본소득'도 진지하게 고려해 봐야 한다.

 

지금 이대로 농촌이 죽어간다면 우리의 미래도 없기 때문이다. 농촌을 살리기 위해서는, 생태순환농사를 짓는 소농들이 농촌의 주축이 되기 위해서는 '농민기본소득'은 필수다.

 

그런 정책에 대해 많이 고민해봐야 한다.

 

여기에 이번 호에서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대해서 짚어보고 있다. 일본 근대화의 계기... 일본인들은 메이지유신을 자랑스레 생각하고 있다는 것, 메이지 유신과 그 뒤 침략전쟁을 구분하고 있다고 하는데...

 

하지만 녹색평론 이번 호에서는 메이지 유신에 이미 주변 국가에 대한 침략이 담겨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 역사에서 메이지 유신과 그 뒤의 행동이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연속된 것임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글들을 읽으며 일본인들이 정말로 잘못 알고 있어서 지금처럼 행동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교육의 중요성.. 역사를 바로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메이지 유신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이제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이 보호무역 정책을 펼쳐 우리나라 철강산업도 된서리를 맞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어디 철강산업뿐이겠는가.

 

이럴 때일수록 우선 우리가 먼저 추구해야 할 정책이 무엇일지, 우리의 생존, 생활을 위해서 어디에 중점을 두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그 우선 순위에 농업이 있어야 함을 이번 호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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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4 10: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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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4 10: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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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남 오빠에게 (어나더커버 특별판)
조남주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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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소설'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일곱 명의 소설가가 각자의 작품을 써서 엮은 책이다. 그렇다고 모두 여성이 피해를 본다든지, 여성의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든지 하는 주제를 내세우지는 않는다.

 

'페미니즘'이라고 해서 꼭 여성의 권리 운운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역시 인간이 지닌 기본적인 권리를 이야기하고, 인간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첫소설은 여성이 어떻게 남성에 의해 약한 존재,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 변하게 되었는지, 그것을 어떻게 해서 깨치고 나오게 되는지를 편지 형식을 통해 서술하고 있다.

 

남성과 여성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남성들은 여성들을 보호해야만 할 존재로 생각하고 자신들을 따라야 할 존재로만 여기고 행동하지 않았나 하는 점을 되돌아보게 하는 소설이다.

 

남성들이 의식하지 못하고 하는 행동들 중에 많은 부분이 여성들을 그런 틀에 가두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을 부수고 나오는 것, 어쩌면 몇 배로 힘든 일일지 모른다.

 

우선 자신들이 약하고 보호받을 존재로 규정당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인식에서부터 시작하여 그것을 깨고 나오는 과정은 참으로 어려운 과정이다. 그렇지만 꼭 거쳐야 할 과정이기도 하고.

 

첫소설인 '현남오빠에게'에서 이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면, 두번째 소설에서는 그렇게 깨고 나왔어도 주변의 틀이 여전히 공고함을 주인공인 유진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자신 역시 가부장제의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습을 대물림하려는 엄마의 모습, 그리고 독립해 나왔음에도 여전히 가족의 틀에서 완전히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유진의 모습을 '당신의 평화'란 소설에서 잘 보여주고 있으니.

 

남성과 여성이라는 개인의 문제에서 이제는 가족의 문제까지 확장되고 있다. 아직까지도 여성들에게 얼마나 많은 유리 천장과 유리 벽이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경년'이라는 작품은 여러 가지가 섞였다. 그럼에도 여성을 중심에 놓는데,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를 대하는 어른들의 태도를 엿볼 수가 있다.

 

'청소년 성'에 대해서도 남학생과 여학생을 다른 잣대로 평가하는 그런 모습, 여전히 가시고 있지 않은 우리 사회의 모습이 이 소설에서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으니...

 

이런 왜곡된 성의식과 성적지상주의가 교묘하게 결합되어 우리 미래를 이끌어갈 아이들을 양성불평등 사회로 이끄는지 너무도 간명하게 보여주고 있어서, 읽으면서 조금은 섬뜩함을 느끼게 되는 소설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것이 지금 우리나라 현실을 적절히 반영하고 있을지도 모르니...

 

'모든 것을 제자리에, 이방인, 화성의 아이'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라고 보면 된다. 여성이 핍박받는 모습을 서술하지 않고 잘못된 우리 사회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그것에 대응해 가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갈등이라기 보다는 사회의 문제에 대응하는 사람의 모습이 부각된다. 페미니즘이 남성-여성의 이분법 구도에 갇혀 있지 않고 더 넓은 세계로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사회, 인간답게 사는 모습들, 그것이 바로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주제로 이런 소설이 묶이는 것도 어색하다고 할 수 없단 생각을 한다.

 

이 작품집에서 섬뜩한 작품이 있다. 공포물이나 폭력물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러나 추리물에도 가까운 그런 소설, '하르피아이와 축제의 밤'

 

여장 대회에 참가한 남성들이 살해당하는 그런 내용을 담은 소설. 소설에서 남성 주인공은 마지막에 '히파티아'를 떠올린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찢어죽임을 당한 수학자. 마찬가지다. 그만큼 여성이라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차별과 박해가 있었는지, 거기에 무슨 합당한 이유를 댈 수가 없다.

 

소설 속에서 초대받은 남성들은 여성을 차별하거나 성추행을 했던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라, 그래도 약간의 이유가 있지만, 역사 속 여성들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추방, 감금, 죽임을 당해왔다.

 

그런 모습을 거꾸로 표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특이하게도 주인공을 성추행 경력이 없는 사람으로 삼았다는 것. 그가 친구를 대신해 참가했는데...

 

이것을 조금 더 깊게 생각하면 방관자인 남성 역시 가해자일 뿐이라고, 그들도 책임을 면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에 난 아니야 하고 발을 빼고 있는 남성들에게 이 소설은 너희들도 같은 족속이라고, 너희들도 책임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방관은 동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곱 편의 소설이 '페미니즘'이라는 주제 하나로 엮여 있지만 내용은 다 다르다. 이만큼 페미니즘이 다양하게 다가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리라.

 

이렇듯 페미니즘을 꼭 여성주의로만 해석할 필요가 없다. 페미니즘은 인간주의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라는 사실. 인간다운 삶을 추구한다는 사실. 이 사실에는 여성과 남성을 구분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여기 실린 일곱 편의 소설들은 인간다운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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