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시들.

 시에 대한 의미를 한 번에 파악하기 힘든 시들. 언어는 많으나, 대체로 시들이 길다, 그러나 그 언어들은 의미를 피해서 에둘러 간다.

 

  의미에 다가가지 않는다. 마치 카프카의 소설 '성'애서처럼. 성은 눈 앞에 보이는데 절대로 성에 들어갈 수가 없다.

 

  이 시집도 그렇다. 시인의 말에서 이 점을 느낄 수 있다.

 

  '말의 회오리는 고요의 축 주변에서 / 모래알 하나도 선명하게 포착하지 못한다. // 바람 지난 자리의 유령 발자국들. / 말은 늘 마지막이길 바랐다.' (5쪽)

 

  그러나 말은 늘 마지막이길 바라지만 말은 늘 처음이다. 밖으로 나온 말은 한 사람에게는 마지막이 될 수 있어도 듣는 사람에게는 처음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시인이 시로 표현한 말들을 시인은 마지막이길 바랐겠지만, 독자에게는 처음이어야 하는 말들이다.

 

독자에게도 마지막이 되는 말들은 시로써 존재하지 못한다. 그것은 죽은 말, 종이에 갇힌 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강정의 시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 이상 들춰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집에서 나온 언어들은 '모래알 하나 선명하게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

 

모래알은 구체적이다. 실체다. 그런 실체를 잡지 못하는 말. 그야말로 귀신일 수밖에 없다.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존재. 그렇게 시들은 독자들 주변을 맴돌지만 절대로 독자들에게 들어오지 않는다. 포착되지 않는다.

 

해설에서, 참으로 심오한 시 해설인데, 이렇게 강정 시를 말하고 있다.

 

'이 시집에서 일상의 사물과 일상의 시간에 대한 차분한 묘사나 관찰은 없다.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경험이나 그 경험에 대한 관찰도 없다.  ... 강정 시가 처음부터 공공적이라는 현실에 대해 시건방진 표정을 짓거나 시큰둥했지만, 이 『귀신』은 지독하다.' (105쪽)

 

이렇게 지독한 시집을 읽다니... 공유하기 힘든 감정들을 시로 표현한 시집을 일다니... 시인이 마치 빙의 또는 접신이 되어 방언을 내뱉은 말들에서 무언가를 찾으려 하다니...

 

읽고서도 귀신에 홀린 양 그냥 제자리로 돌아오기 위해서 다른 곳을 빙빙 돌았다는 느낌만을 받는다.  허무하다. 읽었는데 읽지 않았다. 귀신이다.

 

『귀신』이라는 시집, '바람 지난 자리의 유령 발자국들'처럼 실체가 없게 나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우리네 삶에 명확히 무엇이라 지칭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듯이.

 

그럼에도 삶은 실체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유령이 아니므로. 귀신이 아니므로. 시라는 회오리는 실체를 거머쥐어야 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실체를 보고 잡을 수 있게 해야 한다.

 

어쩌면 강정 시를 읽으며 실체를 파악하려면 더욱 더 미궁으로 빠져드는 이 현실세계에서 그래도 실체를 찾으려는 노력을 멈춰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이런 『귀신』같은 시집이 정말로 귀신 같이, 유령 같이 내게 다가왔다면, 나는 이런 유령같은, 귀신같은 시집을 거부하련다. 내게는 삶이 보이는, 실체가 느껴지는 그런 시집이 지금은 더 필요하니까.

 

시들이 길고, 유령발자국같이 실체를 파악할 수 없고, 바람같이 휙 지나가버려 인용하기가 힘들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무언가를 보는 것이 사람이라면, 우리는 실체를 잃어가는 시대에 실체를 찾기 위한 노력을 더 해야 한다. 이 시집을 읽으며 든 생각이다.

 

나중에 다시 읽어보면 귀신조차 사람이 만들어낸 존재, 사람이라는 실체를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실체라면, 이 시집 다시 읽으면 어떤 실체를 찾아낼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가능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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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3 09: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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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3 17: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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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로 된 무지개 - 다시 읽는 이육사
도진순 지음 / 창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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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로 된 무지개' 이육사 시 '절정'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구절을 제목으로 삼은 것은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지개인데 강철로 되었다니, 이 말로 안되는 역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로 이육사 시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고심을 했다. 다양한 해석을 하고, 교과서에서 통용되는 해석도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을 쓴 도진순은 역사 지식을 바탕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바로 무지개에 대한 해석. 이 시에 나오는 무지개를 사마천이 쓴 "사기"에 나오는 형가에 대한 이야기에서 해석하는 단초를 찾아온 것.

 

흰무지개. 이는 반역이라는 것. 당시 일제시대에 흰무지개라는 표현은 금지되었다는 것. 그렇다면 이육사가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개라고 한 것은 겨울이 일제시대를 가리킨다면 강철로 된 무지개는 이런 일제시대를 깨부술 아주 강한 무기 또는 신념이라는 것이다.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육사는 일제에 대항하는 삶을 살았는데, 시에서 일제에 굴복하는 듯한, 절망적인 표현을 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겨울로 상징되는 혹독한 시련은 오히려 그 시련을 이겨낼 의지를 벼려내고, 무기를 마련하는 계기로 작동한다고 이육사가 이야기했다고 할 수 있다.

 

백척간두에서 한 발을 더 내디뎌낼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바로 이육사였을테고, 그런 삶을 시로 표현한 것이 '절정'이고, 절정의 마지막 부분 표현이 바로 이런 '강철로 된 무지개'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육사 시에 대해서 역사 지식을 바탕으로 새롭게 해석한 부분이 많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시 '청포도, 절정, 광야'에 대한 해석이 새로워서 읽으면서 감탄을 할 때가 많다.

 

상당히 타당성이 있다고 받아들여지지 때문이다. '청포도'에서 '청'자에 관한 문제... 푸른 포도를 의미하지 않고 '풋'이란 의미를 지닌 아직 익지 않은 포도라고 하는 것. 결국 청포도는 미래를 노래하는 시라고 할 수 있다는 것.

 

여기에 교과서에서 배웠던 글자가 하나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참, 마찬가지로 '광야'에서 광야를 넓은 들로 이해하기 쉬운데, 그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고...

 

결코 광활한 의미를 지닌 말이 아니고 삶을 살아가던 터전인 광야라는 것. 이 광야를 잃어버렸는데, 이제 다시 찾아 먼 미래에 그곳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는 해석.

 

좋다. 이렇게 이육사 시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이 하나 더 덧붙여졌다. 단지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이육사 시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게 해준다.

 

이육사가 한시에, 불교에도 관심이 많았다는 것, 이런 면을 이육사 시에 적용할 수 있다는 것. 그런 것을 새롭게 알려주고 있다.  

 

하나 더 시를 꼭 문학을 연구하는 학자들만이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역사를 전공한 학자가 이육사 시가 지닌 본질에 더 가까이 갈 수도 있다는 것, 그런 것을 알려주는 책이니, 더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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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사람
최정화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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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기 시작하면 얼마 되지 않아, '아, 쌍용이구나!'하는 신음이 튀어나오게 된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던 슬픔이 다시 스멀스멀 밖으로 새어 나온다. 이제는 좀 잊혀졌나 싶었는데, 여전히 진행 중이다.
 
진행 중일 수밖에 없다. 제대로 해결되지 않았으니... 여기에 지금은 미국에 본사가 있는 지엠이 군산 공장을 폐쇄하고, 다른 지역에 있는 공장들도 희망퇴직을 받고 있으니...
 
근 10년이 되어가는 그때의 일들을 소설을 읽으며 상기하는 일은 별로 유쾌하지 못하다. 그럼에도 잊어서는 안 되고, 또 이 일이 단 한 번으로 끝났으면 좋겠지만, 전국 각지에서 또 세계 각지에서 반복해서 일어나고 있으니, 소설을 소설로만 읽을 수 없는 현실이 슬프다.
 
'없는 사람'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어서 제목만 가지고는 쌍용차 파업 사건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어쩌면 노동자들은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은 경영에서도 배제되었고, 또 파업을 할 때는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집단으로 우리 사회 안정을 해치는 집단으로 매도되지 않았던가.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하나의 점으로 인식하게 그들을 철저히 고립시키지 않았던가. 그 고립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 소설은 용역의 시점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무오, 김무오.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성인 김씨 성을 따고, 이름은 무오다. 한자어인지, 한글인지 모르지만 제목과 연결을 시키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제목과 연결을 시키면 무오는 한자어가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 무오(無吾), 내가 없는 사람. 즉 자의식이 없는,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사람. 이런 무오같은 사람이 많으면 노동자들은 점으로만 남을 수밖에 없다. 연결이 된 선이나 면, 입체가 되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는.
 
여기서 무오는 그렇게 나온다. 그에게는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없다. 연락하며 지내는 사람이 없는 그에게 친구가 있을 리가 없다. 이런 그에게 다가오는 한 사람. 이부. 이름 참, 고약하다. 이부라니...
 
그냥 뜻을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기껏 생각하면 두 번째 아빠나 다른 아빠라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의식이 없는 무오에게 용역일을 시키는 사람. 무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사람. 그러니 그는 앞에 나설 수 없는 사람이다. 
 
무오가 용역으로 파업 현장에 참여하면서 그 파업을 무너뜨리는 일을 하게 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는 소설인데, 그런 과정을 통해 서서히 무오는 자의식을 만들어가게 된다.
 
비록 점으로 있는, 사회에서 점 취급을 받고 고립되어 있는 그들이지만,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 고립되어 가고 있는 그들이지만 그들이 그 점 속에서도 인간으로서 유대를 맺고 있음을 무오는 점점 깨달아 간다.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도 깨닫게 되고... 이런 무오의 시점으로 소설이 전개되기에 소설 속에서 파업 노동자들이 겪는 아픔이 한 다리 건너서 전해진다.
 
공지영이 쓴 "의자놀이"에서 아프게, 마음 속으로 콕콕 찍어 박히던 그런 아픔과는 다르게 소설은 거리를 두고 파업 현장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그것이 자의식이 없는 무오가 서술자로 등장하는 효과다. 그렇다고 파업이 아프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파업 주동자였던 이자희가 무너져 가는 과정은 아무리 객관적으로 보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이들에게 해고는 살인임을, 이들이 얼마나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통받고 있는지, 어떻게 사람이 망가져 가며, 가정이 해체되어 가는지를 이자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점과 점이 모여 선을 이루고 선과 선이 모여 면을 만들고, 면과 면이 모여 입체가 되어 자기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데, 우리는 파업 노동자들이 계속 점으로만 지내게 하지 않았는지 반성하게 되는 지점이다.
 
그래서 소설은 마지막에 에필로그를 통해 이자희의 모습을 작가 시점으로 보여준다. 이것이 현실임을.
 
이제 개정될 헌법에서(발의가 될지 안 될지 아직은 미지수지만)는 근로란 말을 노동이라는 말로 바꾸기로 했다고 한다. 그만큼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해서 사회가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파업하는 것이 정당함을, 그들이 결코 점으로 머물러서는 안 됨을 인식했으면 좋겠다. 먹튀 자본가는 있어도 먹튀 노동자는 없으니, 그런 먹튀를 방지하기 위해서도 노동자들의 권리가 강화되어야 함을, 이 소설, 용역의 눈으로 파업 현장을 서술한 이런소설을 읽으며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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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을 읽는데... 시골 마을에 택배기사로 일하는 화자가 시골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시를 통해 들려주고 있다.

 

  쇠락해간다고 밖에는 할 수 없는 시골, 아마도 경상도 영양인가 보다. 시인의 말을 읽으니. 그런 시골에서 노인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 마을에 택배기사로 마을 어른들을 만나면서 화자는 여러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는데...

 

  시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르신들의 귀한 삶을 받아쓴 이 시집이 싸늘한 세상 가운데 사람의 온기를 지키고자 애쓰는 누군가의 손난로라도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135쪽) 라고. 

 

그럼에도 이런 시를 읽으면 슬퍼진다. 이것이 먼 미래가 아닌, 곧 닥칠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빈 들

 

망초꽃 가득한 묵정밭 바라보며

대천댁 할매 한마디 던진다

 

그 어른 가고 나니

들이 빈다

 

최진, 배달 일기, 한티재, 2016년. 83쪽.

 

곧 이렇게 되리라. 농촌에서 젊은 사람이 살기가 힘드니.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살기가 힘드니. 그래서 농민 기본소득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뜻있는 젊은이들이 농촌으로 들어가 살려고 해도 생계가 막막하니, 어떻게 농촌이 유지되겠는가.

 

시골 어른들 하나 둘 돌아가시고 나면 농촌은, 산촌은 텅 빈 들이 되고 말테니, 수많은 밭들이 묵정밭이 되고 말지니.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하는데...

 

이런 시골이 얼마나 늙어가는지, '신원리 마을회관'이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갓 환갑을 치른 사십 년 묵은 막내 새댁이가' (48쪽) 라는 표현. 이렇게 시골은 늙어가기만 한다. 젊은이들이 모두 떠나고 남은 사람들이 그대로 늙어가는 곳. 50이면 청년 소리를 들어야 하는 곳.

 

그럼에도 여전히 농촌에 대한 대책은 별로 없다. 그냥 이렇게 사그라지게 할 것인지...

 

시집은 4부로 나뉘어 있다. 겨울-봄-여름-가을 순으로. 이렇게 계절 순으로 택배기사인 화자가 마을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슬프지만 그곳에서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으니. 그래서 이 시집에는 쇠락해가는 시골의 모습도 담겨 있지만, 그 속에서도 정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아주 따스한 시선으로.

 

그들 삶에 얼마나 정이 넘치는지. 이렇게 정을 받기만 하지 않고, 정을 주기도 한다는 것을. 택배기사인 화자는 물건을 배송하는 것이 아니라 정을 배송하는 것이다. 정을 주고 받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 정 주고받음을 시로 표현했다. 이 시집은 그 결과물이고. 그러므로 이 마을은 시의 마을이자 시인의 마을이 된다. 시란 바로 정 아니겠는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시인의 마을

 

아이고마 이 시간꺼정 배달하니껴

힘들어서 우야니껴

 

잠시나마

고추 꼭다리 따다가 택배 받으러 나온

할매와 내가 다르지 않다

 

너와 내가 같지 않고서

은유는 일어날 수 없다

 

붓고 곱은 손이

멀리 타향살이 하는 막내아들 배웅하듯

택배기사의 등을 따라나서다

할머니의 팔에 붙들려 흔들흔들 바라만 본다

 

추석 앞둔 늦은 밤 배달길

만나는 이마다 모두 몸으로 시를 쓴다

여기가 시인의 마을이다

 

나는 시인의 마을

택배기사이다

 

최진, 배달일기, 한티재, 2016년. 126-127쪽.

 

이런 정이 사라지지 않게 해야겠다. 정이 없는 세상은 너무도 삭막하니까.  어렵지 않고 담백하게 시골 어른들의 모습을, 그들이 이야기를 써 나간 시집이다. 따스해서 좋다. 그렇게 정이 시집 전체를 통해 전달되어 온다. 시인의 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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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30 08: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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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31 00: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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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화 상상 여행 - 신화로 인문 읽기
신동흔 지음, 젤리빈 그림 / 나라말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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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며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코딩교육이니, 정보교육이니 하는 컴퓨터 관련 교육을 어릴 때부터 하지 말고 이렇게 신화를 읽히고 생각하는 교육을 했으면 좋겠다는.

 

앞으로 다가올 세계를 살아갈 미래 세대에게 미래를 대비하는 교육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미래를 충실하게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오래된 미래인 신화 교육도 좋지 않을까 하는.

 

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곰곰 생각해 보니 신화에는 관계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신화에서는 나만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전지전능한 신이라 해도 자신만으로는 존재할 수가 없다.

 

전지전능한 신도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한다.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 잘못된 관계를 맺으면 신이라 할지라도 벌을 받거나 곤경에 처하게 된다.

 

이런 관계, 나만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살아갈 삶은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그래서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데 신화만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이 책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신화를 쉽게 풀이해서 썼다. 신화하면 그리스로마 신화만 생각하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에게 우리나라 신화도 그리스로마 신화 못지 않음을 알게 해주는 책이다.

 

천지창조라는 아주 광대한 영역에서 시작하여 업이라는 눈에 잘 띠지 않는 작은 존재까지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우리나라 신화에 대해서 거의 모든 것을 다루어주고 있다고 보아도 된다.

 

여기에 신화가 가진 상징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고 있으며 신화의 출전도 잘 밝혀주고 있고, 다 읽고 난 다음에는 상상하기를 통해 신화를 자신에게 가져오는 활동도 하게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너무도 위대하고 훌륭한 일들만을 하는 신을 이야기하지 않고 실수하고 잘못하고 그 잘못으로 인해 고통받는 신을 이야기하는 점이 좋다.

 

누구나 잘못을 할 수 있으니, 완전무결한 신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 자신의 삶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로 치부할 수 있으나, 우리 신화에서는 우리가 겪을 수 있는 일들을 신들도 겪는다는 점에서 내 이야기로 읽을 수가 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반면교사로 삼을 수도 있다는 점, 이것이 우리 신화가 지닌 매력이다. 여기에 무슨 숙명처럼 정해져서 절대로 바꿀 수 없다는 식의 신화는 없다.

 

우리나라 신화는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짐을 보여준다. 그래서 어려운 상황속에서 그냥 좌절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도록 하지 않는다. 운명에 맡기라고 하지 않는다. 운명을 개척하라고 한다.

 

무언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라고 한다. 그러면 운명은 어느 새 바뀌어 있음을 신화를 통해서 보여준다. 여기에 절대적인 악, 꼭 배제해야 할 악은 없다는 점도 우리 신화에서 보여준다.

 

관계 속에 모든 존재가 들어 있다면 이 관계 속에는 절대적인 선만이 있지는 않는다. 선과 악이 함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이다.

 

우리 신화에서는 악한 존재, 모자란 존재도 신으로 섬긴다. 왜냐고? 이들을 통해서 우리 삶을 되돌아 볼 수 있으니까. 이들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바로 잡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어린 시절에는 코딩교육이니 뭐니 하는 정보교육보다는 이런 신화교육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삶을 엿볼 수 있고,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고립된 혼자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주변에 있는 모든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마지막에 나오는 신이 바로 '업(業)'이다. 집에서나 또는 가까운 곳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신. 너무 작고 하찮게 여겨져서 신이라 생각하지 않는 그런 존재. 그런 존재도 우리 신화에서는 신으로 섬긴다.

 

이렇게 작고 하찮은 존재도 신으로 섬기는 사람들, 삶을 잘못 살아갈 수 있겠는가. 나란 존재가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존재가 어떻게 관계를 허투루 맺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다른 존재들을 하찮게 막 대할 수 있겠는가.

 

신화는 이래서 과거가 아니다. 현재다. 그리고 우리 미래다. 우리가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를 보여주는 그런 소중한 이야기다. 신화가 지금 이 시대에도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청소년들, 다른 무엇보다도 이런 우리 신화를 읽고 우리 신화를 가까이 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청소년들이 살아갈 미래가 조금 더 인간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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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9 08: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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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29 18: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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