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이 제목이 된 시는 오병량 시인이 쓴 '편지의 정원'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시는 '온통 글이' 되는 듯 길고도 긴데, 점점 말이 많아지는 것이 요즘 시들 추세인가 싶기도 하다.

 

  50명의 시인들이 두 편씩 시를 써서 선보이고 있다. 나는 이런 시를 쓰는 시인입니다. 앞으로 이런 시와 비슷한 시들을 엮어 시집을 내겠습니다. 내 시 어떤가요? 이렇게 묻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인은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고, 언어에 대한 민감성, 예민성이 뛰어난 사람인데, 시집 제목에 '티저'라는 말이 들어간 것이 좀 마음에 걸린다.

 

예고편 정도 되는 말을 이렇게 기념 시집에 당당히 쓰다니, 좀 아니다라는 생각을 했고, 영어 단어 'teaser'라는 말을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모르는 사람도 많을텐데, 우리말도 아니고 영어 단어를 이렇게 시집에 버젓이, 비록 한글로 '티저'라고 썼다고 하지만, 어울리지 않는단 생각을 했다.

 

두 편의 시들. 그 시인들이 앞으로 이런 시를 쓰겠다는 것, 맛보기, 예고, 그러니 이 시인들 시집이 앞으로 나올텐데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 관심을 가지라는 의도로 편집한 시집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보통 기념시집은 그 전에 나온 시집들에서 한두 편을 뽑아 엮었는데, 이 시집은 과거로 가지 않고 미래로 갔다.

 

미래에 나올 시집을 상상하고 기다리게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잘 보여주는 시가 문태준의 '상응하다'란 시가 아닐까 한다.

 

시집은 시를 통해 우리와 상응하려고 하고 있다. 시와 시인이, 시인과 우리가, 우리와 시가 서로 상응해야 하는 것이다.

 

상응하다

 

  아무 인연이나 연고가 없는 것은 없다. 무엇과도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무엇에서도 마음은 일어난다. 아침햇살, 새소리, 바람, 꽃가루가 돌에게 가서 돌을 깨우듯이, 그래서 돌이 얼굴과 음성으로 화답하듯이.

 

고은강 외, 너의 아름다움이 온통 글이 될까봐, 문학동네. 2017년. 79쪽. (문태준, '상응하다')

 

 이 시집은 이렇게 우리와 상응하려고 한다. 그것도 요즘 영상세대에 맞게 짤막한 시들을 보여줌으로써 좀더 깊고 넓은 시 세계로 들어오라고 한다. 그래서 '티저'란 말을 썼는지도 모른다. 젊은이들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서. (내 맘에는 안 들지만)

 

하여 이 시집에는 시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50개가 있다. 이 50개 중 어느 곳으로 들어가도 된다. 어느 문을 열어도 된다. 아무 문이나 열어도 어느 문과도 상응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시다.

 

그렇게 문학동네 시인선은 과거의 시들과 현재 시, 그리고 미래 시들이 함께 어울리게, 상응하게 하고 있다.

 

단지 시만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과 상응할 수 있는 그런 삶, 그런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그런 시집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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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아이 라임 청소년 문학 12
은이결 지음 / 라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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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집단 생활을 한 다음에 전쟁이 없던 시기가 있었을까? 짧은 평화, 긴 전쟁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세계 곳곳에서 전쟁은 일어나고 있다. 일방적인 폭격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작은 전쟁들이 지속되기도 한다.

 

이런 전쟁들 속에서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은 여성과 아이이다. 그러면 여성 아이는 더 큰 피해를 본다고 할 수 있는데.

 

지구에서 사는 생물 중 가장 고등하다는 인간이 서로를 죽이는 전쟁을 멈추지 못하는 것은, 몸 속에 내재한 폭력에 대한 욕망을 이성으로 제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이 소설을 읽으며 전쟁이 얼마나 여성 아이에게 피해를 주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이 소설에서 전쟁 장면이 나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배경은 병자호란이 끝난 직후다. 전쟁은 이미 끝났다. 그러나 여성 아이에게는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단지 여성 아이뿐만 아니라 힘없고 약한 백성들에게는 전쟁 중에도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고통이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전쟁을 감내해야 한다. 양반들과 달리.

 

비극적인 건, 어떤 사람들이 '화냥년'이란 말의 어원으로 '환향녀'라는 말을 들고 있는데, 이는 병자호란 이후에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양반들, 권력자들, 자신들이 잘못해서 청나라로 끌려가게 해놓고, 이들이 돌아왔을 때 정조 운운하면서 책임을 이들에게 전가한 말. 환향녀. 이 소설에서도 끌려갔다 돌아온 작은 마님이 결국 추운 겨울에 냇가에서 몸을 씻어야 하고, 결국은 차가움 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비극들, '칼의 아이'라고 하는 제목이 언뜻 '에밀레종'을 연상시킨다. 종을 완성하기 위해 아이를 제물로 바쳤던 먼 과거의 일들. 이번에는 왕에게 바칠 칼 '사진검(四辰劍)'을 완성하기 위해 바칠 아이, 행이. 행이를 둘러싸고 청나라 사람들에게 누이를 빼앗긴 부칠이, 그리고 행이 쌍동이 동생 만우. 행이와 함께 지내는 옥란이라는 양반집 규수. 칼을 만드는 도검장.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해 나라를 피폐하게 만든 왕, 그러나 그 왕을 잃으면 자신들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 왕이 권력을 쥐도록 신묘한 기운을 얻고자 하는 신하. 그 신하가 이야기한 검, 사진검.

 

사인검(四寅劍)은 있어도 사진검은 없다. 사인검이 호랑이 해 호랑이 달 호랑이 날 호랑이 시에 만들어진 검이라면 사진검은 용 해에 용 달, 용 날, 용 시에 만들어진 검이다. 여기에 소설적 상상력을 더해서 이때 태어난 아이를 제물로 바쳐야 한다.

 

그렇다. 왕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반 사람의 생명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자기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양반들의 모습은 정권을 잡기 위해서 물불 가리지 않는 지금 정치권들 모습의 원조라 할 만하다.

 

소설은 행복한 결말, 인과응보로 어느 정도 가다보면 결말이 예측가능해진다. 이런 결말이 이루어질 수 없음에도 소설 결말에 안도하는 것은 소설 속에서조차 힘없는 사람들이 속절없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람 목숨은 누구를 막론하고 똑같다는 사실. 안타까운 희생이 있었지만, 그런 희생이 더 힘없는 사람에게 일어나지 않았다는 안도감. 그럼에도 힘있는 집안에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여성이 겪는 삶은 마찬가지로 힘듦을 이 소설에 등장하는 최부사 댁 딸 옥란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무남독녀라고 오냐오냐 하면서도 정략적 결혼의 대상으로만 삼고 있는 것, 딸의 무참한 죽음 앞에서도 제 부와 권력을 잃지 않으려는 최부사의 모습. 눈 먼 충성심으로 한 사람의 생명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이판서. 여기에 여성이 한 사람으로 당당한 한 생명으로 존중받는 모습은 없다.

 

사람 목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것, 전쟁으로 인해 더욱 피해를 보는 여성 아이들이 어떤 일을 겪는지, 과거 오래된 역사를 배경으로 이 소설은 잘 보여주고 있다.

 

힘없는 사람들이 그래도 서로 돕는 모습, 결국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소설은 끝난다. 우리 삶도 이래야 하지 않겠느냐고, 역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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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0 0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0 15: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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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를 가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불교든, 천주교든, 기독교든, 이슬람교든 또는 다른 종교든 종교는 사람에게 위안을 주기 때문에 지금까지 존재해 오지 않았던가.
 
  위안만이 아니라 사람답게 사는 삶, 자신들이 믿는 신의 뜻에 따라 살기 위해 종교를 지니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종교가 많을수록 사람들이 행복해야 하는데, 과연 그럴까 하면, 부정적인 대답이 올 수밖에 없다.
 
  종교로 인해 일어난 수많은 전쟁들, 학살들을 제외하더라도 종교가 흥할수록 이상하게 가난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은 더 힘들게 살아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교회나 성당, 그리고 땅 넓은 줄 모르고 넓어지는 절, 크고 넓고 높고 화려해지는 성전들과 달리 일반인들의 삶은 작고 좁고 낮고 누추해지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란 소설에서 예수가 다시 이 세상에 내려왔을 때 일어나는 일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아마도 예수는 다시 감옥에 갇히고 심판을 받고 추방이나 사형을 당하리라는 그런. 그 시대에 예수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도종환, 지금은 장관이 되어 있지만, 보수정권 10년 동안 깊은 절망에 빠져 있던 그가 절망에 허우적거리면서도 시를 놓지 않았다. 그리고 낸 시집. 
 
시집 속에는 절망이 도처에 보이지만, 그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길어올리고 있다. 그렇기에 다시봄을 맞이했는지도 모른다. 
 
그중에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연상시키는 시. 아니 지금 우리나라 종교를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시. '흐느끼는 예수'
 
흐느끼는 예수
 

 


만일 예수가 눈발 풀풀 날리는 철거 지역에 와서
꺼멓게 타버린 슬픔의 시신을 안고 몸부림치는
늙은 여인 곁에 앉아 울고 있었다면
우리는 예수를 알아보았을까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해고노동자의
절망의 무게를 두 팔로 받아 안으려다
손에 피를 묻힌 채 흐느끼는 예수를 보았다면
우리는 그를 예수라고 믿었을까
가난한 자들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세상을 향해
예수가 독사에 빗댄 욕을 거칠게 내뱉았다면
우리는 막말하는 그에게 실망해 등을 돌렸을까
만일 예수가 로마의 군사기지 철조망 앞에 앉아
저를 평화의 도구로 써달라고 비에 젖으며 기도했다면
그날도 노인들이 군복을 입고 교회 앞에 몰려왔을까
만일 예수가 오늘 아침 이 땅에 와서
탐욕의 식탁과 향기 없는 정원
정의 없는 권력과 이성 없는 극단
자비 없는 기도를 비판한다면
그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으려 했을까
국정원이 몇가지 비리를 언론에 넘기고
조간신문 기사로 돌팔매질한 뒤
감옥에 가두려 하지 않았을까
불법체류자나 무슨 무슨 주의자로 낙인찍어
이 땅을 떠나게 만들지 않았을까 
만신창이가 된 채
진눈깨비 내리는 지평선 속으로
혼자 걸어가게 하지 않았을까
 
도종환, 사월 바다, 창비. 2016년. 110-111쪽.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아니라고... 절대 아니라고,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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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9 16: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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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9 17: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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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하트 라임 청소년 문학 20
김선희 지음 / 라임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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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뿐인 삶. 그러나 이런 삶을 살아가는 데 자기 자신이 선택한 삶은 얼마나 될까? 이상하게도 선택보다는 주어진 삶을 산다는 느낌을 더 많이 받지 않는가.
 
선택할 수 없이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 삶. 청소년기에는 더 그럴지도 모른다. 선택보다는 시키는대로 해야만 하는 시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이래야 해, 이것을 해야 해. 이것은 하면 안 돼. 우리는 이렇게 쉽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자아정체성을 지니게 되는 시기라고 하면서도 막상 청소년들이 선택을 하려고 하면 이 핑계 저 핑계로 자신들을 따라 하라고, 자신들이 제시한 길로만 가라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청소년 소설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작품들을 읽어보면 어른들 입장에서 서술되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만큼 청소년 소설이라고 하지만 작가는 어른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회 통념을 벗어나지 못하는 소설들이 많은데, 이 소설은 조금 다르다. 명확한 결말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끔찍한 미래가 기다라고 있는데도 그 미래로 걸어 들어가는 청소년을 그리고 있어서 그러는지도 모른다.
 
한때 일진이었다가 자신의 미래를 만나고 마음을 바꾼 검은 하트. 소설 제목이 된 검은 하트는 김요정이라는 아이가 주인공인 것 같지만 주인공은 배진익이라는 아이다.
 
진드기라는 별명으로 김요정에게 불리는 진익이를 중심으로 소설이 전개되는데, 짜장면 집을 하는 진익이네, 엄마, 아빠, 외삼촌과 벌어지는 일들, 그리고 진익이 학교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들이 서술되고 있다.
 
한 학기 동안 여러 사건들을 거치면서 자기 삶을 선택하게 되는 진익이의 성장소설로 볼 수 있는데, 이런 진익이의 성장을 돕는 인물로 김요정이 나온다.
 
김요정은 이름과 달리 초등학교 때 검은 하트로 이름을 날리던 일진 짱이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사는 삶을 선택한 평범한 중학생이다.
 
'우주로탈출프로젝트'라는 밴드를 결성한 친구들이 학교 축제에서 무대에 올라 신나게 연주를 하고, 그 영상이 인터넷에 오르내리면서 김요정이 검은 하트라는 소문이 퍼지게 된다.
 
김요정은 이 일로 인해 학교에서 집단 괴롭힘을 당하고, 심지어 밴드에서 탈퇴하게 되고 밴드 구성원들에게도 괴롭힘을 당하게 된다. 이때 선택의 기로에 선 진익. 그는 김요정을 감싸게 된다. 
 
과거는 과거일 뿐. 그러나 다른 학생들은 집요하다. 이렇게 심하게 괴롭히는데 학교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수많은 피해자들이 단단하게 뭉쳐 가해자가 되는 모습은 섬뜩하기만다.
 
그런 벽에 맞서는 진익 역시 괴롭힘을 당할 뿐이다. 누구에게도 동조받지 못하는 행동. 그러나 진익은 피해가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자신이 선택한 삶이니까. 고민을 통해 스스로 결정한 일이니까.
 
마찬가지로 김요정 역시 이런 행동을 취한다. 과거 자신의 잘못은 되돌릴 수 없으니, 아이들이 괴롭히더라도 그 잘못한 값으로 여기겠다는 것. 그렇게 새로운 자신의 삶, 일진으로서 돈을 뜯을 때보다 지금 괴롭힘을 당하고 있지만 마음은 더 편하다고 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이는 아이.
 
진익은 그런 김요정을 보면서 자기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결정하게 된다. 어른들이 준 선택지 속에서 고르지 않고 자기가 어떻게 살지를 스스로 결정하겠다고. 물론 확실히 결정하지는 못했지만, 제 삶의 주인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렇게 한 청소년이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성장해 간다. 하지만 이런 개인의 성장은 집단의 힘 앞에서 무력할지도 모른다. 김요정의 앞날은 결코 밝지 않을 것이고, 또 그런 김요정을 지지하는 진익 역시 힘든 생활을 할 것이다. 
 
피해자임을 내세우면서 가해자가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 벽은 얼마나 단단한지, 이렇게 포용이 아니라 배제하는 모습이 우리 사회가 지닌 모습이 아닌지, 소설을 통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럼에도 소설에서는 희망이 느껴진다. 김요정의 변화는 진정한 변화이고 진익은 많은 고민 끝에 자기만의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스스로 선택한 삶, 그것은 스스로 책임지는 삶이고, 그런 삶 앞에서 어려움은 없어지지 않을지라도 피하지 않을 대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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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제목이 이미 질주다. 속도다. 가만히 있지 않는다. 계속해서 달려야 한다. 어쩌면 현대인은 이렇게 멈춤이 아니라 달림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길 위에 있다. 시집에서 멈추도록 하는 존재로 '거울'이 등장하지만 이 '거울' 역시 멈춤이 아니다. 달림이다. 그냥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결코 멈춰있지 않은 존재를 비춰주고 있다.

 

 이렇게 시집은 계속 질주한다. 속도가 대단하다. 그래서 위태하다. 우리네 삶이 이렇게 위태로운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한다.

 

이 시집을 가장 잘 드러내는 시가 '길, 오토바이, 나이키'라는 시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물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 위태위태하게 달리고 있다.

 

     길, 오토바이, 나이키

 

길은 계속해서 제 속에서 제 몸을 천천히 빼내고 있다

길은 미끈거린다 길에서는 늘 시간의 피비린내가 난다

길은 여기에 서서 멀리까지 간 제 몸을 그리워한다

 

오토바이는 계속해서 길 끝에서 길 끝으로 탈주한다

오토바이는 항문의 속도로 들끓는다 따가워 매워

오토바이는 길에서는 도저히 발을 떠올릴 수조차 없다

 

달리는 오토바이 위에서 몸은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다

두 발이 가까스로 남은 눈알처럼 허공을 더듬는다

빛 속에서 생겨난 그림자가 앙상하다

몸보다 커진 심장이 벌컥벌컥 시간의 고삐를 잡고간다

 

이원,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 문학과지성사, 2013년 초판 5괘. 111쪽.

 

여기에 나이키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나이키가 무엇인가? 운동을 하는 선수들이 신는 신발 아닌가. 그 로고는 어떤가. 날렵하게 달리지 않는가. 마치 오토바이가 달려나가듯이.

 

이러니 삶은 속도일 수밖에 없다. 계속해서 달려야 한다. 길 위에 오토바이, 오토바이 위에 나이키. 그렇게 이들은 계속해서 달려야만 한다. 우리네 인생이 그렇게 달릴 수밖에 없듯이.

 

이런 달림으로 우리는 시간의 고삐를 잡고 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몸보다 커진 심장은 정상이 아니다. 그러니 이런 달림 속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잃고 만다.

 

속도에 자신을 맡기면 심장이 몸보다 커지는, 결국 내가 견딜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질주하는 길이 아니라 걷는 길, 가끔은 멈추기도 하는 길... 운동하는, 전력질주하는 나이키가 아니라 사뿐사뿐 흙을 밟으며 가는 신발, 그리고 시간의 피비린내가 아닌 자연의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길.

 

그런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시집을 읽으며 시집에 나오는 엄청난 속도에 내 삶을 맡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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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7 09: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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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7 18:3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