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피 공부 - 매일 언어를 다루는 사람들에게
핼 스테빈스 지음, 이지연 옮김 / 윌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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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꼭 광고에 종사하는 사람만 읽을 필요는 없다. 소설을 쓰는 사람, 시를 쓰는 사람 등등 말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면 꼭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꼭 말하고 관계 있다고 할 필요가 없다. 세상에 말과 관련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누구나 말을 하고 사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누구나 읽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냥 옆에 놓고, 시간 나는 대로 아무 곳이나 펼쳐보아도 좋다. 짤막한 문구들이 1060개가 있다. 이를 경구라고 해도 좋다.

 

'279 광고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근친상간으로 고생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들은 광고를 쓰고, 광고를 읽고, 광고를 이야기하고, 광고와 자고, 꿈에서도 광고를 본다. 그 결과 아이디어끼리 교배를 하여 신기하게도 똑같은 배치와 문구를 가진 콘셉트와 해석이 나온다.

 

280 광고는 커뮤니케이션의 예술이다. 하지만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으려면 먼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사람들과, 자연과, 주변 세상과, 나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 (77쪽)

 

이런 말이 꼭 광고에만 해당하겠는가. 직장인들에게도 마찬가지 아닌가. 오로지 자신의 직종만 생각하다 보면 창의적인 생각이 나오지 않는다. 늘 그게 그거인 생각, 기획만 하게 된다. 이럴 때 다른 곳에 간다든지, 다른 이를 만난다든지, 다른 일을 하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좋다고 하는 회사에서는 이렇게 딴짓하는 시간을 일부러 주고 딴짓을 권장 또는 의무로 하고 있다. 이는 생각의 근친상간을 막는 방법이다.

 

생각의 근친상간을 막는 방법, 그것은 곧 대화하는 것이다. 바로 280번 경구처럼 하면 생각의 근친상간을 막고 창의적인 발상을 할 수 있다.

 

광고에 딱 어울리는 말, 그러나 바로 우리 삶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말.

 

798 소비자가 볼 때는 머리로 보지만, 살 때는 마음으로 산다. (228쪽)

 

그렇다. 우리는 주로 머리로 판단을 한다고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것은 마음이다. 그래서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긴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그 여정을 시작하지도 못하고 머리에만 머물러 있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가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손과 발로 가는 여정이 시작된다. 마음, 가슴을 거치지 않고서는 절대로 손발을 움직일 수 없다. 광고가 그러하다면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참 많은 경구들이 있다. 광고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그것을 다른 분야로 확장할 수 있다. 우리 삶과 연결지을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누구나 읽어야 한다. 읽으면서 마음 속으로 새겨야 한다.

 

예전에 학창시절 땡볕 운동장에서 교장 훈화를 듣던 때를 생각해 보라. 참 좋은 말, 구구절절 옳은 말만 하는 교장이지만, 그 좋은 말이 학생들 머리로 들어가던가. 머리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말들이 어떻게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겠는가. 어떻게 손과 발을 움직이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교장 말은 그냥 말로써 허공에 흩어져 버리고,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제 행동만을 하지 않았던가. 그 길고도 길었던 교장 훈화.

 

마지막으로에 환성을 올리면 다시 끝으로가 시작되고, 끝났다 싶으면 다시 한번 말하자면으로 또 시작되던 그 지루한 말들.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많은 말들은 의미없다고 한다. 특히 광고에서는. 짧은 말 속에 많은 의미를 담아야 한다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말들도 그렇지 않을까 한다. 지나치게 장황한 말들은 결코 다른 사람의 마음에 닿을 수 없으니까.

 

좋았다. 그냥 한 구절, 한 구절 읽는 것이. 읽으면서 어떤 말을 써야 할지, 어떻게 써야 할지 생각해보는 기회도 가질 수 있었으니까. 

 

곁에 두고 언제든 아무 쪽이나 펼쳐 읽으며 생각에 잠기면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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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1 22: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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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2 05: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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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젠더 수업 창비청소년문고 27
김고연주 지음 / 창비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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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수업이다. '젠더'를 생물학적인 성인 '섹스'와 비교해서 '사회적인 성'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생물학적이든 사회적이든 무언가로 규정되면 이미 어떤 한계 속에 들어가게 마련이다.

 

그러니 젠더 수업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점은 바로 한계 속에서 나오는 것, 틀을 부수는 것, 보이지 않는 유리 천장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 시작을 인간의 본성이라는 주제로 시작한다.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지만 남녀가 지니는 본성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남성과 여성으로서 서로 다른 본성을 지니는가? 이에 대한 답은 아니다다.

 

아니라는 연구 결과를 가지고, 남녀의 본성이라고 하는 것이 실은 사회적ㅡ역사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틀 속에서 본성이라는 것도 자연스레 형성되는데, 이것이 '다이어트'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 다음에 사랑, 또 모성으로 논의를 확대해 나가는데...

 

본능에 가까운 정서라고 여기고 있던 것들이 실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사례를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제목이 '나의 첫 젠더 수업'이듯이, 젠더라는 주제를 가지고 수업을 받아야 하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쓴 책이니, 청소년들이 어떤 고정관념을 지니고 있으면 그것이 고정관념임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여 책은 한 발 더 나아간다. 이번엔 직업이다. 어떤 일을 해야 할까? 과연 일에 남녀가 구분되는 일이 있을까. 지금까지는 남자와 여자가 하는 일을 구분하고, 그렇게 교육했다면, 이제는 아니다. 일은 평등하다. 누구나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 그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최초'라는 이름을 단 사람들을 언급한다.

 

이 '최초'들이 있어서 사회에 퍼져 있던 편견들이 하나하나 깨져가고 , 이제는 '최초'라는 말을 쓰지 않는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는 것.

 

그럼에도 가정으로 돌아와 보면 어떤가? 라고 질문을 한다. 가정으로 돌아오면 사회에서 양성 평등이 많이 이루어졌고, 남녀 구별이 많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고하게 남아 있는 차별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이 책에서 이 말을 듣고 참 좋은 말이다 하는 생각을 했는데, '맞벌이'와 '맞살림' (136쪽)이라는 말... 맞벌이는 많이 하는데, 아직도 맞살림은 거의 하고 있지 않는 우리나라 현실. 그러니 갈 길이 멀다.

 

젠더 수업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도 모르게 쓰는 '혐오의 말'을 인식하는 일이다. 혐오의 말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양성평등으로 가기 힘들다. 이런 '혐오의 말'은 파농의 말을 빌려 '수평 폭력'이라고 하는데, 자기가 분노해야 할 대상이 아닌 주변에 있는 약한 사람들에게 분노를 폭발하는 것, 이것이 바로 '수평 폭력'이다.

 

가부장적 사고에 빠져 있거나, 남녀는 달라야 한다는 사고에 빠져 있는 경우, 그렇지 않으면 과거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경우,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경우, 이런 '수평 폭력'을 휘두르기 쉽다.

 

그러니 자신을 제대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젠더 박스'에 갇혀 살지 모른다. 자신은 갇힌 줄도 모른 채.

 

어쩌면 이 '젠더 박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일지도 모른다. 상대를 온전히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관점으로 재단하는. 자기 관점에서 상대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그런 침대.

 

이 프로크루스테스 침대는 없어져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젠더 박스' 또한 없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좀더 평등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아니, 내 자신이 나를 인정하고, 남과 함께 연결되어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박스에 갇혀 있으면 다른 사람과 제대로 연결될 수 없기에. 우리나라 청소년들 공부다 뭐다 해서 자꾸만 박스 속으로만 들어간다. 그렇게 들어가면 안 된다. 이 책은 그런 청소년들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젠더 박스를 벗어나라고 말을 건다.

 

젠더 박스에서 나와야지만 너는 너답게 살 수 있다고, 나는 나답게, 너는 너답게, 그래서 우리는 우리답게 서로 연결되어 서로 존중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고.

 

덧글

 

프란츠 파농은 20세기에 살았던 알제리 사람이에요. 학자이자 의사이며 알제리가 프랑스의 식민지였을때 독립 투쟁을 이끈 지도자이기도 하지요. (181쪽) 라고 되어 있는데,

 

파농이 알제리 독립 투쟁에 참여한 것은 맞지만, 알제리사람은 아니다. 파농은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출신이다. 알제리는 그가 활동했던 나라이지 조국은 아니다. 체 게바라가 아르헨티나 사람인데 쿠바에서 활약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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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30 14: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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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30 15: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저는 답안지입니다


직사각형의 종이에

검은 벌레,

빨간 벌레가 있습니다.

제 집에 안주한

벌레는

쳐다보는 사람의 눈을

즐거움으로 빛나게 하지만

제 집을 찾지 못한

벌레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얼굴을 찌푸리게 합니다.

같은 벌레인데

어느 칸에 있느냐에 따라

다양한 반응을 일으키는

엄청난 변이.

이런 변이를 창조하는

수많은 아이들.

아이들의 손.


저는 답안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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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는 청소년 시집을 자주 읽는다. 청소년이 우리 미래라고 하지만, 청소년이 지내는 현재는 미래를 생각하기엔 너무도 어둡기 때문이다.

 

  어둔 현재를 살아가는 청소년들 모습을 진솔하게 그린 시를 보면 그들에게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모든 어른들이 청소년들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고 싶겠지만, 자신은 마음을 열었다는 것이 오히려 청소년들에게 꼰대로 다가갈 때도 많으니...

 

  적어도 시인은 청소년들의 현재를, 청소년들의 마음을 잘 파악하고 있을테니, 시인의 공감 능력은 다른 사람들보다도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청소년 시집을 읽으면 청소년 현재에 좀더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청소년 시집을 찾던 중 이 시집을 발견했다. 다양한 발상에, 청소년들의 마음이 이렇겠구나 하는 시들이 많다.

 

한 편 한 편 쉽게 읽을 수 있고, 쉽게 넘길 수 있는데, 마음에는 오래 남아 있는데... 아, 이게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처한 현실이구나. 이것이 바로 청소년들의 현재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무거워지는데, 달라지는 뭔가가 없다. 그냥 그렇게 다람쥐 쳇바퀴 돌듯, 교육은, 청소년은 그 자리에서 계속 맴돌고 있다. 정말 '뱅뱅' 돌고 있다. 어지러워 쓰러질 지경이다.

 

이 시를 보자.

 

    사이에 두고

 

교실 창문 하나, 사이에 두고

 

저 밖은 찬란한 봄

이 안은 혹독한 겨울

 

김선경, 뱅뱅, 푸른책들, 2016년 초판. 16쪽.

 

꽃이 피었다. 봄이다. 활짝 폈다 진다. 오월이다. 이제 여름을 향해 간다. 그렇게 모두들 봄을 노래하는데 창문 하나를 두고 밖은 화창한 봄인데, 교실은 겨울이다. 그것도 혹독한 겨울.

 

도대체 이 좋은 날에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심지어 쉬는시간, 점심시간이 되어도 교문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꽃을 보는 것도 삭막한 학교 안에서 봐야 한다. 

 

이 삭막한 학교 공간에도 꽃은 어김없이 피어 있지만, 담장 안 꽃, 힘들다. 그런 꽃도 교실에서는 창문 하나, 사이에 두고 또 볼 수 없다. 수업시간이 더 많은 학교 생활에서는.

 

온갖 규제들, 통제들, 그리고 공부, 공부, 공부... 이렇게 교실 안은 혹독한 겨울의 연속이다. 늘 겨울이다. 언제 봄이 오나, 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어른들은 말한다. 이 시기를 잘 넘겨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이렇게 아이들과 어른들은 사이가 넓다. 사이만 넓은 게 아니고 벽도 있다. 유리로 된 아주 튼튼한 벽이.

 

이 시를 보자.

 

     커서

 

커서, 방향에 상관없이 컴퓨터 화면을 자유롭게 이동할 때 쓰는 키

커서, 어른들 입에만 담기면 삶을 한 방향으로 고정할 때 쓰이는 말

 

커서, 뭐 될래?

커서, 뭐 할래?

 

김선경, 뱅뱅, 푸른책들, 2016년 초판. 31쪽.

 

무섭다. 이런 괴리를 어른들은 여전히 느끼지 못하고 있단 생각에. 나 역시 이런 어른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자유로운 아이들을 틀에 가둬두고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만 가라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커서'는 그게 아닌데...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는데...

 

이렇게 청소년 시집에 나온 시들을 읽으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청소년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청소년들의 모습에서, 현재에서 다시 나를 비춰보게 된다. 난, 제대로 된 어른인가. 이들과 함께 하는 어른인가. 아니면 이들에게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어른인가.

 

일방적 지시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도 청소년 시집을 읽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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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7
에드워드 올비 지음, 강유나 옮김 / 민음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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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속았다. 아니, 번역을 한 제목에 속을 수밖에 없었다. 영어로 몇 개 철자만 바꾸어 뜻을 전달할 수 있겠지만, 영어와 전혀 다른 언어인 한글로 번역을 했을 때는 영어로 말하는 말장난이 먹혀들지 않는다.

 

이 희곡도 마찬가지다. 버지니아 울프하면 유명한 작가를 연상하고, 그를 두려워하랴라고 하면 도대체 페미니즘을 주장하는 희곡인지 뭔지 생각하게 되는데...

 

버지니아 울프가 어렸을 때 성폭행을 당하고 그 후유증을 심각하게 앓았다는 사실, 가정 생활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자살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희곡 내용을 상상하는데... 아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나오는 장면은 노래에서밖에 없다.

 

해설을 보니 조금 이해가 된다. 노래는 아기돼지 삼형제에서 돼지들이 '누가 늑대를 두려워하랴'라고 부르는 노래를 비튼 것이란다.

 

울프... 늑대... 발음에서 같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말로 번역을 해놓으면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도 이상하게 버지니아 울프와 이 희곡 내용이 통한다는 느낌이 든다.

 

마사와 조지는 부부지만, 또 손님으로 나오는 허니와 닉도 부부지만 이들에게 사랑이 넘친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아직 젊은 부부인 닉과 허니는 그래도 서로를 이해하는 모습이 보이지만, 주인공인 마사와 조지는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다.

 

어쩌면 이들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상처를 주면서 그것이 사랑이라고 여기는 것.

 

가족이 이렇게 되면 파탄날 수밖에 없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지, 상대를 한없는 나락으로 이끌어가는지 생각해 보게 하는 희곡이다.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서로를 헐뜯고 서로를 화내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 없던 이야기(아이)도 만들어내는 부부. 이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받은 상처를 극복한 다음 만났다면 이들이 서로 상처를 주는 관계만을 지니게 되지는 않았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극한 말들을 쏟아내면서 상처를 주면서 그것이 사랑인 줄 착각한다. 이런 관계에서 사랑이 넘치는 가정, 우리가 꿈꾸는 가정은 이루어질 수 없다.

 

우리는 가정에 대한 환상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서로가 함께 있으면 마냥 행복한 관계, 그런 장소로 가정을 꿈꾸는지도 모른다. 그런 가정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을 열어야 한다. 자신만이 지닌 울타리를 없애야 한다.

 

자기 울타리를 지니고 상대방을 울타리 밖으로 자꾸만 몰아내는 말들, 그런 행동들을 하면 가정은 유지되지 않는다. 자기가 지닌 울타리에 문을 내고, 길을 내고, 서로 받아들여야지만 가정이 유지될 수 있다.

 

서로 자기 이야기만 하는 마사와 조지. 이런 가정이 지금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 가장 평화롭고 사랑이 넘쳐야 할 가정이 비난과 폭력과 두려움이 지배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

 

적어도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자기들 울타리에 문을 내고, 문과 문 사이에 길을 내야 하는데, 또 그 사이에 함께 할 장소를 마련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서로를 밀어내는 말들만, 행동들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 희곡이 오래 전 미국 가정이 붕괴되어 가는 모습을 그렸다고는 하지만, 지금 우리 가정들도 이 부부들 모습과 얼마나 달라졌는지...

 

타산지석(他山之石)이어야 한다. 이 희곡을 읽으며 가정이 어떠해야 하는지, 내가 살고 있는 가정은 어떤 가정인지 되돌아 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적어도 이렇게 삭막한 가정은 아니어야 한다는 그런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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