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정상가족 -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
김희경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넬슨 만델라의 말로 시작한다.

 

"한 사회가 아이들을 다루는 방식보다 더 그 사회의 영혼을 정확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없다."

 

그렇다. 언론을 떠들썩하게 했던 아동학대가 왜 문제가 되는지를 이 말만큼 잘 보여주는 것은 없다. 아동학대로 죽어갔던 아이들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를 생각하면 우리 사회의 영혼이 어떤지 알 수 있다.

 

이 책은 이런 아동학대에 대해서 쓴 책이다. 제목이 이상한 정상가족이라고 해서 가족의 형태에 대해서 쓴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읽어보면 아동 인권을 주제로 삼았는데, 아동 인권이 가장 심하게 침해당하는 장소가 바로 가족이라는 데서 출발한다.

 

흔히 가족하면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곳, 아이들이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이 책을 읽어보면 아동 학대의 출발점이 바로 가족이다. 그러니 이상한 정상가족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보통 아동 학대하면 정상가족이 아닌 곳에서 일어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사실 정상가족이라는 용어 자체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도대체 정상가족이 아닌 가족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정상가족이다 아니다는 가족의 형태로 이야기할 것이 아니다. 정상가족과 비정상가족을 나누는 기준은 가족이 서로를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느냐의 여부로 따져야 할 것이다. 그러니 '가족 동반자살'이라는 말이 얼마나 비정상적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아이 목숨을 부모가 끊어버리는 일, 그것은 동반자살이 아니라 살해다.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자녀 살해 후 부모 자살'이란 표현이 적절하다는 것에 동의한다. 아이를 자신의 소유물로만 생각하는 부모가 있는 가정은 정상가족일 수가 없다.

 

그래서 이 책은 체벌로부터 시작한다. 우리 사회는 부모의 체벌에 대해서는 참으로 관대하다. 부모가 아이를 때리는 일은 그럴 수도 있지, 우리도 그렇게 자랐어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제기하듯이 체벌과 학대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 기준을 나눌 수 없다. 스웨덴에서 린드그렌이 한 연설에서 아이가 회초리 대신 돌을 가지고 왔다는 엄마의 말, 그 엄마는 어떤 형태의 체벌도 교육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돌을 주방에 두고 늘 살폈다는 것.

 

법적으로 부모의 체벌을 완전히 금지한 스웨덴,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체벌 금지를 택한 많은 나라들, 우리도 형식상으로는 체벌금지지만, 여전히 체벌은 일어나고 있다. 아직도 아동 인권에서는 많이 못 미치는 나라인 것이다.

 

아동인권에 중요한 요소가 바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 다름을 인정하지 않음이 비정상가족이라는 이상한 말을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미혼모, 입양아, 다문화가정, 한부모 가정 등을 비정상가족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이다. 이런 가정을 삐딱한 눈으로 보게 되면 그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사회가 집단적으로 차별을 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과 같다는 것.

 

그런 태도를 버려야 한다는 것. 그래서 우리 사회도 아이들의 인권이 보장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 아이가 제대로 대우받아야 우리 사회가 좋은 사회가 된다는 것이다.

 

체벌은 학교에서는 거의 사라졌다고 할 수 있는데 - 완전히는 아니다. 여전히 학교에서 체벌은 일어나고 있고, 학교가 아닌 사교육 현장에서는 체벌은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다. 소위 돈 내면서 맞으려 다니는 아이들이 수없이 많은 것이 우리나라 현실이다 - 아동학대에 왜 화장이나 염색 규제 또는 교복은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규제하는 것, 이것 자체가 이미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누구나 똑같아야 한다는 폭력 아닌가, 그런 폭력이 교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교육이라는 가면을 쓰고 행해지니, 이것 역시 아동 학대라는 생각이 든다.

 

체벌이 법적으로 교육현장에서 금지되었지만, 상벌점이라는 이름으로 화장 등 각종 규제가 아이들을 옥죄고 있는데, 이것으로 인해 아이들이 두려움을 지니고 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아이들의 개성을 인정하지 않는 학교 교칙이 결국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이 곧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일을 내면화하게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책에서 하고 싶은 말이 결국 폴란드 교육학자인 코르차크의 말로 대변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세상에는 많은 끔찍한 일들이 있지만 그중에 가장 끔찍한 것은 아이가 자신의 아빠, 엄마, 선생님을 두려워하는 일" (217쪽)

 

그래서는 안 된다. 이 점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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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2 0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02 1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02 13: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02 14: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 2018-07-02 17: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넘 좋죠 올해 상반기에 읽은 책중에 최고 였습니다 ^^

kinye91 2018-07-02 19:55   좋아요 1 | URL
네.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었어요.

2018-07-02 2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03 0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 시집을 읽게 된 이유는 단 하나다. '시인의 말'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집에 묶인 시들을 反전쟁시라고 부르고 싶다.

내가 특별히 평화주의자라서 그런 건 아니다.

다만 이 시집에 묶인 많은 시들이 크고 작은,

가깝거나 먼 전쟁의 시기에 씌어졌기 때문이다.

전쟁을 직접 겪지 않은 한 인간이 쓰는 反전쟁에 대한

노래,

이 아이러니를 그냥 난,

우리 시대의 한 표정으로 고정시키고 싶었을 뿐'

 

시인의 말

 

인류 역사를 어떤 사람은 전쟁의 시기와 전쟁이 잠시 멈춘 평화의 시기로 나눈다. 전쟁이 대부분 역사를 차지한다는 것인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책에서 우리가 위인으로 다루는 인간들 대부분은 왕(나라를 세우거나 정복전쟁을 하거나 등등)이거나 장군이거나 하지 않던가. 평화 시기에는 특기할 만한 일이 없어서인지 모르겠지만, 긴 전쟁의 시기와 짧은 평화의 시기.

 

그러니 反전쟁시 얼마나 반가운가. 전쟁을 반대하는 시들. 도대체 어떤 시들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시집이다.

 

많은 시들이라고 했으니, 시집에 실린 시가 모두 전쟁을 반대하는 시는 아닐텐데... 전쟁을 반대한다는 것이 꼭 난 전쟁을 반대한다고 주장을 하거나,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는 내용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평화롭고 조화로운 삶, 서로 돕는 삶, 남에게 해를 주지 않고 - 이것이야말로 너무도 어려운, 정말 평생 살아가면서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 살아가는 삶을 이야기하면 그것이 바로 反전쟁시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

 

제목이 되는 구절을 따온 시와 그것과는 다르게 내 마음에 훅 들어온 시.

 

우선 내 마음에 들어온 시, 그냥 읽으면서 의미보다는 무언가 모를 아련한 그리움 같은 것이 마음 속으로 들어왔다. '대구 저녁국'이란 시다.

 

대구 저녁국

 

  대구를 덤벙덤벙 썰어 국을 끓이는 저녁이면 움파 조곤조곤 무 숭덩숭덩

  붉은 고춧가루 마늘이 국에서 노닥거리는 저녁이면

 

  어디 먼 데 가고 싶었다

  먼 데가 어딘지 몰랐다

 

  저녁 새 벚나무 가지에 쪼그리고 앉아

  국 냄새 감나무 가지에 오그리고 앉아

 

  그 먼 데, 대구국 끓는 저녁

  마흔 살 넘은 계집아이 하나

  저녁 무렵 도닥도닥 밥한다

 

  그 흔한 영혼이라는 거 멀리도 길을 걸어 타박타박 나비도 달도 나무도 다 마다하고 걸어오는 이 저녁이 대구국 끓는 저녁인 셈인데 

 

  어디 또 먼 데 가고 싶었다

  먼 데가 어딘지 몰랐다

 

  저녁 새 없는 벚나무 가지에 눈님 들고

  국 냄새 가신 감나무 가지에 어둠님 자물고

 

허수경,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문학과지성사. 2005년. 26-27쪽.

 

시를 두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다. 고향에서 입에 익은 밥을 먹는 시간과 고향을 떠나 다른 세계에서 사는 시간.

 

두 시간 모두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하지만, 과거의 공간은 충만한 공간이다. 새도 있고, 냄새도 머문다. 여기에는 평화와 사랑이 깃들어 있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 우리네 삶이 이랬는데... 어느 순간, 그 고향을 떠나 사는 삶은 빈 공간이다. 무언가가 머물지 못한다. 새도 없고, 냄새도 없는 그런 상태.

 

굳이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자신의 몸과 음식이 일치되는 삶을 살던 때, 그때가 바로 평화의 시기가 아닐까. 그런 시기는 짧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도 모른 채 떠나왔다.

 

다시 먼 데로 가고 싶어하지만, 그 먼 데로 과연 갈 수 있을까. 텅 비어버린 곳에서 어디론가 떠나기는 힘들다. 이 시를 읽으며 마음이 애틋해지는데...

 

반면, 다음 시는 섬뜩히다. 그야말로 反전쟁시라는 생각이 든다. 청동의 시간, 무언가 딱딱한 금속성의 시간, 석기시대를 거쳐 청동기 시대가 되면 인간의 폭력성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곧이어 철기가 되겠지만.

 

이런 청동의 시간은 폭력의 시간, 전쟁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시대는 이런 전쟁의 시간을 살고 있는 때 아닌가. 아이들이, 땅이라는 어머니에게서 잘 자라야 하는 그 아이들이 제 때를 기다리며 익어가는 감자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아이들은 청동의 시간을 살고 있다.

 

  물 좀 가져다주어요

 

  아이들 자라는 시간은 청동으로 된 시간

  차가운 시간 속 뜨겁게 자라는 군인들

 

  아이들이 앉아 있는 땅속에서 감자는

  아직 감자의 시간을 사네

 

  다행이군요.

  땅속에서 땅사과가 아직도 열리는 것은

  아이들이 쪼그리고 앉아 땀을 역청처럼 흘리네

 

  물 좀 가져다주어요

  물은 별보다 멀리 있으므로

  별보다 먼 곳에 도달해서

  물을 마시기에는

  아이들의 다리는 아직 작아요

 

  언젠가 군인이 될 아이들은 스무 해 정도만 살 수 있는 고대인이지요. 옥수수를 심을 걸 그랬어요 그랬더라면 아이들이 그 잎 아래로 절 숨길 수 있을 것을 아이들을 잡아먹느라 매일매일 부지런 한 태양을 피할 수도 있을 것을

 

  아이들을 향해 달려가는

  저 푸른 마스크를 한 이는 누구의 어머니인가,

  저 어머니들의 얼굴에 찍혀 있는 청동의 총,

  저 아이를 끌고 가는 피곤한 얼굴의 사람들은

 

  아이들의 어머니인가

  원숭이 고기를 끓여 아이에게 주는 푸른 마스크의

  어머니에게 제발 아이들의 안부 좀 전해주어요

  아이들이 자라는 그 청동의 시간도, 그 뜨거운 군인이 될 시간도

 

허수경,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문학과지성사. 2005년. 42-43쪽.

 

이 시에서 '언젠가 군인이 될 아이들은 스무 해 정도만 살 수 있는 고대인이지요.' 이 구절에서 가슴이 탁 막혔다. 스무 살까지만 살 수 있는 고대인... 그렇다. 아이들은 80년이 넘는 세월을 자라야 하는데, 20년에서 멈춘다.

 

군인이 되는, 전쟁터에 나가 죽어야 하는, 이들은 고대인들처럼 수명이 짧다. 이들에게 제대로 자라 다른 열매를 맺을 시간이 없다. 그냥 죽어갈 뿐.

 

그러니 어찌 反전쟁시가 아니겠는가. 어느 어머니가 자식들이 전쟁터에서 일찍 죽기를 바라겠는가. 그런 자식을 둔 어머니들, '얼굴에 찍혀 있는 청동의 총' 자국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단지 얼굴만이겠는가. 그들 가슴 속에는 시퍼런 총알이 박혀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 시를 읽으며 전쟁의 참혹함을 어찌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난민들이 발생하고 있다. 전쟁에서 죽어나가는 사람들, 군인도 많지만 민간인도 많다. 민간인 중에서 어린이들, 참으로 많다. 또 이들을 데려가 소년병으로 만드는 집단들도 많으니.

 

우리 인간 역사에서 이런 전쟁의 시간을 없애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그럴 때가 되지 않았나 한다.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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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30 12: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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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30 16: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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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애2


하얗디 하얀

너무도 하얘

차마 건드릴 수 없는

자그만 손길이 닿아도

얼룩이 생겨

제 온몸을 툭․ 끊어버리는

목련.

한 없이 하얀

저 꽃을 바라보며

처절히 떨어지는 훗날에

가슴 졸이고,

마음 아파하고.


사랑이야……

그 마음이,

그냥 바라보며

마음 졸임이,

가슴 시려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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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봄'이라고 했다. 문익환 목사 호가 바로 '늦봄'이다. 봄이 오는데 천천히 온다는 뜻인가. 아니면 늦더라도 봄은 온다는 뜻인가. 그도 아니면 남보다 앞서서 봄을 즐기지 않고 남들이 즐긴 뒤에야 봄을 즐긴다는 뜻인가.

 

  하여간 봄은 봄이다. 문익환 목사가 꿈꾸었던 통일이 봄이라면, 참으로 늦게 온 봄이다.

 

  통일을 위해 노력하다가 스러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통일은 여전히 오지 않고 있는데, 그럼에도 통일이 어느 날 우리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는 것이 아니라면, 통일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오는 것이 아니라면, 열매를 맺기 위해 겨울이 주는 혹독함을 견뎌야 하고, 봄에 겨울의 상흔을 씻고 준비를 하고, 여름 더위와 비바람을 견뎌야만 하듯이 통일은 그렇게 천천히, 느지막히 오는 것이다.

 

도서관에서 이 책 저 책 사이를 돌아다니다 문익환 목사 시집을 보게 됐다. 그러고 보니 문익환 목사가 태어난지 년 100년이 되는 해다. 1918년에 태어났으니, 올해 2018년은 탄생 100년이 되고도 한 해가 지난 해다.

 

그가 살아간 해를 생각해 보면 일제시대를 거쳐 분단과 전쟁, 독재와 민주화 시대를 두루 거쳤다. 한마디로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살다 간 분이다.

 

목사였기에, 목자가 되기 위해서 민중을 위해서 앞장 섰던 분이기도 하다. 시인 윤동주의 친구이기도 해서, 윤동주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 노력한 분이기도 하다. (이 시집에 '동주야'라는 시가 실려 있다)

 

또한 통일을 위해 노력한 분이기도 하고... 통일을 위해서 북한을 방문하기도 해서 고초를 겪기도 했던 분.

 

이 시집 첫머리가 바로 '잠꼬대 아닌 잠꼬대'다. 이 시에서 북한에 가겠다고 선언을 한다. 단지 시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문 목사는 이를 실천했다.

 

시 첫부분은 이렇게 시작한다.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누가 시인이 아니랄까봐서

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또 펼치는 거야

천만에 그게 아니라구 나는

이 1989년이 가기 전에 진짜 갈 거라고

가기로 결심했다구

(생략)

 

문익환, 두 하늘 한 하늘, 창작과비평사. 1996년 초판 4쇄. 3쪽

 

그리고 정말로 방북을 했다. 통일운동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드는 때였다. 비록 감옥에 가더라도, 북한에 갈 수 있음을 몸으로 보여줬다.

 

문 목사가 꿈꾸었던 일들이 지금 하나둘 결실을 맺기 시작한다. 꿈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 현실이 되고 있다.

 

훈데르트 바서가 했다고 했나, 혼자서 꿈을 꾸면 꿈에 불과하지만, 모두가 함께 꾸면 현실이 된다고...

 

문익환 목사의 꿈만이 아니라 우리들 꿈이 모이고 모여, 잠꼬대 아닌 잠꼬대들이 모여 이제는 우리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게 통일은 천천히 오고 있다.

 

'늦봄' 문익환... 여전히 봄은 오지 않았지만, 오고 있다. 늦더라도 봄은 온다는 믿음이 있다. 이 시집에 실린 것처럼 통일이 꼭 거창할 필요는 업다.

 

      (전략)

통일이라는 것도 그러고 보면

별로 대단한 게 없군요

형님하고 나하고 오다가다

북청이나 단천쯤 어느 주막에서 만나

술자리 한판 떡벌어지게 차리고

마시다 마시다 곤드레가 되는 일이군요

       (생략)

 

문익환, 두 하늘 한 하늘, 창작과비평사. 1996년 초판 4쇄. '문석이 형님' 부분. 98쪽.

 

그렇다. 이런 게 통일이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평양냉면을 먹으려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면 평양냉면 분점이 서울에 생기거나 또는 평양이나 그 어디쯤 가서 북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통일 아니겠는가.

 

하여 시인은 자유를 이렇게 노래한다.

 

        (전략)

황주에서 꿀맛 같은 홍옥을 사 먹고

평양에 가서 냉면 두어 그릇 사 먹고

신의주에 가서 압록강 물에 참외를 씻어 먹는 맛 그게 자유란다

문석이형님을 모시고 목포에 가서 소주를 받아놓고

홍어 민어 광어 낙지회를 먹으며

회포를 푸는 일도 정말 눈물겨운 자유겠군요

       (생략)

 

문익환, 두 하늘 한 하늘, 창작과비평사. 1996년 초판 4쇄. '자유' 부분. 103쪽.

 

아직은 이렇게는 못하지만 이제 이산가족 상봉이 다시 시작된다. 만남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만남부터 점점 더 만남을 넓혀가면 된다.

 

한방에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이미 그것은 안 된다는 것을 경험하지 않았는가. 봄은 올테다. 분명 온다. 그러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 그냥 천천히 가면 된다. 무작정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해나가면 된다.

 

이것이 바로 '늦봄'이 바란 것 아니겠는가. 그가 있는 하늘은 이제 두 하늘이 아니라 한 하늘일 텐데, 우리도 한 하늘 아래서 살기를 그가 바라고 있지 않겠는가.

 

문익환 시집을 읽으며 요즘 한층 밝아진 남북관계를 생각하면서 봄이, 우리에게도 봄이 오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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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8 09: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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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8 11: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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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인 삶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3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지음, 이승수 옮김 / 민음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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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소설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이탈리아는 살기 힘든 나라였을 것이다. 전쟁에서 패했고, 파시즘이 물러갔다고는 하나 민주적인 정부가 제대로 들어서지는 못했을 거고, 넘쳐나는 빈민들을 제대로 구제하지도 못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노동자를 위한다는 공산당이 제대로 활동을 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소설에서 공산당 지부 사람들이 어떻게 돈을 빼돌리는지가 나오는데, 이것이 당시 현실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나마 그들은 민중들이 고난을 당할 때 현장에 함께 있어주니, 민중을 위한다는 슬로건을 어느 정도 실천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 경찰로 대표되는 공권력은 민중들에게 절대로 우호적이지 않다. 경찰에게 체포될 위기에 처한 카고네를 마을 여자들이 단합하여 구해주자 다음 날 저녁 경찰들이 들이닥쳐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간다.

 

심지어 옷을 건네주러 온 가족까지도 잡아가 버리는 횡포를 저지르는데, 없는 사람들은 공권력에게도 힘없이 당하게 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이 도덕적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전상국이 쓴 '우상의 눈물'에서 재수파 대장인 기표를 순수 악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소설에 나오는 톰마소가 사는 동네 아이들도 이런 순수 악에 해당한다.

 

그들에게 도덕은 의미가 없다. 당장 하루하루를 먹고 살기 힘든 그들에게는 생존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살아가기 위해 그들은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한다. 도둑질부터 시작하여 강도, 몸 파는 일까지 안 하는 일이 없다.

 

이들을 도덕 잣대로 재면 이해할 수가 없다. 도덕이 이들을 밥 먹여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나이를 먹어간다. 감옥을 제 집 드나들 듯이 드나들게 되고.

 

여기에 예외적인 인물이 주인공 톰마소이다. 톰마소 역시 부랑아일 수밖에 없다. 그 역시 온갖 못된 짓을 다 한다. 심지어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갈 돈을 마련하기 위해 창녀의 돈을 강탈하기까지 하고, 동성애자에게 몸을 팔고 위협해서 돈을 뜯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조금씩 변화해간다. 여자 친구인 이레네와 행복한 가정을 꾸밀 생각을 하는 것이다. 빈민촌에서 현재만이 있던 생활에서 미래를 보기 시작한다. 그에게 미래가 보인다. 그 순간 그는 현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하고,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을 다시 보게 된다. 기독교민주당에 들어가 어떻게든 줄을 잡아 생활기반을 찾아야겠다는 결심이 결핵으로 인해 병원에 다녀온 뒤에는 공산당에 입당하게 된다.

 

자기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볼 수 있는 눈, 그들을 동정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다만 여전히 못된 행동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다. 사람이 어떻게 한번에 변하겠는가. 그러나 그는 나쁜 행동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지만, 마지막에 홍수가 난 빈민촌에 자진해서 사람들을 구하러 간다. 친구들의 비웃음을 뒤로 하고.

 

그가 구한 사람이 창녀라는 사실,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피난을 온다는 서술, 가장 없는 그래서 몸밖에는 팔 것이 없는 창녀를 구하는 톰마소의 행동은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그를 보여준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니 말이다.

 

미래를 살아갈 어린이를 구해주는 모습에서도 마찬가지를 느낄 수 있고. 그러나 그가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지지리 가난한 생활에서 변변한 학력도 없고, 기술도 없고, 배경도 없는 톰마소가 청렴하지 않은 사회에서 과연 잘 살아갈 수 있을까. 그가 한 이타적인 행동은 결핵을 심화시키고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죽을 수밖에 없다. 빈민촌에서 살아가는 삶은 나쁜 짓을 끝까지 해도 사살되거나, 자살로 삶을 마감하거나 감옥에 수감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고, 여기서 벗어나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려 해도 결국 사회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니 톰마소는 죽을 수밖에 없다. 그가 살 장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홍수가 끝난 뒤 정치인이 와서 '노상 하는 약속을 남발하고 갔다'는 표현처럼 이들이 살아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

 

'순수 악'이 생기지 않게 하는 방법은 단순하다. 이들이 생계로 인해 고민하지 않게 해주는 것이다. 생계 문제가 해결이 된 다음에 생활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도덕은 생계가 해결된 다음에 나오는 것이다.

 

톰마소 역시 이레네와 만나는 것, 새로운 생활을 설계해나가는 것 역시 생계가 해결된 다음, 생활의 문제로 접어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생계는 스스로도 해결하려고 노력해야지만, 제도,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함께 가야 한다.

 

함께 가지 않고 개인의 노력으로만 맡기면 해결되지 않는다. 톰마소처럼 결국 죽음에 이를 뿐이다. 우리나라 빈곤 문제가 많이 해결되었고, 복지 정책도 점차 풍성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다.

 

힘든 사람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것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지 말고 사회제도적인 측면에서 바꿀 수 있는 면을 함께 고민하고 실행해 나가야 한다.

 

파솔리니가 쓴 "폭력적인 삶".  

 

도시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최소한 도덕이라는 윤리의식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닫게 해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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