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애3


누리에 싸인 공기가

촉촉해지고

따뜻한 온기가 내게

전해져

세상 모든 것이

기쁨으로 빛나는

열병이어라.

모든 우수를 떨쳐

존재만으로 기쁨이 되는

더욱 소중한

열병이어라.

벗어나려 할 수도 없는

마음 속 떨림

지독한 열병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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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6
아서 밀러 지음, 최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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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 없다는 생각을 했다. 마녀 사냥이라니. 도대체 마녀가 무엇이란 말인가? 존재하지도 않는 대상을 존재한다고 여기고, 자백을 하게 하고 탄압을 하는 광기. 그것에 불과하다.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절대로 이런 마녀 사냥에 가담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어처구니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도 하지만 이성보다는 다른 요소에 의해 움직일 때가 더 많다는 것을. 이성으로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것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받아들이고 남에게 강요할 수 있다는 것을.

 

아서 밀러의 희곡 "시련"은 미국에서 일어난 마녀 사냥을 다루고 있다. 질투에 눈이 먼 한 여자아이의 거짓말이 마을 전체를 공포로 몰아가며,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마을 사람을 마녀로 고발하는 다른 사람들까지 겹쳐 수많은 사람이 희생당하게 된다.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마녀 사냥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어쩌겠는가. 그 동안 죽어갔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중세에 있었던 마녀 사냥만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아니다. 밀러의 이 희곡은 미국에서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매카시즘'을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권력이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상대방을 공산주의로 몰아갔던, 광기에 휩쓸려 사람들을 옴짝달싹도 못하게 했던 매카시즘.

 

한 사람의 말로 인해 사회가 얼마나 광포해질 수 있는지를 매카시즘이 잘 보여주고 있고, 또한 사람의 이성이 얼마나 허약한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면, 매카시즘은 현대판 마녀 사냥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단지 미국이나 유럽에만 해당하는 일일까? 아니다. 우리나라도 독재정권 시절에 이런 일을 많이 당하지 않았던가.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또는 상대방이 그냥 미워서 거짓 고발을 하는데, 그것이 기묘하게 정권의 필요와 맞아떨어져 대대적인 사회 문제로 비화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았던가.

 

희곡에서는 마녀라고 하면 다 통하였듯이, 매카시즘에서는 공산주의자라고 하면 다 통했듯이, 우리나라에서는 빨갱이라고 하면 너무도 쉽게 잡아들일 수 있지 않았나.

 

빨갱이라고 거짓 자백을 강요하고, 사형시킨 경우도 많지 않았나. 이성보다는 감정으로 사람들을 몰아갔던 시대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것은 깨어 있는 사람이 있어서 일텐데... 희곡에서는 프록터가 그 역할을 한다. 애비게일의 거짓에 휩쓸려 사람들이 우왕좌왕할 때 프록터는 자신의 잘못을 드러내면서도 진실을 알리려 한다.

 

간음이 당시 사회에서는 프록터 자신에게 치명적인 문제였음에도... 마치 우리나라에서 반대파를 탄압할 때 성적인 것을 이용했던 것과 같이... 그러나 그의 말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도 마녀 사냥의 희생양이 된다.

 

거짓 자백을 하면 살려주겠다는 말에 잠시 흔들리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의 양심을 버릴 수 없음을 알고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런 사람들의 존재로 인해 마녀 사냥은 시들해지고,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게 되는데...

 

문제는 절대 권력을 지닌 공권력이 반성을 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을 사형에 처하게 판결하는 판사나, 꼭두각시처럼 그 명령만을 집행하는 관리나,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 부지사나, 목사직을 사욕을 위해 이용하는 패리스와 같은 사람. 자기 이익을 위해 상대를 함정에 빠뜨리는 애비게일과 같은 사람...

 

이런 사람들이 소위 사회지도층을 형성했을 때 무고한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희생당할 수 있는지를 희곡은 잘 보여주고 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지만, 가장 위험한 존재가 바로 이웃임을, 희곡에서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자신의 이익을 가장 쉽게 침해하는 존재가 바로 이웃이기 때문인데, 이런 감정이 결국 마녀 사냥을 유지하는 근간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도 한다.

 

공동체로 살아가는 일, 자율성을 인정하되 함께 살아가는 일, 따로 또 같이라는 말이 통용되는 사회, 그런 사회가 좋은 사회일텐데...

 

난민 문제로 연일 시끄럽다. 난민에 접근하는 태도가 어쩌면 이 희곡에 나타난 마녀 사냥과 비슷하지 않나 하는 반성을 하면서, 자기 이익이라는 것이 얽혀 있는 상태에서는 아주 작은 요건으로도 상대에게 치명상을 줄 수 있는 일이 일어날 수 있음을, 이 희곡이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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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6 0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06 1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때 화이트칼라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유행이라기보다는 선망의 대상이라고 해야 옳겠다.

 

  블루칼라라고 하여 몸을 움직이는 노동자들을 천시하고, 넥타이부대라는 말로 화이트칼라를 무슨 좋은 직업인양 생각한 적이 있었다.

 

  작업복이 아니라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회사에 출근하는 꿈을 꾼 사람들이 예전에는 많았다.

 

  그런 넥타이는 지식인의 상징이기도 했다. 지금보다 한 단계 올라간 상승의 상징이기도 했고. 하지만 과연 그런가? 넥타이로 자기 목을 죄는 대가로 지구는 좀더 뜨거워지고, 우리는 점점 더 살기 힘들어지지 않았나.

 

넥타이를 맨 대가로 더 많은 시간을 의자에 앉아 보내게 되지 않았나. 덜 움직이고, 에너지는 더 쓰고, 제 목은 더 조이고... 이게 넥타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한다.

 

최근 직장에서는 여름에 넥타이 안 매는 운동을 하기도 한다고 한다. 넥타이를 풀면 목을 덜 조이기 때문에 더위를 조금 더 덜 수 있다는 것. 그렇다. 화이트칼라의 상징이었던 넥타이가 이제는 지구를 더 힘들게 하고, 더불어 삶도 더 힘들게 하는 존재가 되었다.

 

최종천 시집을 읽다가 노동의 지난함을 생각하다가, 노동의 종말이 인간의 종말일텐데, 노동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태에 답답해 하다가, '넥타이'란 시를 보고... 아! 할 수밖에 없었다.

 

넥타이

 

넥타이란 회사에 모가지를 매다는 끈이다.

그가 출근할 때 넥타이를 매는 걸 보라.

그 방법은 밧줄로 물건을 동여매는 것과 같다.

자살할 때 혹은 사형에 처할 때

끈을 홀치는 방법과 놀랍게 똑같다.

회사에서 모가지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홀쳐매는데도 자신도 모르게 빠져나오는 모가지를

원망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하지만

모가지가 빠져나오지 않았다면 그는

사형에 처해지거나 자살을 했을 거다.

긍지와 자부심으로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는

참 가엾은 사람들아 지구는 더워지고 있다.

당신의 그 긍지와 자부심은 자본주의의 밑천이다.

긍지와 자부심도, 넥타이도 다 풀어버려라.

시원하게, 에너지 절약과 지구 환경을 위해

회사에 목매달고 살지 마라!

쇠갈고리에 걸린 도살장의 고깃덩어리를 보라. 넥타이는

넥타이가 아니라 모가지에다가 얽어매는 그 무엇이다.

 

최종천, 인생은 짧고 기계는 영원하다. 반걸음. 2018년. 76쪽.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을 패러디한 이 시집 제목은 우리의 노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신은 인간을 창조했다. 인간은 기계를 창조했다. 신이 창조한 인간이 창조적인 작업을 한다. 인간이 창조한 기계가 창조적인 작업을 한다? 그러면 인간은 곧 신이다. 그러므로 신은 죽어야 한다. 그렇다면 언젠가 인간도 죽어야 한다. 

 

신의 죽음이 인간의 창조적인 노동의 결과라면 기계가 창조적인 노동을 하는 순간, 인간도 죽는다. 인간도 종말을 맞는다.  

 

노동은 바로 인간의 존재 조건이다. 노동 없이는 인간이 없다. 그런데 인간들이 노동을 기계에 맡기기 시작했다. 바로 인간 자신이 인간을 부정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되면서 노동을 전혀 하지 않고 세상에 군림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런 사람들을 따라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런 쪽을 향하여 가고 있다. 이 세상은. 그렇다면 결과는 노동의 종말이고, 인간의 종말이다. 이렇게 말을 하고 싶다. 이 시집을 읽으며 이런 것을 이야기 하나, 이런 내용으로 시를 썼나 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넥타이로 돌아가 보자. 넥타이, 화이트칼라의 상징. 이는 노동보다는, 노동을 감독, 감시하는 쪽에 가깝다. 즉, 인간 본연의 모습에서 멀어진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자기 스스로 제 목을 죄고 있다. 스스로 죽어가는지도 모르면서. 이때 넥타이를 벗어던지지 못하면 죽음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넥타이를 벗어던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다른 삶을 상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동의 종말이라고 하지만, 이들은 노동을 제대로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동을 하지 않았기에 다른 존재가 노동을 해도 자신들은 노동을 하지 않으려 한다.

 

한사코 다른 존재들만 시킬 뿐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줄도 모르고. 시인은 시에서 말한다. 넥타이에 목매달고 살지 말라고. 넥타이를 벗어버리라고.

 

다른 존재를 움직이게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움직이라고. 그래야 한다고. '넥타이'란 시 읽으며, 단지 노동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삶 자체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신-인간-기계'의 관계에서 넥타이는 또다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신- 넥타이 맨 인간 - 넥타이 매지 않은 인간 - 기계'

 

여기서 넥타이 맨 인간이 빠지면 기계에 전적으로 우리 노동을 맡기지 않는다. 신이 제 역할을 인간에게 모두 넘겼을 때 사라져야 하듯이, 우리 인간도 인간의 일을 기계에 넘기면 신처럼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처럼 되지 않으려는 인간들은 바로 '넥타이를 매지 않은 인간, 넥타이를 벗어버린 인간'이다. 나는 그런 인간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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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8
아서 밀러 지음, 강유나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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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너무도 많이 들었던, 연극으로 상연이 많이 되었다고 이야기만 들었던 작품.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최선을 다해 일했으나 결국은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노동자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는데...

 

내 생각과는 조금 다르다. 주인공 윌리 로먼은 세일즈로 평생을 살아오지만 그다지 큰돈을 벌지 못한다. 물론 잘 나갈 때는 좀 벌 때가 있었지만, 그것은 그가 벌어온 돈을 평균냈을 때 이야기다. 그는 평생을 직장에 다니면서 물건을 팔면서 간신히 자기 집을 마련한다. 그것도 융자로.

 

융자가 끝날 때쯤 그의 인생도 끝난다. 아들 둘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자신은 해고되고, 그러나 그는 과거의 환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단지 노동자들이 소모품처럼 소모되는 세상에 대한 풍자라고 하는데... 우선 윌리는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그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세상이 변해가는데 과거에만 사로잡혀 있다. 사실 노동자들이 현실의 변화를 따라가기는 힘들다. 그래서 세상이 급격하게 변할 때 따라가지 못해 해고되는 노동자들이 많다. 이 희곡의 주인공 윌리도 그러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자식에 대한 기대도 변하지 않는다. 자식에 대한 무한한 기대로 인해 큰아들 비프는 아버지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괴로워한다.

 

자식의 인생에 부모의 기대를 걸어놓음으로써 자식이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데 걸림돌로 작용하게 만든다. 우리들 대부분 부모가 하는 그런 실수를 윌리 역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도 그렇지만 아들들이 돈을 잘 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업을 하면 성공할 것이라 생각하고. 예전에만 사로잡혀 있는 그에게 큰아들 비프는 현실을 바로보게 한다.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음을.

 

그러나 윌리는 아들이 잘 살 거라고 믿고 아들에게 돈을 마련해 주기 위해 자살을 택한다. 그가 들었던 보험료를 아들이 지니게 하기 위해서다. 그 아들이 그 돈으로 성공하기를 바라면서.

 

세일즈맨은 물건을 파는 사람이다. 영업사원이라고 하면 된다. 자기 회사 물건을 다른 사업체 사람에게 홍보하여 사게 만드는 사람이다. 이들이 물건을 판 대가로 돈을 받고 그것으로 생활을 해나간다. 그러다 그가 물건을 팔 수 없게 될 때 그에게 남은 것은 자신의 목숨밖에 없다.

 

자본주의는 노동할 힘이 있을 때는, 또는 영업을 할 능력이 있을 때는 자신의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보험이라는 이름으로 목숨을 팔 수도 있게 하고 있다. 대다수 노동자들이 노년을 불안하게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죽을 때까지 돈을 벌지만 죽을 때까지 집값을 값아야 하는 처지. 그렇다고 자식들이 번드르하게 출세를 하냐 하면 그것도 아닌 상태. 자식들의 앞날까지 걱정해야 하는 노년.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이다.

 

이 희곡의 주인공 역시 그런 상황에 처한다. 그럼에도 둘째 아들 이름이 해피로 나오는 것은 그런 상황에서도 희망은 있다고 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희곡에 나오는 해피는 윌리의 또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희망적인 소리를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만 하는 소리. 내면에는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

 

사실 우리의 현실도 그렇지 않은가. 노동자들의 자식들이 과연 미래에 대해 밝은 희망을 지닐 수 있는 사회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히려 비프가 솔직하다. 그는 자신을 알게 된다. 대장으로 여기던 아버지의 위선적인 모습을 보고, 그는 고등학교 졸업을 완전히 포기하고 만다. 하여 대학 진학도 물건너 가고. 또 가는 일터마다 도둑질을 하여 쫓겨나거나 감옥에 가기도 한다. 마지막에 전에 근무하던 사장을 찾아가지만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고, 자신의 현실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처음에 비프가 공을 훔쳐 왔을 때 윌리의 반응이 비프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윌리는 공을 훔친 비프를 크게 야단치지 않는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오히려 연습을 더 하면 된다고 한다. 거기에 유급 위기에 처한 비프에게 공부에 대해서, 적어도 유급을 하지 않아야 함을 제대로 인식시키지 않는다. 그러니 비프가 방황하는 것에 대한 책임은 윌리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아들 해피가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공허한 울림으로 들리는데, 비프는 그렇지 않다. 그는 이제 끝까지 갔다. 여기에 아버지의 죽음까지 겪었다. 그리고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게 됐다. 비록 앞으로의 삶도 힘들겠지만, 그는 이제 자기 삶을 살아갈 것이다.

 

평생을 노동에, 그리고 가족을 위해 일을 하고, 죽음도 가족을 위해 선택하는 세일즈맨. 그가 살아온 인생이 도덕적이고 위대하지는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 산 삶임은 확실하다. 그런 사람들이 노년을 걱정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일은 가족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회가 책임져야 할 일이다. 이 희곡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도 우리나라 곳곳에서 노동자들이 삶의 무게에 짓눌려 살고 있다. 적어도 이제는 그래서는 안 되지 않나.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 요즘도 울림을 주는 희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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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쉬임 없이 노동해야만 하는 노동자.

  그들을 시시포스라 할 수 있으리라.

  아주 잠깐 쉬고는 다시 일터로 가야만 하는 노동자.

  휴일은 노동을 위한 잠깐 쉼.

  그러한 휴일도 제대로 보장 받지 못하는,

  대양을 향하여 뜨거운 모래밭을 지나야 하는 노동자.

  타는 듯한 모래밭을 느릿느릿 걸어가야만 하는 노동자는

  오로지 바다에 도달하기 위해 가지만

  바다에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위험이 있는지.

  평생을 노동하다 결국 바다에 닿지도 못하고 스러져간 노동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 땅의 시시포스들, 그런 노동자들.

 

  문동만 시집을 읽다.

이 시집에서 노동자들을 위한 시를 읽고 마음이 짠해지다.

그래. 대다수 노동자들은 거북이일지도 몰라.

노동자들은 시시포스일지도 몰라. 죽지도 못하고 바위를 끊임없이 올려야 하는 시시포스지만, 노동자들은 죽어서야 그 노동을 멈추게 되지.

 

시 '거북이'를 보자.

   

거북이

 

아이는 수험장, 나는 휴게실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데

늙수그레한 청소부가 쓰레기통을 뒤진다

 

저이가 아이가 말한 쉬지 못하는 시시포스리라

나는 잠깐 쉬는 시시포스로군

좀 팔자 좋은 거북이거나,

고독하게 쓰레기를, 쓰레기나, 치우는

똑똑한 인간들이 쓰는 거북이

깡통을 엎자 잔류물이 목장갑을 적시는데

그 손등으로 콧등을 닦는 거북이

 

지식과 고상이 버린 퀴퀴한 쓰레기를 등에 지고

끙, 하고 일어서는 거북이

어지간한 모멸로는 깨지지 않는 등짝과

뒤집어지면 돌아가지 못하는 뱃가죽을

앞뒤로 지고

 

가장 느린 발로 기어가야 할

타는 모래밭으로

가는

거북이

 

문동만, 구르는 잠, 반걸음, 2018년. 100-101쪽.

 

'지식과 고상이 버린' 것들을 치워야만 하는 노동자. 그렇게 세상을 지탱해 가는 것은 노동자들의 땀이 있기 때문인데, 이를 '모멸'하는 고상한 인간들.

 

그래서 거북이 등은 그렇게도 딱딱한 것인지도 모른다. 걷는 동안 '어지간한' 것들을 견뎌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너무도 부드럽다. 약하다. 그들은 한번 뒤집어지면 치명상을 입는다. '뒤집어지면 돌아가지 못하는 뱃가죽'이란 표현처럼.

 

목표를 향해 꾸준히 가지만, 노동자들의 삶은 '가장 느린 발로 기어가'는 삶일 수밖에 없다. 한발 한발 천천히, 그들은 간다. 가야만 한다.

 

하지만 이런 노동자들로 인해 세상은 유지된다. 세상이 굴러간다. 결국 모모에게 시간을 되돌려주는 길을 가르쳐 준 것도 거북이이듯이.

 

가끔은 나 자신이 노동자임을 잊을 때가 있다. 겨우 '잠깐 쉬는 시시포스'에 불과한데 말이다. 그러니 잊지 말아야겠다. 나 역시 거북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남에게 보여주는 등껍질은 딱딱하지만, 보이지 않는 부분은 너무도 연약할 뿐이라는 것을. 내가 갈 길을 천천히 꾸준히 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덧글

 

출판사에서 보내준 시집이다. 기쁜 마음으로 받아 읽었다. 그리고 시집에 있는 좋은 시들, 가슴으로 파고드는 시들... 잘 간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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