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서 슬픔이 묻어 나온다.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이라니. 꽃이 피기도 전에 이미 왔다 스러져 간 사람들. 우리 역사에서 이런 슬픔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렇게 먼저 다녀간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있는지도 모른다. 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지녀야 하는데...

 

  이종형 시집을 읽다. 처음부터 4.3이다. 제주도. 관광의 섬으로 다가오지 않고 비극의 섬으로 다가온다. 처연하다.

 

  이 아름다운 자연에서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살육이 있었다니, 아니 이 살육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4.3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주도에 간 적이 있다. 최근에.. 강정 부근을 지나면서 차마 들르지 못했다.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고 해야 하나... 평화의 섬이 되어야 할 제주가 여전히 전쟁의 섬으로 남아 있는 듯한 느낌에 발길을 그곳으로 향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참에 이종형의 시집을 읽는 것은 마음이 편치 않은 일이다. 다시 4.3을 떠올리고, 강정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읽어야 한다. 언제까지 외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 그렇게 먼저 다녀간 사람들이 있었기에... 그나마 지금 우리가 이렇게 지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첫 시 산전(山田)을 읽으며 다시 강정을 떠올린다. 이렇게 강정이 산전이 되게 하지 않아야 하는데... 하면서.

 

山田

 

깨진 솥 하나 있었네

누군가는 버렸다고 하고, 누군가는

떠나며 남겨두었다고 하네

 

어느 겨울

솥을 가득 채운 눈雪을 보았네, 문득

갓 지은 보리밥이 수북한 외할머니 부엌의 저녁이 떠올랐네

山田의 깨진 솥은, 그해

뜨거운 김을 몇 번 내뿜었을까

달그락거리며 솥바닥을 긁던 숟가락은 몇이었을까

 

겨울이 수십 번 다녀가고

수천 번 눈이 내리고, 얼고, 녹아 흘렀어도

그날의 허기가 가시지 않았네

 

아직 식지 않았네

 

* 山田: 제주 4.3항쟁 당시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가 지휘하던 무장대 최후의 은거지. 이덕구 산전이라고도 한다.

 

이종형,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삶창. 2018년 초판 2쇄. 12쪽.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하던 사람들이 꽃보다 먼저 다녀간 세월. 그런 아픔을 딛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된 것.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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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에 갇힌 김소월 구하기 - 새롭게 읽는 소월의 시 한티재 교양문고 5
박일환 지음 / 한티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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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는 순간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과 같은 판소리계 소설과 '홍길동전'이 떠올랐다. 김소월이 누구던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시인 아닌던가. 우리나라 시인 이름을 대 보시오 하면... 처음 나오는 이름이 아마도 김소월, 윤동주 쯤이 아닐까 한다.

 

이 이름들이 나오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교육열이 높아도 너무 높은 우리나라에서, 교과서가 정전으로 취급받고 있는 이 나라에서, 국어 시간에 배운 시인, 그것도 비중있게 배운 시인, 시보다는 시험을 잘보기 위해서는 꼭 배우고 외워야 하는 시인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행복한 시인들이다. 어떤 시인은 단 하나의 시로 기억되기를 바랐다고도 했는데, 이들은 단 하나의 시가 아니라 여러 시들, 많은 시들로 사람들 기억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꾸로 이야기하면 이들은 교과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험 때문에 외웠던 몇몇 단어들(민요조 서정시, 부끄러움의 미학 등)만 기억 속에 있고, 정작 시들은 마음 속에 자리잡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참고로 이 책에서 저자는 김소월과 윤동주의 시를 단순해서 비교하고 있다. 이는 비교를 위한 단순화이지 절대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윤동주의 시가 '부끄러움의 미학'에 기대고 있었다면, 김소월의 시는 '그리움의 미학'에 기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소월의 시를 평할 때 많은 사람들이 현실 극복의 지향성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곤 한다. 이러한 견해가 소월 시의 전체를 아우르는 건 아니지만, 그런 경향을 지니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 166쪽 

 

아니다. 마음 속에 자리잡은 시가 있기에 이들이 우리나라 대표 시인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김소월 하면 '진달래꽃' 윤동주 하면 '서시' 하고 금방 튀어나온다. 한번 암송해 보라고 하면 끝까지는 몰라도 몇몇 구절은 누구나 읊조릴 수 있다.

 

가히 우리나라 대표 시인이고 대표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나라 사람치고 춘향전이나 홍길동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도 끝까지 읽은 적이 별로 없는 작품.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소설, 춘향전, 홍길동전 아니던가.

 

그렇다면 김소월이나 윤동주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라고 하면서도 이들이 낸 시집을 다 읽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사실 이들이 낸 시집이라고는 시집에 실리지 않은 시나 유고시를 빼고는 단 한 권에 불과한데 말이다.

 

김소월은 시집 "진달래꽃"을, 윤동주는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냈을 뿐이다. 그러니 단 한 권 시집을 낸 우리나라 대표 시인들의 시집을 다 읽은 사람이 적다는 것은, 그들이 너무도 유명해서 또 너무도 유명한 시들이 있어서 그 유명한 몇몇 시에 그들이 갇혀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니 이 제목, 정말 잘 지었다. "진달래꽃에 갇힌 김소월 구하기"

 

다른 말로 하면 제발 김소월이 쓴 다른 시들도 좀 읽으라는 얘기다. 그냥 김소월=진달래꽃, 이 등식에 안주하지 말라는 얘기다. 우리가 문화인이 되려면 적어도 교과서 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얘기다.

 

(물론 우리는 김소월을 '진달래꽃'으로만 기억하지는 않는다. 교과서에도 진달래꽃만 실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 비슷한 정서를 지닌 작품들을 실어놓고 있다. 가끔 민족시라고 해서 일제에 저항하는 내용을 담은 시를 싣기도 하지만 예외적인 경우다. 이런 경우 말고도 김소월은 다양한 시들을 썼으나 교과서에서는 고만고만한 시들만 싣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김소월을 특정 시경향의 시인으로만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김소월=진달래꽃'의 등식은 비유로 여겼으면 한다)

 

교과서에서 벗어나는 일, 김소월을 특정 시에 가두지 않는 일이 될 것이다. 물론 김소월처럼 이렇게 '진달래꽃'으로 영원히 기억되는 것도 좋은 일이다. 다른 시인들이 꿈꾸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김소월은 이미 하나의 시에 갇혀서는 안 되는 시인이다. 그런 시인을 더 알아보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것은 너무한 일이다.

 

이 책은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더 많은 시를 읽지 않는 시인. 김소월=진달래꽃, 이 등식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김소월이 '진달래꽃'으로 우리나라에서 정점을 찍은 시인임은 확실하지만, 그가 쓴 다른 시들을 더 많이 읽을수록 왜 김소월이 뛰어난 시인인지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머리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김소월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김소월 시 중에 좋은 시들이, 마음을 파고드는 시들이 얼마나 많은가. 또한 '한(恨)의 정서, 민요조 서정시' 등으로 그를 제한하기에는 다양한 시들이 더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많은 시들이 소개되고 있고, 이 시들에 대한 소개글이 있다. 그냥 시만 읽어도 좋지만 그 시에 대한 해설들, 다양한 쟁점들, 그리고 김소월의 삶 등이 함께 씌어 있기 때문에 김소월 시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다.

 

점점 더 많은 김소월 시를 읽으면서 김소월의 시맛을 맛보게 된다. 그게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즐거움이다.

 

이렇게 이 책은 '진달래꽃'으로 시작해서 '진달래꽃'으로 끝난다. 단지 김소월 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김소월과 다른 시인들의 시를 비교하는 글도 실려 있는데, 김소월이 쓴 '진달래꽃'으로 시작해서 그 시를 변용한 김언희의 시로 끝나고 있다.

 

그렇게 우리가 알던 '진달래꽃'의 애잔한 정서는 김언희의 시에서 낯섬으로 변주가 된다. 그리고 이런 변주가 김소월 시를 더 풍요롭게 함을 깨닫게 된다. 여기에 더해 김소월을 과거의 김소월로만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김소월, 미래의 김소월로 불러낼 수 있고, 불러내야 함을 깨닫게 한다.

 

그렇다. 이제 김소월을 이야길 할 때 '김소월=진달래꽃'의 등식을 벗어나야 한다. 그는 어느 한 시로, 또 어느 한 경향으로 가둘 수 있는 시인이 아니다. 그를 그 틀에서 빼내었을 때 우리 시도 더 풍성해질 수 있다. 우리들 감상 능력도 마찬가지고.

 

김소월 시에 대해서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 있는 이 책, 시를 이해하는 것에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들, 김소월을 교과서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던 사람들, 읽으면 다양하고 새로운 김소월 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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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0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12 09: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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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그림으로 읽기 - 그리스 신들과 함께 떠나는 서양미술기행
이주헌 지음 / 학고재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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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신화'는 우리 상상력을 자극한다. 우리 감수성을 깨운다. 신화를 읽으며 미지의 세계로 떠나기도 하고, 내가 떠나온 곳에 대한 동경으로, 그곳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신화 시대, 이 시대에 인간은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으리라. 오로지 신이 뜻하는 대로 살아가면 됐고, 인간의 운명은 신에게 달려 있었으니 말이다. 그냥 운명이려니 하고 살면 되는 시대, 그 때가 바로 신화시대 아니었던가.

 

그러다 인간 자신이 신에 맞서기 시작한 때,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때가 오게 되는데, 이때가 바로 영웅시대라 할 것이다. 영웅, 비록 죽음을 이기지는 못하지만 살아 있을 때 신과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

 

신과 비견할 수 있는 사람이 칭송받던 시대가 영웅시대라면 이제 그러한 영웅도 시간 속으로 사라지고, 인간들이 서로 갈등하고 타협하는 인간시대, 이를 청동시대, 철기시대라는 말로 하기도 하지만, 그런 시대가 오게 된다.

 

신이 저 멀리 사라져버린 시대. 그렇게 멀어진 신들을 인간은 그리워하게 된다.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완전한 존재를 동경하는 것이다. 다시는 신화시대가 오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신화시대를 그리워하는데, 그런 신화시대를 찾게 하는 것으로 미술이 있다.

 

서양 사람들 문화의 기원이 되는 그리스-로마 신화. 특히 시작을 그리스 신화로 보면, 서양 문화의 저변에 깔려 있는 그리스 신화를 알게 되면 그들 문화를 좀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은 그렇게 하기 위해서 미술을 통해 접근을 한다. 서양 사람들이 고대부터 지금까지 그리스 신화에서 많은 내용을 빌려와 미술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런 미술들이 그리스 도시 곳곳에 남아 있고, 그들 삶이 신전이라는 이름으로 건축물이라는 이름으로 그리스에 남아 있으니 저자가 이 책의 1부에 그런 도시들을 여행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쓴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리스 도시와 미술관에 이어서 저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 가운데 너무도 잘 알려진 신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들이 조각이나 그림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유럽 곳곳에 있는 미술관도 함께 소개하고 있어서 더 좋은데...

 

미술과 함께 떠나는 유럽 여행이라고 해도 좋고, 유럽 미술관 기행 또는 박물관 기행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수많은 그림들과 조각들, 그리고 미술관, 박물관에 대한 소개개 되어 있다.

 

물론 미술관, 박물관은 미술을 소개할 수 있는 장소니 당연히 나와야 하지만, 수천년에 걸쳐 모아놓은, 시간과 장소를 집적해놓은 듯한 미술관, 박물관이 많다는 것이 부럽기는 했다.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그 나라의 문화가 모여 있는, 그래서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면 켜켜히 쌓여 있는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그런 곳이 많이 있다는 것이 부럽기도 했고, 또 파리를 설명할 때 도시 자체에 역사가 있다는 말이 부럽기도 했지만...이제 우리도 문화에 눈을 돌리고 있으니... 난개발을 막고 역사에, 문화에 관심을 지니고 있으니..

 

그런 모습으로 우리 사회가 변해가는 것도 이런 책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도 경제만큼이나 문화가 중요하다는 것, 우리 역사가 중요하다는 것, 그것이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3부에서는 신을 닮고 싶어하는 권력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자기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신들에 빗대는 것이야 동서양 가릴 것이 없으니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예술이 자칫하면 권력에 이용당할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책 한 권으로 유럽 미술관, 박물관을 그리스 신화라는 주제로 여행을 할 수 있어서 좋다. 그렇게 깊고 넓게 그리스 신화를 다룬 미술들에 대해서 알게 된다. 단순히 그리스 신화를 다룬 미술을 안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런 문화가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생각하게 된다.

 

예술은 삶에서 떨어질 수가 없다는 것...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예술도 필요하다는 것. 그렇다면 지금 우리나라에는 더 많은 예술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예술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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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1 09: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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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1 1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집을 읽는데 웃음이 절로 나온다. 상황이나 말들이 웃음을 머금게 만든다. 그냥 읽어도 좋다. 굳이 머리를 쓸 필요도 없다.

 

  이런 시의 특징을 잘 알 수 있는 것이 '아버지의 욕'이란 시다.

  우리가 쉽게 '개새끼'라고, 좀더 순화하면 '개자식'이라고 쓰는 욕을 시인은 아버지의 말을 빌려 '운동화나 물어뜯을 놈'(아버지의 욕, 60-61쪽)이라고 표현한다.

  댓돌에 벗어놓은 운동화를 물어뜯을 존재, 그것은 바로 개다. 옛날 마당있는 집을 떠올리면 상상이 될 것이다. 개들이 얼마나 많은 신발을 물어뜯었는지.

 

  그러므로 '운동화나 물어뜯을 놈'이라는 욕은 '개새끼, 또는 개자식'이라는 욕이다. 마음에 상처를 주는 욕이 아니라 웃음이 피식 나오게 하는 욕이다. 이런 말을 쓰는 부모 밑에서 시인은 자신의 언어를 만들어갔으리라.

 

그러니 시집에 나오는 언어들이 어렵지 않다. 우리가 늘 사용하는 말들이다. 시에 나오는 소재들도 마찬가지다. 특별히 한참을 생각해야 나오는 것들이 아니다. 그냥 우리 주변에서 늘상 우리가 만나고 있는 것들이다. 다만 그것들에 시인만큼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을 뿐이지.

 

시인이 만난 사람들 이야기, 시인 가족 이야기, 시인 자신 이야기 등등 많은 것들이 모두 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래서 시란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삶 자체임을 깨닫게 한다.

 

학교, 튼튼한 담장을 치고, 누구의 침입도 거부한다는 듯이 철문을 잠그고, 각종 감시카메라에, 경보장치에, 외부인 출입금지라고 배타적인 존재로 마을에 군림하는 그 학교를 그는 이렇게 비판한다.

 

이웃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으니

두부장수는 종을 흔들지 마시고

행상트럭은 앰프를 꺼주시기 바랍니다

크게 써서 학교 담장에 붙이는 소사 아저씨 뒤통수에다가

담장 옆에 사는 아줌마 아저씨들이 한마디씩 날린다

공일날 운동장 한번 빌려준 적 있어

삼백육십오일 스물네 시간을 울어대는

학교 종 한번 꺼달란 적 있어

학교 옆에 사는 사람은 두부도 먹지 말란 거여

꽁치며 갈치며 비린 것 한번 맛볼라치면

버스 타고 장터까지 갔다 오란 거여

차비는 학교에서 내줄 거여 도대체

목숨이 뭔지나 알고 분필 잡는 거여

호박넝쿨 몇개 얹었더니 애들 퇴학시키듯 다 잘라버린 것들이

말 못하는 담벼락 가슴팍에 못질까지 하는 거여

애들이 뭘 보고 배울 거여 이웃이 뭔지

이따위로 가르쳐도 된다는 거여

 

이정록, 정말, 창비. 2013년 초판 7쇄. 86쪽.

 

'공동체' 의식을 가르쳐야 할 학교에서 오히려 공동체와 멀어지는 교육을 하고 있다. 아니다. 교육을 한답시고 말로는 온갖 도덕, 윤리를 이야기하면서도 실제 행동은 그렇지 못하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해서 신고를 하면 상점을 준다든지, 자기 반이 아닌 다른 반에 들어가도 벌점을 준다든지, 서로를 믿지 못해 점점 감시카메라는 늘어나고, 교실 문은 이동할 때마다 꼭꼭 잠근다든지...

 

학교 시설을 한번 쓰려고 하면 온갖 규제들, 절차들 때문에 스스로 포기하고 마는 경우. 도대체 학교와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요즘은 학교 운동장 개방이나 시설 개방 등 많이 나아지고는 있지만, 실질적으로 학교는 굳건한 담장으로 외부와 학교를 가르고 있다.

 

학생들이 한번 등교하면 수업이 다 끝날 때까지 학교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도 그런 모습이 아닌가.

 

이웃들이 학교에 항의하는 이 시를 통해 학교가 어떤 모습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시인이 어떤 삶을 원하는지도 알 수 있고.

 

이 시처럼 시집에 실린 대부분의 시들은 경쾌하다. 경쾌하면서 우리 삶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시를 읽을 때 벙싯거리게 된다. 좋다. 각박한 세상, 따스한 시들을 읽으며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도 얼마나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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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香 2018-07-10 0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정록 시인의 동시집 <콧구멍만 바쁘다>를 읽으면서 배시시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
동시라 그런 줄 알았는데, 일단 이정록 시인 보관함에 keep 해 둡니다.

kinye91 2018-07-10 10:13   좋아요 1 | URL
이정록 시인이 쓴 시들 중에 어머니와 관련된 시들은 저절로 웃음이 배어나오게 하더라고요... 그래서 좋아요.
 
빛의 호위
조해진 지음 / 창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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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무엇일까?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그 절망에서 건져줄 수 있는 것은? 그것은 거창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아주 작은 것, 그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절망의 나락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조해진 소설집 "빛의 호위"를 읽다가 그런 생각을 했다. 빅터 프랭클이 말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 그러면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는 것.

 

나치 박해를 피해 숨어 있는 유대인 여성에게 삶을 지탱하도록 해 준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동료 작곡가가 건네준 악보였다. 그 악보를 속으로 연주하면서 하루하루를 견뎠고, 살아낼 힘을 얻게 되었다.

 

부모가 없는 골방에 갇혀 있던 아이에게 삶으로 나아가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반장이 건네준 카메라였다. 사진을 찍으면서 빛을 발견하고 점점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게 된다. 사진을 찍을 때 빛이 모여드는 것을 경험하는 인물.

 

그렇다. 삶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렇게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는 것이 거창한 무엇일 필요는 없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그것 하나만으로도 다른 사람을 삶으로 인도할 수 있다.

 

'빛의 호위'라는 소설, 행복한 결말이라고 할 수 없지만, 세상이 여전히 어둠에 쌓여 있지만, 그 어둠 속에서도 빛을 모으고, 빛을 잃지 않으려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세상의 어둠 속에서도 빛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소설인데... 다른 소설들은 사회, 역사적 사건들이 사람들 삶에 어떻게 스며들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살아가면서 사회에서 벗어날 수도, 역사의 흐름을 거부할 수도 없는데, 그런 거대한 역사나 사회문제를 다루기보다는, 그 속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짧은 소설로 다루고 있다.

 

재일교포간첩단 사건이라든지, 동백림 사건 등을 소재로 다룬 소설(사물과의 작별, 동쪽 伯의 숲)을 통해 한 사람의 삶이 어떻게 굴절되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기록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에 들어와 그 사람 평생을 따라다니게 되는 그런 상흔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역사적 사건이 아니더라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배경으로, 그런 일들이 사람의 삶에 어떻게 들어오게 되는지를 섬세하게 표현해주고 있다.

 

입양아 문제, 인종차별 문제, 인문학의 쇠퇴 문제 등등 많은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데, 이들이 지금 우리 삶에 들어와 우리들을 힘들게 하고 있기도 하다.

 

소설이 다른 사람의 삶을 통해 내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면, 조해진의 이 소설집은 여러 사건들이 한 사람의 삶으로 어떻게 들어왔고, 그 사람의 삶을 어떤 식으로 끌고 가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우리들 역시 사회문제, 역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사회, 역사 등이 내 삶에 들어오고 있음을, 그것들로 인해 내 삶의 궤적들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결국 삶이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우리는 거기서 빛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 그 빛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자그마한 일, 내가 줄 수 있는 조그마한 물건이라도 삶의 빛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소설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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