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가 여기까지 치고 나올 줄은 몰랐다. 교육을 말한다는 잡지들 가운데 이런 주제까지 다룰 정도라면, 그것도 이런 식으로 다룬다면 민들레는 100호가 넘는 지금까지도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고 해야 한다.

 

  이번 호 기획은 '아이돌'이다. 사실 아이돌에 대해서는 상반된 입장이 있다. 아이돌을 열렬히 옹호하는 청소년 집단과 아이돌에 대해서 상업화된 상품에 불과하다고 폄훼하는 몇몇 어른 집단, 그리고 아이돌이 뭔데? 하며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집단.

 

  민들레가 표방하고 있는 이념이 무엇인가.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 아니던가. 스스로 서는데, 과연 아이돌은 스스로 섰는가라는 질문을 하면 예전에는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아이돌 초창기에는 기획사를 통한 만들어짐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학교에서 아무리 학생들을 틀에 맞춰 만들어내려고 해도 어디 그런가. 학생들은 그런 학교에서 탈주를 감행하지 않았던가. 자기들만의 삶을 찾아서.

 

탈주를 감행한 학생들로 인해 공고했던 학교의 틀도 어느덧 유연해지고 있지 않았나. 그렇다면 기획사가 만들어냈다고 하는 아이돌들은 어떤가. 이들이 내내 기획사 의도대로만 움직이는가. 아니다. 이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기획사의 음악을 넘어 자신들의 음악을 하는 존재로.

 

이런 성공사례로 방탄소년단을 들고 있다. 단지 방탄소년단만이 아니다. 요즘 아이돌은 스스로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선 다음 이제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서로를 살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이 요즘 아이돌이다.

 

그런 아이돌을 기존 잣대로만 평가한다든지, 자기가 지니고 있는 선입견의 틀에만 집어넣고 본다면 문제가 된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학생-학부모-교사가 교육의 주체라고 하면서 학생을 소외시켜왔던 것이 현실 아닌가. 그런 현실에서 학생들은 자기 목소리를 스스로 내기 시작했고, 학교에서 더이상 할일이 없다고 생각한 학생들은 학교 밖으로 나가 생활하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아이돌들 역시 자기들 음악을 하게 되었고, 그런 아이돌들을 편견을 지니고 보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이 되어야 하는데... 여전히 아이돌을 아이돌이라고, 그들을 하나의 음악인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번 호를 읽으면 그런 생각이 쏙 들어갈 것이다.

 

함께 사는 사회에서 어느 특정 집단을 특정 집단으로만 규정짓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학생이라고 말하기 전에 사람임을 먼저 인식하고 행동해야 하듯이, 아이돌이기 이전에 음악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들을 만나게 된다면 우리가 지닌 편견을 많이 씻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편견을 씻어내도록 하는데 민들레 118호가 도움을 주었다. 단지 아이돌만을 다룬 것은 아니다.

 

대안학교가 20년이 지났는데, 그런 대안학교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방향 모색에 대해서 고민을 한 글(양희규, 대안학교의 진화는 가능할까)과 학교 밖 아이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글(양영희, 학교 밖 아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등등이 있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지금 우리 사회는 수능 개편안 때문에 시끌시끌하다. 어떤 개편안이 나와도 아마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은 만족하지 못하리라. 지금과 같은 교육제도가 지속된다면... 지금과 같은 사회가 지속된다면 말이다.

 

그래서 수능 개편안은 사회와 교육제도의 변화와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교육 변화, 사회 변화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하는 잡지가 바로 '민들레'이기도 하고.

 

민들레 읽기 모임이 꽤 있나 보다. 책에 보면 많은 지역에서 읽기 모임을 하고 있으니... 이런 읽기 모임이 더 번져 나간다면, 교육 개혁이 단지 수능개편으로만 치우치지 않는 그런 정책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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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그라피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2
비톨트 곰브로비치 지음, 임미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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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제목이 책을 함부로 들고 다닐 수 없게 만든다. '포르노그라피아'라니... '유토피아'가 우리가 갈망하는 세상이라면, 포르노그라피아는 그렇다면 포르노를 갈망하는 사회라는 뜻 아닌가. 선뜻 집어 읽기 민망한 제목이다.

 

하지만 우리가 '포르노'를 거부한다고 해도 '포르노'는 이미 우리 일상에 너무 깊게 들어와 있다. 스마트폰 시대에 나이를 가리지 않고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는 세계가 바로 포르노 세계다.

 

물론 포르노 세계는 현실세계가 아니다. 가상으로 연출된 세계다. 인간이 지닌 가장 적나라한 몸만을 욕망하는 세계를 화면을 통해서 교묘하게 잘 보여주는 세계다. 이런 세계에서 우리는 자신이 지닌 욕망을 배출하고자 한다.

 

화면을 통한 배출, 그러나 많은 세계에서 포르노는 금지 구역이다. 여기에 접근하면 도덕적인 비난을 받는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육체적인 향락에 대한 욕망이 꿈틀거릴지라도 현실 세계에서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포르노 세계다.

 

금지되니 더 욕망하게 된다. 은밀하게 유통되던 포르노가 이제는 대놓고 버젓이 유통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유통이 성적 일탈을 더 많이 만들었을까? 과연 우리 인간은 그 정도밖에 되지 않을까.

 

포르노에 대해 논란이 일어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포르노가 미성년들에게 또는 유약한 정신을 지닌 - 그럼 포르노다 아니다 판단하거나 유통해도 된다 안 된다를 판단하는 법조인들과 윤리학자들은 강하고도 높은 정신력을 지니고 있다는 건지, 원... 그들이 벌이는 비도덕적인 모습을 너무도 많이 봐왔는데... -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쪽과 아니다 오히려 이런 매체를 통해서 해소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쪽으로 나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제목을 지닌 책을 들고 다니기엔 좀 그렇다. 아직 정리가 안 된 분야기이 때문이다. 제목이 민망하긴 하지만 읽어보면 '포르노'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인간이 지닌 욕망에 대해서, 그 파멸적인 모습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는 소설일 뿐이다. 물론 포르노가 인간 욕망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모습을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 역시 인간이 지닌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바로 젊음, 그래서 젊음이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보고자 하는 욕구다. 작가의 말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인간에게는 절대를 향한 갈망이 있습니다. 완전함, 충만함에 대한 갈망. 말하자면 진실, , 총체적 성숙 등에 대한 갈망이지요. 이 경우 인간에게 요청되는 건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완전히 실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포르노그라피아』에서는 인간의 또 다른 갈망 하나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더욱 은밀한, 어떤 의미로는 법에 배치되기도 하는 것으로, 미완성, 불완전, 열등함, 젊음 등에 대한 욕구입니다. (299쪽)

 

독일군에 점령당한 폴란드 시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욕망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야 하는데, 이야기가 참 이상하게 전개된다.

 

성적인 욕망을 실현하는 장면이 하나도 나오지 않음에도 자꾸만 포르노를 연상하게 만든다. 이유는 바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욕망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오던 관계인 헤니아와 카롤을 어른인 나와 프레데릭은 이들을 자신의 욕망에 맞게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즉 이들은 젊음의 욕정을 거리낌없이 발산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약혼을 했든, 안 했든 그들 젊음은 이미 육체의 욕망을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들 기대와 다르게 행동하는 헤니아와 카롤은 그들 각본에, 그들 시각에 맞지 않는 것이다.

 

이건 어른들 욕망에 맞지 않는 그런 행동이다. 이 행동은 잘못된 것이다. 이들은 욕망에 따라, 즉 젊음이라는 불완전한, 완성되지 않은, 그래서 어른에 비해 열등한 욕망을 발산해야 한다. 거리낌없이. 그래서 프레데릭은 세세한 각본을 짜서 이들을 자기 구미에 맞게 움직이게 한다.

 

이에 대한 희생양으로 알베르트를 삼는데... 헤니아의 약혼자인 알베르트가 희생양이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이미 어른이기 때문이다. 어른이기 때문에 같은 어른인 나와 프레데릭의 관심을 끌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가 헤니아와 카롤에 의해 몰락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또다른 어른들을 만족시켜 줄 수 있다.

 

여기에 이런 욕망은 조국이니 민족이니 하는 것을 뛰어넘는다. 독일군에 대항하던 사람, 시에미안을 죽이는 일에 이들을 가담시키는 것에서 어른들이 지닌 욕망을 극한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알베르트, 도덕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그는 자신이 시에미안을 죽이고 카롤의 칼에 죽는다. 이것으로 소설이 끝나는데...

 

젊음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관음... 그들이 불완전하게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싶은 갈망, 그 갈망을 이루기 위해 젊은이들의 행동을 유도하는 치밀함. 그리고 그것을 은근히 즐기는 어른들의 모습.

 

성적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포르노가 아니라, 불완전함 속에서 기쁨을 느끼는 어른들의 욕망을 가감없이 그러냈다는 점에서 이 책 제목이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숨겨져 있는 어른들의 욕망, 함부로 드러내면 안 되는 그런 욕망을, 전쟁 중에서도 버리지 못하는 인간 본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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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2 08: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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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2 1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최하연 시집을 읽으면 자꾸 '명사들'이 생각난다. 나이 들어 가면서 이상하게 명사부터 까먹게 되는데.

 

  그 단어가 무엇이었지, 그 사람 이름이 무엇이었지 하는 등, 자꾸 명사가 내 곁에서 사라져 가고 있는데... 그래서 명사는 내게 또렷한, 너무도 명료한 무엇이어야 하는데...

 

  최하연 시집에는 참 많은 명사들이 나온다. 그런데 그 명사들이 이상하게 정렬되어 있지 않다.

 

  마치 내 기억 속에 무언가가 있지만 명료한 이름을 갖고 있지 못해 내 애를 태우듯이, 최하연 시들에 나오는 명사는 이상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저게 뭐지 하는 생각을 자꾸 불러일으킨다.

 

  익숙함을 낯설게 하기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에 무언가를 남긴다. 명료하게 이거다 하고 남기지는 않는데, 자꾸 시를 들춰보게 만든다. 이해하지 못해도 손이 가게 하는 시들이라고 해야 할까.

 

그것만으로도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가령 '봄비'라는 시를 보자. 이 시에 등장하는 명사는 비, 배꼽, 탯줄, 허공, 테러, 송홧가루다.

 

배꼽과 탯줄, 비와 허공은 연결이 되는데, 또 비와 송홧가루도 연결이 되는데... 다른 것들과는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 연결이 잘 되지 않는 명사들이 제 자리를 차지하면서 어떤 의미를 만들어 낸다.

 

명사 자체도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다른 명사들과 관계를 맺으며 또다른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 시는 이렇게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보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게 해준다.

 

   봄비

 

비의 배꼽은

쑥 들어간,

움푹 패인,

탯줄 끊고 떨어지는 허공,

속에 있다

 

테러에 가까운

송홧가루가 몽땅

젖는다

 

최하연, 디스코팡팡 위의 해시계. 문학실험실. 2018년. 119쪽.

 

이런 낯설게 하기의 정점이 바로 '끝난 것은 죽음'이라는 시가 아닐까 싶다. 아파트 화단을 보면서 무덤을 생각하다니... 전혀 낯선 비유인데, 읽다보면 그러네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끝난 것은 죽음

 

아파트의 화단은 무덤이어서

어느 날은 모자가 모종삽을 들고 찾아와

죽은 고양이를 묻고

어느 날은 노부부가 막삽을 들고 찾아와

아들 손주 며느리를 묻는다

그리하여 나무 아래 도둑고양이는

혼자 몰래 삼년상을 치르고

무덤 밑으로 상수도 오수관 소화전이라도 지나갈라치면

어느 쫑, 메리, 삼순이의 집안엔 액이 끼어

가세가 기우는 것

그리하여 한진택배 파란 차가

무덤가게 잠시 설 때마다

상주의 고구마나 나주의 배라도

명부에 잠깐 올렸다가

층층마다 나누어 먹고

봄날의 꽃들은 그토록

한꺼번에 피었다가 지는 것

아파트의 화단은 부의함도

리무진도 없는 것들의 선산이어서

구름이 발로 밟고

잡풀은 해마다 질기게 자라는 것

그리하여 누군가 화단 앞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거나

전화기를 들고 빙글빙글 돌고 있을 때

메리 쫑 삼순이의 후손은

뒷다리 한 개씩 고이 들고 화단에

저리도 장엄하게 쉬를 하시는 것

 

최하연, 디스코팡팡 위의 해시계. 문학실험실. 2018년. 110-111쪽. 

 

이렇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 너무도 익숙해서 다르게 보지 못했던 것, 마치 명사가 한 개의 뜻만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다른 의미는 생각하지 않는 것에 대해 시인은 아니라고, 잘 보라고, 더 생각하라고 하는 듯이 낯섬을 우리에게 선물해주고 있다.

 

익술함과의 결별.. 이것은 인생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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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 페미니스트 크리틱 1
김은실.권김현영.김신현경 외 지음, 김은실 엮음 / 휴머니스트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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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지 한쪽으로만 치우치면 좋지 않다. 페미니즘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페미니즘은 방어 논리가 더 강했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의 절반(이 말은 성소수자를 배제하는 말이 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처음에 여성 권리를 주장할 때는 이 말을 사용했다. 남성과 동등한 존재인데, 그렇지 못하다는 인식에서 세상의 절반이라는 말을 썼다)이 여성임에도 남성들의 부속품 같은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는 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시작하자,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이 붙기 시작했고, 페미니즘은 방어를 넘어 공격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과격한 여성주의를 표방하는 단체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남성들뿐만이 아니라 여성들 사이에서도 페미니즘에 관한 여러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논쟁은 좋다. 자꾸 논쟁해야 한다. 그래야 쟁점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다. 쟁점, 즉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 알게 된다면 그 다음은 해결책으로 넘어가게 된다.

 

인간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 제기한다고 했던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이라는 얘기는 이미 문제가 제기되었다면 해결책이 있다는 말이다.

 

하여 많은 문제들이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해결되어 가고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여전히 갈 길이 멀지만.

 

이 책은 이런 페미니즘의 발달과정에서 여전히 논쟁이 되어야 할 것들을 제시하고 있다. '성폭력 이후'라는 논점으로 성폭력 피해를 당한 여성들이 여전히 당당한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제기하고 있으며...

 

가령 여성이 성폭력을 유발했다는 식으로 몰아간다든지, 또는 피해자화라고 하여 너는 큰 고통을 겪었으니, 그에 합당한 자세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든지, 가해자는 미래를 바라보면서 용서 담론이 형성이 되지만, 피해 여성에게는 이미 씻을 수 없는 과거 담론을 제시한다든지 하는 등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는 것들을 제시하고 있다.

 

피해자화라는 말... 너는 당했으니 괴로울테니, 괴롭게 지내야 한다는 말... 이 말이 지닌 폭력은 여성을 대상으로만 치부하게 된다. 무서운 말이다. 그런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마찬가지로 '여성의 입대' 문제가 있다. 평등 시대에, 여자도 군대 가라는 말, 또 여자도 군대 가야한다는 여성주의 진영의 말이 있다.

 

그러나 군대가 무엇인가. 군대는 철저하게 남성성이 관철되는 집단 아닌가. 그곳에는 평등이 없고 위계와 명령, 그리고 폭력만이 있을 뿐이다.

 

오히려 여자도 군대 가야 한다가 아니라 남자도 군대 가지 않을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로 바뀌어야 한다. 이런 다양한 주제들... '성매매 여성 되기 / 10대 가출 여성 / 걸 그룹과 샤덴프로이데 / 소녀의 디지털 노동 / 저출산 담론 / 이주 여성의 이름' 이 논쟁 거리로 나와 있다.

 

하나같이 고민해야 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다. 이런 논점들임에도 이 책은 한 쪽으로 논쟁을 몰아가지 않는다.

 

세상이 단 하나만의 답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측면에서 살펴보면서 해결책을 찾아가야 한다는 점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주제는 마지막 장에서 유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요즘 다문화라고 통칭되는 이주민들, 특히 이주 여성들이 지닌 문제.

 

이들을 우리는 이방인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반대로 우리에게 동화되어야 할 타자로만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장에서 말하고 있는 '노동자를 불렀더니 인간이 왔다' (204쪽)는 말과 '며느리를 불렀더니 여성이 왔다' (204쪽)는 말이 바로 페미니즘이 지닌 주장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앞에 나오는 말보다 우선해야 할 것이 바로 뒤에 나오는 '인간(사람)'이라는 말. 여성이니 남성이니 또는 성소주자니를 따지기 전에 모두 사람이라는 사실. 또 동양인, 서양인 따지기 전에 인간이라는 인식이 먼저 작동되어야 한다.

 

이런 인식에서 차이를 인정하고, 그 차이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시작한다면 사회는 다양성이 살아있는 조화로운 사회가 될 것이다.

 

그것이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사회일테고, 그런 사회를 위해서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를 우리는 지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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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9 09: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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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9 11: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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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을 읽으면서 황당한 경우를 많이 만나게 된다. 도대체 뭔 소리야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시집들이 많기 때문이다.

 

  언어의 마술사라고 할 수 있는 시인들이 자기들 언어를 갈고 닦아, 저만 알 수 있는 언어를, 그야말로 언어 연금술사처럼, 다른 사람들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언어를 만들어 내고, 그 언어들을 자기 맘대로 배열해 놓은 시집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이를 어떤 해설에서는 무궁(無窮)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끝을 알 수 없게 만드는 언어 배치... 그래서 무궁(無宮)이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잉태를 할 수 없는 자궁이기 때문이다.

 

  이 시집에 실린 시를 해설하는 강계숙은 제목을 이렇게 달았다.

 

'무궁(無宮/無窮)의 꿈, 카산드라 콘체르토'라고.  

 

워낙 해설자들이 현란한 언어로, 또 전문가다운 지식으로 시를 해설해 놓아, 해설이 더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이 무언가를 잉태하지 못하고(無宮), 또한 언어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無窮) 것만은 맞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카산드라 콘체르토'라니... 카산드라가 누군가. 예언을 하지만 그 예언을 누구도 믿지 않는 예언자 아니던가. 카산드라는 옳은 예언을 한다. 그러나 누구도 카산드라가 한 말을 믿지 않는다.

 

믿지 않기에 따르지 않는다. 트로이가 멸망할 것을 알고 사람들에게 알리는 카산드라지만 트로이가 멸망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콘체르토라니... 이게 이해가 안 된다.

 

콘체르토를 찾아보니, 협주곡이다. 협주라는 것은 서로 어울림이다. 어울림... 시는 바로 우리들 삶과 어울리기에 지금까지 존재해 오지 않았던가.

 

잉태도 하지 못하고, 끝도 모르는, 그러나 누구도 믿지 않는 말들이 우리와 함께 있다니... 협주하다 하고는 웬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는데... 콘체르토라는 말을 찾아봤더니, 라틴어로는 경쟁하다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경쟁이 무엇인가. 그냥 상대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와 함께 공존하는 것이 바로 경쟁 아닌가. 상대가 없으면 경쟁도 없다. 그렇다면 경쟁은 바로 협주다. 삶의 협주.

 

시가 난해해 질수록 시는 우리에게 카산드라의 말로 다가온다. 무언가가 있기는 있는 듯한데, 현실에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런 말... 그럼에도 그 말은 우리와 함께 한다.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해설을 읽으며 이 시집에 나온 시들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기묘한 협주다. 해설의 현란함은 그렇다 해도, 해설 마지막 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무엇보다 무궁(無宮/無窮)의 실존성을 정시(正視)하는 자기 성찰적 시선이 이러한 언어적 자의식과 결합할 때, 그의 시는 아름답게 빛난다. 만일 그중 가장 아름다운 한 편을 고르라면, 주저 않고 「콘체르토」를 꾭으리라.' (127쪽)  

 

나 역시 이 시집에서 이 시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무엇이라 설명하지 않아도 그냥 마음 속으로 파고든 시...

 

특히 이 시에 쓰인 구둣점을 보라. 마침표가 하나도 없다. 보통 마침표를 쓸 만한 곳에도 시인은 쉼표를 쓰고 있다.

 

시는 끝나지 않았다. 끝이 없다. 잠시 숨을 고를 뿐이다.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언제나 과정에 있는 것, 시는 마침이 아니라 출발이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는 쉼터, 그것이 바로 시다.

 

콘체르토

 

  섬이 있다네, 섬과 교회가 있다네, 섬에는 우체국이 있고 좁은 길이 있고, 어둠 속에 숨은 달이 길의 끝을 자꾸만 늘이고 있다네, 바다는 끝내 수평선에 목을 매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네,

 

  뒤돌아보면 하나 이상의 하나가 자꾸만 따라온다네, 앞서 가지도 않으면서 기다리지도 않으면서, 섬의 하루는 달빛을 따라 바다로 나간다네,

 

  오늘은 만선이었고, 만선 직전의 어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네, 얼마나 더 가야, 그 섬에 닿을지, 얼마나 더 가야, 나는 섬 밖에서 섬을 바라볼 수 있는지, 누군가 모든 길들을 처음으로 되돌리고 있는데,

 

  교회의 종탑은 순간 반짝인다네,

 

최하연, 피아노, 문학과지성사, 2007년.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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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8 09: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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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08 15: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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