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공감하는 시라. 아이들이 솔직하게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말하고 쓰고 이를 시로 표현하도록 한 것.

 

  아이들 시를 모아 놓은 책이다.

 

  아주 짤막하지만,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읽을 수 있어서 좋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시하고 멀어지는 우리나라 교육 현실에서, 초등학교 때 시를 쓰고, 그 시를 함께 읽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 정말 필요한 일이다.

 

  이때는 좋은 말로 꾸미려고 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자기 느낀 점을 글로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런 활동이 필요하기도 하고.

 

창간 준비호와 창간호를 읽었다. 최근에 쓴 아이들 시도 있지만, 이오덕 선생님이 근무했던 시대에 썼던 시, 그리고 10년이 지난 시도 있다.

 

물론 시라는 것이 한 시대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니까. 아이들이 느끼는 마음은 세대를 거쳐서도 공통된 것이 있으니,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읽으면서 마음이 따스해진다. 아이들을 만나면, 아무리 시대가 영악한 아이들을 키운다고 해도 어른들보다는 순수하다. 아이들은 왜곡된 눈으로 보지 않는다.

 

있는 것 그대로, 또 느끼는 그대로, 그리고 작은 것을 볼 줄 안다. 어른들이 놓치고 있는 아주 작은 것들을 아이들은 보고 말할 수 있다.

 

이 책들을 보면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그냥 지나쳐갔던 것들이 아이들에게는 매우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는 것을.

 

계간지로 한 해에 네 권 나온다고 한다. 제목이 '올챙이 발가락'인 이유를 창간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작은 것도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고, 낮은 곳에 마음이 가닿아야 시가 된다는 뜻에서 아주 작고 작은 '올챙이 발가락'이 좋겠다고 정했습니다.' (50쪽)

 

작은 것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이 쓴 시들... 작은 책자에 담겨 있으니 부담없이 읽으면 좋겠단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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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클래식 레터북 Classic Letter Book 5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육후연 옮김 / 인디북(인디아이)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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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꾸러기 아이가 성장하는 이야기. 일본 근대문학을 이끈 나쓰메 소세키의 성장소설이다. 성장소설이기에 작가의 경험이 많이 녹아 있다고 봐야 하는데, 작가가 한 해 동안 영어 교사로 근무했다고 하니 이 소설에도 어느 정도는 작가의 경험이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소설 내용이야 경쾌하게 빠르게 진행이 되어 읽기에 부담이 없다. 짤막한 문장들로, 또 다양한 사건들로 읽기에 전혀 부담이 없는데...

 

성장소설이니 몇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일본 근대 문화를 알 수 있겠거니 하지만, 사실 일본 근대문화에 대해서는 잘 나와 있지 않다. 학교 교육이 중시되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우선 성장에 절대적인 지지자가 필요하다는 것. 엄마가 일찍 죽고 아버지에게 못난 놈으로 취급받는, 형에게조차도 인정받지 못하는 주인공을 하녀인 기요가 전폭적으로 지지해 준다. 도련님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그 사람을 온전히 받아주는 사람이 있는 성장기를 거친 사람. 그런 사람이 악한 행동을 할 수가 없음을... 비록 성급하고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주인공이지만 표리부동한 사람을 싫어하고 옳다고 하는 것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주인공에게 그래도 기요라는 주인공을 전적으로 받아들여주는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저기서 잔소리를 듣고 야단만 맞고 넌 쓸모 없는 놈이야라는 소리를 들으며 지내는 환경에서 그나마 자신을 인정해주는 단 한 사람도 없는 상태라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그런 인정을 해주는 사람의 중요성, 이 소설에서 그 점을 찾을 수 있다.

 

또 하나는 지방 교육의 문제... 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수학교사로 부임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아이들을 무시한다. 도시 출신이라는 이유로 시골 아이들을 무식하다고 자기와 동급으로 대하지 않는다. 실수를 하고도 그냥 넘어가는 모습, 동료 교사들을 무시하는 모습 등은 도시인이 지방을 대하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편견을 가진 사람을 학생들이 교사로 인정할까? 학생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말과 행동이 같은 사람과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을. 그들은 말과 행동이 같은 사람은 교사로 인정하지만(이 소설에 나오는 멧돼지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교사처럼)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은 교사로 인정하지 않는다.

 

주인공이 도쿄에서 와 학생들에게 인정받기까지는 꽤나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러니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학생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 그가 먹는 음식부터 하는 행동까지. 그러나 익명에 익숙했던 도시인은 사생활이 완전히 까발려지는 시골 생활을 견딜 수 없어 한다.

 

주인공도 그랬다. 그는 학생들과 갈등을 한다.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생각으로 학생들과 하나가 되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것은 교사는 학생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교사 우월주의를 보이는 근대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학생들과 친해지는 것은 패싸움을 통해서다. 물론 주인공은 학생들의 반응을 칭찬인지 아닌지 구분을 못하지만... 자신들과 함께 싸우는 교사를 보면서 학생들이 마음을 열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사는 어찌해야 하는가. 바로 멧돼지 선생처럼 바른 말을 할 줄 알아야 하고, 또 학생들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20대 초반에 교사 생활을 하면서 주인공은 사람을 알아가게 된다. 겉으로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를 다양한 교사 군상들을 만나면서 깨달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장소설이다.

 

성장소설을 읽는 것, 그것은 우리의 삶을 다른 사람에게 비춰보는 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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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3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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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하나의 몸짓에서 시작한다.

 

'그 몸짓 덕택에, 시간에 구애되지 않는 그녀 매력의 정수가, 그 촌각의 공간에 모습을 드러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 나는 이상하리만치 감동했다. 그때 나의 뇌리에 아녜스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11쪽)

 

예순이나 예순 다섯으로 보이는 부인이 하는 몸짓 하나가 시간을 초월하게 한다. 시간을 초월하는 몸짓, 그것은 불멸을 향한 몸짓이다. 쿤데라는 소설 속에 직접 등장한다. 여인의 몸짓을 보고, 그는 아녜스라는 이름을 떠올린다.

 

'아녜스.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이름의 여자를 만난 적이 없다.'(11쪽)고 하면서. 그렇게 소설은 시작된다. 특이하게도 등장인물들과 소설가, 그리고 소설가 친구가 소설 속에서 서로 만난다. 이런 일이...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지만, 쿤데라는 이를 통해 과연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일을 겪는다. 수많은 일들이 우리 인생을 감싸고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그 많은 일들 중에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일들은 얼마나 될까?

 

소설 뒷부분에 가면 '루벤스'라는 별명을 가진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온갖 여자와 잠자리를 갖지만 결국 나중에 남는 것은 사진 몇 장으로 기억되는 여자들뿐이라고 한다. 여자와의 만남이 영화로 남는 것이 아니라 사진으로 남는 것. 연속이 아니라 단절된 장면으로만 기억되는 것.

 

사랑이 불멸일 수 있을까? 불멸의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영화가 되어야 할까, 사진이 되어야 할까? 영화가 되면 우리는 굳이 기억하지 않는다. 자신이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이 되면 그 장면에서 많은 것을 떠올리려 노력한다.

 

불멸이 되기 위해서는 연속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단절되어야 한다. 단절되어야 기억을 떠올리려 노력하고, 찾으려 노력한다. 결국 루벤스가 만난 류티스트라는 별명으로 불렀던 여자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아니라 사진이다. 몇 개의 장면으로 남은.

 

그리고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결국 류티스트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죽음으로 그 여인과의 사랑은 영원히 기억될 수밖에 없다. 몇몇 장면으로. 그리고 류티스트가 아녜스임을 전화통화에서 밝히고 있는데...

 

아녜스... 쿤데라가 창조해낸 인물이다. 몸짓으로 보고, 그는 아녜스를 창조했고, 아녜스로 하여금 그 몸짓을 하게 한다. 그런데 아녜스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죽음으로 몰아갔음에도 아녜스의 몸짓이 동생인 로라에게서 나타나게 한다.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 남게 된다. 그 점을 괴테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베티나 이야기를 곁들인다.

 

괴테가 베티나와 사랑에 빠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베티나는 괴테가 살아 있을 당시 많은 편지를 썼고, 괴테가 죽은 다음에는 그 편지들을 책으로 엮어냈다. 책으로 엮어냄으로써 베티나는 괴테의 연인으로 영원히 남게 된다. 그들의 관계가 지속적이지 않고 순간적이고 어느 순간 끝났다는 데서 불멸은 시작한다.

 

베티나는 괴테의 죽음으로 괴테에 대한 사랑의 불멸을 이룬 것이다. 그렇다면 쿤데라가 괴테의 이야기를 소설에 집어넣은 이유는 무엇인가? 불멸의 사랑이 있다는 것인가? 아니, 사랑은 순간적이고 일회적임일, 그래서 사진처럼 장면으로만 남음을 우리에게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 아닌가.

 

아녜스라는 인물을 창조한 쿤데라는 남편으로 폴을, 그리고 여동생 로라를 만들어낸다. 로라는 언니의 뒤를 좇는다. 언니가 하는 몸짓을 따라한다. 아녜스를 그를 보고 그 몸짓을 그만둔다. 여기서 우리는 로라가 언니를 대신하게 됨을 예측할 수 있다. 언니를 대체하는 로라, 그렇다면 아녜스는 어디에 자리해야 할까?

 

동생에게 제 자리를 빼앗긴 아녜스는 죽음으로 사라져야 한다. 죽음으로 사라져야 로라의 몸짓에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게 여러 개 사랑 이야기가 겹쳐지면서 소설 '불멸'은 전개된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아녜스는 물망초 한 가지를, 물망초 오직 한 송이를 사고 싶어 했다. 눈에 잘 뵈지도 않는, 아름다움의 마지막 자취로서, 그것을 두 눈 앞에 간직하고 싶어 했다.' (520쪽)

 

물망초... '나를 잊지 말아요'라는 꽃말을 지닌 꽃. 아녜스는 이 물망초를 갖고 싶어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불멸에의 욕망이다. 자신은 삶을 마감하지만 기억되고 싶은 욕망. 기억되기 위해서는 떠나야 하는 것.

 

참으로 다양한 이야기들이 교차하고 있다. 일관된 줄거리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이야기들이 순서없이 나오고 있다. 중심 이야기가 아녜스를 중심으로 펼쳐진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괴테 이야기, 그리고 뒤에 루벤스 - 우리가 아는 화가 루벤스가 아니다 - 이야기가 펼쳐진다. 여기에 실명으로 나오는 쿤데라 자신과 친구인 아베나리우스 교수가 나오고, 실제 인물들과 작중인물들이 서로 만나고 이야기하고... 참 난해하게 전개된다.

 

그러나 한 가지는 명확하다. 인간은 유한하다. 생명이 유한하고, 사랑 역시 영원하지 않다. 그런 유한과 순간에서 영원을 추구하는 것, 불멸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불멸이 되기 위해서는 절대로 영원해서는 안 되는 것. 순간에서 멈춰야 하는 것. 파우스트 박사가 순간을 멈추라고 했던 것, 비록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기게 되더라고 멈출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이 멈출 때, 멈춰서 하나의 장면으로 기억될 때 불멸이 된다.

 

그런 불멸을 우리가 바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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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책방에서 구했다. 많은 책들이 있었지만, 詩人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잡지였는데, 여러 권 중에서  권을 고르기로 하다.

 

  하나는 복간창간호이고, 또다른 하나는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을 고른 이유는 단순하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추모시들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분들이고, 국민의 정부, 참여 정부를 이끌었던 분들이니, 그들에 대한 추모시가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잡지에서는 두 분에 대한 추모시를 실었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사게 된 것.

 

  그밖에도 다른 여러 시인들의 시가 실려 있고, 복간창간호가 조태일 특집이듯이, 이번 호에도 조태일 시인에 대한 글과 조태일 시인의 육필 원고가 실려 있다.

 

 이 정도면 읽기에 충분한 책이 아니겠는가.  다른 말이 필요없다.

 

두 분에 대한 추모시를 쓴 시인들은 언급하지 않으련다. 이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단지 이 분들을 추모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아야 한다. 이 분들이 걸어갔던 길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분들은 우리에게 우리가 갈 길을 보여주었다. 길을 보여주고 떠난 분들, 계속 이어진 그 길은 우리가 가야 한다.

 

멈춤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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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반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78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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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생소한 병명 '알렉시티미아'라는 이름을 이 소설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감정 표현 불능증이라고 한다는데, 특히 공포를 잘 느끼지 못하는 증세라는데... 편도체가 보통 사람보다 발달이 잘 안 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증세라고도 하고. 다만, 후천적인 훈련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보고도 있다고 하니 ('일러두기' 참조)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무궁무진한 존재인지 알려주는 병일수도 있겠단 생각을 하기도 했다.

 

아스퍼거와 같이 남의 감정을 잘 읽지 못하는 증세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는데, 알렉시티미아라... 그런 증세를 가진 이는 공포, 두려움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그 장면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칠 수 있다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다른 사람의 얼굴이나 행동, 말에서 공포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보통 때와 다름없이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

 

공포나 두려움은 인간이 살아남는데 기여를 한 감정이기에 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면 살아남기 힘들다. 왜냐하면 같은 상황에서도 같은 행동을 반복하기 때문이다.뜨거운 물이 담긴 빨간 주전자에 데었으면서도 다시 빨간 주전자와 뜨거운 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대하는 주인공의 행동이 이를 말해준다. 이는 자신을 위험에 처하게 만든다.

 

단지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공포를 느끼지 못한다는 얘기는 다름 사람의 감정에 공감을 하지 못한다는 얘기와 통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공유하지 못하기에 공포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아이가 사회에 적응하게 하기 위해 엄마는 기본적인 태도를 교육한다. 소설을 보면 단지 공포만이 아니라 감정을 읽지 못하는 경우까지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말은 생각을 전달하지만 생각을 곧이곧대로 전달하지는 않는다. 말 속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가. 말 속에 담겨 있는 수많은 감정들을 배제하고, 그냥 말 그대로만 받아들인다면 세상이 얼마나 무미건조하겠는가. 아마 세상 모든 예술이 사라질 것이다.

 

예술은 보이는 것 속에 들어있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삶도 마찬가지다. 들어가는 대로만 나오게 하는 그런 기계적인 연산과 달리 사람들은 들어가는 것과 나오는 것이 무척 다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살아왔다.

 

이런 인간 앞에 기계가 서 있는 것이다.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마치 인공지능 시대를 연상하게 하는 그런 인물이 등장한다. 부모의 죽음 앞에서도 어떤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그냥 장면이 펼쳐질 뿐이다. 그리고 다음 행동을 할 뿐이다.

 

학교에 가서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많은 관계, 행동, 말 속에서 다른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는 주인공에게는 학교란 별다른 의미가 없는 곳이다.

 

그와 정반대 인물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두 인물이 등장한다. 아마도 주인공의 편도체를 키워줄 인물, 아니 편도체라는 인체 일부분으로만 성장을 이야기하면 안 된다. 오히려 주인공은 전혀 다른 사람과 관계를 통해 스스로 성장해가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생각해야 한다.

 

곤이... 어려서 부모와 헤어지고 온갖 험한 일들을 겪은 아이. 이 아이 역시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주인공이 감정을 읽지 못해서 표현을 하지 못한다면, 곤이는 감정을 너무도 잘 읽어서 표현하지 못한다. 그렇게 살아왔기에... 자기를 인정받지 못하고 살아왔기에, 인정 욕구는 강하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내면에 있는 작은 천사가 외면에 있는 악마로 나타나는 것이다. 외면으로 보이는 악마, 그러나 속에 숨어 있는 천사... 주인공이 감정을 읽지 못한다고 했는데, 아니다. 곤이란 인물로 인해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감정을 정작 읽지 못하는 것은 주인공이 아니라 우리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 역시 사람의 내면을 보아야 한다고 하면서도 겉으로 나타나는 면만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나, 또 자기 감정을 감추기 위해 마음과는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나 하는 점을 곤이를 통해 보게 된다.

 

오히려 감정을 읽지 못하는 기계같은 주인공은 곤이를 이해한다. 왜냐하면 곤이를 어떤 판단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래서 곤이와 친구가 된다. 나중에 곤이를 찾아가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사람, 그렇게 생활한 사람은 남을 받아들일 수 있다. 곤이가 변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마지막에 주인공에게 남긴 쪽지 '미안하다. 그리고 고마워. 진심.'이라는 말을 통해서 곤이는 자기를 그대로 받아들여준 친구가 있었기에 또 변하려는 아빠가 있기에 변해갈 것이다.

 

다른 한 축에 있는 인물, 이도라. 여학생이다. 주인공 마음에 이상한 파문을 일으키는 인물.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주인공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도라 역시 집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육상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꿋꿋이 육상을 한다.

 

이도라는 자기 길을 간다. 그냥 그렇게. 이런 이도라에게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어디에 있어도 이도라를 느낄 수 있게 된 주인공. 이것은 사랑이다. 마음의 흔들림. 그런데 사랑을 느끼게 되면 자연스럽게 공포를 느낄 수 있게 되지 않나.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잃게 될까봐 두려워한다는 뜻이기도 하니 말이다. 사랑과 공포가 따로 존재할 수 없는 감정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도라가 꺼져 라고 말해 곤이가 사라져버리고 난 뒤...

 

주인공에겐 사랑과 공포가 서서히 찾아들게 된다. 물론 공포는 여전히 잘 느끼지 못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은 표현하지는 못하더라도 주인공의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된다.

 

일탈행위를 하는 곤이를 찾아가고, 곤이를 위해 칼을 맞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 그는 성장했다. 성장하게 된 이유가 바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았기 때문이다. 자기 관점에서 남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눈 앞에 있는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알렉시티미아'라는 병을 앓고 있는 주인공을 통해 작가는 정상인이라고 하는 우리들이 어쩌면 자기만의 잣대로 남을 판단하는 '감정 공감 불능증'을 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는 생각을 했다.

 

감정을 읽지 못하는 주인공을 앞세워 봐라, 정작 감정을 읽지 못하는 것은 바로 너희들이라고... 곤이를 보라고. 곤이가 그렇게 외쳐댔는데, 누가 곤이의 감정을 읽어줬냐고? 오히려 곤이를 제 관점에서 내치기만 했지 않냐고... 그런 곤이를 받아들인 사람이 누구냐고... 바로 감정 표현 불능증에 빠진 주인공 아니었냐고.

 

감정 표현 불능증, 가만히 이 용어를 살펴보니 '표현'이다. '이해'가 아니다. 그렇다. 우리는 먼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 내지 않았던가. 조금만 자기 뜻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한 사람에게 인상을 찡그리고 말에 감정이 담겨 있고 막 그러지 않았던가. 그런데 주인공을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냥 무덤덤하게 상대를 대했다. 그가 사회에서 나쁜 사람이라고 낙인찍혔든,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받든 똑같이.

 

그런 주인공을 통해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어떻게 했는지 반성하라는 듯하다.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우리가 '감정 이해 불능증'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하는. 나를 돌아보게 하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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