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홍승은 지음 / 동녘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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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에 대한 여러 논란이 있지만, 그럼에도 페미니즘은 더불어 살기 위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더불다는 말, 나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나와 남이 똑같아도 갈등이 있을텐데, 나와 다른 남과 함께 살아가야 하니 어찌 갈등이 없을 수 있을까?

 

페미니즘은,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 페미니즘은 이런 갈등을 완전히 해소하자는 운동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갈등을 인정하고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접점을 찾아가자는 운동이다.

 

다르니까 배제하자는 것이 아니라 다름에도 함께 하자는 것, 나하고 똑같은 방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서의 방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야말로 우리들이 꿈꾸는 대동세상이다. 대동세상이 뭔가. 모두가 똑같자는 것이 아니라 큰 부분에서 같자는 것이다. 소이(小異)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이부동(和而不同)이 되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페미니즘이다.

 

가끔 페미니즘을 한다는 사람들이 과격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괘씸하게 여기고 노여워해서 페미니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사회 안정을 해치는 집단으로 매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해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 이들은 이미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고 이 기득권 속에서 편안하게만 살아가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왜 저런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다른 존재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게 지내야 했는지를 알 수가 없다.

 

일부러가 아니라 그들은 정말로 모를 수가 있다. 편안함 속에 푹 빠져 살았기 때문이다. 그냥 그런 삶이 당연한 줄 알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은 페미니즘을 괘씸하다고 하고 그들에게 노여워 한다.

 

이 책을 쓴 홍승은의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가족에게 가했던 폭력에 대해서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그냥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딱히 이 분의 잘못이라고만 하기엔 문제가 있다. 사회가 그런 환경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홍승은의 아버지 역시 자신은 보통 아버지와 똑같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자, 이런 환경에 균열을 내는 것이 바로 페미니즘이다. 페미니즘은 그래서 억압받고 피해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린다. 대동(大同) 세상이 꼭 다 같다는 것이 아니라 소이(小異)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운동이다.

 

조금 다름이 있다는 것, 사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조금 다름이 아주 크게 다름으로 인식되고 차별을 받았는데, 크게 다름은 많이들 깨달았다면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던 조금 다름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특히 이 책은 그렇다.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서 아, 그렇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어쩌면 알게 모르게 차이를 차별로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불편하다.

 

불편함을 생각하게 된다. 불편함을 생각한다는 것은 자신의 세계를 낯설게 본다는 것이다. 낯설게 볼 수 있다는 것, 자신의 세계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불편해야 한다. 이 책 제목처럼 우리는 계속 불편해야 한다.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고 함께 살아가려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불편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불편함이 사회 전체적으로는 편안함을 만든다.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서 불편함을 인식해야 한다. 내가 불편함을 인식하고 그것을 드러낼 때 사회 전체적으로 불편함이 줄어들게 된다. 그런 노력을 다른 존재들이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말 하나 행동 하나 정말 조심해야 하겠다는 것, 내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라는 것을 생각하게 해준 책이다.

 

우리 조금씩 서로 불편하자. 내 조금의 불편함이 사회 전체적으로 편안함을 만들어 갈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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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현대사를 관통하다 - 19세기 말 이후 한국 현대사와 시의 만남
이성혁 외 지음 / 문화다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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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세상을 자신의 방식으로 재해석해서 표현하는 존재다. 세계를 자신의 표현 속으로 들여오기 때문에 시인은 바로 세계 자체다. 따라서 시 역시 세계 자체다.

 

그렇다면 시는 역사에서 떨어져 있을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시가 세계 자체라면 시는 곧 역사다. 우리가 시를 읽는 것은 인간의 역사를 읽는 것이다.

 

시를 읽으며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삶이 역사에서 벗어난 적이 있었던가. 그러므로 시를 읽으면 자연스레 역사를 읽게 된다. 역사, 그 속에서 인간들이 함께 살아왔던 것 아니던가.

 

하지만 시를 그렇게 읽지 않고 역사에서 독립된, 세계에서 독립된 철저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존재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시는 서정 이상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바로 역사 속에서 그런 시를 썼다는 사실... 독재 정권 아래서 그 정권을 비판하지 못하고 그에 아부하는 시를 쓰면서 그것을 순수서정이라고 하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역사다. 세계에 깊이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는 역사에서 떨어질 수가 없다. 시가 세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인 역시 세계 속에서 역사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현대사의 주요한 사건들을 다루면서 그 사건들을 시가 어떻게 형상화하고 있는지를 살피고 있다.

 

우리나라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많았는데, 개화기부터 2016년까지 역사를 개관하면서 시가 어떻게 역사를, 사건을, 사회를 드러냈는지 보여주고 있다. 당대 씌어진 시부터 시간이 흐른 다음에 그 사건을 다룬 시까지 아우르면서.

 

하여 시와 역사가 함께 드러나 있다. 개화기 때 창가부터 일제시대 독립을 노래한 시들, 그리고 해방이 되고 격동기를 노래한 시, 전쟁의 참담함을 노래한 시, 이승만 독재 때 나온 시들, 4.19를 다룬 시, 박정희 개발독재를 다룬 시, 벗어날 수 없는 광주민주화 운동을 다룬 시, 1980년대 첨예한 정치의 시대를 다룬 시, 그리고 급변했던 1990년대 공동체보다는 소비지상주의로 흘러가던 우리 모습을 다룬 시, 그러다 맞은 외환위기... 또 2000년대 시들.

 

이렇게 큼직한 사건들을 다룬 시들을 소개하고 있다. 시를 읽으며 현대사를 알 수 있게 되기도 하고, 현대사 속에서 시인들이 어떻게 살아가려 했는지, 어떻게 대응했는지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서 이 책은 각 장이 끝날 때마다 그 시대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글들을 부록으로 실어주고 있다.

 

가령 2000년대는 박근혜 탄핵문이 실려 있으며, 1970년대 개발독재를 다룰 때는 10월 유신 선언문이 실려 있다. 아버지와 딸이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는데...

 

현대사를 일별할 수 있고, 여기에 따른 시를 알고, 시인에 대해서 생각할 수도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각자가 해당 시기를 맡아 썼다는 것도 장점이라면 장점일 수 있는 책이기도 하고...

 

시와 역사는 앞으로도 함께 갈 것이니... 관심을 가지고 읽으면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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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를 철학하다
차민주 지음 / 비밀신서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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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말했다. 예전에 외국에 나가면 일본인이냐, 중국인이냐고 먼저 묻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은 한국인이냐고 묻는 경우가 많다고...

 

물정도 모르고 우리나라가 이제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졌나 보다고 말했더니, 그 사람이 하는 말, 우리나라 자체의 능력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방탄소년단 때문이라고...일명 BTS라고 하는 그들 때문이라고.

 

방탄소년단으로 인해 한국에 대해서 좋게 생각한다고 했다. 방탄소년단. 처음엔 무슨 군사단체인 줄 알았다. 그 다음엔 그냥 요즘 많이 나오는 아이돌 그룹 중 하나인 줄만 알았다. 얼마 있지 않아 잊혀질... 참 물색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아이돌에, 방탄소년단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으니...

 

아이돌 하면 그냥 만들어진 존재로 치부했다. 『민들레118호』를 읽으며 아이돌에 대해서 생각을 조금 바꾸긴 했지만, 그 호에서 방탄소년단이 나오긴 했지만 더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BTS를 철학하다』라니... 아이돌을 이제는 철학으로 조명하는구나 싶었다.

 

아이돌과 철학, 정말 멀리 있는 조합이다. 은유라고 한다면 가장 먼 은유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아이돌 음악하면 경쾌함, 가벼움, 순간적임 등등을 떠올리는데, 철학하면 무거움, 어려움, 영원함 등등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이건 편견이다. 그런데 이 편견이 참 무섭게도 잘 없어지지 않는다)

 

경쾌하게 젊은이들과 어울리는 아이돌 음악이 진지하고 무겁게 이상하게도 광장이 아닌 밀실에서 늙수그레한 늙은이를 떠올리는 철학과 연결이 되다니...

 

어찌 흥미를 유발하지 않겠는가. 제목만으로도 책에 손대게 만든다. 어른들은 이게 뭐야 하는 마음으로, 젊은이들은 방탄소년단을 좋아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손에 든 책... 처음엔 방탄소년단이 부른 노래들 가사에서 시작한다. 어라? 노래 가사들이 만만치가 않다. 책에서는 방탄소년단 노래 가사가 '시'라고 말하기도 한다.

 

시가 본래 노래였으니 새삼스러운 말도 아닐텐데, 요즘 노래 가사들의 의미없음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말은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충격을 받았으면 찾아서 비교해 볼 수밖에... 책에 많은 노래들의 가사가 나오는데, 가사들이 가볍지가 않다.

 

사회 문제부터 청년들 문제까지 다 다루고 있는데, 가리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하는데, 그렇게 문제의 정곡을 찌르고 있다. 그래, 이래서 방탄소년단이 수많은 팬들에게 사랑을 받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런 가사에 빠른 박자의 음악, 그리고 독창적인 그들의 춤, 나름대로 연결성을 갖고 만든 뮤직비디오 등등, 이들은 자신들의 음악을 종합예술로 승화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종합예술이 아니라 사람들 마음에 무언가를 심어주는, 치유 기능도 갖고 있고, 사유 기능도 갖고 있으며, 오락 기능도 갖고 있는 그런 노래들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게 철학이 아니고 무엇인가.

 

예전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부른 '교실 이데아'가 우리나라 교육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고, 'COME BACK HOME'이라는 노래가 집을 나온 청소년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고 하는데, 이런 역할을 방탄소년단이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활동했을 때보다 한 단계 더 발전된 모습으로... 그들은 어려운 환경에서 좌절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지금의 자리에 섰다고 한다. 그런 자신들의 삶을 솔직하게 가사로 담고 있으며, 팬들과도 솔직하게 소통한다고 한다.

 

이렇게 방탄소년단이 삶과 밀접하게 연계된 노래, 음악 활동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 책이다. 나같은 기성세대에게는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먼저 들으면 우선 빠른 박자로 가사를 제대로 알아 듣지 못하고 마는데, 이런 책을 통해 가사를 먼저 알고 그 의미를 생각하고 다시 노래를 들으면 그때부터 가사가 들어오기 시작한다.

 

가사가 들어오기 시작하는 순간, 마음에 노래가 들어오게 된다. 이제는 아이돌이 특정 세대만의 음악이 아니라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음악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이 책 『BTS를 철학하다』를 읽으면 아이돌 음악에 대한 편견이 사라진다. 방탄소년단이 왜 유명해졌는지, 그들을 왜 사랑하는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이제 음악은 다시 철학과 하나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은 이렇게 내게 방탄소년단을 새롭게 알려주었다. 또한 그들의 노래를 찾아 듣게도 만들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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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9
제임스 M. 케인 지음, 이만식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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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하게 이 소설을 소개할 필요는 없다. 세계문학전집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명작이라고 할 필요도 없다. 이 소설은 그야말로 통속소설이다. 옛날 말로 하면 통속잡지에나 실려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 그런 소설. 한마디로 싸구려 소설.

 

이렇게 혹평을 하면? 글쎄... 읽히지도 않는 명작과 잘 읽히는 통속소설, 어느 것이 더 좋을까? 작가에게, 아님 독자에게?

 

명작과 통속을 어떻게 구분하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통속이라는 말이 너무 저속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 이를 대중이라는 말로 바꾸자고 할 수 있다. 이젠 통속소설이 아니라 대중소설이다. 많은 사람들이 읽는 소설이다.

 

많은 사람들이 읽다보니 자꾸 사람들 입에 회자된다. 회자되면서 작품에 대해서 이런 저런 말들을 하게 된다. 이 말들이 살을 붙여 작품이 점점 심오해진다. 대중소설이 우리 삶에 어떤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도 계속 읽힌다. 명작을 쓰는 작가라는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준다. 이 소설에 영향을 받았다는 작가도 나온다. 이제는 대중소설을 넘어서기 시작한다. 명작의 반열에 오른다.

 

세계문학전집에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니 사람들이 아, 좋은 소설이겠구나 하고 또 읽는다. 읽기의 선순환이 일어난다. 그렇게 소설은 통속, 대중, 명작, 고전을 떠나 자기 자리를 확고하게 만든다.

 

이 소설이 그렇다. 읽으면서 어떤 깊은 의미를 찾으려 할 필요가 없다. 신문 사건사고란에서 볼 수 있는 일이 소설에서 펼쳐지기 때문이다.

 

부랑자가 어느 곳에서 어떤 여인을 만난다. 그 남편이 권하는 대로 그곳에 머무르고, 그 여인과 밀회를 즐긴다. 밀회를 즐기다 보니 남편이 거슬린다. 죽여버려야 한다. 한번에 성공하지 못한다. 이들은 어설프기 때문이다. 이 어설픔이 남들 눈에 다 보이는데, 자기들은 진지하다. 두번째 성공한다. 그리고 이들은 함께 산다.

 

함께 살지만 부랑자는 방랑벽이 있다. 떠나고 싶어한다. 하지만 여자는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살인에 공모한 두 사람, 비밀을 공유하는 두 사람이 어긋나기 시작한다. 어긋나지만 이들은 서로를 떠나지 않는다. 이것이 사랑으로 묶여 있든, 아니면 배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묶여 있든.

 

결국 우연이든 의도이든 부랑자는 여자를 죽게 만든다. 자동차 사고다. 그리고 그는 이전 범행까지 밝혀져 감옥에 있다.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을지 집행유예를 받을지, 감면될지 알 수가 없다. 알 수가 없는 상태에서 회고록을 쓴다. 이것이 바로 이 소설이다.

 

많이 들어본 줄거리 아닌가. 그런데 제목이 내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소설 내용에는 우체부(포스트맨을 우편배달부라 번역할 수 있다)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설을 읽어보면 제목을 붙이기 위해 작가와 출판사가 여러 고민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 두번 벨을 울리거나 문을 두드리는 우편배달부를 떠올리고, 이것을 제목으로 삼았다고 한다. 두번 벨을 울린다. 여기에 착안을 하자. 소설에서 사건은 두 번 일어난다.

 

우선 그리스인 남편을 살해하는 행동이 두 번 일어난다. 그리고 부랑자인 '나' 역시 두 여자를 만난다. 또 검사에게 '나'가 여자를 배신하고, 여자 또한 '나'를 배신한다. '나'는 여자를 두 번 떠났다가 돌아온다. 같은 검사 앞에 두 번 서게 된다. 보험사가 두 번 등장한다. 경찰도 역시 두 번 등장한다.

 

두 번... 비슷한 일이 반복되는 것, 그것도 안 좋은 쪽으로 두 번 하다보면 결국 파멸로 향하게 된다. '나'가 감옥에서 교수형을 기다리고 있듯이.  두 번째에는 파멸이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소설은 사건의 완결을 향해 두 번 비슷한 사건을 등장시킨다.

 

부랑자인 프랭크와 그를 사랑했던 코라. 이들은 사랑이라고 생각했지만, 온전히 서로에게 서로를 내어주는 사랑이 아니다. 여자는 머무르려 하고, 남자는 떠나려 한다. 여기에 살인이 끼어들게 되고... 처음 살인을 저지르려 할 때는 고양이가 등장하더니, 여자를 죽게 만들 때는 고양이과인 '퓨마'가 등장한다.

 

두 번, 두 번은 소설을 비극으로 이끌어간다. 치정살인극이라고 할 수도 있는 내용에 그래도 힘을 주는 것은 이런 제목에 따른 읽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냥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작품...영화로 만들어졌을 정도로 빠른 사건 전개, 인물들의 단순한 성격 등... 이것이면 된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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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3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13 1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디지털 시대의 언론'이라는 기획 글들이 실렸다. 삼권분립이 아니라 제4의 권력이라고 할 수 있는 언론에 대해 다루고 있는 것.

 

  언론이 제 기능을 할 때 사회 역시 제 자리를 잡을 수 있는데, 과연 우리는 언론이 제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을까.

 

  오죽하면 '기레기(기자쓰레기)'라는 말이 있을까? 또 심심치 않게 나오는 가짜 뉴스라는 말이 있을까.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들 가운데 불필요한 정보가 얼마나 많은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스마트폰 시대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정보를 얻고 또 소통을 하고 있는지... 즉각적인 소통. 하다못해 주로 언론에서 떨어져 나온 미국 대통령 트럼프도 트위터로 정치를 하고 있지 않은가.

 

즉각적이고 일시적이고 자기 구미에만 맞는 소통 방식, 트위터를 비롯한 여러 소셜 미디어를 활용한 소통 아니던가. 여기에 디지털 언론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나라에서는 댓글부대들이 생겨 댓글로 여론조작을 시도한 것이 밝혀지지 않았던가. 또한 개인정보를 구청에서 유출해 무작위로 자기들이 필요한 선전문구를 보내기도 하고, 자기들만의 언론을 만들어 동질성을 강화하기도 하지 않던가.

 

이런 소셜 미디어의 난립이 다양성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 너무도 많은 소통관계들이 만들어졌음에도 다양성이 아니라 단일성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이들이 천편일률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관계의 가벼움, 관계의 일방성... 소셜 미디어는 쌍방향을 투구한다고 하지만 사실 쌍방향이 아니라 일방성이다.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을 수 있는. 그래서 자기와 구미가 맞는 사람들과만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일방향성... 그러니 오히려 다양성을 죽이고 단일성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녹색평론에서 언론을 다룬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언론이 다양성을 추구하지 못하고 단일성에 매몰되면 그 사회 역시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없으니 말이다.

 

인간 사회가 건강해지지 않으면 생태, 환경 부문에서도 건강해질 수가 없다. 생태나 환경을 고민하는 존재 역시 인간이기 때문이다.

 

생태와 환경이 정치, 경제와 인간 문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녹색평론이 추구하는 사회에서 언론은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언론이 잘못된 방향으로 왜곡된 정보로 사람들을 이끌어가면 그 사회가 얼마나 안 좋아지는지를 우리는 예전 '보도지침'이라는 것을 통해서 경험했기 때문이다.

 

부패한 정권일수록, 부패한 집단일수록 언론을 장악하려고 한 것을 우리는 경험했다. 그래서 언론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이것을 유지하려고 하는데, 얼핏 다양성을 잘 살린 것 같은 소셜 미디어, 즉 디지털 시대의 언론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기 쉽다는 지적은 우리가 명심해야 한다.

 

이번 호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이 한 말이 있다. 우리가 소셜 미디어에 대해 생각할 때 명심해야 할

말이라는 생각을 한다.

 

  진정한 대화는 같은 것을 믿는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지요. 소셜미디어는 우리에게 대화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논쟁을 너무나 쉽게 피하도록 해줍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소셜미디어를 사용하는 것은 남들과 연대하려는 것도 아니고, 자신들의 인식의 지평을 보다 넓히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즉, 자기 자신이 가장 편하게 느끼는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는 소리만을 듣습니다. 사람이 소셜미디어에서 보는 유일한 것은 자기 자신의 반사된 얼굴입니다. 소셜미디어는 매우 유용하고 사람들에게 쾌락을 주지만, 그것은 하나의 덫입니다. (지그문트 바우만, '소셜미디어는 덫이다' 93-94쪽)

 

이렇게 디지털 시대의 언론에 대한 글들이 있고, 한반도 평화에 대한 글도 있으며 난민문제에 관한 글도 있다.

 

우리 사회를 뜨겁게 했던 예멘 난민 문제... 역시 사회의 다양성과 더불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다. 과연 우리는 환대의 문화를 지니고 있는가...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다보니 당시 제우스 법이 자신들을 찾아온 나그네는 환대를 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하던데...

 

환대, 이것은 인간이 인간을 인간으로 대우하는 당연한 방식이 아닌가 한다. 그래야만 지구촌이라는 말을 실천하는 것일테고...

 

여러 글들이 있다. 하나하나 생각해 보면서 읽으면 좋을 글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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